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1화
이준이 자리에서 일어나 철혈검가가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긴장이 풀렸던 제왕단은 다시 몸이 굳어졌다.
그에게서 풍겨 나오는 살기가 전만은 못하나 지금도 만만치 않았기 때문.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삼선 있던 자리로 갔다.
허리를 숙여 바닥에 문양이 그려진 곳을 매만졌다.
‘여기구나.’
그 어느 곳보다 사기가 물씬 풍겨 나오는 바닥이었다.
“검제님 저 좀 도와주셔야겠습니다.”
“말하시오.”
“여기에 검제님의 피와 뇌기를 주입해 주시겠습니까?”
“어려운 일이 아니외다.”
검제는 이준의 말을 흔쾌히 수락했다.
자신의 검으로 손바닥을 그었다.
뚝뚝 떨어지는 붉은 피를 문양에다 떨어트렸다.
화아악-
그러면서 뇌기를 바깥으로 표출시키는 검제.
주변의 공기가 뇌기로 인해 요동쳤다.
[사흉수 도철에게로 가는 문의 조건을 충족시켰습니다.]
[블랙존 게이트 ‘탐욕의 문’이 열립니다.]
지지직-
문양 위 허공에 검은 포탈이 서서히 열리기 시작했다.
쇠사슬로 꽁꽁 묶여 닫혀 있는 게이트.
점점 거대해졌다.
“이건 게이트 아니오!?”
검제의 눈이 부릅떠졌다.
게이트에선 어마무시한 사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크흡!”
“모두 뒤로 물러나게!”
검제의 외침에 박정연을 비롯한 제왕단이 황급히 뒤로 빠졌다.
그럼에도 사기는 지칠 줄 모르고 커져만 갔다.
“사흉수인 도철에게로 가는 입구입니다.”
“헉! 사흉수!”
검제의 입에서 헛바람이 나왔다.
그도 사흉수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다.
한 번도 만나 보진 못했지만 위험성을 알기에 화들짝 놀랐다.
“당장 문을 닫아야 하지 않소?”
“그러기 위해서 게이트를 실체화시킨 겁니다. 게이트도 없는데 닫을 순 없지 않습니까.”
이준은 탐욕의 문이 완전한 모습을 갖출 때까지 기다렸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압도적인 존재감을 보이는 게이트가 생성됐다.
무려 30m가 넘는 높이의 문이었다.
“검제께서도 뒤로 빠져 주십시오.”
“창제는 안 물러나시는 거요?”
“이 게이트를 다신 열지 못하게끔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게이트를 클리어하지 않고 없앤단 말이외까?”
“비슷합니다.”
이준이 게이트에 손을 가져다 댔다.
[블랙존 게이트 ‘탐욕의 문’을 여시겠습니까? (Y/N)]
‘아니. 영원히 닫아.’
[경고! 당신은 블랙존 게이트 ‘탐욕의 문’의 주인이 아닙니다.]
[경고! 탐욕의 문 주인인 도철이 분노합니다.]
[경고! 도철이 당신에게 탐욕의 시선을 보냅니다.]
경고 메시지와 함께 도철의 사기가 몸속으로 들어오는 걸 느꼈다.
[혼원신공으로 사기를 차단하거라.]
무극자 사부의 말대로 혼원신공으로 몸을 보호했다.
혼원신공은 마기도 존재했지만 강력한 불기 또한 지니고 있었다.
그것도 소림의 불기보다 더 강력한 항마력을 지닌 불기.
포용력이 굉장해서 천마신공의 마기도 보듬어 줄 수 있었다.
그 때문에 혼원신공은 마기, 불기, 사기, 정기.
이 네 가지 기운을 전부 지녀서 그 어떤 것도 이준의 몸에 침입할 순 없었다.
그렇기에 8성의 혼원신공으로도 도철의 사기를 전부 막는 게 가능했다.
도철은 제힘을 되찾지 못한 상태.
