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1화
4대 성지의 금역으로 온 흑염마조는 한 몬스터를 보곤 어이없어 했다.
[지금… 본좌 보고 이 허접한 놈을 사대종에 두게 하란 말이냐?]
녀석의 목소리가 착 가라앉았다.
무저갱 속에서 뚫고 나온 듯한 음성.
화륜의 신전 소속 플레임 오크를 소환했을 때의 목소리와 많이 닮아 있었다.
그 안에는 언뜻 살기까지 보였다.
“이 녀석이 말이야 잠재력이 엄청나 그래서 내가 계승의 꽃까지 먹였다니깐?”
이준은 테구르를 가리키며 말했다.
주인이 부르니 냉큼 달려온 녀석.
영문도 모른 채 파리처럼 손을 비비고 있었다.
태생이 레드급 중간 보스 몬스터로 올랐고 현재 등급은 레드급 일반 몬스터에 있었다.
레드급 몬스터인만큼 태도가 변할 법도 하지만 비굴한 건 예나 지금이나 똑같았다.
“헤헤.”
물론 자신보다 약한 몬스터 앞에선 권위를 보였으나 이 게이트에는 테구르보다 강한 몬스터가 많았다.
[본좌의 사대종은 고귀한 품격을 가져야 한다. 그런데 어찌 스케먼 같은 최하위 몬스터를 사대종에 둔단 말이냐!]
4대 성지의 금역이 열기로 뜨거워졌다.
흑염마조의 기운에 게이트 온도가 올라갔다.
그냥 열기도 참기 힘들 텐데 무려 흑염마조가 뿌리는 기운.
파랑이 빼면 모두가 버티기 힘들었다.
아니, 단 한 마리는 예외.
천중호수의 보스 몬스터인 만년금구 황금이만은 괜찮았다.
예전에도 이런 일이 꽤 많았는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무신님. 그간 강녕하셨어요?]
[막내 때문에 잘 지낼 일이 있겠느냐.]
[저 화염 까마귀 때문에요?]
[그러느니라.]
[이유는 사대종 때문이군요.]
[그것도 맞다.]
[떠들썩하겠군요.]
[마조가 지랄발광을 할 것 같구나.]
[어쩌면 막내 공자님의 말을 안 들을 수도 있겠어요.]
[허허. 그럴 수도….]
황금이는 무극자와 태평하게 이야기를 나눴다.
이준을 걱정하는 듯하면서도 자신들과는 전혀 상관없는 것처럼 말했다.
특히 황금이는 레드급 보스 몬스터.
흑염마조보다 아래급에 있는데도 옛 인연 때문인지 사신수인 녀석에게 화염 까마귀라고까지 했다.
이 말을 못 들었을 리 없는 흑염마조였다.
[느린 거북이 새끼는 빠져라!]
아니나 다를까.
흑염마조가 황금이에게 버럭 소리쳤다.
원래 높은 등급의 몬스터가 기세를 드러내면 등급이 낮은 몬스터는 공포에 빠지기 마련.
황금이는 전혀 개의치 않은 모습이었다.
조금 이상했다.
몬스터는 상하관계가 확실한데 흑염마조와 황금이는 예외인 듯 보였다.
황금이는 여전히 조곤조곤하게 말했다.
[서로 사이좋게 지내면 좋잖아. 막내 공자는 무신님의 제자야.]
[맹탕 같은 성격을 지닌 네놈이나 사이좋게 지내라. 그동안 오냐오냐 해 주니까 감히 나를 업신여기는 게 아니냐!]
흑염마조는 황금이와는 달리 화가 잔뜩 났다.
이준을 거의 적으로 대하는 모습을 취했다.
몬스터에게 사대종의 지위를 주는 건 사신수의 권위.
최하위 종족인 스케먼이 그 자리에 오른다면 어떻게 될까.
다른 삼신수가 비웃음을 흘릴 거다.
그따위 몬스터를 밑에 둘 정도로 힘을 잃었냐며 말이다.
