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81화
이준을 감싸던 회색 아지랑이가 전부 사라졌다.
그는 성화가 공격해 오는 걸 봤음에도 자신의 손을 쥐었다 폈다 하고 있었다.
성화는 이준을 향해 냅다 들이박으려는 상황.
일반 몸통박치기가 아닌, 성스러운 불꽃을 태우는 성화의 공격이었다.
이에 맞는다면 시체도 남기지 않고 소멸되는 게 정상.
하나 몸통박치기를 한 성화가 뾰족한 비명을 내질렀다.
[말도 안 된다!]
성화와 이준을 가로막은 하나의 벽.
조금 전 사라졌던 회색 아지랑이가 이준의 팔짓에 의해 다시 생성된 것이다.
그 한 번의 행동으로 성화의 공격을 가뿐히 막은 이준.
반대편 손으로 주먹을 말아쥐었다.
여지없이 회색 기류가 모여들며 주먹을 감쌌다.
그리곤 그대로 팔을 뻗어 성화의 부리를 강타했다.
콰앙!
[끼에엑!]
단 한 방.
최상위 블랙급 보스 몬스터가 주먹질 한 번에 저 멀리 처박혔다.
이준의 행동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무극군림보의 자세를 취하며 일보를 시전했다.
쿵.
전에 펼쳤던 무극군림보가 지진이 일어나듯 파괴적이었던 것과는 달리 지금은 그저 작은 진동이 다였다.
그러나 결과는 전혀 달랐다.
성화가 처박힌 땅을 비집고 회색 아지랑이가 뿜어져 나왔다.
수십 줄기의 아지랑이가 꿈틀거리며 성화를 옭아맸다.
[이, 이건… 그 괴물 같은 놈의 무공인데 어서 빠져… 끄윽!]
성화가 회색 아지랑이에서 빠져나가려고 발버둥을 쳤다.
화염을 뿌리면서 거세게 저항하고 날개를 펄럭였으나 소용없었다.
회색 아지랑이는 성화가 저항할수록 더욱 강하게 조여 댔다.
[컥컥!]
성화의 모습에 이준이 입매를 비틀었다.
천천히 걸음을 떼며 손을 옆으로 뻗자.
바닥에 떨어져 있던 파멸겁이 그의 손으로 빨려 들어갔다.
우웅!
파멸겁이 진동하며 공명음을 울렸다.
그와 동시에 파멸겁의 모습이 바뀌기 시작했다.
[파멸겁의 조건을 채우지 못했습니다.]
[파천멸기로 인해 파멸겁이 강제로 다음 단계로 변합니다.]
일자로 된 창날이 여러 갈래 변했다.
붉었던 창대도 검은색이 됐다.
1단계에 있던 파멸겁이 2단계로 진화한 것이다.
살기가 굉장히 짙어진 창.
불길한 기운이 가득했다.
일반 각성자가 만졌다면 영혼을 빼앗길 만큼 사기가 짙게 배어 있었다.
이준은 변화된 파멸겁을 쥔 채 무릎을 굽혔다.
땅에서 발을 한 발 떼자 어느새 성화의 몸 위에 있었다.
[…크흑, 당장 내려오지 못 쿠엑!]
성화가 비명을 질렀다.
파멸겁이 성화의 등에 박혔기 때문이다.
실체가 없다곤 하나 성화도 데미지를 받는다.
특히 이렇게 잡혀 있을 때는 더욱더.
이준은 아랑곳하지 않고 파멸겁을 계속 휘둘렀다.
퍽퍽!
성화의 등 위에선 도살장에서 소를 도축하는 듯한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성화의 비명은 제외.
[끼아아악!]
실체가 있는 꼬리를 가격당하자 데미지를 두 배로 입었다.
성화의 비명은 계속 울려 퍼졌다.
시간이 지날수록 줄어든 성화의 발악.
이준의 무자비한 살수로 인해 힘이 다하고 있었다.
그는 죽어 가는 성화를 즐기듯 괴롭혔다.
콰직!
거대한 성화의 날갯죽지를 손으로 잡아 뜯었다.
[그… 만…]
성화의 만류에도 다른 한쪽 날개마저 분리 시킨 이준이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소름 끼치게 살기가 가득한 미소였다.
성화의 몸에서 활활 타오르던 불꽃이 결국 꺼지고 말았다.
[성화의 성스러운 불꽃이 꺼졌습니다.]
[경고! 곧이어 2페이즈가 시작됩니다.]
[성화의 전 몬스터의 능력치가 상승합니다.]
[전 몬스터가 성화의 불꽃을 태울 수 있습니다.]
[서브 퀘스트 ‘천룡의 무복을 입을 자격’을 클리어하셨습니다.]
[보상으로 청룡무의가 봉인된 장소가 주어집니다.]
[폭풍의 언덕]
성화의 몸이 재로 변하고 공중에 날렸다.
이준은 공격할 대상이 사라지자 가만히 있었다.
그리고 무언갈 생각하더니 이내 몸을 돌려 걸음을 옮겼다.
몬스터들이 있는 곳.
그들은 싸우다 말고 멈춰 있었다.
