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87화
“남궁의 천뢰기?”
20대로 보이는 한 여자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천뢰기는 남궁세가의 정점에 있는 무공이었다.
이 세계에서 천뢰기를 사용하는 각성자는 단 한 명.
대한민국의 최고 각성자인 검제 박춘식밖에 없었다.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곁에 있는 여자를 불렀다.
“사매.”
“제가 막을게요.”
날카로운 인상을 가진 여자가 검을 꺼냈다.
스르릉 소리와 함께 그녀의 검이 우아하게 호선을 그렸다.
쾅!
검제의 검과 여자의 검이 충돌했다.
거대한 충격파가 주위를 덮쳤다.
“읏.”
철혈검가의 제왕단은 내공을 일으켜 몸을 보호했다.
천뢰기는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속성인 뇌기였다.
파괴력이 정점에 달한 속성이기에 휩쓸리면 뼈도 못 추렸다.
“어머, 자신 있게 달려든 것치고는 형편이 없다. 늙어서 기력이 없는 건가?”
천뢰기가 담긴 검제의 검을 막은 여자가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비웃었다.
“역시 너희는 괴물들이구나.”
검제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천외천이라면 자신의 검을 가뿐히 막을 수 있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별로 놀라운 게 아니었다.
하지만 검제와는 별개로 제왕단은 달랐다.
20대로 보이는 여자가 검제의 검을 막으니 눈이 커진 상태였다.
“헉!”
“주군의 검이 막혔어…!”
“천뢰기를 가볍게 막는 건 처음봐.”
검제의 천뢰기는 중국의 천마나 활불, 일본의 월령검도 쉽게 막지 못했다.
파괴력에선 으뜸인 천뢰기라 같은 S급 각성자도 정면충돌은 피했다.
“괴물이라니. 어여쁜 숙녀에게 할 소리는 아니지.”
검을 잡은 여자의 손목에 힘이 들어가자 검제가 뒤로 밀려났다.
내공에서 밀린 거다.
여자는 곧장 우아한 움직임을 선보였다.
화려한 곡선의 검무.
그럴 때마다 바람의 칼날이 사방으로 날렸다.
난잡한 검기처럼 보이나 목표는 확실했다.
검제와 그 주변이었다.
“모두 피해!”
검제가 다급하게 외쳤다.
그저 검기같지만 그 속엔 검강과 같은 경력이 깃들어 있었다.
밖에서 봤던 검흔 자국.
아미파의 난피풍검법이었다.
호신강기로는 절대 막지 못한다.
호신강기로 막으려고 한다면 검기가 방어막을 뚫고 몸 어딘가를 잘라 낼 거다.
그만큼 날카롭고 강력한 검기였다.
콰광쾅쾅!
하지만 제왕단이 막기에는 검기의 속도가 너무 빨랐다.
그들이 느껴 보지 못한 속도였다.
검기에 의해 자욱한 먼지가 낀 주변.
검무를 멈춘 여자가 먼지가 일어난 곳을 뚫어지게 봤다.
“저 애야? 사저. 사선을 죽인 놈이 나타난 것 같아요.”
“나도 보고 있어.”
날카로운 인상을 가진 여자와는 정반대의 얼굴.
인자하게 생긴 여자가 입을 열었다.
그녀의 이름은 부운화.
이들의 대사저이자, 아미파의 장문인이다.
또한 신마회의 삼선이기도 했다.
그녀도 먼지가 일어난 곳을 보고 있었다.
창제라 불리는 이준이 창막을 일으켜 사매가 쓴 검기를 수월하게 막은 게 눈에 들어왔다.
“마겁….”
이준이 들고 있는 창.
자신이 모시는 인주가 그토록 찾던 창이었다.
파천혈신을 대표하는 여러 개의 신물 중 하나였다.
그 신물이 현재 봉인이 풀린 상태였다.
천주도 선택받지 못한 신물.
고작 이 세계의 각성자를 선택해서 변해 있다니!
봉인이 풀려 있으니 이제 뺏어서 인주에게 전해 주기만 하면 된다.
그녀의 눈에 파멸겁이 들어오자, 사선이 이준에게 죽임을 당한 건 기억에서 지워졌다.
사선과 그녀의 격차는 하늘과 땅차이.
여기에 있는 자신의 사매조차 사선은 이길 정도로 강했다.
다만 화산의 대표라 자신과 동일 선상에 뒀을 뿐.
“비가 갑자기 그쳐서 짜증나던 차였는데 잘 됐어. 파멸겁을 회수해야겠어.”
그녀는 걸음을 옮겼다.
멈춘 곳은 검왕의 옆.
저들의 저항을 무기력하게 만들 방법이 자신들의 손에 있었다.
그녀는 검왕의 목에 발을 올려놓으며 말했다.
“모두 동작을 멈추는 게 좋을 텐데?”
공력이 담긴 목소리가 주변에 울려퍼졌다.
인자하고 포근하게 생긴것과는 달리, 말투에 오만함과 까탈스러움이 잔뜩 묻어나 있었다.
