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3화
퍼석!
파멸겁이 파랗게 물든 석상을 꿰뚫었다.
이준은 이 패턴을 계속 반복했다.
테노용의 석상을 공격하고 색깔이 변하면 상성에 맞게 속성을 주입 후 공격.
아주 쉬웠다.
물론 이준이니까 쉬워 보이지, 다른 각성자였다면 몇 번밖에 버티지 못하고 쓰러졌을 거다.
움직임에 한 치의 오차도 없어야지만
가능한 일.
이준은 이미 머릿속에 자신이 할 일을 입력한 상태라 가능했다.
그는 타고난 천재였으니까.
그저 운이 안 좋아서 혈족 계승의 한계에 부딪힌 것뿐이었다.
지금은 무공도 SSS급이니 날개를 단 격.
거칠 게 없었다.
지난한 작업이 이어졌다.
테노용의 석상을 파괴하고 또 파괴했다.
석상은 저절로 재생되었으니.
계속 똑같은 일을 반복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르는 그때, 드디어 변화가 일어났다.
테노용의 석상들이 각양각색의 색을 띄웠다.
여기서 제일 많이 보이는 색상은 빨간색.
“조야 파란 구슬!”
흑염마조가 파란색 구슬로 가서 앉은 후 물의 힘을 토해 냈다.
이준은 파멸겁에 물의 힘을 흡수하고 빨간색 석상을 향해 창기를 날렸다.
꽈광쾅쾅!
수십 가닥의 창기가 석상에 부딪혔다.
대부분의 석상에 금이 갔다.
빨간색 석상이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갈 때였다.
이준은 다시 한번 다량의 창기를 날렸다.
이 중 하나라도 부숴야 다음 패턴으로 넘어가기 때문.
첫 번째 스테이지를 끝내기 위해 빠르게 움직였다.
석상이 원래의 색으로 돌아가기 전 다량의 창기가 폭사했다.
신전을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폭음과 함께 세 개의 석상이 가루가 됐다.
‘이제 다음 패턴.’
여태까지 공격을 했으니 이제는 방어를 할 차례였다.
석상이 잘게 부서지면서 테노용이 모습을 드러냈다.
꾸아아악!
허공을 향해 우는 녀석들.
날개를 펄럭이면서 수십 마리의 테노용이 이준의 주위를 맴돌았다.
녀석들의 몸에 불이 일어났다.
테노용의 화염.
초고온의 온도를 자랑하는 화염으로 웬만한 물질은 견디기 힘들었다.
A급 장비도 그냥 녹여 버린다고 알려졌다.
이준은 중앙 제단에서 파멸겁을 꽉 쥔 채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온다!’
테노용이 공중을 선회하다가 그대로 하강했다.
몸에 화염을 지닌 채 날아오는 녀석들.
목표는 이준이 아니었다.
“조야. 계속 파란 구슬에 앉아 있어.”
[알았다.]
이준은 제일 빠르게 하강하는 녀석을 향해 달려갔다.
테노용들의 목표는 제단에 있는 구슬이었다.
이 구슬이 파괴되면 끝이다.
여기가 1인 게이트면서 위험한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구슬이 파괴되면 게이트에 갇히게 되는 것.
이름하여 게이트 표류였다.
바깥으로 나갈 수도 없었고 보스를 만나 처치할 수도 없는 처지.
게이트가 열리지 않는 이상 평생 이곳에 살아야 했다.
이런 걸 바로 게이트 표류라고 한다.
이준은 물의 힘을 바탕으로 무극창법의 마지막 초식을 꺼냈다.
진환.
환영을 만들어 몇 초 후에 똑같은 움직임을 하게 하는 기술.
환영의 공격이 가짜라면 위험하지 않을 테지만, 환영의 공격은 상대방에게 데미지를 입혔다.
그것도 100%로 말이다.
이준은 제단 외곽을 돌려 환영살을 펼쳤다.
하늘을 향해 연속 찌르기를 하자 무수히 많이 생기는 창영.
이 짓거리를 세 번이나 더 하고서야 멈췄다.
도로 중앙으로 온 이준이 파멸겁을 거뒀을 때, 물의 구술을 파괴하려는 테노용을 첫 번째 환영이 공격했다.
퍼벅퍽퍽!
예기가 가득 담긴 창영임에도 불구하고 구타를 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 소리를 시작으로 사방으로 창영이 일어나 테노용을 공격했다.
아주 장관.
제단 주위를 가득 감싼 창영이 테노용의 접근을 완전히 차단했다.
아니, 녀석들을 아예 덮쳐 갔다.
[너무 무리한 거 아닌가? 진환을 네 개씩이나 사용하면 내공이 텅 비었을 텐데.]
“환영살까지 사용해서 이미 탈진 직전이다.”
이준은 서 있었지만 다리가 부들거리고 있었다.
이번 패턴이 마지막.
