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7화
“내… 수하들은 어떻게 했지?”
“알면서 뭘 물어. 다 저승에 갔지.”
은오는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잘 이해되지 않았다.
사냥을 하려고 상대를 유인했는데, 되레 사냥을 당한 것이다.
사천당가의 정예인 은살대가 말이다.
‘조장들이 다 죽어? 나와 겨뤄도 손색없는 녀석들이?’
이곳에 있는 이들은 평대원뿐.
각 조를 이끄는 이들은 보이지 않았다.
정말 적의 말처럼 다 죽은 듯싶었다.
‘젠장! 느낌이 좋지 않더니만.’
딱 맞아 떨어졌다.
살수의 감은 언제나 옳았다.
이 감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목숨을 건졌던가.
그 불길함을 너무 늦게 느낀 게 화근이었다.
“눈알 굴리는 소리 다 들린다.”
이준이 씩 웃었다.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는데 은오는 그 미소가 꼭 염라대왕의 미소와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서 살아 나갈 순 없는 것 같군…’
은오가 체념을 했다.
아무도 몰래 조장들을 죽일 실력이라면…
독나찰이라 불린 당소미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누가 초절정으로 이루어진 살수 집단을 사냥할 수가 있나.
그냥 무력이라면 말이 얼추 되지만, 살수 집단에게 암살을 가한 실력이라면 실력은 안 봐도 뻔했다.
‘인주님과 같은 느낌을 받았을 때 소미님께 도망쳤어야 했다.’
그랬으면 조금이라도 살 가능성이 높았을 거다.
적어도 당소미의 곁에는 수많은 고수들이 포진 되어 있었으니까.
인주와 같이 넘어온 절대 고수들도 있었다.
그들이라면 눈앞의 괴물을 어느 정도 막아 줄 터.
그 사이 인주가 나타나면 이 괴물은 틀림없이 죽일 수 있었다.
애송이라고 무시한 게 패착이다.
‘지금 후회해봤자 소용없겠지. 하지만 이대로 그냥 갈 순 없다.’
여기로 적을 유인한 이유가 있었다.
이곳 해안가는 인주가 무림에서 넘어온 통로.
블랙존 게이트가 열렸던 곳이다.
현재는 닫혀 있지만 다시 열 게이트다.
아직은 균열을 열 힘이 부족한 상황.
아시아 학원 대항전을 당긴 이유도 닫힌 게이트를 다시 열기 위한 힘이 필요해서였다.
참가국 인재들을 제물로 받친다면 균열이 반드시 일어날 거라 여겼다.
그 전에 힘만 쌘 애송이를 여기서 죽인다면 어떻게 될까?
작은 균열이 배로 커질 것이다.
눈앞의 적은 그만한 힘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하나 되레 자신들이 당하게 생긴 것.
제물을 바치기는커녕 자신들이 죽게 생겼다.
어차피 죽을 목숨.
자신이 속한 단체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됐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그가 수하들을 향해 소리쳤다.
“은살대는 적을 추살하라!”
은오는 죽음을 각오했다.
따르는 대주가 결전을 다지니 은살대 또한 각자의 무기를 꺼냈다.
“명!”
은살대가 이준을 둘러쌌다.
은살대만의 진법을 펼쳤다.
살수인 만큼 강한 적과 부딪칠 확률이 높았다.
그때를 대비한 진법.
은살은영의 진법이었다.
그들의 목숨을 갈아 넣은 대신 상대를 꼭 죽이는 살수진이다.
은살대가 자리를 잡은 직후.
퍽퍽퍽!
땅에 검을 박아 넣었다.
검에선 회색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종래에는 검은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더니 주변을 잠식했다.
이준을 둘러싼 검은 암막.
은살은영의 시작이다.
깜깜한 어둠 속에서 움직이는 수 십 개의 기척들.
바람과 함께.
쉭!
날카로운 예기가 이준의 옷자락을 잘라버렸다.
그 소리를 시작으로 비가 내려쳤다.
칼날의 비가.
‘통한다!’
결전을 각오한 은오가 환호를 했다.
은살은영의 진법이 먹혔다.
아무 기대도 안하고 펼쳤던 진법.
그저, 이 거대한 충돌로 인해 게이트에 균열이 발생하기만을 빌었었는데.
‘어쩌면 살아갈 수 있을지 몰라.’
작은 기대가 생겼다.
그때였다.
그의 작은 기대를 와장창 부셔버리는.
비바람보다 더 큰 태풍이 몰아쳤다.
* * *
‘현대엔 없는 무공과 진법들이 많이 존재하네요.’
이준은 은살은영의 진법을 보며 감탄했다.
