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8화
이준이 나고쉬의 실을 설치할 장소를 둘러보는 사이.
한금만 회장의 손자인 한상인이 물건을 가지고 왔다.
트럭에서 물건을 내리자 보따리가 수십 개는 되었다.
독액을 담은 통은 무려 수백 개는 되어 보였다.
마침 주변을 둘러보고 온 이준이 한상인에게 인사를 했다.
“오셨어요?”
“이 많은 물건은 어디에 쓰려 하시는지…?”
한상인이 눈을 반짝이며 이준에게 물었다.
나고쉬의 실은 방어구를 만들 때나 사용하는 재료였다.
“부비트랩 같은 걸로 사용하려고요.”
“함정은 충분하지 않습니까?”
“충분하지 않아요. 저희가 지금 서울 전역에 깔고 있는 함정의 2/3는 무용지물이 될 거예요.”
천외천이 바보가 아닌 이상 당할 리가 없었다.
특히 일선과 이선이 온다면 함정의 2/3는 무용지물이 될지도 모른다.
그들의 수하조차 상식을 초월하는 강함을 지녔으니까.
“궁금한 게 있는데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말씀하세요.”
“나고쉬의 실이 질기고 단단하다는 건 압니다. 한데 이걸로 그 천외천이란 괴물을 상대할 수 있습니까?”
“그냥 나고쉬의 실만으로는 상대할 수 없죠. 하지만 나고쉬의 실을 날카롭게 벼리면 가능할 겁니다.”
“날카롭게 벼린다는 게 무슨 뜻인지…?”
한상인의 말에 이준은 얼굴에 짙은 미소를 지었다.
“저기 설치할 이들이 오네요.”
사형준과 무극대가 경공을 펼치며 모습을 드러냈다.
“가주를 뵙습니다.”
“무극대가 가주를 뵙습니다!”
무극대의 목소리는 굉장히 우렁찼다.
천외천과 전쟁한다는 생각에 기합이 잔뜩 들어간 걸까.
의욕적이었다.
자신들이 모시는 가주와 함께하는 첫 번째 전쟁.
긴장도 됐지만, 각성자의 입장에서 아주 영광스러웠다.
평범한 영역 싸움이 아닌 죽고 죽이는 전쟁을 하는 건 그들로서도 처음이었으니까.
“한상인 님. 다른 분들은 물려 주세요.”
“전 창제 님을 도울 테니, 여러분은 본부로 귀환하세요.”
“예!”
한상인이 암상의 인원들을 돌려보냈다.
무극대와 한상인만 남은 서울 숲.
이준은 보따리에 든 나고쉬의 실을 꺼내 독액에 담갔다.
“나고쉬의 실은 말입니다. 독액이 없으면 그저 질긴 실일 뿐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독액에 담그면 어떤 게 되는지 아십니까?”
“실이 녹지 않겠습니까?”
“녹죠. 겉 부분에 있는 힘 없는 실은 대부분 사라질 겁니다. 그리고 아주 질기고 단단한 얇은 실만 남게 되죠.”
이준은 손에 내공을 두르곤 독액에 담긴 나고쉬의 실을 꺼냈다.
1m 정도의 길이로 잘라 한상인과 무극대에게 보여 줬다.
“어떤가요?”
한상인과 무극대는 눈살을 좁혔다.
이준이 들고 있는 실은 그들의 눈에 보이지 않았다.
한상인이 더 자세히 보기 위해 앞으로 다가가는 순간!
“더 가까이 오시면 위험해요. 나고쉬의 독액에서 나오는 향기가 몸을 마비시키거든요. 그리고 닿은 지도 모른 채 살이 잘려 나갈 거예요.”
“아, 그, 그런 겁니까?”
한상인은 식은땀을 흘렸다.
가까이 갔음에도 실은 보이지 않았다.
이준의 경고에 몸을 뒤로 뺀 한상인이 가슴을 쓸어냈다.
경고가 아니었으면 심각한 부상을 당했을 테니까.
그와 같은 감정을 느낀 김봉팔도 뜨악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이거 거의 암기 아닙니까, 주군?”
“암기로도 쓰여.”
“그, 그렇죠? 눈에 안 보이는 실에 독까지 묻어 있으니 암기로 쓰기에 아주 제격 아닙니까.”
“강철도 두부처럼 잘라 내니 그 어떤 무기보다 위험하기도 하지.”
“허, 이런 건 대체 어떻게 아셨습니까?”
“영업 비밀이야.”
이준이 빙그레 웃었다.
설마 자신이 이 방법을 사용할 줄은 몰랐다.
“저희가 만질 수 있는 겁니까?”
“설치할 때 손목 안 날아가게 조심해.”
“헉!”
김봉팔이 뜨악한 표정을 지으며 슬금슬금 몸을 뒤로 뺐다.
***
이씨세가와 금룡황가, 대국건설의 가주와 회장이 한 모처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황 가주님. 아직도 기죽어 있으신 거예요?”
