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85화
하필 강화도에서 연락이 끊겼다니.
느낌이 싸했다.
“정확히 어디서 사라졌는지 알아?”
“연미정 쪽에서 연락이 끊겼어.”
그 말을 듣자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연미정은 사흉수인 도철을 깨우는 통로가 있는 곳이다.
과거 천외천이 매달렸던 장소이기도 했다.
‘도철을 벌써 깨워?’
아직은 도철을 깨울 시기가 아니라 여겼다.
사흉수를 깨우는 건 굉장히 까다로운 일.
그중에서 도철이 제일 힘들었다.
차라리 도철 이외에 다른 사흉수를 깨우는 게 효율성이 뛰어났다.
도철은 사흉수 중에 제일 약하면서도 욕심이 많은 녀석이니까.
도철을 깨울 정도로 힘을 가지고 있다면 다른 흉수도 깨우는 게 가능했다.
그걸 제일 잘 아는 게 천외천이었다.
‘지금은 전생과 완전히 바뀐 상태야. 사흉수를 언제 깨우든 이상하진 않아.’
이미 자신으로 인해 나비 효과는 진행됐다.
도왕이 죽었고 십선과 구선이 죽었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천외천을 자극했다.
자신으로 인해 미래가 깡그리 바뀌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
사흉수도 예외는 아니었다.
“왜? 아는 거 있어?”
“아직은… 그냥 느낌이 싸해서.”
박정연의 말에 대답하곤 바로 폰을 꺼내 들어 한민성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 이준 선생 어쩐 일인가?
“혹시 중국 쪽 소식을 전해 들을 수 있을까 해서요.”
-중국 소식은 왜?
“급해서 그럽니다. 제가 전에 말해 드렸던 옥룡설산 게이트랑, 신장 소공탑 게이트, 러산대불 게이트는 잘 살펴보고 있어요?”
한민성에게 천외천을 이야기했을 때 미리 말해 두었던 내용이다.
사흉수가 잠들어 있는 게이트.
분명 사흉수를 깨우려고 천외천이 모습을 드러낼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미리 한민성에게 감시를 부탁했다.
공식적으로 신기지가의 정보망은 암상과 더불어 최고였으니까.
-선생이 말했던 게이트에는 아무 이상 없네. 개미 새끼 한 마리도 접근한 사람이 없다고 주기적으로 보고를 받고 있어.
“그렇담 말이죠… 알겠습니다. 제가 또 연락드리겠습니다.”
이준은 한민성과 전화를 끊었다.
아직 다른 흉수가 있는 곳에 천외천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자신이 과민했던 모양.
한편으로는 다행이라 생각했다.
사흉수가 깨어나는 건 천외천의 일이 많이 진척됐다는 것.
아직은 그 단계까진 못 갔나 보다.
“우선 연미정으로 가 봐야겠다.”
이준의 말에 박씨 남매가 고개를 끄덕였다.
검제가 자신의 애검을 들고나오자.
모여 있던 철혈검가의 각성자가 줄을 맞춰 섰다.
“오셨소?”
“검제를 뵙습니다.”
“인사는 되었소. 안쪽에서 들었는데 창제도 우리와 함께 가려는 것이오?”
“친구 아버지의 생사를 모르는데 함께 해야죠.”
“여러모로 창제께 감사드리외다.”
“별말씀을.”
이준이 작게 고개를 숙였다.
박춘식의 눈엔 그에 대한 고마움이 가득했다.
자신의 손자에 이어 아들까지.
자기 가문의 일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팔을 걷으며 나섰다.
그 모습이 참으로 고마웠다.
“그러면 출발하겠소.”
검왕이 나서니 직속 호위 각성자인 제왕단이 함께했다.
철혈검가 내에서도 최강자들.
한 명, 한 명의 기도가 심상치 않았다.
이준이 키운 무극대보다 더 강했다.
검제의 연배와 비슷한 이들 또한 보이는 걸로 보아, 뒤로 물러났던 이들까지 나선 것으로 보였다.
그러니 이런 막강한 전력을 보유한 거겠지.
이준은 그들을 보자, 무극대는 아직 멀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검제 님과 비슷한 연배를 가진 사람들은 죄다 AA급이야. 저들이 은퇴한 조장들이겠지?’
이래서 철혈검가가 대한민국 최고의 가문이라 불렸다.
패왕도가가 넘지 못한 가문.
정확히는 검제의 직속 호위단인 제왕단이 있기 때문에 패왕도가가 철혈검가를 넘지 못한 것이다.
* * *
이준과 철혈검가의 사람들이 강화도 연미정 근처에 도착했다.
“정지. 여기서부턴 기척을 숨기고 움직인다.”
“명을 받습니다.”
철혈검가의 최정예답게 그들은 자신들의 기도를 감추었다.
영락없이 일반인.
몸에 검만 안 차고 있다면 그들이 각성자라는 걸 모를 정도로 감쪽같았다.
