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6화
이준은 경기장을 나왔다.
복면인을 쫓아 온 곳은 청도의 번화가였다.
높은 건물에 붙여진 전광판에는 한국 대표 팀과 일본 대표 팀이 싸우고 있었다.
‘잘하고 있네.’
남선호가 미즈시마 요시오라를 상대로 방어를 잘 하고 있자 신경을 껐다.
지금 이준의 목표는 복면인.
그의 뒤에 숨어 있는 천외천을 찾는 일이 중요했다.
팟-
전광판에서 시선을 거두고 복면인을 쫓아갔다.
시내 곳곳을 누비는 상대.
건물 입구로 들어갔다가 뒷문으로 나가는 걸 반복했다.
[저놈이 왜 저러는지 아느냐.]
‘잘 알죠.’
[말해 보거라.]
‘은신처를 저한테 안 들키려고 저러는 거잖아요.’
[맞다.]
‘제가 이래 뵈도 무협 소설 많이 읽었습니다.’
서당 개 삼년이면 풍월을 읊는다, 라는 말이 있다.
무공을 사용하는 각성자가 나오고 나서는 무협 소설이 불티나게 팔렸다.
무협 소설은 더 이상 그냥 소설이 아니었다.
교과서나 다름없는 책.
무공의 종류와 특징.
무림사에 대한 내용은 무협 소설만큼 방대한 자료가 없었다.
오죽하면 유명한 무협 소설을 토대로 신 무림사를 만들었을까.
그만큼 현대 사회에서 무협 소설은 필수였다.
그래서 이준도 많이 읽었다.
지식을 쌓는 건 덤.
삼재심법을 익혔던 전생에는 무협 소설을 보고 대리 만족을 했다.
소설에 나와 있는 주인공은 무능력하지 않았다.
둔재라도 결국에는 천재가 되는 내용.
망나니지만 원래부터 천재.
고난과 역경을 겪고 나중에는 홀로 우뚝 서는 주인공이 부러웠다.
둔재도 노력 여하에 따라 고수가 되는 과정이.
그 때문에 무협 소설에 푹 빠져 산 적이 있었다.
물론 어떨 때는 회의감과 절망감이 들기도 했지만, 이준에겐 무협 소설은 숨 쉴 수 있는 유일한 탈출구였다.
허수만큼의 무협광은 아니나 소설을 많이 읽었던 이준.
살수들이 행동하는 습관과 버릇을 잘 알고 있었다.
책에서 수백, 수천 번 본 내용이니까.
복면인이 왜 귀찮게 여기저기를 왔다 가는지도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준은 하나를 알고 둘은 몰랐다.
아니, 무협 소설과 천외천이 사는 실제 무림의 차이를 알지 못했다.
복면인은 천외천.
하늘 위의 하늘이라는 존재들이다.
그냥 일반적인 살수라면 이준이 생각했던 것처럼 행동하는 게 다였겠지만.
천외천은 달랐다.
[하지만 네가 한 가지 간과하고 있는 사실이 있느니라.]
‘그게 뭔데요?’
[여긴 한국이 아니라 중국이라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적의 영역이라는 말이지.]
‘아, 어쩐지.’
이준은 걸음을 멈췄다.
주변으로 고개를 돌리며 기감을 확산시켰다.
자신이 지나왔던 곳에서부터 아주 미세한 기운들이 나타나 자리를 지키고 있는 듯 했다.
일반 살수가 아닌, 천외천의 사천당가.
오합지졸이 아니라는 말이었다.
‘저 포위된 거예요?’
[적이 전선을 구축하기 전이니 완전히 포위됐다고 할 순 없지.]
이준은 복면인이 은거지를 감추기 위해 분주히 움직인다고만 생각했다.
무협 소설에서도 많이 나온 내용 아닌가.
때문에 여유롭게 행동했다.
주변을 경계하고 움직였으나 느슨하게 했으며 천외천을 얕보았다.
저들은 어린 나이 때부터 험난한 무림을 겪은 자들.
매일 같이 도산검림에서 살았던 이 세계인들이다.