이준의 말은 남쪽을 다스리는 지배자를 업신여긴 말.
흑염마조로선 절대 받아들일 수 없었다.
“저기 조야 내 말 좀 들어….”
[들을 가치도 없다.]
“아니, 설명을….”
[안 듣겠다지 않나.]
“정말 기막힌 아이디어라니깐?”
[한 번만 더 개소리를 지껄이면 작은 주인을 꼬치구이로 만들어 버리겠다!]
녀석이 으름장을 놓고 날아가 버렸다.
이준도 포기하지 않고 따라가려 했지만, 이내 멈춰 섰다.
이성적으로 대화를 할 수 있을 때 다시 이야기를 꺼내는 게 좋겠다 여겼다.
이준은 테구르를 보며 말했다.
“너한테는 정말 좋은 기회인데 아쉽네.”
“예? 무슨 말씀이십니까요?”
“너 불은 기깔나게 잘 다루잖아.”
“그럽습죠? 주인님께 자랑할 건 아니지만 대장장이 기술자로서 불은 필수입니다요. 제가 그 필수보다 훨씬 잘 다루지만요. 헤헤.”
테구르는 만능 일꾼이었다.
특히 녀석은 계승의 꽃을 소화하기 전에 가졌던 특성이 대장장이.
현재는 그 대장장이 특성이 진화한 상태였다.
[특성: 4대 대장장이, 마법공학 설계사, 권위 있는 건축가]
[4대 대장장이]
드워프 말론, 하이엘프 사란페, 정령 프네와 더불어 최고의 제련 기술을 가졌습니다. 그가 만든 모든 아티팩트는 기본적으로 마법 부여 효과가 있습니다. 특히 속성 중 불을 제일 잘 다룹니다.
‘여기에 흑염만 보탤 수 있으면 전 몬스터를 개사기 장비로 도배할 수 있을 거란 말이지.’
문제는 마조의 자존심이었다.
저 높은 콧대를 어떻게 꺾어야 할지, 고심해야 했다.
* * *
그 무렵.
인터넷엔 박혁진의 이름으로 가득 찼다.
[검룡 홀로 플레임 오크를 막아서다.]
[검룡의 앞에선 레드급 몬스터도 속수무책. 그의 끝은 어디에 있나.]
……
……
……
[차세대의 활약! 그 앞에는 검룡 박혁진이 있었다.]
[검룡의 새로운 이명 뇌룡, 그도 아니면 뇌왕? 뇌제? 앞으로의 행보에 달렸다.]
무수히 쏟아지는 기사에도 철혈검가의 내부는 침울했다.
검가의 후계자 박혁진이 의식불명의 상태.
몬스터와의 싸움에서 이미 한계를 넘어섰음에도 정신력으로 버틴 거다.
긴장이 풀린 것과 동시에 기절했고 여태껏 깨어나지 않았다.
TV나 인터넷에 나오는 기사를 보면 좋아할 텐데 기절해 있으니 볼 수가 없었다.
“좀 어떤가?”
침대 옆에 있는 박춘식이 의원에게 물었다.
치료 각성자는 고개를 저으며 똑같은 말만 반복했다.
“아직 차도가 없습니다.”
“혹, 이대로 깨어나지 못할 수도 있나?”
“그건 지켜봐야 알 것 같습니다.”
“허허.”
박춘식이 눈을 질끈 감았다.
전장에 섰을 때와는 다른 말투였다.
그때는 철혈검가의 각성자들도 있었고 그들이 박혁진을 따르게 하려고 냉정하게 행동했다.
하나 지금은 검제가 아닌 한 아이의 할아버지 입장에 있었다.
“그렇다고 너무 걱정할 건 없을 것 같습니다.”
“그건 또 무슨 소린가?”
“도련님의 내부에서 기가 활발히 움직이고 있습니다.”
“설마 자가치유를 하고 있단 말인가?”