갑자기 주변을 휩쓴 강렬한 살기에 전투를 중단한 것이다.
아군, 적군 할 것 없이 몸이 굳어졌기 때문이다.
[제자야. 멈추거라.]
이준의 움직임에 무극자가 제지를 했다.
그의 목표를 알기에 멈춰 세웠다.
하지만 이준은 무극자의 말을 무시했다.
아니, 일부러 무시하는 게 아니었다.
현재 이준은 전의 이준이 아니었으니까.
천살성이 깨어나 오직 피만을 갈구하는 살귀에 불과했다.
[네 역할은 이걸로 끝났다. 다음은 마조에게 맡기고 어서 운공을 하거라.]
무극자의 목소리가 들릴수록 이준의 걸음은 빨라졌다.
그의 몸이 흐려진 순간 테구르의 앞에 나타났다.
이준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던 흑염마조가 이준을 막아섰다.
[이 멍청한! 천살성에 잡아먹히면 어쩌자는 거야!]
그는 흑염마조의 목소리도 듣지 못했다.
다짜고짜 파멸겁을 휘둘렀다.
화르륵!
흑염과 파멸겁이 부딪혔다.
성화의 불꽃을 그냥 꺼트렸던 파멸겁이 막히자 이준이 인상을 찌푸렸다.
[여기서 더 했다간 가만 안 둬.]
하지만 여전히 이준은 흑염마조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고 재차 공격을 가했다.
그 순간!
[이 못난 제자 놈이 사부의 얼굴에 똥칠을 하는구나!]
“억!”
무극자의 일갈이 터져 나왔다.
이준은 파멸겁을 바닥에 떨어트리곤 손으로 머리를 부여잡고 쓰러졌다.
무극자의 일갈은 항마력이 깃들어 있었다.
“크흑….”
이준이 몸을 꿈틀거리며 고통스러워했다.
무극자의 일갈로 인해 깨어난 천살성이 흔들렸다.
내부에서 극심한 갈등이 일어났다.
[정신이 그렇게 약해 빠져서야 어디 고금제일인의 제자라 할 수 있겠느냐! 그럴 거면 아예 무공을 때려치우거라!]
무극자가 항마력이 깃든 음성으로 이준을 흔드는 사이.
[성화의 불꽃이 재생되었습니다.]
[성화의 반쪽이 2페이즈에 들어갔습니다.]
재가 되어 흩어졌던 성화가 하늘에 다시 나타났다.
* * *
심연 속 어둠.
이준은 깜깜한 공간에서 길을 헤매고 있었다.
“사부님! 똑똑. 안 계시나요?”
무극자 사부를 연신 불렀지만 대답은 없었다.
꼭 무인도에 떨어진 느낌.
불안했다.
분명 마신지체를 찍은 후 고통에 휩싸였는데 눈을 떠 보니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공간이었다.
“괜히 저 겁주지 마세요.”
유일하게 의지할 사람은 무극자 사부뿐.
자신의 부름에 응답해 줄 줄 알았건만 돌아오는 건 공허한 메아리뿐이었다.
“아, 무서워 뒤지겠네.”
텅 빈 공간에 혼자 있으니 꼭 귀신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그러는 그때 뒤에서 은밀한 기척이 느껴졌다.
고개를 휙 돌렸는데 아무도 없었다.
“누구야. 나와.”
또다시 뒤에서 느껴지는 기척.
이번엔 자신의 어깨까지 만지는 게 느껴지자.
펑!
몸을 돌리자마자 주먹을 휘둘렀다.
허나 허공이 터져 나가는 소리가 다였다.
“이 새끼 안 나와?”
이준이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폈다.
기척이라곤 전혀 잡히지 않는 그때, 마침 내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사람이 아닌, 인간의 형상을 띈 그림자였다.
“응?”
“드디어 만났구나.”
“날 알아?”
“아주 잘 알지.”
“어떻게 아는데?”
“나는 너고, 너는 나이니까.”
“뭔 개소리야?”
“난 네 안에 숨어 있던 욕망 그 자체다.”
이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전혀 이해가 안 되는 모양.
그림자가 다시 한번 말했다.
“난 네 안에 숨어 있던 욕망 그 자체다.”
“그래서?”
“그래서라니! 넌 나와 함께할 운명을 타고났다.”
이제 녀석의 자아를 잡아먹을 차례.
싫다고 발버둥 쳐야 정상이었다.
하지만 예상과는 다른 반응이 나왔다.
“아, 그러니까 내가 명예나 권력, 돈 이런 걸 탐내는 게 너 때문이라 이거구나? 뭐 별거 없네. 곁가지에 신경 쓴다고 사부한테 혼날 테지만 같이하자.”
“겨, 곁가지!?”
그림자가 당황했다.
한 번도 이런 취급을 당한 적 없었기에 혼란스러웠다.
자신은 천살성.
오로지 살육로 똘똘 뭉친 욕망이었다.
욕망 중에서도 가장 위험하다는 피를 갈구하는 욕망이다.
그런데 명예나 권력 따위의 그냥 그런 욕망과 비교를 하고 있으니 환장할 노릇이다.
