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83화
“개쩌러.”
이준은 자신이 한 결과물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블랙급 보스 몬스터를 단숨에 사살한 방법은 크게 힘들지 않았다.
그저 손짓 한번과 짧은 순간의 집중.
이 두 가지가 완성된 순간 몬스터가 죽었다.
“사부님!”
이준이 흥분한 목소리로 무극자를 불렀다.
[…크흠. 알고 있느니라. 누가 만들었는데 당연한 결과지.]
무극자는 이준의 행동에 당황한 걸 감추기 위해 헛기침을 했다.
이준이 보인 것은 살의 정점에 있는 무의였다.
굉장한 깨달음이 있어야만 사용할 수 있었다.
이준처럼 무극기를 배웠다고 바로 사용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레드급 몬스터는 모를까.
특히 블랙급 보스 몬스터를 상대로는 더더욱 사용할 수 없었다.
잘못하다간 도리어 자신이 상처 입는 게 무극기였으니까.
이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준은 흥분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의 팔은 쉬지 않고 움직였다.
자신을 감싸며 공격하고 있는 몬스터를 향해 회색 아지랑이를 이동시켰다.
‘어디 이것도 되려나?’
회색 기류가 삽시간에 몬스터 주위에 퍼졌다.
몬스터는 자신의 몸을 둘러싼 이상한 기류에 공격을 멈췄다.
블랙급 보스 몬스터가 했던 행동을 똑같이 따라 하는 녀석들.
손을 휘저으며 아지랑이를 흩어지게 했다.
“꾸엑?”
그럼에도 회색 아지랑이는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주변을 가득 메웠다.
이준이 금역 소속 몬스터를 향해 내공이 담긴 목소리로 외쳤다.
“모두 뒤로 빠져!”
이준의 목소리를 아는 몬스터들이 전부 몸을 뺐다.
금역 몬스터는 전부 회색 아지랑이에서 벗어나고 오직 성화 소속 몬스터들만 기류 속에 있었다.
확인을 끝내자 이준의 손이 좌측에서 우측으로 움직였다.
그 결과.
[블루급 몬스터 활지네를 죽였습니다.]
[보상으로 테크트리 포인트 100,000p를 지급합니다.]
[블루급 몬스터 활지네를 죽였습니다.]
[보상으로 테크트리 포인트 100,000p를 지급합니다.]
[레드급 몬스터 화염사귀를 죽였습니다.]
[보상으로 테크트리 포인트 300,000p를 지급합니다.]
[레드급 몬스터 플레임 오크를 죽였습니다.]
[보상으로 테크트리 포인트 350,000p를 지급합니다.]
……
……
……
[보상으로 테크트리 포인트 250,000p를 지급합니다.]
[레드급 몬스터 외눈박이 오우거를 죽였습니다.]
회색 아지랑이에 둘러싸인 몬스터의 상반신이 일제히 갈라졌다.
그것도 아주 깔끔하게 잘려나갔다.
상반신을 잃은 몬스터의 하반신에선 피분수가 뿜어져 나왔다.
“미쳤네 그냥.”
자신이 한 짓을 보고 놀라는 이준이었다.
그가 조금 전 한꺼번에 죽인 몬스터만 1000마리 이상.
손짓 한 번에 일어난 기적이었다.
그는 무극기로 압도적인 무력을 선보였다.
그로 인해 성화 측 몬스터가 혼란에 빠졌다.
[레드급 몬스터인 플레임 오크가 혼란에 빠졌습니다.]
[블루급 몬스터인 활지네가 혼란에 빠졌습니다.]
[레드급 몬스터인 화염사귀가 혼란에 빠졌습니다.]
[레드급 몬스터인 외눈박이 오우거가 혼란에 빠졌습니다.]
[레드급 몬스터인 큰뿔 부족이 혼란에 빠졌습니다.]
……
……
메시지가 미친 듯이 올라왔다.
이준과 눈이 마주친 몬스터가 뒷걸음질을 쳤다.
1000마리를 순식간에 도륙한 인간.
