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5화
“크윽… 이 발 치우지… 못해…?”
황종묵은 자신의 위에 있는 발을 치우려고 내공을 올렸다.
금룡심법이라는 멋진 이름의 무공을 가졌으나 등급은 A에 불과했다.
각성자 등급 또한 A급 절정.
반대로 사형준은 두 개의 S급 무공을 가지고 있었다.
수미천왕신공과 벽력신장.
두 개만해도 같은 등급이라면 황종묵이 사형준에게 필패였다.
여기에 사형준의 등급이 AA급이니 그가 죽이겠단 마음을 먹으면 황종묵은 목숨을 부지하지 못한다.
‘꾸, 꿈쩍도 하지 않아….’
황종묵은 내공으로 저항하는데도 몸이 움직이지 않자 식은땀을 흘렸다.
세상과 담을 쌓고 살았다지만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자가 누군지 안다.
신권 사형준.
미래에 왕의 칭호를 물려받을 인물이었다.
권왕이 무척이나 아끼는 각성자라고 귀가 따갑게 들었으나 자신보다 약할 거라 생각했다.
상대는 신력이란 대 가문에 소속되어 있지만, 일가를 이루지 못한 자.
결국 한계가 있을 거라 여겼는데, 이게 웬걸.
사형준은 자신이 가늠할 수준에 있지 않았다.
“신력의 가주가 우습게 보이냐고 묻지 않나!”
사형준의 목소리가 회의장에 울려 퍼졌다.
신성한 대가문회의 회의장에서 겁도 없이 무력을 행사한 사형준에게 제지를 가해야 했지만.
그 누구도 나서지 못했다.
철혈, 만독, 신기도 가만히 있는데 앞에 나서서 사형준에게 핀잔을 가할 자가 누가 있겠나.
괜히 나섰다가 금룡황가의 가주처럼 개망신을 당할지도 몰랐다.
대각성자 시대는 힘이 지배하는 세상.
힘이 곧 권력이요, 서열이었다.
나이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심지어 검제도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보고 있는 게 아닌가.
“벌써 AA급 초입을 넘어서고 있군. 신력은 괴물들만 살고 있어.”
“회의장 바깥에 대기하고 있는 신력의 각성자들도 죄다 괴물들이더군요.”
만독암가의 철왕이 검제의 중얼거림에 동의했다.
철왕이 본 신력의 각성자는 무극대였다.
“우리 가문들도 분발해야 되네.”
“아예 봉문을 하고 한동안 수련에만 몰두할까도 생각했습니다.”
“충격을 많이 받았나 보이.”
“신력에서 새로 편성한 부대라고 하던데, 솔직히 보고 어이가 없습니다. 전부 AA급 각성자라니 그게 말이 되는지 허 참.”
“근래에 AA급 각성자가 나오지 않았는데 그것도 한꺼번에 한 세력에서 등장하니 놀랄 만도 하지.”
그 괴물들의 대장이 사형준이 있었다.
“그런데 저대로 두고 보실 생각이십니까?”
“말리고 싶으면 자네가 한 번 나서는 게 어떻겠나?”
“제가요? 안 됩니다. 창제가 제 아이들의 선생님 되지 않겠습니까? 제가 함부로 나섰다가 괜히 아이들에게 불똥이 튀면 어떡합니까. 전 못합니다. 검제께서 말려 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철왕이 손사래를 쳤다.
그는 정예나와 정예은의 아버지.
이준에겐 철왕이 학부모가 된다.
지금은 가주의 직책으로 대가문회의에 참석했지만 이후에는 도로 선생의 직함으로 돌아갈 터.
무려 창제에게 수업을 배우는데 저런 트러블은 눈감아 줄 수 있었다.
오히려 편을 들어 달라고 해도 넙죽 신력의 편을 들어 줄 것이다.
“노부도 아니 되네. 창제에게는 빚이 많아. 그리고 저 황가 놈이 면전에 대고 창제에게 어린놈이란 소릴 지껄였는데 신권을 어찌 말리겠나. 노부도 무리네. 아니면 한 가주가 나서겠는가?”
