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84화
“쟤 뭐지?”
이준은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무극자도 마찬가지였다.
[저놈은 예나 지금이나 변한 게 없구나.]
3페이즈로 들어가서 존재감을 마음껏 뿜어 대던 성화가 몸을 돌렸다.
딱 봐도 삽십육계 줄행랑.
3페이즈가 되자마자 바로 튄 것이다.
[저 자식이!]
성화의 뒷모습을 본 흑염마조가 대노했다.
성화는 그의 일부분.
싸움을 뒤로 하고 도망을 치는 건 자신의 얼굴에 똥칠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이리 와서 싸우지 못해?]
흑염마조가 성화를 쫓아가며 버럭 소리쳤다.
하나 성화는 대답도 하지 않고 도망치기 바빴다.
[제 무덤을 파는구나. 쯧쯧.]
무극자가 혀를 찼다.
흑염과 성화는 하나이되 둘 같은 존재였다.
흑염은 어둠, 성화는 빛.
두 가지 기운이 공존해야지만 완전한 주작이라 할 수 있었다.
성화는 사신수의 오만한 성격을 가졌으나 겁 또한 누구보다 많았다.
공격력에서만큼은 동쪽을 다스리는 청룡과 쌍벽을 이루는 존재였으나 싸움은 항상 흑염에게 의지했다.
성화는 인간들에게 추앙받는 역할.
귀찮은 일은 전부 흑염에게 맡겼다.
그 때문에 흑염의 자아가 커졌고 결국 성화의 자아는 심연으로 가라앉았다.
자기 무덤을 판 꼴.
성화의 자아 속에 간간이 나오던 흑염은 이때 무극자를 만나 죽을 때까지 함께했었다.
무극자도 성화를 잘 아는 이유였다.
[이 망할 놈의 닭 새끼가!]
흑염마조의 화는 머리끝까지 차올랐다.
성화가 끝내 최악의 수를 뒀다.
녀석이 날아간 방향에 포탈이 열리기 시작했다.
금역에서 나가려는 모양이다.
[제자야. 성화를 잡아야 하느니라.]
“언제는 가만히 있으라면서요?”
[그건 마조와 싸울 때의 이야기다. 저놈이 어디로 나가는지 모르지 않느냐.]
“자기 게이트로 도망치는 게 아닐까요?”
[만약 게이트 바깥으로 도망치는 거라면?]
“안 되는데.”
[어서 움직이거라.]
무극자의 말을 들은 이준이 다급하게 땅을 박찼다.
무극군림보를 이용해 대지를 가로질렀다.
철컥-
넣어놨던 파멸겁을 꺼내들었다.
곧바로 창의 모습을 한 파멸겁을 들며 속도를 더 높였다.
[거기 서지 못해? 게이트를 나간다면 널 아예 소멸시키고 말겠다.]
이준은 무극군림보를 펼친 채 파멸겁을 역수로 쥐었다.
투창 기술인 투경의 각을 쟀다.
‘내공이 없어서 될지 모르겠는데.’
근접은 불가.
오로지 원거리 공격밖에 답이 없었다.
우웅.
파멸겁에 혼원신공의 내기를 담은이준이 팔을 앞으로 뻗으려 할 때.
“쿠오오오오!”
“방해꾼을 막아라!”
“주인님을 쫓지 못하게 해!”
인간의 말을 할 수 있는 성화 측 몬스터들이 부하들에게 일제히 명령을 내렸다.
몸에 성스러운 불꽃을 태우는 몬스터들이 모두 이준에게 달려들었다.
“저리 안 꺼져?”
파멸겁에 내공을 집중시키는 걸 중지하고 남은 왼쪽 손으로 몬스터를 향해 휘둘렀다.
퍽!
주먹에 몬스터의 대가리가 터졌다.
대충 휘두른 것만으로도 몬스터가 죽었다.
“쟤가 뭐라고 불나방처럼 목숨까지 바쳐?”
이준이 자기에게 접근한 이들을 한 번에 처리하기 위해 파멸겁을 휘두르려는 찰나.
“아니지. 너희는 나한테 좋은 먹이지?”