“그런 것 같습니다.”
“내가 한 번… 억!”
박춘식이 박혁진의 손목을 잡으며 자신의 내기를 주입하는데 반탄력이 일어났다.
손목을 쥔 손이 따가웠다.
반탄력의 원인은 강력한 뇌기였다.
“이건!?”
“도련님의 몸을 보호하고 있는 건 강력한 뇌기입니다.”
“어찌 내가 이 정도의 큰 기운을 모를 수가 있었지?”
박춘식은 너무도 놀라 눈이 커진 상태였다.
손자가 강해진 건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손자의 몸에 방대할 정도로 많은 양의 뇌기는 알지 못했다.
이 정도의 양이라면 분명 자신의 기감에 진작 들키고 말았을 터.
겉으로 봐선 전혀 모르겠다.
“네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것이냐….”
박춘식이 박혁진을 보며 중얼거렸다.
그조차 느끼지 못했던 기운.
박혁진이 소화해낸 뇌기가 아닌, 뇌령석에 잠들어 있던 기운이었다.
그가 위험하니 목숨을 잃지 않게 뇌기로 치료한 것.
뇌신공은 뇌령석의 막대한 뇌기를 끌어다가 박혁진의 몸을 치료하고 있었던 거다.
대놓고 치료하는 것도 아니고 아주 은밀히 말이다.
그래서 박춘식이 뇌기의 기운을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시간이 흐르고 밤이 되었을 무렵.
“허어억!”
박혁진이 침상에서 상반신을 일으켰다.
옆에선 팔짱을 낀 채 눈을 감고 있던 박춘식이 손자가 일어나는 소리에 눈을 떴다.
“일어났느냐.”
“여긴…?”
“네 방이다.”
“제가… 기절했어요?”
“한참을 누워 있었어.”
“얼마나요?”
“일주일 되었다.”
“예에에!? 악!”
박혁진이 자리에서 펄쩍 뛰려는데 가슴이 쩌릿한 걸 느꼈다.
“아직 다 안 나았으니 무리하지 말거라.”
“…으음… 몬스터들은 어떻게 됐어요?”
“가문에서 모두 처리했다. 네가 보여 준 기백으로 인해 가문의 각성자들이 힘을 내었다. 아주 장해.”
박춘식의 칭찬에도 박혁진은 자신의 머리를 쥐어뜯었다.
“말도 안 돼….”
“도중에 몬스터가 우왕좌왕하고 힘이 약해져서 가문 측 피해는 얼마 되지 않았다. 그러니 자책하지 말거라.”
박춘식은 흐뭇하게 손자를 보았다.
자신이 부족해서 몬스터를 막지 못했다고 생각해 자책하는 걸로 여겼다.
하지만 박혁진은 전혀 다른 걸로 머리를 쥐어뜯고 있었다.
‘퀘스트 실패는 아니겠지? 아닐 거야. 기절했어도 몬스터를 많이 죽였잖아.’
그는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리고 허공에 손을 내리그으며 홀로그램을 띄웠다.
바로 자신의 상태를 확인하는 손자를 보며 자랑스러운 얼굴을 하는 박춘식.
손자가 일어났으니 이제 궁금한 점을 물어보려 했다.
“이 할애비가 물어보고 싶은 게 있다.”
“말씀하세요.”
“네가 가진 그 뇌기. 새로 배운 무공 때문에 생긴….”
박춘식은 질문을 끝맺지 못했다.
“악!”
갑자기 들려오는 박혁진의 비명 때문이었다.
“왜 그러느냐?”
“아, 안… 돼…!”
박혁진이 머리를 부여잡고 뒤로 넘어갔다.
굉장히 큰 충격으로 인해 기절해 버렸다.
“혁진아! 혁진아!”
박춘식은 급히 의원을 불러 손자의 상세를 살폈다.
그는 모를 거다.
박혁진이 무엇 때문에 충격을 받았는지.
기절하기 전에 봤던 메시지 창은 다름 아닌.