이준은 사람이 아니었다.
자신들이 섬기는 지배자와 같은 존재라 여겼다.
무엇보다 몬스터를 더욱 두렵게 만든 게 있었다.
그의 주변을 맴돌고 있는 회색 아지랑이.
그 속엔 짙은 살기와 공포스러운 힘이 깃들어 있었다.
마기의 장점이자, 단점이다.
약한 힘에는 복종하게끔 강한 압박을 가한다는 장점을 가졌다.
그렇기에 몬스터가 이준을 보고 겁을 집어먹은 것이다.
“좋긴한데… 단전이 텅 비어 버렸네? 슈발.”
이준이 인상을 찌푸렸다.
단전에 그 많던 내공이 비어 버렸다.
손짓 두번에 내공이 거덜났다.
블랙급 보스 몬스터까지는 좋았다.
그 무시무시한 힘을 가진 녀석을 단번에 죽였으니까.
문제는 1000마리 이상의 몬스터를 때 몰살시킨 힘이었다.
이 힘을 사용하기 전까지는 이전처럼 많은 내공을 사용하겠구나 생각했다.
그래서 마음 먹고 내공을 운용했는데.
이게 웬걸.
단전에 가득하던 내공이 썰물 빠져나가듯 한꺼번에 쭉 사라지는 게 아닌가.
허탈할 지경이었다.
[멍청한 제자야 당연하지 않느냐! 무극기를 이제 막 배운 놈이 무턱대고 쓰이니까 이 사단이 난 것이지.]
원래부터 사부의 무공은 극심한 내공 소모를 자랑하는 무공으로 이루어졌다.
그중에서 단연 으뜸은 자신이 사용한 무극기였다.
8성의 혼원신공으로도 내공 수급이 감당이 안될 정도.
살상력이 상상을 초월하는 만큼 그 대가도 컸다.
“가성비 극악이네요.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무극창법이나 장법을 이용할 걸.”
[뭬야? 이 망할 제자가!]
이제는 사부도 현대의 말을 잘 알고 있었다.
가성비라는 말은 무극기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은 단어였다.
예로 들자면 백화점의 명품같은 거다.
대가를 지불한 만큼 자신을 빛내주는 그런 느낌이랄까.
그래서 가성비라는 말을 듣자마자 사부가 부들거린 거다.
“쳇. 내공을 회복할 때까진 초식으로만 싸워야겠다. 테구르, 로티틸! 이제 다시 공격해.”
이준의 목소리에 입을 떡 벌리고 있던 테구르와 로티틸이 정신을 차렸다.
“예? 옙! 알겠습니다요. 다, 다들 공격!”
“저희도 스케먼들에게 밀리지 말아요!”
이준의 압도적인 무위에 힘입어 금역 소속 몬스터들이 반격을 가했다.
* * *
지잉-
게이트에 들어갔던 박정연이 철혈검가로 돌아왔다.
그녀는 곧장 박혁진이 있는 방으로 갔다.
“야! 괜찮…구나?”
방문을 박차고 들어가자 안에는 두 사람이 앉아 있었다.
“게이트에서 지금 온 게냐?”
검제인 박춘식과 동의각주인 이의태였다.
“네. 기사 보고 바로 왔어요. 어떻게 된 일이에요? 혼수상태에 빠졌다는 애는 멀쩡하네요?”
“여기 신의 동생이 해결해주셨다.”
“제가 한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전 그저 옆에서 상태를 확인만 했고 전부 저희 가주님께서 해결하신 거지요.”
“그 가주를 부른 것만으로도 큰일을 한 거야. 동생은 너무 겸손해.”
“큼. 여기서 술 먹은 것 밖에 기억이 없는데… 부끄럽습니다.”
“말 나온 김에 한잔하러 가세.”
“또 말입니까?”
“여기 손녀가 왔으니 괜찮아. 우린 나가자고.”
박춘식은 이의태를 팔을 잡고 일으켜 세웠다.
두 사람은 그동안 이준의 이야기로 절친이 된 상태였다.