철왕과 같이 검제도 한발 뒤로 뺐다.
그리고 슬쩍 한지웅에게 넘겼다.
신기지가의 가주가 한숨을 푹 쉬었다.
“하아아. 어려운 일만 절 시키십니다.”
“중재를 잘하는 건 신기가주뿐이지 않나.”
“알겠습니다. 제가 나서겠습니다.”
“오, 신기가주는 나처럼 겁쟁이가 아닌가 보오. 나는 애들 때문에 중재를 못 하니 이해해 주시오.”
신기가주가 걸음을 옮기려다가 자리에 멈춰 섰다.
“왜 그런가?”
검제의 물음에 신기가주가 말했다.
“생각해 보니 저도 안 될 듯 싶습니다.”
“갑자기 마음을 돌린 이유가 무엇이오.”
“장차 미래에 사위가 될지도 모르는데 측근의 일을 방해했다가 괜히 창제의 미움을 사면 안 되지 않겠습니까?”
“응?”
“그건 또 무슨 말이외까?”
신기가주의 폭탄 발언에 검제와 철왕의 눈이 커졌다.
“모르셨습니까? 창제가 저희 가문에서 자고 간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검제와 철왕, 신기가주, 이 세 사람은 황 가주의 일 따위는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들의 주된 관심사는 창제.
신기가주의 말에 온통 정신이 집중되었다.
“처음 듣는 소리네.”
“뭔가 오해가 있으신 것 아니요? 창제는 사생활 논란을 일으킨 적이 없었는데.”
“전 사실만을 말했습니다. 워낙 창제가 제 딸 아이와 가까워야지요.”
신기가주가 어깨를 으쓱했다.
검제는 분한 마음을 드러냈다.
분명 창제는 자신의 손녀와 사이가 심상치 않았는데, 갑자기 빙화가 끼어든 것이다.
영웅에게는 여러 여자가 꼬이기 마련.
다 이해하지만 빙화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신가가주, 뭔가 오해하고 있는 것 같네.”
“예?”
“이번에 우리 영섭이가 다친 일이 있었지 않나?”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이때 창제가 구해 준 것도 알지? 다 우리 손녀 때문이네.”
“너무 억지로 엮으시는 것 아니십니까?”
신기가주가 검제를 견제했다.
가문의 가주들에게 있어 창제는 최고의 사위였다.
아직 고등학생이면 어떤가.
2년만 지나면 성인인데, 그 때 결혼을 시키면 됐다.
“남사스러워서 말을 안 하려고 했는데 나와 제왕단이 보는 앞에서 두 사람이 뽀뽀까지 한 게 아닌가. 아주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지 뭔가. 허허 우리 손녀 시집은 다 갔네.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그런 것이니 창제가 데려가야지.”
“사, 사실입니까?”
신기가주는 혼란스러웠다.
딸 아이는 창제에게 관심이 있었다.
아니, 아비의 입장에서 볼 때 딸 아이는 창제를 좋아한 게 확실했다.
그런데 검화가 뽀뽀를 했다니.
이 사실을 딸 아이가 알까.
이 말을 들은 딸의 표정을 떠올리니 생각부터 골치가 아팠다.
신기지가에 북풍한설이 내려 앉을 것이다.
“내가 왜 이런 일 가지고 거짓말을 하나. 노부의 이명이 검제라네. 살면서 거짓말 같은 건 하지도 않았어.”
검제가 자신의 이명까지 들먹였다.
말에 과장이 심하게 있었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박정연이 이준의 볼에 뽀뽀를 했으니까.
검제가 모르는 것도 있는데 그전에는 두 사람의 입술이 닿기까지 했다. 물론 이 또한 박정연이 강제로 한 거지만.
대가문회의를 하러 왔다가 회의는 시작도 안 하고 이준을 놓고 신경전을 벌이는 검제와 신기가주였다.