이것이 바로 8성의 혼원신공만으로도 도철의 사기에서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이유였다.
[네놈 따위가 감히 내 힘을 버틸 수 있을 것 같으냐!]
‘존나 약한 새끼가 말끝마다 감히라고 하네. 나한테 말 시키지 말아 줘라. 허접한 몬스터 자식아.’
이준의 마음속에 탐욕이 무럭무럭 치솟아야 정상이었지만 그는 아무렇지 않아 했다.
도리어 개망신을 줬다.
[너, 너! 왜 내 탐욕이 통하지 않은 거냐!]
도철은 당황했다.
게이트의 문도 실체화를 했겠다 자신의 힘이 이준에게 통해야 하는 게 맞았다.
하지만 그는 평소와 똑같았다.
자신의 스킬에 전혀 타격이 없는 모습.
이런 인간은 처음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준은 제 할 일을 했다.
탐욕의 문을 향해 무극기를 들이부었다.
회색 아지랑이가 게이트를 감싸자.
[경고! 당신은 타 게이트의 주인입니다. 상대의 게이트를 봉인하려면 막대한 힘이 필요합니다.]
경고의 알림이 귀를 때렸다.
이준은 현재 연속으로 무리를 하는 중이었다.
천살성과의 동화.
그리고 탐욕의 문을 닫는 것.
안 그래도 조금 전 내기를 안정시켰는데, 또 힘을 끌어내고 있었다.
[도철을 봉인하려면 그 대가를 치러야 하는 게 옳다. 사흉수를 아무 대가도 없이 봉인하는 건 염치없는 것이니라.]
이준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아차린 무극자의 목소리였다.
‘말 안 하셔도 알거든요.’
[전 내공을 사용해서 ‘탐욕의 문’의 봉인을 시작합니다.]
그의 손에선 엄청난 양의 공력이 뿜어져 나왔다.
무극자의 정수가 담긴 무극기.
신에게도 필적할 수 있는 무극기가 탐욕의 문을 휘감았다.
도철도 이상함을 인지했다.
[자, 잠깐! 우리 말로 하자.]
‘난 할 말 없다.’
[이렇게 공격적으로 나올 필요는 없잖아? 우선 대화를 거치고 나서 행동을 해도 늦지 않아.]
도철이 저자세로 나왔다.
하긴 게이트가 봉인되면 이제는 영영 세상을 볼 수 없게 된다.
악의 정점 중 하나가 세상을 보지 못한다는 건 억울했을 테지.
영영 눈을 뜨지 못한다는 건 망자보다 못한 처지였다.
‘네가 주작보다 강하면 생각은 해 볼게.’
[난 주작보다 강하다! 그러니 멈춰!]
‘응 거짓말.’
이준은 게이트 봉인 속도를 더욱 높였다.
그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입가에선 선혈이 흘러내렸다.
무리하게 공력을 운용한 결과.
계속 내공을 소모한다면 상태가 더 안 좋아질지 모른다.
[좋다! 네게 그 어떤 조건도 걸지 않으마. 내 힘도 다 줄 테니까 그만해.]
‘다 필요 없다니깐. 너한테 안 받아도 앞으로 내가 얻어야 할 게 차고 넘치거든.’
[이익!]
도철의 그 어떤 말도 이준에겐 안 먹혔다.
이준의 활짝 펴진 손이 오므라들자.
콰득 소리와 함께 게이트가 찌그러졌다.
[안 돼애애애!]
도철의 사기와 함께 목소리가 귀를 강타했지만 이준은 손을 완전히 꽉 쥐었다.
* * *
검제는 70 평생을 살면서 게이트가 무너지는 걸 처음 봤다.
게이트를 닫으면 그냥 허공에서 소멸 되듯 사라진 게 전부.
하지만 오늘 본 장면은 여태껏 봤던 것과는 달랐다.
정말로 문이 부서지듯 무너져 내렸다.
“저 무공은 대체….”
검제는 이준의 무극기를 보곤 입을 떡 벌렸다.