상대를 어둠 속에 가두는 진법이라니 놀라웠다.
그동안 무극자 사부로 인해 여러 무공과 진법에 대해서 들었지만, 은살은영의 진법은 꽤 색달랐다.
[무림에는 수만 종의 무공이 존재하느니라. 죽을 때까지 그 많은 무공을 못 보고 죽은 무림인이 한두명이 아니었지.]
‘사부님은 다 보셨어요?’
[지금 나한테 물어보는 것이냐.]
‘그럼 여기 또 누가 있어요?’
[끌끌. 그 수 만종의 무공이 이 사부의 머릿속에 있느니라. 내가 못 펼칠 무공은 이 세상에 없다.]
굉장히 광오한 말이었다.
멋있는 말이기도 했다.
저 자신감.
괴짜 같은 성격 말고 아주 본받을 만한 언행이었다.
‘좀 쩔었어요.’
[뭘 그리 또 감명받을꼬. 홀홀. 오느니라.]
무극자 사부가 친절히 공격 경로를 가르쳐주었다.
칭찬을 들어 기분이 좋은 모양이다.
가르쳐 달라고 안했는데 손수 가르쳐주는 걸 보니 말이다.
비바람이 몰아치면서 수백 개의 칼날이 쏟아졌다.
모두 검기.
피할 공간이 없었지만, 이준은 아주 작은 간극을 통해 검기를 피했다.
서걱서걱.
옷자락이 잘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어둠 속에서 검기를 피하는 것만으로도 기적.
이게 경험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준은 강한 공격을 날렸다.
쾅쾅!
두 손에 내공을 가득 실어 무극장법을 날렸다.
두 개의 커다란 폭음.
강력한 충격파로 인해 진법에 조금이라도 타격이 가할 줄 알았건만.
끄떡도 없었다.
[강한 힘으로 진법을 파괴하려면 진법을 펼친 놈들을 합한 것보다 더 강대한 힘이 필요하느니라. 네가 저 수백 명의 인원보다 많은 내공을 가지고 있느냐?]
수백 명의 내공을 합친다면 당연히 많긴 할 것이다.
그러니 무극장법으로도 진법이 끄떡없는 거다.
‘음… 없죠?’
[맞다. 너는 내공의 깊이가 깊고 짙을 뿐, 양은 많지 않다. 그렇다면 저들을 어떻게 상대하는 게 좋을 것 같으냐.]
이준은 칼날의 비를 피하면서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내공은 상대가 많고 자신은 내공의 깊이가 깊다.
진법이 유지가 되는 건 전적으로 저들의 내공이 서로 연결되었기 때문.
그렇다면 연결된 내공의 경로는 끊어 놓는다면?
‘무극장법보다는 무극군림보로 저들을 흔들어 놓으면 되겠네요.’
[그렇다. 네가 저들보다 내공이 더 많으면 무극장법으로 떼 몰살을 시킬 수 있겠지. 하나 너는 내공이 깊을 뿐, 양이 많지 않다. 해결 방법은 적들의 내기를 흩어지게 해 진법의 연결을 끊어 놓으면 쉽게 처리할 수 있느니라.]
이 어둠이 사라질 것이다.
이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극자 사부의 말을 이해하고 실행에 옮겼다.
이준이 혼원신공의 내공을 발에 담았다.
그가 생각한 건 무극군림보 중 패의 걸음.
2보 패는 4보인 멸과 더불어 가장 패도적인 걸음이었다.
그 어떠한 장애물도 찍어 누를 수 있는 패도.
그게 무극군림보 중 2보인 패였다.
쿠우우웅!
이준의 발이 땅에 닿은 순간!
“억!”
“큭!”
“무, 뭐야?”
거대한 지진이 일어났다.
땅이 갈렸다.
마치 세상에 종말이 올 것같이 이준이 서 있던 자리를 제외하곤 전부 쩍 갈라졌다.
은살은영의 진법을 펼치고 있는 은살대.
그들이 밟고 있는 대지가 망가지고 없어지니 제대로 내공을 운용할 수 없어졌다.
이준에게 날렸던 선명한 검기가 날아가다가 도중에 사라졌다.
내공이 제대로 담기지 않은 것.
다른 대원들도 똑같았다.
공격은 물론 자세를 잡는 것조차 어려웠다.
심지어 몸이 그냥 터진 수많은 대원들도 존재했다.
진법은 이미 해체가 됐다.
낭떠러지로 인해 이젠 생존을 위해 움직여야하는 상황.
“여기서 벗어나라!”
은오가 은살대를 향해 명령을 내렸지만.
“사, 살려줘!”
“아아악!”
