제300화
“촘촘하지만 우리가 못 지나갈 만큼 어렵지 않습니다. 가뿐히 통과하겠는데요?”
선두에서 경공을 펼치는 오 회장이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번 내기, 자신들의 승리로 보였다.
“방심하면 안 돼, 수하들도 전부 통과하는 게 내기의 조건이야.”
이소원이 주의를 줬지만 그녀 또한 입가에 미소가 사라지지 않았다.
오 회장과 같은 생각을 하는 그녀였다.
그때 앞에서 비명이 들려왔다.
“어억!”
오 회장을 따라가던 한 각성자의 발이 미끄러졌다.
“조심해!”
다른 각성자가 도와주러 가려고 했지만 이미 늦었다.
발이 미끄러진 각성자의 몸은 아래로 떨어졌다.
밑에는 나고쉬의 엉켜 있는 실들이 있었다.
푸확!
그 실에 닿은 각성자의 몸이 수 갈래로 갈라지며 죽어 버렸다.
그 끔찍한 모습에 동요할 법도 하지만.
“무려 신력의 가주가 내기를 건 함정이다. 방심하면 죽은 목숨이야!”
이소원의 외침에 사신혈맹의 각성자들이 긴장을 유지한 채 앞으로 나아갔다.
하지만 경공의 숙련도가 낮은 각성자들의 실수는 계속되었다.
그로 인해 목숨을 잃었지만, 이 함정에 들어온 각성자의 수에 비하면 극소수에 불과했다.
끝없이 펼쳐진 나고쉬의 함정.
얼추 중간쯤 왔다고 생각했을 때 일이 터지고 말았다.
“어어?”
오 회장은 나고쉬의 실을 밟으며 앞으로 나아가던 중 이상함을 느꼈다.
실이 미끄러웠다.
전까지는 이러지 않았는데 마치 윤활유를 바른 듯한 느낌이었다.
그래도 명색에 사신혈맹의 맹주 중 한 명인 오 회장.
평정심을 유지하며 뒤를 향해 외쳤다.
“실이 미끄러우니 조심해!”
그의 경고에 경공을 세밀하게 조절했지만.
“우왁!”
실이 너무나 미끄러워 발을 헛디디고 말았다.
한 명의 균형이 무너지니 뒤는 말할 것도 없었다.
대응에 미숙한 이들은 따라 바닥으로 추락했다.
그 결과는 바로 죽음.
불귀의 객이 되었다.
수십 명이 즉사했음에도 사신혈맹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래 봤자 아주 작은 목숨.
그들은 아직도 수 백명의 인원이 남아 있었다.
하나 그들이 모르는 하나.
또 다시 실의 성질이 바뀌었다.
실을 디딤돌 삼아 나아가던 그들이 다리에 힘을 준 순간!
“억!”
“다, 다리가?”
“악!”
실에 그들의 발바닥이 붙은 게 아닌가.
오 회장마저 당황했다.
어떻게든 발바닥을 떼려고 발버둥 쳤으나 본드가 발라진 듯 딱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다행인 건 앞으로 나아가는 게 멈춰졌을 뿐.
죽은 사람은 별로 없었다.
“이건… 혈무?”
순간, 오 회장의 코로 짙은 혈향이 들어왔다.
안개처럼 가려진 붉은 연기가 점점 주변을 물들여 갔다.
“이 불길한 느낌은 뭐야?”
갑작스레 일어난 현상에 그의 촉이 이상함을 느꼈다.
그때 뒤에서 비명이 들려왔다.
“시, 실이… 악!”
“안 돼애애!”
“이, 이거 놔!”
공포에 질린 목소리였다.
혈무에 가려져 시야가 보이지 않자 오 회장도 불안을 느끼기 시작했다.
“형님, 누님!”
황 가주와 이소원을 불렀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분명 저 뒤에 두 사람의 기척은 느껴지는데 왜 아무런 말이 없을까.
의아함에 다시 소리 내어 두 사람을 부르려는데 실이 발을 타고 올라오고 있었다.
“뭐, 뭐야!?”
오 회장이 손으로 실을 잡아당겨 몸에서 떼어 내려 했다.
하지만 실의 점성은 엄청났다.
그의 두 손까지 실에 달라붙고 말았다.
“이딴 실로 나 오종수를 속박할 수 있을 것 같아?”
버럭 소리친 것과는 달리 말에선 다급함이 느껴졌다.
안 되겠다 싶어서 손을 바짝 세웠다.
실을 끊는 방법뿐.
내공이 가득 실린 수도로 실을 내려치는데.
푸확!
“아아아아악!”
도리어 오종수의 손목이 날아가고 말았다.
잘린 손목에선 피가 분수처럼 쏟아졌다.
피가 주변에 뿌려져서일까.
짙어진 혈무는 점점 그를 옥죄었다.
조건을 채운 나고쉬의 실이 또 변했다.
