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88화
이준의 시야는 온통 붉었다.
검은 바다도, 대지도, 심지어 사람의 피부색도.
‘이게 천살성의 시야.’
현재 천살성과 동화된 상태.
눈으로 보이는 것이 바로 천살성이 보는 시야였다.
특이한 게 있다면 사람들이 다 악마로 보이는 것.
천외천을 비롯한 이곳에 있는 모두가 괴물로 보였다.
꼭 저들을 죽여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신기하기도 했고 무섭기도 했다.
박혁진과 박정연, 철혈검가의 인원까지 천외천과 똑같이 보였으니까.
뿐인가.
모두가 자신에게 살기를 토해내고 있기도 했다.
‘이래서 천살성에 사로잡히면 앞뒤 분간 못 하고 다 죽인다고 했구나.’
천살성 같은 운명의 별자리는 정보가 미미했다.
그저 무협지에서 나온 게 끝.
자신이 아는 것과 비슷해서 다행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준에겐 새로운 정보도 있었다.
지금과 같은 상황에 어떻게 적을 죽여야 할지 머릿속에 그림이 그려졌다.
마치 미래를 나타내는 것처럼.
이후에 자신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보였다.
‘투신체와 비슷한 효과를 내는 건가?’
우선 움직여 봐야 알 것만 같았다.
머릿속으로 우선 순위를 정했다.
삼선을 공격하는 것보다 우선으로 해야 할 일.
검왕을 보호하는 것이다.
조금만 잘못 판단해도 삼선이 검왕부터 죽이려 할 터.
삼선이 반응하지 못한 움직임을 보여야 했다.
‘지금의 나라면 뜻대로 할 수 있어.’
생각을 다 정리한 후 고개를 번쩍 들고 손을 뻗었다.
파멸겁에서 나온 무극기가 순식간에 삼선을 감쌌다.
위험한 기운이라는 걸 인지한 삼선이었기에 그녀가 당황하며 몸을 빼려 했으나.
무극기는 그녀가 쉽게 뿌리칠만한 힘이 아니었다.
쇠사슬로 몸을 속박하듯, 삼선의 손과 발을 속박했다.
하지만 삼선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손목 스냅을 이용해 검을 역수로 쥔 채 아지랑이를 잘라낸 그녀.
속박이 풀렸다.
그러나 무극기는 그녀를 놓아줄 생각 따윈 없었다.
빠른 재생력으로 그녀를 괴롭혔다.
‘이 사이에 검왕을 구출하자.’
이준은 목숨이 경각에 달린 검왕에게 갔다.
‘상태가 심각해.’
바로 아공간 주머니를 꺼내 약을 찾았다.
뱀파이어 로드의 피를 검왕의 입에 부었다.
나머지는 검제의 일.
응급 상황을 대비해 귀한 약을 가지고 있을 거니, 그에게 데려다 주면 된다.
응급조치를 끝내고 검제에게 갔다.
하지만 자신이 다가갈수록 제왕단이 검을 겨눈 채 경계했다.
‘내 살기 때문인가?’
이준은 더 다가가는 걸 멈추고 검왕을 자리에 조심스럽게 내려놨다.
“응급조치를 취했지만 부족합니다. 뒷조치는 검제께서 해 주십시오. 그리고 부탁이 있습니다.”
“…무엇이오…?”
“여기서 멀리 가십시오.”
“그럴 수 없소. 우릴 도와주러 온 창제를 혼자 두고 어떻게 도망친단 말이외까.”
“부탁…드리겠습니다.”
더는 대화를 할 수 없었기에 몸을 돌려 적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첫 번째 목표는 이미 정했다.
여기에 도착했을 때부터 살심을 자극한 여자.
삼선이 사매라 부른 인상이 사납게 생긴 여자였다.
“사매들! 합공하자.”
그녀가 삼선 다음의 서열인 것 같았다.
그녀의 명령으로 아미파 문도들이 검진을 이루었다.
이준은 아랑곳하지 않고 검진 안으로 들어갔다.
“멍청한! 살기만 가득했지 별 볼 일 없… 흑!”
날카로운 인상의 여자, 임정은 말을 끝맺지 못했다.
검진으로 파고들었던 이준이 사라지고 그녀의 앞에 나타났기 때문.
자신의 목이 잡혔다고 생각지도 못한 채 입을 나불댔다.
그녀는 이준의 눈을 본 순간 머리가 새하얘지는 게 느껴졌다.
끝없는 공포.
잊으려고 노력한 두려움이 다시 마음을 장악했다.
“두 눈으로 똑똑히 봐라. 너희가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지.”
이준의 손이 옆으로 움직이자.
“꺄아악!”
임정이 비명을 토했다.
그녀의 손목과 발목이 깔끔하게 잘렸다.
내공이 많으면 뭐하나.
검을 들 손목과 움직일 발목이 사라졌는데.
그녀는 이제 평생 서 있는 것조차 힘들게 되었다.