갈라진 사이로 떨어지는 은살대가 한두 명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걸로 끝나지 않았다.
그들에게 덮친 건 자연재해만이 아니다.
바로 이준!
자연 재해보다 더 큰 재앙이 그들을 덮쳤다.
퍼억!
은오는 은살대를 향해 명령을 내리고 이곳을 탈출하려는데.
무언가가 허공을 가르고 날아왔다.
엄청난 속도로 날아온 물체를 인지하지 못한 결과.
“커헉!”
가슴이 꿰뚫리고 말았다.
그의 앞에 이준이 나타나 플라스크에 든 붉은 액체를 먹였다.
“무, 무슨 짓이냐.”
마지막으로 못 움직이게 점혈을 했다.
이준이 죽지 않게 치료약을 먹였다.
그는 이곳의 우두머리.
그가 죽는다면 천외천에 대한 고급 정보를 얻지 못할 것이다.
그 불상사를 막기 위한 수단이었다.
“읍읍!”
“여기서 네 수하들이 죽는 걸 가만히 지켜보고 있어. 도망치고 싶어도 못가. 이게 보통이 아니거든.”
이준은 은오의 가슴을 꿰뚫은 파멸겁을 툭툭 치며 말했다.
그리고 사라졌다.
“으으으읍!”
은오는 안 돼, 라고 외치고 싶었으나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저 보고만 있어야 했다.
이준이 다시 나타난 곳은 절벽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탈출하는 수하들이 있는 곳이었다.
그들은 제대로 된 저항도 하지 못한 채 목숨을 잃어야만 했다.
머리가 터지는 수하가 있는 반면, 두 다리가 잘려 낭떠러지에 떨어지는 이들도 있었다.
저항은 무의미.
은오가 보기엔 양떼 사이에 한 마리 늑대가 나타난 것과 같았다.
학살에 가까운 장면이었다.
‘내, 내가 너무 안 일하게… 생각했다…’
상대는 힘만 쌘 애송이가 아니었던 것.
그는 애송이의 탈을 쓴 노회한 고수였다.
수하들의 학살을 더는 못 보겠던 은오는 눈을 질끈 감아야만 했다.
* * *
모든 상황이 끝났다.
전멸.
은오 혼자만 남았다.
이준이 일을 끝내놓고 은오에게 다가왔다.
팟팟!
은오의 몸을 손가락으로 두드리자.
“너, 넌! 대체 누구냐!?”
그가 놀라서 이준에게 물었다.
“이준. 사람들은 날 창왕이라고 부르더라고.”
“말도 안 되는!”
창왕.
말도 안됐다.
이런 괴물 같은 자를 고작 왕의 칭호로 부른다고?
이 세계의 각성자가 무공 실력도 낮고 보는 눈이 없다는 건 알았지만 이 정도 일지는 몰랐다.
이자는 왕의 칭호가 아닌 제의 칭호로 불려도 손색이 없었다.
손속으로 보아 사파와 마교 쪽 성향에 가까운 자.
이 자를 보고 있자니 천주와 비슷하자는 생각이 들었다.
“내 이명을 알려줬으니까. 이제 내가 질문해도 돼지? 너희 뭘 꾸미고 있는 거야?”
이준의 말에 은오의 눈이 커졌다.
자신들이 꾸미고 있는 일.
아무도 모르는 일을 그는 자신들의 일을 아는 듯 물었다.
그의 질문에 은오가 입을 꾹 닫았다.
“……”
“네가 말 안 해도 입을 열 방법은 있어. 좋게 말하는 게 좋을 텐데.”
“너에게 해줄 말 따윈 없다. 죽여라.”
은오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의 반응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처럼 이준이 미소를 지으며 웃었다.
[실행하거라.]
‘예.’
처음해보는 수법이다.
상대의 입을 열게 하기 위한 방법으로 무극자 사부가 가르쳐 준 것은 바로 혈을 터트리는 것.
야만적이게 손톱을 뽑던가, 눈알을 파던가.
그런 짓거리는 하지 말라고 했다.
상대의 몸속으로 내기를 흘려 혈을 터트리면 알아서 술술 분다나 뭐라나.
사부의 말이기에 믿었다.
새로운 방식을 배운다는 생각에 즐겁기도 했다.
이준은 잔뜩 기대한 얼굴로 은오의 팔목을 잡았다.
“내 사부가 이 방법이 안통하면 만들다간 만 최강의 무공을 주기로 했거든? 그러니까 제발 말하지 말고 버텼으면 좋겠어. 시작할 테니까 참아봐.”
이준은 아주 친절히.
은오에게 시작한다는 말까지 하고 그의 몸속으로 내기를 보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