* * *
이준과 박춘식의 얼굴이 굳어졌다.
목소리에 공력을 담아 말한 여자가 왜 멈추라고 한 건지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멈추지 못하겠느냐!”
검제가 버럭 소리쳤다.
아들인 검왕은 현재 기가 약해져 있었다.
목을 짓밟은 발에 조금만 힘을 가해도 목숨이 위태로웠다.
“움직이면 안 되지.”
“크으으….”
검왕이 신음을 토했다.
삼선의 발에 힘이 들어간 모양이다.
“아, 아버지!”
“하지 마!”
박혁진과 박정연이 검왕을 향해 외쳤다.
두 남매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특히 박정연은 손톱이 살을 파고 들어갈 정도로 세게 쥐었다.
무기력.
언제부턴가 두 사람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은 단어였다.
항상 친구인 이준에게 도움을 받았다.
그 전과는 다르게 실력을 급속도로 끌어 올려 줬으며, 신병에 해당하는 아티팩트를 얻게 해 줬다.
뿐인가.
가문의 무공보다 더 좋은 무공까지 얻게 해 준 게 바로 이준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은 이준의 발목만을 잡는다고 생각했다.
그 생각이 머리 속에서 떠나지 않아 쉴 틈 없이 수련에 매달렸다.
‘오늘도 난 아무것도 하지 못해.’
‘내가 약한 게… 너무 분해! 짜증나서 죽을 것 같아.’
아버지가 위험에 처했는데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자신이 한심했다.
힘이 있다면 제 손으로 아버지를 구할 텐데….
상대가 가만히 있으라고 한 말을 곧이곧대로 듣고 있었다.
이젠 자기혐오까지 들 정도.
박혁진과 박정연의 심정이었다.
두 남매의 기분을 느낀 이준이 인상을 찌푸렸다.
‘저러다가 또 주화입마에 걸리겠는데?’
[강한 무공을 가졌음에도 나약한 마음을 지니면 심마에 빠지기 십상이니라.]
‘우선 검왕 님부터 구해야겠네요.’
[생각이 있느냐.]
‘삼선이란 여자 지금 제 파멸겁에만 시선이 꽂혀 있어요.’
[그래서?]
‘파멸겁을 내어 주려고요.’
[그다음은?]
‘검왕 님 구하고 나선 쟤들 싹다 죽여야죠?’
죽이겠다는 말에 살기가 넘실넘실 흘러넘쳤다.
천살성을 잠재우고나서부터 생긴 효과였다.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게 아니냐?]
‘사부님.’
[왜 그러느냐?]
‘사부님이 만드신 무공을 사부님이 무시하면 어떡해요.’
[제자야. 어디서 널 올려 치려는 것이냐. 사부는 네 능력을 말하는 것이니라.]
이런 망할 사부.
말로는 못 따라가겠다.
사부의 기준대로면 자신은 한참 못미치니 어쩌랴.
그냥 사부를 도발 안 하는 게 정신 건강에 이로웠다.
이준은 창막을 거두고 한 발 앞으로 나왔다.
“원하는 게 뭐야?”
“네가 들고 있는 무기를 우리에게 넘겨라.”
“이거? 너희가 감당할 물건이 아닌데?”
어린 이준이 말끝마다 반말하자 삼선의 사매가 발끈했다.
“이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자식이!”
한 줄기 강력한 경기가 여자의 검에서 뿜어져 나왔다.
삼선의 목소리도 들려왔다.
“호신강기를 일으키거나 창막을 펼치면 바로 이 남자를 죽일 거야.”
그 말에 이준은 어떠한 행동도 하지 않았다.
“준아, 위험해!”
“창제 막아야 하오!”
하필 날아간 방향이 급소였다.
무인에게 제일 중요한 곳.
단전이 있는 배꼽 아래 부분이었다.
만약 저 경기를 그대로 맞는다면 단전이 부서질 수도 있을 만큼 위험했다.
하지만.
쾅!
이준은 그 어떤 행동도 하지 않았다.
“안 돼!”
박정연이 뾰족하게 비명을 질렀다.
걱정과는 달리 이준은 멀쩡했다.
심지어 옷도 찢어지지 않았다.
그저 먼지만 날릴 뿐.
이준은 옷에 붙은 먼지를 털어 내며 말했다.
“너, 지금 이 자리에서 사라지는 게 좋을 거야. 아니면 내가 널 찢어 죽일지도 몰라.”
그의 눈이 회안으로 번들거렸다.
짙은 살기의 정도가 아니었다.
심령을 뒤흔드는 공포였다.
주춤.
오히려 공격한 여자가 뒤로 주춤했다.
“무, 뭐야?”
여자는 자신이 들고 있는 검이 떨리는 것도 모른 채 말을 더듬었다.
천주를 봤을 때나 겪어 본 두려움을 느꼈다.
“아, 미안. 나도 요즘 내 성격을 제어하지 못해서 말이야. 다시 한번 쏘리.”
단전이 적에게 공격당하자, 몸에 웅크리고 있던 천살성이 잠깐 눈을 떴다.