이번엔 실이 오 회장의 살을 파고들었다.
“커어어억….”
그는 손목이 잘린 고통에 제정신이 아니었다.
제 살에 실이 파고든 것조차 인지하지 못했다.
눈깔이 뒤집히고 거품을 문 오 회장.
실이 그의 몸을 점령하자.
퍽- 소리와 함께 그의 내부에서 하얀 가시가 밖으로 튀어나왔다.
수십 개의 가시가 박혀 즉사한 모습.
그렇게 대국건설의 회장이 죽어 버렸다.
제 주제도 모르고 욕심을 부린 참혹한 대가였다.
오 회장은 죽어서 모를 테지만, 살아 있었다면 이렇게 죽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 뒤로는 차라리 죽는 게 나을 만큼 고통스러웠으니까.
* * *
“주, 죽는다아아!”
“사, 살려줘!”
“으악!”
나고쉬의 실이 펼쳐진 나무숲은 비명으로 난무했다.
각성자 등급이 낮은 한상인은 식은땀을 흘리며 이준에게 물었다.
“저곳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겁니까?”
“들으시는 바와 같이 지옥이 펼쳐지고 있겠죠.”
이준은 태연하게 말했다.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았다.
저 나무 숲길에 들어간 인원만 족히 500명은 넘었다.
과연 몇 명이 살아서 돌아올 수 있을까.
비명만 들으면 한 명도 살아 돌아올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이제 대미를 장식해 볼까?”
이준은 손에 든 실에 내공을 주입했다.
그러자 붉은 안개의 색이 보라색으로 물들었다.
“전부 뒤로 물러나.”
이준의 말에 한상인과 무극대가 몸을 뺐다.
한상인은 김봉팔을 보며 말했다.
“뭐 하시려고 저러는 걸까요?”
“저도 모릅니다. 주군의 생각을 읽을 수 있어야 말이죠. 물론 이 하나는 알고 있습니다.”
“뭡니까?”
“저 안에 있는 놈들은 죄다 죽는다는 것. 확실합니다.”
“헉! 기자들이 이렇게 많이 있는데도 말입니까?”
“아직 주군을 모르시군요. 기자가 보든 전 국민이 보든 수틀리면 다 죽여 버리는 게 저 사람입니다. 적이 되면 차라리 그냥 죽는 게 나아요.”
무극대원들도 옆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몸을 부르르 떠는 사람까지 있었다.
이들도 무서워하는 이준.
파천자란 코드네임을 쓰는 이준과 창제는 많이 다르나 보다.
항상 TV나 인터넷 기사로 접해서 실감이 안 나서 그런가.
이준이 대단하다는 건 알지만 가슴 속으로는 와 닿지 않은 한상인이었다.
이건 자신만이 아니고 전 국민이 느끼는 감정이다.
TV에서 아무리 대단하다고 치켜세우면 뭐하나.
머리로는 아는데 한쪽 구석에 자리 잡은 의심이란 마음은 거둘 수가 없으니 말이다.
“한번 보세요. 주군이 어떻게 처리하는지. 저희도 궁금하거든요.”
한상인을 비롯한 무극대의 시선이 집중되는 사이.
보라색으로 물들었던 안개에서 빛이 흘러나왔다.
이준의 손에 들린 실에 내공을 좀 더 주입하자 이내 빛이 터졌다.
콰아아아앙!
핵폭탄이 터지듯 버섯 모양의 연기가 서울 한복판에 나타났다.
무극대도 깜짝 놀랐다.
엄청난 기의 폭풍에 저도 모르게 내공으로 몸을 보호했지만, 그럴 필요가 없었다.
어느새 이준의 창이 그들의 앞에 나타난 것.
창에서 나온 회색 아지랑이가 기의 폭풍을 온전히 막아 주었다.
“정말 츤데레라니깐.”
“정말 고수야.”
“괜히 여자를 모른 척하신 거라니까. 딱 봐도 여자들이 좋아하는 행동인데.”
“요오오물.”
무극대는 저마다 한마디씩 했다.
가주는 자신들이 다치지 않게끔 보호해 줬다.
굳이 수고스러움을 무릅쓰고 말이다.
“이러니 내가 저 사람을 좋아해요.”
“아서라. 너 같은 노처녀가 넘볼 분이 아니야.”
“X발. 존경이요. 존경! 뭔 말을 못 해.”
“킥킥. 그래요. 이서 누님이 존경한다잖아요. 가뜩이나 결혼도 못 하시는데 왜 놀려요.”
“네 그 말이 더 싫어. 한 번만 더 지껄이면 뒤질 줄 알아.”
“넵!”
웃고 떠들던 무극대의 시선은 연기가 가득한 나무 숲길에 꽂혀 있었다.
차츰 연기가 가라앉고 그 안의 시야가 보였다.
“끄으윽….”
“사, 살….”