두 사람의 대화에서 갑자기 소외된 철왕은 자신의 두 딸을 욕했다.
‘딸자식이 두 명이나 있는데 어째 실속이 하나도 없는지 원. 보니까 창제에게 아직은 임자가 없는 것 같은데 돌아가서 애들한테 적극적으로 행동하라고 말해야겠어.’
철왕은 혼자 허튼 생각을 했다.
정예나는 몰라도 정예은은 한 남자와 이미 연애를 하고 있었다.
훗날 이때의 선택으로 인해 만독암가는 오대가문의 자리를 타 가문에 한순간도 내어 주지 않았다.
정예은과 결혼한 사람으로 인해서 말이다.
* * *
이준은 사형준을 보다 말고 고개를 돌렸다.
그가 바라본 곳은 검제와 철왕 신기지가의 가주가 있는 곳이다.
‘이 찝찝한 기분은 뭐지?’
화기애애한 모습.
하나 서로 경계를 하는 게 이준의 눈에 들어왔다.
그들의 말 따위는 이준에게 관심 밖이었다.
사형준을 두고 보면 재밌는 광경을 연출할 수도 있었지만 장난은 여기까지였다.
지금은 회의가 먼저였으니까.
마침 회의장 앞을 기웃거리던 김봉팔과 시선이 마주쳤다.
‘가주님. 이게 무슨 일이래요?’
‘좀 일이 있었어. 사 대주 좀 데리고 나가.’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알겠습니다.’
전음을 마친 김봉팔이 회의장 안으로 들어와 사형준에게 말을 걸었다.
“대주 여기가 어디라고 무력을 사용하시는 겁니까. 어서 나갑시다.”
“이 자가 가주님을 모욕했다.”
“미친. 개잡놈이네?”
김봉팔이 눈알을 부라리며 고개를 내려 황종묵의 얼굴을 보았다.
고통으로 일그러진 얼굴.
입에선 선혈이 흘러나왔다.
딱 봐도 사형준의 발을 치우려고 내공을 끌어 올리다가 무리를 한 모양이다.
“이게 아니지. 대주, 지금 열리는 회의 아주 위급한 거랍니다. 밟는 건 나중에 하고 우선 저랑 나가시죠.”
“그럴 수 없다. 신력의 가주를 업신여긴 자를 이대로 내버려 둔단 말이냐?”
“누가 하지 말랍니까. 회의가 끝나면 밟으라 이 말입니다.”
하지만 사형준은 요지부동이었다.
그에게 가장 중요한 건 가주의 위신을 높이는 일.
여기서 물렁하게 나간다면 앞으로 또 이런 일이 발생할 게 뻔했다.
“벽창호 대주가 정말! 대주가 융통성 없게 행동하면 가주님이 욕을 먹습니다. 전 가주님처럼 프레임이 씌워지는 걸 바라십니까?”
사람들의 인식에 권왕은 오로지 힘만을 추구하는 사람이었다.
어떤 사건을 해결하든 힘으로 하려 했다.
이신이 아이들을 반죽음으로 만들어 놓고도 되려 역정을 내고 힘으로 찍어 누른 사람.
주변 가문이 신력을 꺼려하는 이유였다.
가문은 쇠락하고 있지만, 여전히 강한 무력을 가져 기피의 대상이었다.
이 모든 게 오직 무력만 내세운 결과였다.
“고집 그만 피우시고 나갑시다. 대주가 계속 이러면 회의도 진행 못 합니다.”
“…알았다.”
사형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주의 위신을 바로 세우는 것도 그였지만, 가주의 평판을 만드는 것도 그였다.
자신이 하는 행동으로 인해 가주의 이미지가 달라질 터.
이 정도의 압박으로는 성에 안 찼지만 그만하기로 했다.
그는 황종묵을 내려다보고 입을 열었다.
“두 번 다신 주제를 넘지 말라. 신력권가의 가주는 너 따위가 함부로 말할 분이 아니시다. 만약 또다시 이런 일이 생긴다면 그땐 네 머리통을 날려 버리겠다.”