아무리 회귀했다 해도 이준과는 경험치가 달랐다.
그는 이 사실을 간과한 것이다.
또한 S급에 올라섰다는 자신감도 한몫했다.
AA급과는 전혀 다른 세계.
지금의 자신이라면 어렵게 이긴 혈불도 쉽게 제압할 수 있을 거라 여겼다.
이 자신감으로 인해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하지만 실수는 실수일 뿐.
그렇다고 걱정할 일은 아니었다.
무극자 사부도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무협지는 무림과 많이 유사하나 유의할 건 경험의 차이니라. 이것만 인지하고 행동하면 네가 위험해질 일은 없을 것이다.]
‘명심할게요.’
[그러면 이제 제자가 해야 할 행동은 무엇이냐?]
‘정면 돌파 아니면 후퇴? 둘 중 하나지 않을까요?’
[그 답이 최선이냐 제자야?]
사부가 지그시 물었다.
자신의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은 모양이다.
조금 더 생각을 해 보았지만 다른 대답은 떠오르지 않았다.
‘다른 대답이 있어…요?’
[가아아아알!]
무극자 사부의 노성이 터져 나왔다.
그의 성난 목소리에 이준이 눈을 질끈 감았다.
[고금제일인인 내 제자나 되는 녀석이 그 따위 대답밖에 못 한단 말이냐!]
‘악! 그, 그만… 이러다 적들에게 포위당하겠어요.’
[천라지망을 펼치라면 하라지. 내 제자가 사천당가 따위가 펼치는 포위망을 못 뚫을 리 없지 않느냐! 아니 그러느냐?]
‘사, 사부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흥.]
무극자 사부의 호통이 멈췄다.
그제야 골이 잠잠해졌다.
이준은 눈치를 보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뚫을까요?’
[아니.]
‘그러면요?’
[천라지망의 목적은 목표를 사냥하는 것. 반대로 네가 저놈들을 사냥하거라.]
* * *
푹-!
“커헉! 네놈이 어떻…”
남자가 믿기지 않는다는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는 분명 이준을 잘 감시했다.
한눈을 팔지도 않아 계획대로 됐다.
이제 해안가로 몰기만 하면 끝.
그 순간 적이 갑자기 사라졌다.
그리고 나타난 곳은 자신의 등 뒤.
적의 손이 자신의 가슴을 꿰뚫고 있었다.
털썩.
“한 명은 처리했고.”
이준은 남자가 가진 폰을 박살 냈다.
그는 재차 움직였다.
다음 목표에게 향할 동안 무극자 사부는 끊임없이 말을 하고 있었다.
[포위망의 핵심은 한 축을 담당하는 명령권자에게 있느니라. 놈들만 죽여 놓으면 모든 체계가 무너져 그저 그런 망으로 변한다.]
무극자 사부가 말하는 사이.
연락체계를 담당하는 명령권자를 발견했다.
딱 봐도 조장 격.
폰으로 전화를 하고 있었다.
“다른 조장에게 전화를 해 보겠습니다.”
남자가 전화를 끊고 동료에게 전화를 걸려고 했지만.
으드득.
이준이 남자의 목을 잡고 돌려 버렸다.
남자가 목이 꺾이며 즉사했다.
그렇게 이준의 사냥은 계속 됐다.
맨 뒤에서 포위망을 좁혀 오는 이들부터 차근차근.
숫자를 줄여 나갔다.
지난한 작업이었다.
한 번에 강력한 힘으로 쓸어버리는 게 아닌.
한 명 한 명 찾아가서 죽여야만 했다.
인내심을 요하는 작업이다.
‘사부님. 이 정도는 되지 않았어요?’
[아직 멀었느니라.]
‘지루한데….’
이준이 슬쩍 말을 흐렸다.
또 호통이 들려올 거라고 여겼지만, 괜한 착각이었다.
대신 무극자 사부가 재밌는 이야기를 해줬다.
[옛날 한 아해가 있었다. 그 녀석은 이와 같은 일을 수십, 수백 번을 했느니라.]