촤아아악-
이준이 땅에 슬라이드하며 몸을 돌렸다.
그의 눈을 마주쳤음에도 무작정 달려드는 몬스터들.
두려움에 가득 찬 표정을 하면서도 다리는 멈추지 않았다.
“흡기.”
이준이 흡성공의 흡자결을 운용했다.
그리고 무극군림보를 사용해서 몬스터를 향해 튀어갔다.
화염사귀에 손이 닿자마자 뼈만 남은 녀석.
쌍뿔 부족과 플레임 오크, 외눈박이 오우거.
몬스터란 몬스터는 가리지 않고 흡혈했다.
이준은 1분도 되지 않아 50마리 분량의 마기를 흡수하자.
텅텅 비었던 단전이 만족스러울 만큼 채워졌다.
혼원신공이 8성에 이르니 혼탁한 마기를 정화하는 속도도 배는 빨랐다.
“더 늦기 전에 해야겠다.”
이준은 파멸겁에 다시 내공을 집중시켰다.
무극군림보로 다시 앞으로 튀어 나갔다.
뒤따라오는 몬스터는 무시한 채.
‘조금만 더.’
밑바닥까지 내공을 긁어모아 파멸겁에 담았다.
원하는 상태에 도달하자마자 있는 힘껏 파멸겁을 성화에게 던졌다.
투쾅!
대기를 갈기 찢으며 날아가는 파멸겁.
전과는 다른 회색 아지랑이가 가시의 칼날이 되어 파멸겁과 함께 성화에게 날아갔다.
포탈에 거의 당도한 성화는 금역을 나가려는데 하나의 살기가 빠르게 접근하는 걸 느꼈다.
창이었다.
성화는 한쪽 날개로 성스러운 불꽃을 일으켜 바람과 함께 날리려는데.
쌔애애액!
그 힘을 뚫고 날아오는 게 아닌가.
성화가 몸을 돌려 두 날개를 펄럭이며 기존보다 강한 불꽃과 바람을 일으켰다.
하지만 그마저도 뚫고 접근했다.
[이익!]
도망치는 시간도 모자랄 판국에.
창 따위가 날아와 자신을 방해하자 화가 치밀어 오른 성화였다.
성스러운 불꽃으로 벽을 세운 그가 이젠 괜찮겠다 싶어서 포탈로 시선을 옮기려는 그때!
퍽-
[꾸에에엑!]
성화의 왼쪽 날개에 파멸겁이 박혔다.
파멸겁에서 회색 아지랑이가 수십 갈래로 나눠지면서 왼쪽 날개를 감쌌다.
쿵 소리와 함께 성화가 땅으로 추락했다.
“나이스 샷!”
이준이 핼쑥한 얼굴로 주먹을 불끈 쥐었다.
예상했던 대로 명중.
여기에 더해 무극기로 날개를 사용하지 못하게 묶기까지 했다.
“조야. 다음은 네 차례야.”
[한 건 했군. 다음은 내게 맡겨라.]
흑염마조가 발톱을 바짝 세워 성화를 잡아챘다.
드디어 3페이즈 성화와 흑염마조의 대결이었다.
* * *
기대와는 달리 두 신수의 싸움은 일방적이었다.
무극자 사부의 말대로라면 수하를 많이 데리고 있던 성화가 조금 더 강하던지.
아니면 막상막하의 싸움을 펼쳐야 정상이었다.
그러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흑염마조의 일방적인 공격.
지옥의 불꽃과 성스러운 불꽃은 서로 엉켜 있었고, 흑염마조는 성화를 발톱으로 찢어발겼다.
강철같은 부리는 성화의 털은 물론, 살까지 도려 낼 만큼 무자비했다.
[그, 그만!]
[봐줄 때 적당히 했어야 했다.]
성화가 애걸했지만 흑염마조는 가차 없이 행동했다.
걸레짝이 될 만큼 망가진 성화.
윤기 나던 털은 온데간데없었다.
흑염마조는 성화를 짓누른 채 아가리를 활짝 폈다.
[안… 돼…!]
성화의 불꽃이 흑염마조의 아가리를 향해 빨려 들어갔다.