“아, 아니오. 잠시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을 뿐이오.”
“황 형님. 기죽으실 필요 없습니다. 세간에 알려진 신권은 A급이지만, AA등급을 숨기고 있었다 합니다.”
오 회장의 위로는 전혀 마음에 와 닿지 않은 황 가주였다.
신권이란 새파랗게 어린놈에게 개망신을 당했다.
그것도 모든 가주가 보는 앞에서.
이제 얼굴을 어떻게 들고 다니겠는가.
어쩌면 산속에만 처박혀서 내려오지 않은 게 나을 지경이다.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지금은 저희가 어떻게 오대 가문에 들어갈지가 최우선이에요.”
“누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지난 일은 잊고 앞으로의 일만 생각하십시오.”
“우리 이씨세가가. 아니죠. 이제는 금룡황가와 대국건설 이하 길드까지. 전부 합친 사신 혈맹이, 오대 가문에만 들면 그 신권이라도 황 가주를 무시하지 못할 거예요.”
세 단체는 이참에 자신들의 세력을 합치기로 합의했다.
혈맹의 맹주는 한 명이 아닌 세 명.
지금 모여 있는 이들이었다.
그들은 오대 가문에 들기 위해 서로 힘을 합친 것도 모자라 아예 하나의 단체로 합병한 것이다.
“우리가 모여서 오늘 이야기를 나눌 건 저희가 담당해야 할 관할 구역 건인데.”
“가주님!”
“왔나 보군요.”
이 가주가 미소를 지으면서 고개를 돌렸다.
“철혈에서 뭐라고 하던가요?”
“자기들은 권한이 없다면서 창제에게 말해 보랍니다.”
“우리와는 상대하지 않겠다는 심보인가요?”
“그쪽에선 계속 창제에게 떠넘기기는 제스처를 취했습니다.”
“흐음….”
이 가주가 팔짱을 끼며 몸을 뒤로 누였다.
철혈검가가 상대를 안 해 주니 다른 가문의 가주를 찾아야 했지만 신기가주는 제외였다.
그를 만나서 대화를 나눈다면 득보단 실이 많을 테니까.
차라리 그와는 대화를 안 나누는 게 더 나았다.
“그러면 하는 수 없이 창제를 만나 봐야겠군요. 그는 가문에 있나요?”
“이곳으로 오기 전에 알아봤는데, 서울숲 쪽으로 갔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서울숲이요? 왜요?”
“서울숲으로 5톤 트럭의 차들이 줄줄이 들어섰다고 하던데 자세히는 더 알아봐야 할 듯합니다.”
“알겠어요. 고생하셨어요.”
이 가주는 대화를 끝내고 고개를 돌렸다.
“아무래도 우리가 서울숲으로 가서 창제와 담판을 지어야 할 것 같아요.”
“오오, 창제와 담판이라! 기대됩니다.”
각자의 세력 대표로 가면 창제에게 비빌 수도 없었다.
만나 주는 것만으로도 다행.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무려 세 단체가 혈맹을 맺었다.
그 아래 휘하 단체는 얼마나 많은가.
이 정도의 규모면 신력권가와 충분히 대등하게 대화를 나눌 만했다.
“일어나세요. 황 가주. 대가문회의에서 구긴 위신을 세우러 가시죠.”
이 가주가 황 가주를 재촉했다.
황 가주는 사실 서울숲에 가고 싶지 않았다.
개망신을 당한 건 분하나 사형준을 다시 만나는 건 꺼려졌다.
이 가주와 오 회장이 모르는 게 있는데….
신권 사형준은 그들이 생각했던 것 이상이었다.
자신은 직접 몸으로 그의 강함을 느꼈다.
위신?
당연히 세우고 싶었다.
하나 그보다 중요한 건 목숨 아닌가.
사형준에게서 느껴진 건 굉장히 위험한 냄새였다.
더는 다가가면 안 된다는 신호.
그가 40 평생 살아왔던 감각이 위협을 알려 왔다.
“형님. 안 가실 겁니까?”
“가, 가야지.”
두 사람의 재촉에 황 가주는 하는 수 없이 따라나섰다.
* * *
나고쉬의 실 설치는 순조로웠다.
독액이 묻지 않은 실은 그저 질길 뿐이었다.
실이 눈에 보이기도 했고 말이다.
“휴. 힘들다. 벌써 밤입니다.”
어느새 해가 졌다.
이 넓은 구역을 100명이서 설치하려고 하니, 한 세월이었다.
“암상의 인원을 괜히 돌려보낸 것 같은데요 주군?”
“여기서 나고쉬의 실을 설치한다는 걸 많이 알아서 좋을 게 없어.”
천외천의 눈은 많았다.
한국에서 세력이 전멸했다지만 이 사실을 곧이곧대로 믿을 순 없었다.
삼선이 한국에 온 것도 15가문 연맹은 전혀 몰랐다.
