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1화
펠리아스가 침을 꼴깍 삼켰다.
그 사나운 샥쿠를 잠재운 인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나한테 귀속 신청을 했으면서 내가 인간이었다는 것도 몰랐어?”
“난… 로티틸에게 귀속을 청한 줄 알았다.”
펠리아스의 반말에 로티틸이 이준에게 배꼽 인사를 했다.
“주인님. 죄송해요. 펠리아스 님이 아직 아프셔서 사리 분간을 못 하시는 것 같아요.”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 그런데 눈치는 없는 것 같네. 이곳에서 살아가려면 눈치가 빨라야 할 텐데 말이야.”
이준이 샥쿠와 테구르를 번갈아 보며 말했다.
펠리아스의 반말에 샥쿠와 테구르의 얼굴이 와락 구겨진 것.
몸에선 그를 위협하는 마력이 나오고 있었다.
저들의 충성심에 펠리아스가 식겁했다.
‘인간을 향한 충성심이 이렇게 강할 수가 있나?’
몬스터는 죽으면 죽었지, 인간 따위에게 충성을 하지 않는다.
그나마 인간과 친숙한 종족인 엘프나, 페어리, 드워프만이 잘 지냈다.
이것도 오랜 이야기.
자신들의 세계에 게이트란 게 열린 순간 인간과 몬스터는 서로 죽고 죽이는 관계였다.
아니면 자신의 종족이 목숨을 잃을 테니까.
하지만 이들은 어떤가.
인간에게 복종을 하고 있었다.
로티틸은 인간에게 잘 속아 넘어간다 치더라도.
스케먼은 비굴해서 복종을 한다 하더라도.
샤크로아 종족은 두 종족과는 달랐다.
절대 인간에게 복종 따위는 안 하는 존재들.
그런 사나운 샤크로아조차 인간에게 충성심을 보이고 있는 게 너무 놀라웠다.
“자, 본론으로 들어가자. 우리 쪽으로 귀속해 온 이유가 로티틸 때문이지?”
“맞다…요.”
펠리아스가 황급히 말을 높였다.
또다시 반말을 하니 창을 든 샤크로아가 이번엔 정말로 자신을 죽일 것 같았다.
“그런데 로티틸은 나한테 귀속한 상태인데 어쩌지?”
“전 인간에게 귀속하러 이곳에 온 게 아닙니다.”
“그래? 그러면 다시 돌아가. 보내 줄게.”
이준이 쿨하게 보내 준다고 말했다.
그러자 로티틸이 이준의 손을 붙잡았다.
“안 돼요, 주인님. 이대로 게이트 밖으로 나가면 펠리아스 님과 달의호수 페어리들이 죽을지도 몰라요.”
“쟤는 내가 싫다는데 억지로 붙잡아 둘 순 없잖아. 그리고 여길 나가면 왜 위험한데?”
“펠리아스 님이 제게 귀속을 청해서 페어리 왕에게 배신자로 찍혔나 봐요.”
“로티틸, 너 때문에 저놈이 죽게 생겼으니 네가 책임지겠다?”
“네… 한 번만 봐주시면 안 될까요? 제가 잘 설득해 볼게요.”
로티틸이 똘망똘망한 눈빛으로 애원했다.
어린아이의 눈빛을 발산하자 거절이라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좋아. 대신 빨리 선택해. 나 밖에 일이 생겨서 나가 봐야 해.”
이준이 한쪽 구석으로 가서 앉았다.
“감사합니다, 주인님!”
로티틸이 활짝 웃으며 고개를 연신 숙였다.
그 후 펠리아스를 향해 몸을 돌렸다.
“펠리아스 님. 제게 귀속하려고 이곳에 오셨다고 했죠?”
“맞다.”
“그러면 저랑 같이 주인님을 섬겨요.”
“인간을 어찌 믿고 섬긴다는 말이냐. 그럴 수 없다.”
“저분은 다른 인간과 달라요. 인간들이 저를 속일 때 저분만이 저를 도와주셨어요. 요정의 꽃밭이 인간들에게 위협을 받을 거라는 걸 알고 저희가 살 곳도 주셨어요. 그렇죠, 여러분?”
로티틸의 말에 요정의 꽃밭 소속 페어리들이 동조를 했다.
“저희가 절망에 빠져 있을 때 동족조차 도움을 주러 오지 않았습니다. 저분이 없었다면 저흰 본 드라고니에게 한 명씩 잡아먹혔을 거예요.”
“저희 주인님은 나쁜 사람이 아닙니다.”
“펠리아스 님도 주인님을 겪어 보시면 진심으로 따르게 되실 거예요.”
페어리의 말에 펠리아스가 당황해했다.
저들의 표정이 말해 주고 있었다.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하다고.
주인이란 인간에 대한 무한한 신뢰가 담겨 있었다.
로티틸을 향한 믿음과는 또 다른 마음이라고 할까.
믿기지 않았다.
인간이 어떻게 대해 줬길래, 저 무한한 신뢰가 가능한지.