“너무… 고통스… 러워….”
실에 의해 몸 한군데가 잘려 나간 사람.
피부가 보랏빛으로 물든 사람.
화상을 입어 얼굴이 흉측하게 일그러진 사람 등등.
저 안에 있던 이들 중 정상적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와.”
“저럴 줄 알았다.”
“평범하게 가는 건 주군이 아니지.”
“주군의 성질만 안 건드렸으면 깔끔하게 죽은 건데 안타깝군.”
참혹했다.
처절하기 그지없었다.
마치 지옥을 연상시키는 장면.
일반적으로 죽은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죽지 않은 사람은 어떤가.
고통에 울부짖으며 죽고 싶어 하는 표정을 했다.
저 모습에 동정심마저 들었다.
* * *
사람인지, 시체인지 분간이 안 되는 형체의 그림자가 이준에게 엉금엉금 기어 왔다.
“죽… 여 줘….”
“이 가주님이시군요.”
“…제발….”
“살아 있는 사람을 제 손으로 어떻게 죽입니까. 전 적들만 죽여요.”
그 말을 하는 이준의 입가엔 작은 호선이 그려져 있었다.
섬뜩할 만치 차가운 미소였다.
이소원은 저 미소를 보고 알았어야 했다.
자신이 가진 상식은 전혀 통하지 않다는 걸.
언론 플레이를 하면 적어도 타협을 볼 줄 알았건만, 설마 자신들을 전부 죽일 생각을 하고 있었다니.
자신의 오만한 판단으로 인한 결과는 죽음뿐.
이준이란 상식 밖의 인물을 상대로 평소처럼 판을 짠 게 큰 잘못이었다.
“…그냥… 죽여 주면… 안 될까…요…?”
“절 나쁜 사람으로 만들지 말아 주세요. 누가 보면 제가 꼭 당신들을 죽이려고 한 것처럼 보이잖아요.”
“크흡…!”
이소원이 가슴을 부여잡았다.
전신에 퍼진 독이 발작했다.
나고쉬의 독은 맹독이었다.
사람의 몸에 치명적으로 작용했지만 곧바로 죽이진 않았다.
아주 서서히.
조금씩 고통을 주며 괴롭힌 끝에 죽였다.
이 때문에 나고쉬의 독은 다른 이름으로 괴혼독이라고도 불리었다.
혼마저 박살 내는 독이라고 말이다.
“으으으.”
이소원이 경련을 일으켰다.
이제 클라이맥스.
눈이 터지며 실이 뿜어졌다.
그 실은 개미처럼 그녀의 몸을 기어가 다른 곳을 차근차근 터트렸다.
살점이 터질 때마다 뿜어지는 실.
실이 벌레처럼 움직이면서 그녀의 살을 파먹었다.
종래엔 몸의 살점만이 바닥에 남았다.
이 장면을 지켜본 기자들은 너도 나도 구역질을 했다.
“우에에엑!”
“웩!”
기자들도 각성자였지만 이 정도의 참혹한 장면을 직접 볼 만큼 경험이 많지 않았다.
김봉팔이 이준에게 다가와 소곤거렸다.
“주군. 정말 이래도 됩니까? 저들이 이상한 기사를 쓰면 어떻게 합니까?”
“상관없어.”
“그래서 신력의 이미지가….”
“저런 떨거지들로 인해 많은 사람이 피해를 입는다면 그거야말로 신력의 이미지가 추락하는 거야. 이건 전쟁이야. 평범한 땅따먹기가 아닌 전쟁. 통솔이 안 된 아군은 적군보다 더한 복병이 될 수 있어. 그렇게 되기 전에 제거한 것뿐이야.”
신력의 이미지?
박살 나도 좋다.
원래부터 신력권가의 이미지는 별로였다.
그나마 최근 돼서야 바뀌기 시작한 터.
신력의 이미지가 박살 나면 다시 회복하면 된다.
하지만 사람들의 목숨은?
신이 아닌 이상 되살릴 순 없었다.
전생에도 수없이 많이 보았다. 누군가를 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전쟁을 이용하는 사람들을.
저런 이기적인 사람들 때문에 무고한 사람이 얼마나 많이 죽었는가.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저들이 하는 대로 내버려 뒀으면 무사고가 위험했을 수도 있었다.
그곳은 자신의 소중한 사람들이 있는 장소.
저들로 인해 소중한 사람들이 피해를 보고 목숨을 잃는 건 두고 볼 수 없었다.
그 때문에 미리 제거한 거다.
‘또다시 저런 이기적이고 미련한 놈들이 나타난다면 지금과 같이 할 거야. 과거처럼 소중한 사람들을 잃을 순 없어.’
그때는 선택도 선택이지만, 힘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자신에겐 천외천에게 대항할 힘이 있었다.
천외천에게서 소중한 이들을 지키기 위해선 악인도 마다하지 않을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