회의장에 있는 모두가 들리게끔 말했다.
전체에게 하는 경고였다.
이래도 기어오르는 놈들은 있을 터.
원래부터 기득권층 사람들은 신성의 등장을 반기지 않는다.
신성이 아무리 자신보다 부자고 권력이 있다 해도 업신여겼다.
애써 부정하고 싶은 마음.
자신은 어떻게 이 자리에 올라왔는데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녀석이 혜성처럼 등장을 하니.
시기와 질투가 깔려 있는 게 당연했다.
이게 인간의 본성이었다.
사형준이 황종묵의 가슴에 올려놨던 말을 치웠다.
“허억… 허억….”
황종목이 침을 질질 흘리며 숨을 격하게 몰아쉬었다.
사형준이 몸을 돌려 이준에게 고개를 숙였다.
“주제넘게 나섰습니다. 죄송합니다.”
“재밌는 구경이었습니다. 부대주 말대로 나가서 머리 좀 식히고 오세요.”
“네.”
사형준이 김봉팔과 함께 회의장을 나갔다.
이준은 몸을 돌려 자신에게 배정된 자리로 향했다.
어수선했던 분위기는 검제의 한마디에 정리가 됐다.
“바로 회의를 시작하겠네.”
* * *
웅성웅성.
회의장 분위기가 다시 시장통이 되었다.
신기가주의 발언 때문이었다.
“전 가문이 쉘터에 들어가야 된다고?”
“맡고 있던 게이트는 어떻게 하지?”
“쉘터가 열린 지 얼마나 됐다고 또 쉘터에 들어가야 된다는 거야?”
혼잣말을 하는 사람, 옆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 반문하는 사람.
그들이 한꺼번에 말하자 난장판이 되었다.
“조용히들 하시게.”
그나마 검제의 말에 소음이 빠르게 잦아들었다.
“곧 큰 적이 한국으로 쳐들어올 겁니다.”
“그 적이 누군지 알아야 저희가 이해를 할 수 있을 게 아닙니까.”
“맞습니다. 다짜고짜 쉘터로 들어가라 하는 건 도무지 납득하지 못하겠습니다.”
“저도 여러분의 심정 잘 이해합니다. 그래서 적의 정체를 공개하려 합니다. 이 앞에 있는 화면을 봐 주십시오.”
신기가주가 회의장 앞에 있는 스크린에 동영상을 띄웠다.
사형준과 한 여자가 치고받고 싸우는 장면이 나왔다.
아주 격렬하게 공수가 교차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사형준이 조금씩 밀리기 시작하는 게 나오자.
“저 여자는 누구기에 신권을 몰아붙인단 말이오.”
“가, 강해.”
“꿀꺽…”
가주들은 마른침을 삼키며 영상에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리고 다음 영상으로 넘어갔다.
“신력권가의 안주인 아니오?”
“패왕도가의 패왕단도 있소이다.”
“한데 왜 검룡을 공격한단 말이외까.”
동영상은 최미진과 패왕단이 박혁진과 허수를 공격하는 장면이 담겨 있었다.
신기지가에서는 이준의 장면을 쏙 빼 버렸다.
15가문 연맹에 든 가문을 제외하고는 모르는 내용이었다.
“이 영상을 보시고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패왕단이나 신권을 몰아세운 여자가 강하단 생각이 드십니까?”
신기가주의 말에 가주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들은 이번에 쳐들어오는 적의 하수인일 뿐입니다.”
“하수인?”
“신권을 몰아세운 여자가 고작 하수인이라고?”
“말도 안 됩니다.”
“말이 안 되죠. 저도 처음에는 여러분처럼 믿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명백하게 사실입니다. 저와 여기 계신 검제께서는 오랜 시간 동안 우리 곁에 숨어 있는 적을 찾았고 그들을 천외천이라고 불렀습니다. 천외천은 이 세계에서 넘어온 괴물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