그녀에게 한 말을 지키기 위해 혈도를 두드려 손과 발목에서 나오는 피를 지혈했다.
“읍…!”
마혈까지 제압한 후 몸을 돌렸다.
다음 목표는 검진을 이룬 아미파 문도였다.
“무옥.”
이준의 입에서 나지막한 저음이 울렸다.
그러자 몸에서 거대한 기의 아지랑이가 주변을 덮쳤다.
퍽퍽퍽퍽-
수백 줄기의 아지랑이가 땅에 박혔다.
직사각형 모양의 감옥이 만들어졌다.
아미파 문도가 도망치지 못하게 아예 가둬 버린 것이다.
이준을 검진에 가두려다가 도리어 당한 아미파 문도였다.
“최대한 도망쳐 봐. 그래야 사냥할 맛이 나지.”
이준이 그녀들을 향해 차갑게 웃었다.
* * *
삼선은 몸을 속박하려는 아지랑이를 보자 기겁했다.
‘대체 이 무공을 어떻게!’
이준이 지니면 안 되는 무공이었다.
인주의 백영창법을 익혔다는 말을 들었을 때도 얼마나 놀랐는가.
여기까지는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이 세계에는 자신들의 세계처럼 많은 종류의 무공이 존재했으니까.
하나 회색 아지랑이의 무공은 아니었다.
절대 존재해선 안 되는 파멸의 무공.
그 괴물 같은 천주조차 두려워하는 무공 아닌가.
그때문에 제 사부의 등에 칼을 꽂았다.
이 사실을 극소수만 알기에 삼선은 부정하고 싶었다.
‘아니야! 절대 무극기가 아닐거야.’
자신을 속박하는 아지랑이를 자르고 또 잘랐다.
그럴수록 더 확신이 들었다.
이건 천주도 배우지 못했던 무극기라고.
천주가 설명하길, 무극기는 파천멸기에서 더욱 발전된 무공이었다.
파천멸기를 가진 천주는 저 무공이 얼마나 무섭고 완성도가 높다고 말했다.
신에 필적한 무공을 만들어 버린 사부가 대단하면서도 두렵다고.
그가 안 죽는다면 평생을 2인자로 썩어야 한다고.
그러면 자신들의 숙원인 무림을 너머 대륙을 지배하는 제황이 될 야욕마저 꺾일지 모른했다.
힘은 있지만 사부로 인해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썩는 인생.
대륙인도 아닌, 변방의 오랑캐 때문에 꿈을 이룰 수 없다는 생각에 천지인 주는 사부를 죽이기로 했다.
여기까지가 삼선이 아는 내용이었다.
‘무극기가 왜! 저놈의 손에 있단 말이야!’
그녀의 얼굴은 핼쑥해졌다.
검을 휘두를수록 내공이 급속도로 빠져나가는 게 느껴졌다.
인주에게 들었던 내용이다.
무극기는 상대의 내공을 흡수하기까지 한다고.
이 엄청난 효과도 무공이 가진 효과 중 하나에 불과했던 것.
파괴적인 무공에 가려졌을 뿐 많은 요소가 더 있었다.
‘여기서… 도망쳐야 해. 이 사실을 인주께 알려야 돼.’
그녀는 사선과 똑같은 생각을 했다.
인주가 알아야지만 대응할 수 있을 테니까.
이 세계에 무극기가 존재한다면 천외천은 모습을 드러내면 안 된다.
천주도 무서워한 무극기를 인주가 어찌하겠는가.
덤비는 건 자살행위와 똑같았다.
지주와 천주가 이 세계로 넘어오기 전까지 바짝 엎드려야 했다.
놈이 약하면 많은 희생을 치르더라도 죽이겠지만…
강했다.
강해도 너무 강했다.
보라, 저 전율적인 장면을.
화경의 경지에 있는 사매들이 저항도 못한 채 찢겨 발기고 있었다.
다리면 다리, 팔이면 팔 몸에 붙어 있는 모든 걸 뜯어냈다.
그도 아니면 손으로 심장을 도려내 으깼다.
머리를 꺾어서 절명시킨 것도 모자라 터트리는 게 잔인하지 않을 정도.
손속이 굉장히 잔인했다.
정말 잔인하기로 유명한 지주조차 혀를 내두를 장면이었다.
덜덜.
삼선의 몸이 떨렸다.
그녀는 화경의 끝자락.
얼마 있지 않으면 현경에도 도달할지 모르는데 약관(20살)도 안 된 애송이한테 공포를 느꼈다.
그래서일까.
“아, 안 돼!”
무극기에 저항하던 그녀가 완전히 결박당했다.
챙그랑-
두 손이 꼭꼭 묶였다.
검이 바닥에 떨어지며 금속음을 내었다.
무릎까지 꿇려진 굴욕적인 모습.
고개를 숙이지 못하게 그녀의 목을 감싼 아지랑이가 팽팽하게 당겼다.