성화가 발악했다.
고개를 흔들며 입에서 불을 마구 뿜어 댔다.
주변으로 튄 성화의 불꽃.
그 자리에 있던 몬스터는 뼈도 남기지 못하고 재가 되었다.
성화의 발악에도 흑염마조는 놓아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대로 끝내려는 모양이다.
[흑염마조가 성화를 흡수합니다.]
[성스러운 불꽃이 흑염마조의 몸에 들어왔습니다.]
[지옥의 불꽃이 성스러운 불꽃을 제 것으로 만들려고 합니다.]
이준은 자리에 주저앉아 성화를 흡수하는 흑염마조를 보며 말했다.
“사부님이 생각했던 것보다 성화가 훨씬 강한 게 아닐까요? 아니면 마조가 더 강하나? 3페이즈에 들어갔는데 저항도 제대로 못 하고 있네요.”
[성화가 달아나는 악수를 둬서 그렇느니라. 3페이즈 들어가자마자 죽기 살기로 싸웠다면 마조도 힘들었을 게다.]
“저렇게 당할 거였으면 싸워 보기라도 하지. 멍청하네.”
[성화는 원래 예전부터 겁이 많았다. 그래서 툭하면 마조의 품으로 숨었지.]
“쟤들도 두 개의 자아를 가지고 있었다는 게 놀랍네요.”
두 사제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사이 거의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다.
[하, 항복이다! 내가 네 밑으로 들어갈 테니 제발 소멸만은….]
[미안하지만 거부하지. 또 뒤통수를 맞을 순 없다.]
[다, 다신 안 그러겠다.]
성화가 애걸복걸했다.
그래도 명색이 사신수의 자리에 있는 녀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릎 꿇고 싹싹 빌만큼 자아를 잃지 않고 싶나 보다.
굉장히 오래 산 만큼 삶에도 미련이 많은 것 같았다.
[그만 작별하자. 다신 안 봤으면 좋겠군.]
흑염마조는 성화의 말을 단칼에 거절하고 흡수를 계속했다.
[아, 안 돼! 이대로 소멸될 수 없다아아아!]
성화는 마지막으로 다시 발악했다.
전신의 불꽃을 태우며 흑염마조를 감쌌다.
그러나 이미 끝난 게임.
성화의 성스러운 불꽃은 이미 흑염마조의 것이었다.
그를 태우던 성스러운 불꽃은 흑염마조에게 일말의 상처도 내지 못한 채 몸으로 빨려 들어갔다.
[사신수인 내가 소멸이라니이이이!]
성화는 비명을 지르며 이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흑염마조가 성화를 완전히 흡수했습니다.]
[레드급 몬스터 화염사귀의 주인이 사라졌습니다.]
[레드급 몬스터 플레임 오크의 주인이 사라졌습니다.]
[레드급 몬스터 쌍뿔부족의 주인이 사라졌습니다.]
[레드급 몬스터 외눈박이 오우거의 주인이 사라졌습니다.]
……
……
……
[블루급 몬스터 활지네의 주인이 사라졌습니다.]
“저게… 사신수의 진짜 모습.”
이준의 눈은 흑염마조에게 꽂혀 있었다.
압도적이라는 말 밖에 나오지 않았다.
하늘을 덮을 정도로 거대한 크기.
흑염과 성화가 어우러지니 격이 다른 존재가 되었다.
이준이 이 정도의 느낌을 받는데, 몬스터들은 오죽할까.
흑염마조의 존재를 옛날부터 알던 황금이 빼고는 전부 쥐 죽은 듯 몸을 웅크렸다.
파랑이도 낮게 으르렁거렸다.
녀석 또한 흑염마조에게 위협을 느꼈을 터.
당연한 반응이었다.
[레드급 몬스터 화염사귀가 흑염마조에게 종속을 청합니다.]
[레드급 몬스터 플레임 오크가 흑염마조에게 종속을 청합니다.]
[레드급 몬스터 쌍뿔부족이 흑염마조에게 종속을 청합니다.]
[레드급 몬스터 외눈박이 오우거가 흑염마조에게 종속을 청합니다.]