뿐인가.
고심하고 또 고심해야 할 부분을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자신과 같이하잔다.
미친놈이 아닌지 잠깐 헷갈렸다.
“그,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정말 나와 같이할 생각이냐?”
“너는 나고 나는 너라며? 함께할 운명이기도 하고 말이야.”
“이건 신중하게 생각해야 한다.”
입장이 정반대가 되었다.
원래라면 그림자가 이준을 꼬드겨야 하는데, 잘 생각해 보라고 말리고 있었다.
무극자가 봤다면 아주 기가 찼을 일이다.
“신중할 게 뭐가 있어. 같이 가자.”
“…정말? 난 네가 생각하는 곁가지 욕망이 아니다.”
“그러면 뭔데?”
“살의와 파멸. 오로지 피만을 갈구하는 미친 악귀와 같은 욕망이다.”
“그건 좀 곤란한데….”
그제야 이준이 난감하다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역시 그렇겠…”
“그래도 같이하자.”
“무, 뭐라고?”
“같이하자는 말 못 들었어?”
“곤란하다고 하지 않았던가?”
“아아 그 말은 내 사부가 알면 좀 곤란할 것 같다 이 말이지.”
“무극자를 말하는 것이냐?”
“잘 아네? 난 사부님을 실망시켜 드리고 싶지 않거든.”
“그 망할 노인네가 왜 좋지? 내가 지켜본 바로는 사사건건 너를 골탕 먹이려고 하던데.”
그림자는 이준을 잡아먹겠다는 생각을 때려치우고 이야기에 집중했다.
“다 날 애정하니까 그런 거지. 너는 무관심이 얼마나 무서운지 모르지?”
“모른다. 난 항상 관심의 대상이었다.”
“그러니까 네가 사부를 안 좋게 생각하는 거야. 십 년 넘게 무관심을 받았다면 그런 말 못 할 거야. 사부님은 처음으로 내게 관심을 준 사람이거든.”
“난 차라리 관심이 사라졌으면 했는데….”
“무관심은 살아도 사는 게 아니야. 투명인간과 다를 바 없어. 세상에 홀로 있다는 느낌이 얼마나 외로운지 알아?”
이준은 평생 외로움을 겪었다.
혈족 계승을 못 했던 실패작이란 편견.
오대 가문의 자식이지만 쓰레기보다 못한 무공을 계승해 가문의 명예를 실추시킨 자식.
핏줄이라 죽이진 못하고 목숨만은 살려 놓은 그런 느낌이었다.
“외로움… 잘 안다. 나만큼 잘 아는 사람은 드물 거다.”
“그래서 내가 사부님을 좋아해. 그분은 내 부모님 같은 존재거든. 쓸모없던 날 이만큼 강하게 만들어 주셨잖아?”
이준의 목소리엔 씁쓸함과 기쁨이 담겨 있었다.
그 감정을 느낀 그림자가 중얼거렸다.
“넌 나와 다르군.”
“다를 게 뭐가 있어? 네가 지금 외롭다면 내가 함께해 주면 될 건데.”
“나와 말이냐?”
“응. 싫어? 애초에 넌 날 설득하려고 모습을 드러낸 거 아니야? 아니지, 잡아먹으려 한 건가?”
“맞긴 하지만 너도 들었다시피 난 살육에 미친 파괴자다. 그런데도 나와 함께하겠다는 이유가 뭐지?”
그림자는 의문을 가지면 안 됐다.
자신이 가진 본질이 흔들리기에 질문은 금지였다.
그런데 이준이 자신을 당황스럽게 만든 후부터는 생각이 흔들렸다.
자신이 누군지 사실대로 말했음에도 같이하자는 인간은 난생처음이었으니까.
긴 기간 동안 여러 사람을 만나 왔지만 이준 같은 부류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멍청한 건지, 순수한 건지.
“난 우리 사부가 갔던 길을 가고 싶어. 그 길엔 압도적인 힘이 필요해. 지금의 난 사부에 비해 너무 약하거든.”
“그것과 내가 무슨 상관이냐.”
“넌 나와 달리 굉장히 강해 보이거든.”
“나와 함께 한 모든 인간의 끝은 좋지 못했다. 살의를 제어 못 하면 네게 남은 것은 오직 파멸뿐인데 괜찮나?”
그림자가 이준에게 넘어갔다.
자신과 똑같으면서도 다른 인간.
그를 한 번 지켜 보고 싶었다.
과연 천살성인 자신을 어떻게 제어하는지 말이다.
“응. 난 널 제어할 자신 있어.”
“내 앞에서 그런 자신감을 보인 인간은 네가 처음이다. 좋다. 함께하지. 너를 잡아먹는 게 아닌 도와주는 걸로 하지.”
“앞으로 잘 부탁해, 친구.”
이준이 그림자에게로 가서 손을 내밀었다.
그림자 또한 손을 내밀어 마주 잡았다.
“나야말로 잘 부탁하지 친구.”
그 말과 함께 그림자가 이준의 몸으로 빨려 들어갔다.
깜깜한 곳에 한 줄기 빛이 뿜어지면서 어둠이 걷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