여기서 끝내야지만 처음 패턴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만약 끝내지 못한다면 지난한 작업을 또 시작해야 한다.
문제는 처음의 패턴을 반복할 힘이 남아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진환의 공격력을 믿는 수밖에.”
첫 번째 스테이지를 클리어하기 위해 전 힘을 쏟아 냈다.
자신의 생각이 맞다면 진환의 공격으로 인해 테노용이 전부 죽을 터다.
꾸에에엑!
사방에서 테노용의 울음이 들렸다.
돼지 멱 따는 소리가 귀를 때리다가 점점 잦아들었다.
주위를 뒤덮었던 창영 또한 마찬가지로 사라졌다.
그 결과.
공중을 선회하며 제단의 속성 구슬을 노렸던 테노용은 전부 바닥에 떨어져 시체가 되었다.
“후. 끝났다.”
[첫 번째 스테이지를 클리어하셨습니다.]
[테노용의 가죽(A)이 바닥에 떨어졌습니다.]
[테노용의 불꽃 망토(A)가 바닥에 떨어졌습니다.]
[테노용의 송곳니(A)가 바닥에 떨어졌습니다.]
……
……
……
무수히 많은 아티팩트가 떨어졌다.
1인 게이트의 장점 중 하나가 바로 독식.
바닥에 반짝이는 아티팩트를 모두 혼자 차지할 수 있었다.
“애들 주면 되겠다.”
[작은 주인 놈아.]
“응?”
[너 호구냐?]
“아닌데?”
이준이 인상을 찌푸렸다.
흑염마조가 말한 호구란 단어가 굉장히 거슬렸다.
[그런데 왜 다른 녀석들 줄 생각을 하냐?]
“너한테도 또 설명을 해야 되냐? 후우우. 잘 들어. 천외천을 상대하려면 우리 애들도 강해져야 할 것 아니야. 나 혼자 무쌍 찍는다고 될 일이 아니잖아. 이게 다 미래에 대한 투자라고. 그러니까 내가 하는 짓은 호구가 아니란 거다. 알았냐?”
이준은 흑염마조에게 친절히 설명했다.
하나 녀석은 코웃음을 칠 뿐이었다.
[흥. 그게 바로 호구인 거다. 큰 주인은 작은 주인의 행동에 뭐라 안 해?]
“사부님은 저어언혀 아무 말 없으신데?”
[복 받은 놈이군. 옛날의 큰 주인이었다면 작은 주인 놈아의 행동에 경을 치고도 남았을 것인데.]
“지금은 아니시잖아?”
[잘 들어라. 본좌가 작은 주인 놈아의 생각을 완전히 뜯어고쳐 주겠다.]
무극자 사부의 잔소리가 없으니 흑염마조가 이를 대신했다.
그래도 사부는 융통성이라는 게 있었는데 녀석은 그런 게 전혀 없었다.
자신이 말한 건 무조건 반박하고 나섰다.
전혀 밀리지 않는 말솜씨.
영물이라고 해야 할지 사람이라고 해야 할지.
학자를 뺨치는 입놀림을 가지고 있었다.
끝으로 녀석의 말이 이어졌다.
[네가 주려는 아이들 부자 아니냐?]
“맞아.”
[부잔데 공짜로 주려고 했다는 게 작은 주인 놈아가 호구라는 소리다.]
“A급 아티팩트 주는 게 어때서? 신뢰의 관계로…”
[절대! 한 번 받기 시작하면 사람의 욕심 상 계속 받길 원한다. 처음에는 고마워할지언정 이게 반복되면 고맙긴커녕 안 준다고 서운해하는 이치도 모른단 말이야?]
흑염마조의 목소리는 호통에 가까웠다.
그러면서도 묘하게 설득력 있었다.
“네 말이 맞기도 하네.”
[맞기도 한 게 아니고 내 말이 옳은 거다. 무엇보다 돈이 많은 녀석들에게 귀한 아티팩트를 팔아 주면 고맙다고 당연히 값을 지불해야 하는 게 정상이지!]
“그러면 애들한테 팔까?”
[당연히 그래야지. 비싼 값에 팔아서 주머니를 두둑이 채워라. 남자가 주머니에 돈이 없으면 어깨만 축 늘어진다.]
무극자 사부와 똑같은 말을 하는 흑염마조였다.
“좋아. 애들한테 팔아야겠다.”
[그래. 이제는 호구 같은 생각은 버리고 돈 많은 녀석들에게 덤탱이를 씌울 생각을 해라.]
“덤탱이까지?”
[어차피 돈 많은데 작은 주인 놈아가 비싸게 판다고 타격받을 녀석들이 아니다.]
“우리 수는 집에 돈이 없는데.”
[그 애는 다른 걸로 채우게 하면 된다.]
“뭐로?”
[하. 하나하나 다 가르쳐야 되다니. 큰 주인은 이런 걸 안 가르치고 뭐 했지?]
흑염마조가 한숨을 푹푹 쉬었다.