이준은 바닥에 널려 있는 몬스터 사체를 살펴봤다.
‘창궁무애검법의 흔적이야.’
검왕이 가진 무공이다.
여기서 몬스터와 싸운 사람은 검왕이 확실했다.
철혈검가의 각성자로 보이는 검흔 자국이 곳곳에 남겨져 있었다.
그들은 사체를 살피면서도 아주 은밀히 시체가 이어진 길을 따라 움직였다.
처음에는 철혈검가의 각성자가 몬스터들을 무참히 죽인 흔적이 있었으나.
점점 앞으로 갈수록 상황은 반전됐다.
쉽게 몬스터의 목을 땄던 흔적이 점점 힘겹게 바뀌었다.
끝에선 몬스터의 시체보다 철혈검가의 시체가 더 많아졌다.
“허허.”
“이 많은 이들이 죽었음에도 싸움이 일어난 지 몰랐던 게 말이 됩니까?”
“강화도는 균열 오염 지역이라 저희 쪽에 정보가 안 들어왔을 수도 있습니다.”
이준이 보기에도 강화도의 균열 오염은 심각했다.
‘이 정도의 균열 오염은 아니었어.’
막말로 부산 지역보다 더했다.
코를 찌르는 역겨운 냄새.
온통 검붉은 피가 쏟아진 것처럼 끈적한 바닥.
메말라 비틀어진 앙상한 가지에는 사기가 잔뜩 풍겨 나오고 있었다.
“준아. 어때?”
“더 가 봐야 할 것 같아.”
“아버지… 괜찮으시겠지?”
“강한 분이시잖아. 괜찮을 거야.”
“그랬으면 좋겠다.”
하지만 상황은 심각했다.
몬스터의 시체가 거의 없다시피하고 사람들의 시체가 많이 보일 때는 이준의 표정마저 딱딱하게 굳었다.
철혈검가 각성자들 사이로 간간이 보이는 시체들 틈에 새하얀 머리를 한 이들이 보였다.
마치 정기가 빨린 이들 같은 모습.
‘천외천이다.’
연미정이란 단어를 들은 순간부터 예감이 안 좋았던 이유였다.
“태상가주 님. 우리 검가의 인원에 난 검흔의 흔적을 모르겠습니다.”
“와서 직접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알겠네.”
검제는 한 시체의 옷을 벗기고 살폈다.
아주 처참하게 짓이겨진 살갗.
굉장히 악랄한 검흔이었다.
“으음….”
검제의 백미가 위로 치켜세워졌다.
미간이 찌푸려진 채 신음을 하는 그.
잠시 후 그의 입에서 뜻밖의 대답이 흘러나왔다.
“…나도 모르는 상처야.”
“허.”
“주군께서도 모르는 무공이라니.”
“설마 천외천입니까?”
검제와 연배가 비슷한 이들이 물었다.
“아마도 그런 것 같네.”
“그러면 가주를 빨리 찾아야 하는 게 아닙니까?”
“천외천이라면 가주가 위험합니다.”
검제가 모르는 무공을 가진 이들이라면 천외천밖에 없었다.
게이트를 통해 나온 이세계 악마들.
각성자보다 한 차원 높은 무공을 구사하는 인간은 그들밖에 없었다.
검제와 제왕단이 심각한 표정을 한 사이.
이준은 검흔을 살피면서 무극자랑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사부님. 시체에서 불기가 느껴지는데요.’
[잘 보았다. 무림의 문파 중 불기를 다루는 곳은 어딘지 말해 보거라.]
‘소림사랑 아미파요.’
[이 상처는 둘 중 어디라고 보느냐.]
‘소림도 검법이 있지만 아미파의 검법이 연관성 있어 보여요.’
[정답이니라. 아미파에서 쾌검을 구사하는 검법은 난피풍검법이 제일이지. 하나 보이는 상처는 그보다 한 단계 발전해 있는 무공이니라. 아미가 그동안 놀고먹지만은 않은 모양이구나.]
무극자 사부는 뜬금없이 아미파를 칭찬했다.
무엇보다 사부는 칭찬에 인색한 사람.
제 무공이 아니면 절대 이런 말을 하지 않았다.
그렇다는 건 상황이 생각보다 심각하다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이준은 사부에게 들은 내용을 빠르게 읊었다.
“아미파의 난피풍검법에 당했어요.”
“난피풍검법은 우리도 아는 무공입니다. 하지만 그 검법과는 전혀 다른 흔적이 보이는데 창제께서 잘못 본 게 아닙니까?”
제왕단의 단주가 의문을 표시했다.
난피풍검법을 검제가 모를 리가 있나.
한국 무림사에도 등재된 무공이기도 해서 경험이 많은 이들 중에는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이 흔적은 난피풍검법의 진화된 초식 같습니다.”
“그런 게 있을 리가!”
“시체 속에 불기가 느껴지지 않습니까?”