페어리들이 페어리 왕을 섬길 때보다 믿음이 더 강하면 강했지 못하진 않았다.
“아니, 주인님을 믿지 않더라도 우선 여기에 있으세요. 게이트 밖으로 나갔다가 무슨 봉변을 당할지 알고요.”
“으음…”
펠리아스가 고민에 빠졌다.
자신 혼자라면 몰라도 달의 호수 페어리까지 있었다.
여길 나가 봤자 죽음뿐이고.
결정을 내려야 했다.
인간을 슬쩍 보자, 그는 생각할 시간을 많이 줄 것만 같지 않았다.
“사는 게 우선이겠지.”
“잘 생각하셨어요. 펠리아스 님도 주인님의 진면목을 보시면 지금 같은 의심은 싹 사라질 거예요. 주인님. 펠리아스 님이 여기에 있겠대요.”
펠리아스를 설득해서 기분이 좋아진 로티틸이 이준에게 달려갔다.
“들어 보니까 여길 나가면 갈 데도 없는 것 같던데.”
이준이 펠리아스의 아픈 구석을 찔렀다.
보금자리를 잃은 몬스터는 갈 장소는 하나.
인간들의 세상뿐이다.
인간 세상도 위험하긴 하나 살려면 인간을 죽이고 한 지역을 차지하는 수밖에 없었다.
물론 페어리는 인간 친화 종족이라 이런 일은 벌이고 싶지 않을 테지만, 어쩌랴 목숨이 날아갈 판인데.
“나간다 해도 다른 페어리에게 죽을 것 같고. 들으면서 궁금한 게 하나 생겼는데, 페어리는 심성이 착한 몬스터 아니야? 동족끼리도 싸우고 죽여?”
“아니에요! 동족끼리는 절대 죽이지 않아요.”
“여기 누워 있는 페어리 꼬라지를 보면 로티틸의 말이 틀린 것 같아서 그래.”
“저도 이 부분이 좀 의심스러워요. 페어리 왕은 아주 신중해요. 그런데 펠리아스 님이 제게 귀속을 한다고 바로 공격을 했다는 게 믿기지 않아요.”
“사실은 우리도 공격을 받으면서 이상함을 느꼈다. 내가 알던 숲과 낙원의 지배자가 아니었어.”
“무슨 말씀이세요?”
로티틸은 이준과 함께 펠리아스의 이야기를 들었다.
* * *
대구 로열바이오 제약 공장 안.
캡슐이 대량으로 생산되는 걸 보고 있는 한 남자가 흐뭇하게 웃고 있었다.
“저 약이 음지에서 전국으로 퍼질 거라 생각하니 짜릿해. 안 그래 오 비서?”
그는 로열바이오의 사장 주영재였다.
혈불의 명령으로 마기를 압축한 알약 제조를 대량으로 하고 있었던 그.
밖에는 아직 검증 단계로 알렸지만, 음지를 통해 조금씩 유통하고 있었다.
이제는 이 많은 알약을 한꺼번에 풀 계획까지 세워뒀다.
“혈불께서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는 얼마나 아찔했는지. 잠자코 있었던 게 신의 한 수였어.”
“이럴수록 더 방심하면 안 될 것 같습니다. 약의 유통 경로를 조금 더 최소화하는 게 어떨까요?”
“어느 세월에 이 많은 게 풀리는 걸 기다려?”
“여기 각성자는 멍청하지 않아요. 특히 신기학사라는 놈이 저희를 눈에 불을 켜며 찾아다니고 있어요.”
“그래서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려놓은 게 아니야.”
주영재는 자신만만했다.
힘이 아닌 머리를 굴려 한국의 각성자를 헷갈리게 만들었다.
레드존과 블루존 게이트의 페어리에게 자신들이 만든 마기 알약을 먹였다.
마기의 알약을 먹은 사람은 상위 마기를 지닌 마인의 꼭두각시가 된다.
이 알약을 몬스터에게도 실험한 것.
아주 성공적이었다.
알약을 먹은 몬스터는 차츰 본래의 모습을 잃어갔다.
순진하던 몬스터는 파괴적으로 변했으며 동족까지 공격했다.
그도 모자라 게이트 바깥으로 나가 날뛰기도 했으니.
실험은 아주 성공적이었다.
조금만 더 마기의 알약을 발전시키면 세상을 혼돈에 빠트릴 무기가 될 거라 생각했다.
꼭두각시가 된 몬스터는 현재 게이트로 돌아간 상태.
언제든 자신의 명령만 떨어지면 다시 게이트 밖으로 나와 인간을 살육할 것이다.
이 때문에 주영재는 자신만만해 하고 있었다.
“이 정도의 트릭은 신기학사가 금방 찾아낼 거예요.”
“오 비서는 사람이 신중해도 너무 신중해. 그래서 그 잘난 귀살대 양반들이 그리 죽은 건가?”
주영재의 말에 오 비서의 눈 옆 근육이 실룩였다.
근육이 움직이는 걸 보지 못한 주영재는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너무 신중한 것도 우리의 원대한 계획을 망가트릴 수도 있다는 말이지. 화끈하게 갈 때는 밀고 나가야 돼.”