그의 창법도 불가사의할만큼 강했다.
헌데 저 회색의 아지랑이는 창법의 강함을 가뿐히 뛰어넘었다.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
자아가 있는 듯한 무공에 혀를 내둘렀다.
그의 상식으로선 저런 무공을 들어 보지도 못했으니까.
천외천의 무공도 무공이지만 이준의 무공은 더욱 미궁이었다.
심지어 호기심을 넘어 이젠 경외감마저 들었다.
“내 천뢰기와는 비교도 되지 않아.”
검제는 천뢰기에 자부심을 느꼈다.
남궁세가의 비전을 모두 계승한 철혈검가.
각성자 중 소수만 무림의 무공을 전부 계승했다.
천마와 활불을 비롯한 자신과 일본의 월령검 외 열 명도 채 되지 않았다.
천뢰기는 그중 최상위 각성자와 대등하게 붙을 수 있게 해 준 무기.
사람들은 천마신공이 제일 강하다고 알고 있지만 천뢰기도 그에 못지않았다.
그저 숙련도의 차이일 뿐.
그런데 이 자부심을 무참히 부숴 버리는 무공이 나타났다.
창제의 저 회색 아지랑이.
천뢰기를 비교하자니 민망할 수준이었다.
어떻게 저런 대단한 무공이 존재할까.
“천외천의 무공이 엄청나다고 생각했는데 창제에 비해서는 새 발의 피군.”
창제의 무공은 독보적이었다.
그 어떤 무공과도 비교하지 말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펑!
블랙존 게이트가 완전히 사라지자 공기가 터져 나갔다.
주변으로 퍼진 기파는 사기였다.
검제는 제왕단이 있는 곳으로 물러나 천뢰기로 주변을 감쌌다.
그와 반대로 이준은 온전히 사기를 맞았다.
[블랙존 게이트인 ‘탐욕의 문’을 봉인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무리한 내력 소모로 인해 모든 능력치가 20% 하락합니다.]
[도철의 사기가 몸에 침입했습니다.]
[혼원신공으로 사기를 정화합니다.]
무극자 사부는 대가를 치르지 않으면 염치없는 짓이라 했지만 이준은 그럴 생각이 없었다.
탐욕의 문이 터진 덕에 게이트 전체는 사기와 마기로 가득했다.
하나 공기 중에 떠다니는 기운들은 이준에게 한낱 먹이일 뿐.
사기와 마기를 자양분 삼아 받은 패널티를 무마시켰다.
“흡자결.”
이준은 파멸겁을 허공으로 던졌다.
그리고 팔을 활짝 펴곤 흡성공을 운용했다.
대기에 떠도는 사기와 마기가 이준과 파멸겁을 향해 빠르게 빨려 들어갔다.
[파멸겁이 도철의 사기를 흡수합니다.]
[파멸겁이 하찮은 마기를 흡수합니다.]
[파멸겁이 도철의 사기에 흡족해합니다.]
[도철의 사기로 인해 파멸겁이 급성장을 이루었습니다.]
[파멸겁(기본) - 제2단계 형태까지 남은 경험치 83.4%(100%)]
[도철의 사기를 흡수했습니다.]
[혼원신공으로 사기를 정화합니다.]
[하찮은 마기를 흡수했습니다.]
[혼원신공으로 마기를 정화합니다.]
파멸겁은 도철의 사기로 엄청난 경험치를 얻었다.
파멸겁의 경험치가 너무 안 올라 좋은 방법이 없을까란 생각을 했는데 잘됐다.
자신 또한 그럭저럭 이득을 챙겼다.
텅 빈 단전이 빠르게 채워졌다.
언제 내상을 입었냐는 듯, 다친 혈맥도 아문 상태.
내공도 늘어나서 패널티로 받은 모든 능력치 20% 감소는 문제도 아니었다.
“허, 허허.”
검제는 이제 허탈하기까지 했다.
사기와 마기를 흡수하며 소모된 힘을 채우는 이준이 괴물같이 보였다.