그녀의 눈은 강제로 싸움을 볼 수밖에 없었다.
도륙당하는 아미파 문도들.
양 떼 사이를 누비는 늑대, 아니 사자 한 마리가 장난치듯 사매들을 죽이고 있었다.
“그, 그만…!”
20대의 얼굴이던 삼선이 어느새 50대가 되어 있었다.
그 짧은 새에 일어난 일이다.
이게 무극기의 무서운 점.
이준이 명령을 내려놓으면 사물을 통해서 적과 싸울 수 있었다.
무극기는 하나의 자아였다.
“이 악마 같은…!”
이준은 멈추지 않았다.
잔인하게 아미파 문도를 죽였다.
저항을 포기한 채 죽음을 받아들이는 게 그녀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그만하지 못하겠느냐.”
그녀의 귀에 이준의 목소리가 똑똑히 들렸다.
“내가 경고했을 텐데? 내 안에 있는 악마를 보지 못했냐고. 그때 그만했어야지. 그랬다면 내가 너희를 이렇게까지 죽이진 않았을 거다. 이건 네가 자초한 일인 거야.”
“꺄아악!”
“제, 제발 살려 줘!”
“뭐든지 다 할… 악!”
“여, 여기서 나가고 싶어…”
얼마나 이준이 잔인했으면 배테랑인 제왕단조차 헛구역질을 했다.
저건 일방적인 도륙이 아니었다.
무자비한 포식자가 약한 짐승을 가지고 노는 모습.
정확히 표현하자면 인간이기를 포기한 짐승의 행동이었다.
“도저히 못 보겠… 우에에엑!”
검제도 눈을 질끈 감았다.
귀까지 닫기에는 도와준 이준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다.
박혁진도 고개를 돌렸다.
이준은 그의 절친한 친구.
그가 강하더라도 거리낌없이 다가갈 수 있었던 게 박혁진이었다.
하지만 오늘 이후부턴 그를 예전처럼 대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저 장면을 보고도 살갑게 대할 수 있다면 그건 정상이 아니었으니까.
아니면 저 행동마저 감싸 줄 만큼 사랑을 하든가.
박혁진도 두 눈 멀쩡히 뜨고 볼 수 없는 와중에 오직 박정연만이 입술을 피나게 깨물며 눈 앞의 상황을 똑바로 보았다.
마치 자신은 저 싸움을 외면할 수 없다는 눈빛이 담겨 있었다.
이준이 어떤 싸움을 하던 그녀는 상관없었다.
자신마저 외면한다면 그는 또 예전처럼 외로워지기에.
이준이 혼자가 되지 않게 하겠다는 다짐이 눈에 깃들어 있었다.
* * *
학살이 멈췄다.
주변은 아주 조용했다.
뚜벅뚜벅.
들리는 건 오직 이준의 발걸음 소리뿐.
그 누구 하나 입을 연 사람이 없었다.
모두 죽었던지, 아니면 이준과 눈이 마주치는 걸 피하기 위해 고통을 꾹 참는 이들이 다였다.
이준이 멈춰 섰다.
“소감이 어떠지?”
“히이익!”
삼선의 사매, 임정은 이준의 물음에 소스라쳤다.
경기를 일으킬 만큼 그녀의 뇌를 지배하는 건 공포였다.
“그게 다인가?”
“아, 악마…!”
“악마를 잡으려면 내가 악마가 되어야 하더군.”
이준이 무릎을 굽히며 몸을 숙였다.
그녀의 무릎에 손가락을 올려놓고 힘을 주었다.
“끄으읍!”
“고통스러워?”
“끄어어어…”
“너희에게 당한 사람도 이런 고통을 느꼈을 거다.”
“끄급… 그놈들은… 우리를 위해 값진 희생을 한 거… 컥!”
“어째 너희랑 하는 대화가 항상 똑같은지 모르겠어.”
“빠리… 죽여…”
“쉽게 죽일 생각이었으면 벌써 목숨을 거뒀지.”
이준은 그녀의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삼선에게로 끌고 갔다.
남은 아미파의 문도들은 살았다는 안도감을 지은 순간!
“폭.”
아지랑이로 만들어진 감옥이 거대한 굉음과 함께 터졌다.
그 안에 있던 아미파의 문도는 모두 목숨을 잃었다.
회색 아지랑이와 함께 허공에 날아든 붉은 액체.
아미파 문도의 피였다.
한 명도 남기지 않고 모두 산화했다.
남은 사람은 단 두 명.
삼선과 자신의 손에 있는 여자뿐이었다.
삼선의 앞에 도착하자마자 땅에 박힌 파멸겁을 뽑아 삼선의 허벅지에 꽂았다.
“아악!”
“크윽… 사저….”
“눈알 굴리지 마. 내 손에서 벗어날 수 없으니까. 내가 묻는 대답이나 잘해 그러면 고통 없이 죽여 주지. 만약 헛소리를 지껄이면 지옥을 경험하게 해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