주영재가 신이 나서 오 비서에게 충고하던 그때였다.
“사장님! 큰일 났습니다.”
로열바이오의 직원이 그를 향해 황급히 뛰어왔다.
“무슨 큰일?”
“알약의 유통 경로가 노출되었다 합니다.”
자신감이 충분하던 주영재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누구한테!?”
“신기지가의 비선들이 알약에 대해 파고 들었다 합니다.”
듣고 있던 오 비서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역시나 조심한다고 했는데 들켰군요.”
그녀는 주영재의 수족이자 지낭.
이번 일을 계획한 것도 모두 오 비서가 한 일이었다.
“지금 한가하게 말할 때야? 알약의 유통 경로를 신기지가에 들켰으면 우리를 찾는 건 금방이잖아.”
“그래도 다행이에요. 이 약이 풀리기 전에 알아서. 아니었다면 저희가 발뺌을 하지도 못했을 겁니다.”
“지금 우리가 아니라고 잡아떼자는 거야?”
“예. 약이 유출된 건 사장님과 저희는 몰랐던 거예요. 생산 직원이 소량의 알약을 빼돌려서 팔았다고 하면 됩니다.”
“오! 역시 오 비서. 좋은 계책이야.”
“그리고 만들어진 물량은 전면 폐기해야 해요.”
“이 많은 걸 말이야!?”
주영재가 탐욕스러운 표정으로 되물었다.
이 많은 물량이 시중에 풀리면 아수라장이 될 거다.
그 공은 전부 다 자신의 몫.
신마회에 커다란 공훈을 세울 것이다.
천주가 이 세계로 왔을 때, 어쩌면 큰 보상을 내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약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야 우리가 범인이 아니라고 잡아뗄 수 있어요.”
“그래도 그렇지. 이 많은 걸….”
또 한 명의 직원이 달려오며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장님. 그림자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신기지가의 가주가 진씨 가문의 정예와 함께 대구 시내로 진입했다는 보고입니다.”
“설마 벌써 우리를 조사하러 온 거야?”
“그런 것 같습니다.”
쾅!
주영재가 손으로 벽을 치면서 화를 내었다.
“젠장! 며칠만 더 늦게 올 것이지.”
그러는 사이, 오 비서가 직원들에게 명을 내렸다.
“여러분은 저 알약을 전부 소각하세요.”
“전부 말입니까?”
“네. 하나도 남김없이 다 폐기하세요.”
그녀의 명령에도 직원은 움직이지 않았다.
대신 주영재의 눈치를 살폈다.
“오 비서… 말대로 해.”
주영재는 눈물을 머금으며 알약 폐기에 동의했다.
그러자 직원이 움직였다.
공장에 있는 모든 직원을 동원해 알약 폐기에 힘썼다.
“너무 아쉬워하지 마세요. 알약은 또 만들면 되고, 이걸 폐기하면서 여기에 강제로 게이트를 열면 저희의 정체도 들키지 않아요. 저희는 게이트로 인한 피해자죠.”
“빌어먹을 또 음지에서 한세월을 보내야겠군.”
남아 있던 직원이 아직 다 전하지 못한 말을 이어갔다.
“그림자가 전해 달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뭔데?”
“자기가 신기학사를 유인할 테니 기회가 됐을 때 죽이자 합니다.”
“좋은 생각이에요. 게이트도 열리겠다 예상치 못한 일로 인해 죽었다고 하기에 딱 좋아요.”
안 그래도 알약을 전량 폐기한다는 말에 화가 머리끝까지 난 상태였는데.
오 비서와 그림자의 계획에 찬성한 주영재였다.
“그래. 녀석들에게 화를 풀어야겠어. 그림자의 제안에 동의한다고 해.”
“알겠습니다.”
* * *
이준은 펠리아스의 이야기를 묵묵히 듣고 있었다.
페어리 왕을 비롯한 숲과 낙원의 지배자가 평소와 달라졌다는 것.
처음에는 예민해진 상태라 치부했다.
하나 저들이 점점 이성을 잃어가고 난폭해졌다고 한다.
끝에는 결국 죽일 듯 공격하기까지.
“그러니까 평소와 달랐다는 말이지. 눈동자도 검은색으로 뒤덮였고?”
“그렇…습니다.”
로티틸의 옆에 있겠다고 해서 그런지.
펠리아스가 어색한 말투로 이준에게 말을 높였다.
“내가 아는 증상 같은데…”
천외천이 사용하는 마기를 강제로 주입한 부작용이었다.
처음에는 강한 힘에 도취하고.
다음에는 차츰 광기에 찬 행동을 한다.
그리고 마지막 단계에서는 살육밖에 보이지 않은 듯 모든 걸 파괴했다.
과거 천외천이 전 세계를 휩쓸었던 힘.
몬스터를 자신들의 꼭두각시로 만들어 세상을 파멸시킬 선봉에 세웠던 것.
이게 바로 천외천의 첫 번째 무서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