[특별 퀘스트 ‘뇌령석을 지닌 자’를 실패하셨습니다.]
퀘스트를 실패했다는 메시지였다.
박혁진은 오직 이 메시지만을 봤다.
다음 나온 메시지는 보지 못한 채 기절했다.
[‘천상의 동쪽’은 당신과 연락을 끊지 않았습니다.]
[다음 퀘스트가 주어질 때까지 기다리십시오.]
* * *
이준은 흑염마조를 계속 설득했다.
계속 뒤를 쫓아다니며 이유를 설명했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이준은 포기하지 않고 흑염마조를 귀찮게 했다.
[이… 빌어먹을 작은 주인 놈이!]
“누가 테구르를 지금 당장 사대종에 집어넣으래? 그냥 이유만 들어보라니까?”
[이유도 듣기 싫다 하지 않았느냐!]
“너도 구미가 당길 거라니까?”
이 일주일간 계속 똑같은 말이었다.
정말 진절머리가 날 정도.
끈기 하나는 기가 막혔다.
참는 데 한계에 봉착했는지 마조가 흑염을 태우며 경고를 했다.
[그래, 오늘 사생결단을 내고 말겠다. 네 말을 듣고도 시원찮으면 큰 주인과의 관계도 끊고 내 마음대로 살겠다.]
[막내 제자 놈 때문에 내 인맥이 끊기게 생겼구나.]
[무신님 저 화염 까마귀는 잊어버리세요. 제가 옆에 있잖아요.]
[황금이는 안 떠날 거지?]
[그럼요. 제집은 무신님 옆이랍니다.]
[황금이밖에 없구나.]
무극자와 황금이는 설득에 실패한다에 한 표를 던졌다.
그들의 반응에 오기가 생긴 이준이었다.
“좋아. 대신 내 말 끝까지 들어.”
[거북하지만 마지막이니깐 들어 보지.]
흑염마조가 오아시스 옆 나무에 앉자 이준은 바로 설명을 시작했다.
“내가 생각했을 때 사대종의 지위를 얻으면 네 흑염을 사용할 수 있어. 맞지?”
[맞다.]
“만약 그 흑염을 장비에 담을 수 있으면 어떻게 될까?”
[내 흑염을 장비에 담을 수 있을 것 같아? 무기가 버티지 못하고 녹는다.]
“그러니까 담을 수 있으면 어떻게 되냐고.”
흑염마조가 잠시 생각을 하다가 입을 열었다.
[마병이 탄생하지.]
“파멸겁과 비교하면 어때?”
[애초에 비교가 잘못되었다. 파멸겁은 인간이 만들었지만 큰 주인으로 인해 탄생한 마병. 인간이 만들 수 있는 무기가 아니야.]
“그렇담 파멸겁은 예외로 두고, 내 친구 혁진이 무기 봤지? 그거와 비교하면 어때?”
[흑염을 얼마나 담을 수 있냐에 따라서 비슷한 무기가 탄생을 하겠군. 설마 저 녀석이 내 흑염을 버틸 만한 무기를 만들 수 있단 말이냐?]
“못할 것도 없잖아? 사대종이 되면 능력이 전부 상승하는 거 아닌가?”
[능력과 대장장이 기술은 전혀 달라.]
흑염마조와 대화가 이어지고 있었다.
이대로 계속 의견을 교환한다면 마조를 설득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이걸 어째? 테구르 쟤 대장장이 기술이 넘사벽인데.”
[10대 대장장이라도 되나?]
“사부의 시대 때 대장장이가 얼마나 잘 만드는지는 모르지만, 특성에 4대 대장장이라고 되어 있네? 그것도 대장장이 장인으로 알려진 드워프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애로 말이야.”
이준이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점점 이야기가 자신의 페이스로 흘러가는 게 느껴졌다.
이제 녀석이 구미가 당길 말을 할 차례.
그 전에 혼을 쏙 빼놔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