나이도 얼마 차이 안 나겠다 형님, 동생 사이가 된 것이다.
이의태도 마지못한 척 슬쩍 일어났다.
그도 술을 굉장히 좋아하는 편.
그동안은 손녀의 병 때문에 술을 멀리했지만, 손녀의 병도 나아서 술을 조금씩 먹기 시작했다.
철혈검가에 와서 박춘식과 이야기하며 술잔을 기울이는 건 이의태의 또 다른 재미였다.
“우린 나갈 테니 동생 좀 보고 있거라.”
“할아버지 제가 애예요?”
“신의 동생 말 못 들었냐? 아직은 무리할 때가 아니니 꼼짝말고 있거라.”
박춘식은 박혁진에게 가만히 있으라고 당부하곤 이의태와 함께 나갔다.
방에 두 사람만 남게 되었다.
박정연이 침상 옆에 앉았다.
“괜찮아 보이는데?”
“괜찮아 보이기만 해? 나 달라진 거 없어?”
“음… 없는데?”
“흐흐.”
“그 웃음 뭐냐? 짜증나게.”
박혁진이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웃으며 말했다.
“이제 누나도 나한테 안 돼.”
“지랄. 갑자기 뭐래? 머리 다쳤냐?”
“나 달라진 거 없다며? 그러면 이제 누난 내 상대 안 된단 의미야.”
그의 도발에.
딱!
박정연의 주먹이 날아와 머리를 쥐어박았다.
“악!”
“이것도 못 피한 놈이 변하긴.”
“이씨. 누나라서 봐준 거야.”
“지랄 그만해. 아니면 밖에서 제대로 한번 뜨던가.”
“지금은 안 돼.”
“쫄았냐?
“신의께서 함부로 내공 운영하지 말라고 했거든.”
“쫄았구나?”
“아니라니깐?”
“괜찮아. 이 누나를 이기고 싶은 생각은 간절하겠지만 꿈 깨셔.”
그녀의 도발에 박혁진이 발끈하며 감춰 놨던 기운을 풀었다.
“이래도 무시할 거야?”
잔잔한 바람이 불었다.
머리카락을 간질이는 미풍은 기분을 산뜻하게 만들어줬다.
하지만 박혁진을 보는 순간 산뜻한 마음이 다 날아갔다.
“…그 힘 뭐야?”
“뭐긴 내 힘이지. 흐흐.”
박혁진의 몸에선 거대한 기운이 느껴졌다.
강력한 뇌기를 흩뿌리고 있으나, 주변은 고요해서 더 놀라웠다.
동생 따위가 자신보다 더 기를 잘 조절하고 있으니.
왠지 분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니까 그 힘이 갑자기 어디서 생겼냐고.”
“눈 떠보니 생겼던데?”
“뒤질래? 장난치지 말고 바른대로 말해라.”
“정말이야. 준이가 나 치료하고 갔더니 생겼어.”
박혁진도 방대한 양의 뇌기가 어떻게 생긴지 잘 모른다.
뇌령석에서 얻은 뇌기란 걸 상상도 못한 채 힘이 강해졌다고 좋아하고 있었던 거다.
“이 새끼가 맞아봐야 정신을 차리지?”
“자, 잠깐!”
박정연이 박혁진을 한 대 치려고 할 때 그의 손에 끼워진 은색 반지가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박혁진의 손을 덥석 잡으며 물었다.
“이거 준이가 끼고 있던 반지 아니야?”
어찌나 힘을 잔뜩 줬는지 박혁진이 비명을 질렀다.
“마, 맞아! 아프니깐 좀 놔봐.”
“네가 왜 이걸 끼고 있어?”
박정연의 눈이 살기로 번들거렸다.
박혁진이 이준의 반지를 끼고 있어서 눈이 확 돌아갔다.
제대로 말 안 하면 박정연에게 죽겠다는 생각에 재빨리 말했다.