이준의 내면에 잠들어 있던 살성 그 자체.
그녀가 감당할 만한 수준이 아니다.
다행인 건 그 살성이 이준을 친구로 생각한다는 것.
아니었으면 그녀는 이미 그의 손에 전신이 찢겼을 거다.
“대화가 딴 대로 샜네. 내 무기 감당할 자신 있어?”
“…….”
“저기요?”
삼선도 이준에게 어지간히 충격을 받았는지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나마 두 번째 질문에선 정신을 차렸다.
“…감당은 우리가 하는 거다. 마겁이나 우리에게 넘기거라.”
“좋아 넘기지. 대신 먼저 인질을 풀어 줘.”
“지금 나와 줄다리기를 하자는 말이냐?”
“이 창 가지고 싶지 않아? 이거 너희들한테 꽤 중요한 것 같은데 사선도 이걸 노리고 말이야.”
“아이야. 거래는 말이다 더 큰 무기를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유리하단다.”
으드득-
삼선의 발에 의해 뼈가 꺾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크어어…억…!”
검왕의 신음소리였다.
발에 더 힘을 줬다간 정말 검왕이 죽을 수 있었다.
“그만. 내가 양보하지.”
이준의 얼굴이 그 어느 때보다 차가웠다.
주변에 스산한 공기가 흘렀다.
언제나 웃음을 지니고 있던 그였지만 삼선의 악랄한 심성이 그를 화나게 했다.
이준은 삼선을 향해 파멸겁을 던졌다.
퍽-
파멸겁이 삼선 옆 대지에 박혔다.
“이제 인질을 넘겨.”
“아직 어려서 그런가 배울 게 참 많은 아이구나.”
삼선은 검왕을 보내 줄 생각이 없었다.
그녀의 눈짓에 아미파 여자들은 검을 뽑으며 천천히 다가왔다.
“만약 내공을 움직이거나 쓰면 바로 이 자의 목을 꺾어 버릴 테니 알아서 하거라.”
정파란 아미파가 치졸한 수법을 쓰고 있었다.
더군다나 사파인보다 못한 짓을 했다.
“후회할 짓은 하지마.”
“그 말은 강한 자나 하는 거란다.”
“내 말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너야. 아까 못 느꼈어? 내 안에 악마가 있는걸?”
“아이야. 이곳에선 어떻게 지냈는지 모르지만 우리 무림은 말이다. 힘만 가지고 살아남기 힘든 도산검림과 마찬가지인 곳이란다. 네가 힘을 너무 맹신한 나머지 나에게 무기를 뺏긴 게 아니겠느냐.”
“정말 내 말뜻을 이해 못 한 것 같네. 이것도 알아차리지 못했으면 게임은 끝났네.”
이준이 고개를 숙였다.
‘더는 못 봐주겠어.’
천살성이 귓속말을 해 오고 있었다.
저 눈앞에 있는 오만한 여자를 죽이라고.
자신이 죽일 수 있게 도와주겠다고.
그 누구에게도 이런 수모를 당하면 안 된다 속삭이는 천살성이었다.
천살성을 가진 자는 모든 이가 공포스러운 존재라고 여겨야 한다고 했다.
그럴수록 살심이 치솟았다.
‘사부님. 천살성 말 들어도 되죠?’
[그러려무나.]
‘제 살기가 짙어지면 사부님께서…’
[허허. 제자야 나약한 소릴하는구나. 천살성이 너를 도와주겠다는데 두려울 게 무엇이냐. 마음껏 날뛰거라. 넌 이 무극자의 제자이니라. 네가 천살성과 함께한다 해도 내 제자인 건 변하지 않는다.]
사부의 말에 안심했다.
친구가 되었지만 귓가에 속삭이는 건 악마 같은 유혹이었다.
처음 접하는 거라 무섭기도 했다.
성화를 잡을 때 자신을 도와주기도 했지만 그때는 느낌이 달랐다.
상대에게 무시당하니 천살성이 화를 내고 있었다.
너는 그런 존재가 아니라고.
단지 귀에 속살일 뿐인데 살심이 주체할 수 없이 올라오는 걸 보고 느꼈다.
아, 이래서 수많은 별 중 천살성을 으뜸으로 치는구나 하고 말이다.
만약 사부가 없었다면 친구가 된 지 얼마 안 된 천살성을 의심을 했을 거다.
결국에는 신뢰가 깨졌을 터.
사부가 곁에 있어 천살성을 믿을 수 있었다.
‘가자.’
이준은 누군가에 말하듯 중얼거렸다.
[마신지체가 천살성(기본)과 동화합니다.]
[마신지체로 인해 무극기의 소모 내공이 현격하게 줄어들었습니다.]
[마기를 지닌 모든 이에 대한 제어력 100% 상승했습니다.]
[천살성(기본)이 마신지체의 몸에서 눈을 떴습니다.]
이준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회안이 번들거리는 순간!
파멸겁에서 무극기가 뿜어져 나와 삼선을 덮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