[블루급 몬스터 활지네가 흑염마조에게 종속을 청합니다.]
……
……
성화 측 몬스터가 전부 항복해 왔다.
수십 개의 게이트.
졸지에 게이트 부자가 되었다.
자신의 승낙이 없어도 흑염마조가 알아서 승인했다.
[새로운 남쪽의 지배자가 탄생했습니다.]
[새로운 거처 지옥지대가 생성되었습니다.]
[모든 염열지대는 지옥지대로 통합됩니다.]
계속된 알림에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데 흑염마조가 말을 걸어왔다.
[성화를 흡수하는 통에 힘을 통제할 수 없다. 당분간은 내 거처에 있으면서 힘을 통제해야겠다.]
“그, 그래. 마음껏 쉬다 와.”
[다음에 보지.]
화르륵!
흑염마조와 부하가 된 성화측 몬스터들이 일제히 흑염에 휩싸이며 순식간에 사라졌다.
“완전체가 되니깐 저 말투가 왜 당연하듯이 들리지?”
조그만 꼬마 새였을 때는 웃겼다.
자기 입으로 본좌가~ 이러는데 얼마나 배가 아프던지.
사부 곁에 있었다고 따라 하는 게 귀여웠다.
하나 사신수가 되어 똑같은 말을 하니 무게가 달랐다.
위엄이 서려 있달까.
그냥 보이는 아우라가 전혀 달라져 있었다.
“어색해 뒤지겠네.”
이준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뒷정리를 했다.
성화와의 전쟁에서의 승리.
피해도 꽤 있었지만 전리품도 많이 얻었다.
금역에 널려 있는 몬스터의 사체만 해도 돈다발이었으니까.
* * *
붉었던 하늘이 사라지고 원래의 색으로 돌아왔다.
사람들은 종말이라며 쉘터에서 불안감에 떨었지만 아무 일도 없자 안도했다.
“휴우. 성화가 밖으로 나왔으면 큰일 날 뻔했어.”
전 몬스터가 서울에서 날뛸 생각을 하니, 아찔했다.
게이트 안에서 마무리 지었다는 게 천만다행이었다.
“혁진이는 일어났겠지?”
이준은 뒷정리를 몬스터에게 맡기고 철혈검가로 왔다.
검가의 정문에 도착한 그는 안쪽에서 분주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완전 무장? 누가 쳐들어오기라도 했나?”
이준은 정문으로 가서 각성자에게 말을 걸었다.
“무슨 일이에요?”
그의 등장에 정문을 지키는 각성자가 화들짝 놀랐다.
“차, 창제 님 오셨습니까.”
“안녕하세요. 그런데 검가에 무슨 일 있어요?”
“그, 그게… 외부인한테는 말하면 안 되서…”
“그러면 제가 혁진이한테 알아보죠. 들어가는 건 되죠?”
“예? 예.”
정문을 지키는 각성자는 이준이 안으로 들어가는 것까지 막을 순 없었다.
검제와 같은 서열인 창제다.
검가가 비상에 떨어졌다고 해도 그가 막을 수 있는 신분이 아니다.
안으로 들어온 이준.
그의 눈엔 무장한 철혈검가의 정예들이 눈에 들어왔다.
꼭 싸우러 가는 느낌.
그중에는 박씨 남매도 있었다.
“검가에 무슨 일 있어?”
“준아!”
굳은 표정을 하고 있던 박혁진이 이준을 보자 환하게 웃는데 그보다 먼저 그를 덮친 그림자가 있었다.
“여긴 또 어쩐 일이야? 우리 준이.”
“윽… 누나 좀 떨어져, 남들이 보잖아.”
“우리 사이에 뭐 어때.”
박정연이 이준에게 달라붙어서 떨어지지 않았다.
이준은 그녀를 떼어 내는 걸 포기한 채 박혁진에게 재차 물었다.
“무슨 일인데 완전 무장을 하고 있어?”
“아버지한테서 연락이 끊겼어.”
“언제?”
“몬스터가 서울을 습격했을 때.”
“마지막 연락이 끊긴 곳이 어디야?”
“강화도에서 마지막 연락이 왔어.”
“강화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