막말로 저딴 무공이 어떻게 존재하는지.
자신이 천뢰기가 보잘것없어 보이는 건 난생 처음이었다.
“흐, 흡혈마공입니까?”
“아니면 흡성대법?”
“두 무공 모두 아닌 것 같네. 내가 알기론 흡성대법은 이 거대하고 강력한 사기를 흡수하진 못해. 그렇다면 A급인 흡혈마공은 더더욱 아니지.”
“맙소사… 벌써 대기에 사기와 마기가 걷혔습니다.”
“어떤 무공이기에…”
제왕단은 오늘 여러 번 놀랐다.
창제의 능력에는 끝이 없었다.
혈족 계승을 못 했던 각성자가 맞나 의심스러웠다.
“흐흡! 후우우우.”
어느새 모든 사기와 마기를 다 흡수한 이준.
허공에 떠 있던 파멸겁을 회수한 채 검제가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이제 돌아가시죠.”
살기가 가득했던 창제가 아닌,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감정이 들어 있지 않은 목소리 또한 달라져 있었다.
음성에 생기가 넘쳤다.
“다 끝났소?”
“천외천도 처리했고 사흉수도 봉인했습니다.”
“혼자 고생하셨소이다.”
“별말씀을.”
이준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때였다.
퍽-
“억!”
이준이 허리를 새우처럼 꺾었다.
박정연의 주먹이 그의 명치에 꽂혔기 때문이다.
“또 혼자 다 해결하려고 했지? 그러다 다치면 어떡해?”
“윽… 그렇다고 명치를….”
“넌 맞아도 싸. 너보다 강한 적이었다면 위험했을 거 아니야.”
그녀의 음성이 떨리는 게 이준에게 느껴졌다.
애써 아무렇지 않아 하는 게 눈에 보였다.
자신의 변한 모습을 봤을 터.
두려운 게 당연했다.
천살성은 말 그대로 살귀.
일반적인 살기를 가진 녀석이 아니다.
심지어 검제조차 소름 돋게 하는 천살성 아닌가.
그 장면을 보고도 태연하면 사이코패스였다.
“눈이 확 돌았나 봐. 다음에는 개인 행동 안 할게.”
“그 소리만 몇 번 들은지 모르겠다.”
“쳇. 잔소리는. 검제님 이 누나가 더 잔소리하기 전에 나가죠.”
“그러시오.”
이준과 검제가 발을 옮기려는 그때.
“어?”
박정연이 이준의 팔목을 낚아챘다.
몸이 갸우뚱 기우는 이준.
그의 얼굴 가까이에 박정연의 얼굴이 다가왔다.
앵두 같은 붉은 입술이 그의 볼에 닿는 건 순식간이었다.
“악! 뭐 하는 짓이야!”
이준의 눈이 함지박만 하게 커졌다.
[이 남사스러운 상황은 무어고?]
무극자 사부도 진한 호기심을 드러냈다.
돗자리를 깔고 누워서 구경할 듯한 말투였다.
그만이 아니었다.
박정연의 할아버지인 검제도 상당히 놀란 눈치.
제왕단도 이 상황이 뭔지 판단하고 있었다.
“고마움의 표시야.”
그녀가 당당히 말하자 이준은 할 말을 잃었다.
또 당했다.
[한 번은 당할 수 있지만 두 번은 네놈도 즐기는 것이렸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좀 하지 마세요.’
[방귀 뀐 놈이 성내는구나. 끌끌.]
이준이 당황해할 때 제왕단의 최연장자들이 한마디씩 했다.
“큼큼. 요즘 아이들은 상당히 개방적이오.”
“우리 때는 어른들 앞에서 손도 못잡았는데 말이야.”
“말세다 말세야.”
“자고로 제 남자를 쟁취할 수 있는 여자가 매력적인 법이지. 그 면에서는 내 손녀가 최고지.”
그들과는 달리 검제는 아주 흡족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