머리 위에 앉아 있는 녀석이 날개로 푹푹 찔러 댔다.
[잘 들어라. 돈이 없는 애들은 그만한 값어치의 일을 시키면 된다. 가령 막노동이라든지, 작은 주인의 게이트에서의 관리라든지.]
“히야. 너 사람 좀 굴려 봤구나?”
[흥. 작은 주인 놈아가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다. 무림을 지배한 사람의 옆에 있으면 알아서 체득되는 일이다.]
하긴 흑염마조는 사람보다 똑똑한 영물이기도 했다.
무극자 사부의 옆에 한평생 있었다면 모르는 게 없을 터다.
오히려 자신이 흑염마조에게 배울 게 많았다.
“이 아티팩트는 애들한테 아주 비싸게 팔아먹는 걸로 하고 그 전에 이놈들을 흡수해 볼까?”
이준은 테노용을 바라보며 흐뭇해했다.
흑염마조의 먹이.
테노용의 몸에는 녀석이 흥미로워하는 주작의 기운이 있었다.
* * *
[흑염마조가 ‘성화의 반쪽’의 파편을 흡수합니다.]
[흑염마조가 ‘성화의 반쪽’의 파편을 흡수합니다.]
[흑염마조가 ‘성화의 반쪽’의 파편을 흡수합니다.]
[‘성화의 반쪽’이 자신의 영역을 침범한 4대 성지의 금역 주인에게 단단히 화가 났습니다.]
[‘성화의 반쪽’이 4대 성지의 금역에 쳐들어올 시간 - 2개월.]
[‘성화의 반쪽’이 쳐들어오기 전 당신이 먼저 공격을 해도 됩니다.]
“쳐들어올 시간이 안 줄어서 좋았는데 자극을 하니 줄어 버리네.”
몇 개월만 더 이대로 유지만 됐으면 좋으련만 아쉬웠다.
주작이 쳐들어오기 전 자신의 성장뿐만 아니라 흑염마조를 최대한 성장시킬 시간이 필요했다.
남은 시간은 단 2개월.
그때까지 최대한 마조를 키워야 했다.
그래야지만 4대 성지의 금역에 있는 몬스터들이 피해를 덜 입을 거니까.
상대는 블랙존에서도 최상급에 속한 녀석이다.
계승의 꽃을 먹였다지만 아직은 블랙급 몬스터를 상대하는 건 무리였다.
피해를 최소화하는 방법은 역시나 흑염마조의 성장뿐이었다.
“첫 번째 스테이지에서 성과가 있었던 게 참 다행이야.”
[흑염마조 성장도: 16%]
이곳에서 성장도가 10%나 상승했다.
주작의 파편이 좋긴 하나 보다.
고작 스테이지 하나를 깨고 이 정도의 성과를 얻은 건 엄청난 성장이었다.
“다음 스테이지는 이보다 더 많이 오를 거니까 성장도 50%는 금방 달성하겠구만.”
테노용을 깨니 제단 뒤편에 있는 문이 열렸다.
이준은 흑염마조를 데리고 다음 스테이지로 넘어갔다.
통로를 걸을 때마다 열기가 후끈 달아올랐다.
첫 번째 스테이지보다 높아진 온도.
되려 흑염마조는 좋아했다.
[뜨끈뜨끈하니 좋군. 온돌에 몸을 지지는 느낌이야.]
이준도 별다른 장애를 받지 않았다.
그의 특별한 신체가 열기를 다 막아 줬다.
평상시의 보폭대로 움직이니 얼마 가지 않아 두 번째 스테이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여긴 패턴이 없으니까 마음껏 싸워도 돼.”
[눈앞에 군침 도는 먹이가 많아서 좋군.]
이준과 흑염마조의 눈에 들어온 건 다름 아닌 몬스터 떼였다.
두 번째 스테이지는 살육전.
몬스터가 이기나 게이트를 클리어하러 온 각성자가 이기나.
이 구간에서 게이트가 클리어될지가 정해진다.
몬스터의 숫자가 무식하게 많았으니까.
저놈들을 다 죽이지 않으면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자신 있지?”
[지금 본좌보고 자신 있냐고 물은 것이냐?]
“중국에서처럼 흑염은 못 쓰잖아? 그러다가 또 잠만 잘라.”
[흥. 본좌의 일반 화염으로도 놈들을 다 불태울 수 있다.]
“자신감 넘치는데?”
[내기 할 테냐?]
“내가 이기면 뭘 줄 건데.”
[본좌의 영역을 주겠다.]
“너도 영역 있어? 없을 텐데?”
[있다. 지금은 안 가지고 있지만 곧 찾아올 것이다.]
“좋아. 딴말하기 없다.”
[본좌는 한 입가지고 두말하지 않는다.]
그 말을 끝으로 이준과 흑염마조가 몬스터 군단을 향해 달려들었다.
적의 숫자는 족히 오천 마리는 되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