“내가 주화입마에 걸렸었대. 내공이 불안정해서 할아버지도 어쩌지 못하시는 걸 준이가 와서 해결해주고 간 거야. 이건 주화입마를 억제하고 내공을 안정시키는 장치라고 신의께서 말씀하셨어.”
그제야 박정연이 살기를 거두고 그의 팔을 놓아주었다.
“아파 죽겠다. 무슨 여자가 힘이 이렇게 무식하게 쎄?”
박혁진이 아픔을 호소하거나 말거나.
그녀의 시선은 반지에 가 있었다.
“이제 내기는 안정됐지? 보니깐 이상 없는 것 같아. 그치? 귀여운 동생아?”
그녀의 시선에 박혁진이 손을 뒤로 감췄다.
“안 돼! 준이 올 때까지 내가 보관할 거야.”
“누가 보관하면 어때. 잃어버리지 않으면 되지.”
그녀는 박혁진이 강해진 것보다 손에 이준의 반지가 끼워져 있다는 게 더 부러웠다.
반지의 옵션 따위는 그녀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 사실을 알기에 박혁진이 고개를 격렬히 흔들었다.
“아, 안 돼! 나 준이한테 죽는단 말이야.”
“걱정 마. 이 누나가 잘 끼고 있다가 준이한테 전해줄 거니까.”
“안 된다고오오오!”
두 남매가 반지를 두고 다투었다.
거의 박정연에게 반지를 뺏길 즘.
“자, 잠까아안! 이거 준이한테 소중한 거야 사부님이 주셨다고 했어!”
그 말에 박정연의 행동이 멈췄다.
“준이의 사부님이?”
“그래. 이거 우리가 함부로 할 물건 아니야. 우리가 이러는 거 알면 준이가 화낼지 몰라.”
그녀도 이준에게 사부가 있다는 걸 안다. 그것도 굉장히 존경하는 인물이라는 것도 알고.
사부의 이야기는 제대로 안 했지만, 그 단어만 나오면 표정이 밝았다.
그 누구도 이준에게서 끄집어내지 못했던 표정을 사부라는 사람은 해냈다.
그 사실을 알기에 하던 행동을 멈춘 거다.
‘준이가 끼고 있던 거라 내가 보관하고 싶었는데….’
그럴 수 없게 되었다.
소중한 물건을 함부로 다루는 건 물건의 주인을 무시하는 처사였으니까.
“X발. 왜 이 새끼가 먼저야.”
하지만 이준이 제일 처음으로 반지를 끼워준 사람이 자신이 아니라는 건 너무나도 아쉬웠다.
* * *
[끼에에엑!]
성화의 입에서 귀가 찢어지는 듯한 비명이 들렸다.
흑염마조가 성화의 위에서 몸을 짓누르고 있었다.
흑염은 활활 타오르는데 성화는 서서히 꺼져가는 중.
딱 봐도 흑염마조가 성화를 이기는 모습이었다.
[이제 그만 내 일부가 되어라.]
흑염마조가 아가리를 활짝 벌려 성화의 머리째를 씹어 으깼다.
[2페이즈 성화의 반쪽을 제압하셨습니다.]
[경고! 곧이어 3페이즈가 시작됩니다.]
이준에게 경고의 메시지가 날아왔다.
성화와의 마지막 싸움.
상대측 몬스터를 상대로 승기를 잡은 상태였다.
지상은 이미 이긴 것과 다름없으니 흑염마조가 성화만 잡아주면 된다.
물론 이준은 흑염마조가 성화를 이겨줄 거란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경고! 3페이즈가 시작되었습니다.]
[성화의 반쪽이 본신의 힘을 드러냅니다.]
[성스러운 불꽃이 맹렬히 타오릅니다.]
[성화 측 몬스터가 성스러운 불꽃의 맹약을 이행합니다.]
드디어 마지막 성화가 모습을 드러냈다.
고고할 정도로 눈이 부신 존재.
최상위 블랙급 몬스터이며 남쪽의 지배자가 강림했다.
세상을 멸망시킬 불을 뿜어내고 있었는데.
“어? 어어?”
이준의 눈이 커지며 성화를 가리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