그런데 천외천의 잔당이 한국에서 전부 사라졌다는 걸 어떻게 믿나.
암상의 내부에 첩자가 숨어 있을 수도 있었다.
그 이유로 그들을 그냥 보냈다.
일부로 서울 숲 주변에 경계 인원을 보낸 것도 그 때문이다.
“지도에 설치한 곳 전부 표시해 뒀지?”
“제가 하나도 빠짐없이 체크 했습니다.”
“사 대주는?”
“저도 해 두었습니다.”
“주군… 절 못 믿으시는 거예요?”
김봉팔이 서운한 표정을 드러냈으나 이준은 그를 무시했다.
“자, 힘내서 설치합시다.”
이준은 박수 치며 무극대를 독려했다.
나무와 나무 사이에 연결하는 실.
기둥, 나뭇가지, 건물 벽, 가릴 것 없이 전부 연결시켰다.
“후우… 절반 정도 한 것 같은데.”
김봉팔이 크게 숨을 내쉬었다.
벌써 새벽 1시.
아침부터 지금까지 설치한 게 아직 절반밖에 되지 않았다.
“오늘은 여기서 야영할 거야. 텐트 치고 밥 먹을 준비해.”
“드디어 밥!”
“가주님 너무합니다. 저녁밥이 새벽 1시라니요….”
“사 대주도 밥은 굶기며 일을 시키진 않습니다.”
무극대의 대원들이 투덜거렸다.
그러면서도 인원 분배를 끝내고 텐트와 요리할 조를 나누어 빠르게 행동했다.
“덕분에 절반은 끝냈잖아. 내일까지만 수고해 줘.”
서울숲에 여러 대의 텐트가 쳐졌다.
그 앞에 랜턴 대신 모닥불을 지펴놓아 분위기를 한껏 살렸다.
“오랜만에 낭만을 즐기는 것 같습니다.”
전까지만 해도 투덜대던 김봉팔의 얼굴엔 미소가 맺혀 있었다.
피로가 풀리는 힐링이랄까.
옛날에는 캠퍼들이 좋은 장소를 찾아다니며 캠핑을 즐겼지만, 현시대는 그러지 못했다.
근처에 게이트라도 갑자기 나타나면 죽은 목숨이었으니까.
그 많던 캠퍼들이 감쪽같이 사라진 이유다.
타닥탁탁-
모닥불이 타들어 가는 소리가 들렸다.
야영할 때를 대비해 항상 가지고 다니는 보급품으로 만든 음식을 입에 넣었다.
‘나도 오랜만에 먹네.’
전생에는 항상 전투 식량을 까먹었다.
그때는 음식 할 시간이 없었다.
조금만 시간이 난다 싶으면 어김없이 일이 터졌으니까.
음식을 조리할 시간에 일이 터지니 재료는 모두 버리게 되고 식량은 점점 동났다.
이대로면 싸움하기도 전에 보급품이 끊길 판.
음식을 전투 식량으로 바꾸게 된 계기였다.
“주군. 질문이 있습니다.”
김봉팔을 밥을 먹다 말고 손을 번쩍 들어 물었다.
“뭐?”
“독액은 어떻게 뿌리실 겁니까? 그냥 들이붓기에는 독액이 모자랄 것 같고… 분무기 같은 걸로 뿌리는 겁니까?”
“푸웁!”
이준이 입에 먹은 음식을 뿜어냈다.
“괜찮으십니까?”
“대체 어떤 머리를 가지고 있으면 분무기를 생각할 수 있는 거야?”
“다른 방법이 있으십니까?”
“첨단 장비 있잖아.”
“그게 뭡니까?”
“드론! 이 좋은 걸 놔두고 분무기라니 와, 한 방 얻어 맞은 것 같아. 어떻게 AA급을 달았지?”
이준이 김봉팔을 한심하게 보았다.
그러자 무극대가 김봉팔을 비웃었다.
“킥킥. 가주님 표정 봤소?”
“부대주를 아주 벌레 보듯 보는데?”
“생각하지 못한 방법을 고안해 내는 걸 보면 부대주 천재 아니오?”
“그러게 말이다. 저 머리로 부대주 자리까지 올랐는지… 저것도 운이야.”
“운빨하면 또 부대주 아닙니까.”
“이것들이! 뒤질래?”
김봉팔이 빨개진 얼굴로 버럭 소리쳤다.
자신이 생각해도 어이없는 방법이었다.
차라리 물어보지나 말걸.
괜히 웃음거리가 되고 말았다.
쥐구멍에 숨고 싶어지는 그때, 자신들에게로 걸어오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그것도 수많은 인원이 말이다.
무극대가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밥 먹는데 왜 일어나. 마저 먹어.”
이준이 무극대를 제지 시켰다.
“신력의 영웅들께서 늦은 시간까지 뭐 하고 계셨을까요?”
앞장서서 나타난 사람은 이씨세가의 가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