“느껴집니다.”
“불기는 소림의 검법과 아미파의 검법 말고는 없습니다. 아, 대뢰음사나 소뢰음사도 있지만 거긴 아예 제외입니다. 그 두 곳은 현재 상처로 보이는 쾌검과는 거리가 멀거든요.”
“으음….”
“시체를 잘 보세요. 검흔에 불기도 있지만 마기도 함께 있어요. 사람들의 눈을 현혹시키기 딱 좋죠. 거기다 한 단계 발전된 검법이라면 각성자의 눈을 속일 수 있어요. 천외천은 그만한 실력을 가진 놈들이니까요.”
이준의 설명에도 제왕단은 헷갈려했다.
난피풍검법과는 결이 다른 흔적이기에 자신들의 머리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다.
그때 무극자가 이준에게 쉬운 정답을 내려줬다.
이준은 그대로 말했다.
“혹시 난피풍검법의 흔적을 아세요?”
“난피풍검법은 어지러울 난 자를 써서 상처가 무작위로 생기는 게 특징이 아니요?”
제왕단을 대신해 검제가 대신 답했다.
“맞아요. 원래라면 그렇죠. 그런데 여기 상처를 보세요. 어떤 모양으로 났나요? 꼭 불에 지진 듯 상처가 피어오른 모양이죠?”
“맞…소.”
“이들은 어지러울 난 대신 난초 란을 검의에 담은 거예요.”
“불의 모양이 아니고 난초의 모양이란 뜻이었소?”
“제 생각으로는 그래요.”
“허, 이런 해석이 가능하다니.”
검제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리고 생각에 잠겼다.
[밥을 떠먹여 주는구나. 이 값진 경험은 어디 가서 얻을 수 있는 게 아니지.]
무극자의 해답에 검제의 주위에 뇌기가 몰아쳤다.
무극자의 말 한마디에 검제가 깨달음을 얻은 것이다.
“한시가 바쁜데 여기서 이러시면 곤란한데.”
난감했다.
적진일지 모르는 장소였다.
깨달음을 얻는 것은 장소를 안 가린다지만, 그래도 자기 아들의 목숨이 경각에 달한 상황에선 좀 참아 줬으면 좋겠다.
“모두 검제 님 보호하고 계세요. 제가 좀 더 알아볼게요.”
제왕단이 검제의 주위를 감쌌다.
그러면서도 시선은 이준에게 꽂혀 있었다.
S급 각성자에게 깨달음을 던진 것.
굉장한 일이었다.
적어도 검제보다 강해야지만 가능한 일을 이준이 한 거다.
그들의 시선을 애써 무시한 채 이준은 주변을 더 살폈다.
“준아. 같이 가.”
“검제 님 곁에 있어. 나 혼자 갔다 올게.”
“그래도 되겠어?”
“원래부터 혼자 다니는 걸 더 선호했거든?”
“고맙다.”
“꺼져. 친구끼리 무슨.”
“고마운 건 고마운 거지. 아참. 이거.”
박혁진은 자기 손에 끼워진 반지를 이준에게 넘겼다.
“이제 괜찮냐.”
“어. 완전 좋아졌다.”
“지랄. 아직도 뇌기가 넘쳐 컨트롤 못하는 게 내 눈에 보이는구만.”
“너한테는 못 당하겠다.”
“괜히 컨트롤하지 못한 뇌기 사용했다가 발목 잡지 말고 가만히 있어. 여긴 내가 도와줄 테니까.”
“준아….”
박혁진이 아련한 눈빛으로 이준을 쳐다봤다.
눈가에 물이 고이기까지 했다.
“하지 마. 죽여 버릴 거야.”
“준아아아아! 억!”
그가 이준에게 달려들려다가 누군가에게 뒷덜미를 잡혔다.
“그 자리 네 거 아니야. 어디서 남자 새끼가 자꾸 품에 안기려고 해.”
그의 누나인 박정연이었다.
박혁진 대신 그녀가 이준의 품에 살포시 안기려는 찰나.
이준이 두 사람과의 거리를 순식간에 벌렸다.
“누나 정찰 갔다 올게. 검제 님 잘 살펴.”
“치! 비싼 녀석. 고마움의 표시 좀 하려고 했더니 곁을 안 주네.”
“…으으. 누나는 꿈 깨. 준이 눈 높아.”
“나 검화야. 연예인도 내 옆에 있으면 오징어가 되는 걸 모르니?”
“으휴. 지입으로 예쁘다고 말하는 것도 꼴값이다.”
“이 새끼가 뒤질래?”
박정연이 쌍심지를 켜고 박혁진을 때리려 하자 그가 어느새 검제의 곁으로 갔다.
그녀는 씩씩거리다가 이내 고개를 돌려 이준의 뒷모습을 보았다.
‘귀여운 줄만 알았더니 이젠 듬직하기까지.’
그 눈빛엔 애정이 듬뿍 담겨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