‘그래서요?’
[어떻게 됐을 것 같으냐.]
‘무림공적으로 몰렸어요?’
[아니다.]
‘그러면요?’
[훗날 암천제란 칭호를 얻었더구나.]
‘지금 제가 하는 작업을 해서요?’
[이 일이 쉬운 줄 아느냐? 한꺼번에 적을 쓸어버리는 것보다 어려운 일이 들키지 않고 적을 죽여 가는 것이니라.]
‘듣고 보니 그렇네요.’
이준은 생각을 고쳐 먹었다.
지금과 같은 작업을 해서 제의 칭호를 얻은 무림인이 있다 하지 않나.
그렇다는 건 자신이 대단한 일을 하고 있다는 말과 같았다.
무극자의 말을 들은 이준은 투덜대지 않고 적의 숫자를 줄여갔다.
한 명씩 죽이고 또 죽인 결과.
펑!
하늘에서 폭죽이 터졌다.
[일행을 불러 모으고 있는 신호다.]
드디어 지난한 작업이 끝났다.
손에는 피가 흥건했다.
혈향이 짙게 배어 있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천외천은 악마.
악마를 잡기 위해선 똑같은 악마가 되어야 한다.
‘이제 어떻게 하면 될까요?’
[사냥은 사냥감을 모두 죽였을 때나 끝나는 것이니라.]
저들을 다 죽이라는 말이었다.
이준이 고개를 끄덕이곤 해안가를 향해 움직였다.
* * *
당소미의 심복 은오는 웃고 있었다.
처음 상대를 마주했을 때는 전율스러운 공포를 느꼈다.
하나 그의 행동을 보고 알았다.
힘만 쌘 애송이.
마치 어린 꼬맹이한테 날카로운 명검을 쥐어 준 것만 같았다.
‘저런 놈들은 무림에서도 무궁무진하게 많았어.’
하지만 어떻게 됐나.
모두 불귀의 객이 되었다.
전부 말이다.
무림에선 힘만 세다고 다 되는 게 아니었다.
뒷배경은 필수, 여기에 당연히 강한 무공을 가져야 했고 지혜가 필요했다.
정확히는 경험.
강한 적을 상대로 어떻게 살아 나갈 것인지.
지혜가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차이는 굉장히 컸다.
은오는 상대방의 행동에 자신감이 생겼다.
무공은 대단하나 가벼운 움직임.
자신이 죽였던 대단한 후기지수와 고수들도 딱 저랬으니까.
‘저놈을 해치우고 당소미님이 시킨 일을 해야 해.’
전륜살상진을 펼친 아이를 알아보는 일.
일을 다 끝내면 그 아이를 죽여야 했다.
전륜살상진을 가졌다는 것 자체만으로 천외천을 위험으로 빠트릴 수 있을 터.
1%의 위험성이라도 제거하는 게 은오의 일이었다.
그가 움직였다.
준비된 곳으로 상대를 끌고 가면 성공이다.
팟-
그가 경공을 펼치며 수하들에게 연락을 넣었다.
무림이었다면 여러 가지 수신호와 폭죽으로 위치를 알리든지, 명령을 내렸겠지만 여긴 신문명이 있는 세계.
스마트폰으로 수하에게 연락을 했다.
“사냥을 시작한다.”
-예.
전화를 끊은 은오가 이젠 대놓고 건물 사이를 넘나들었다.
그가 향한 곳은 청도의 해안가였다.
이곳에서 적을 죽일 생각이었다.
해안가에 도착한 은오.
아시아 학원 대항전이 열리고 있어서 그런지 사람들은 시내에 몰려 해안가에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그런데.
“내 뒤를 계속 밟고 있었는데?”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잘 따라오고 있었는데, 적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은오는 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나다.”
-안 그래도 연락 드리려던 참이었습니다.
“적이 사라진 건가?”
-맞습니다.”
“조금 전까지 느껴졌던 기척이 사라졌다.”
-다른 조장들에게 한 번 연락해 보겠습니다.
“나도 해 보지.”
뚝.
은오가 조장들에게 전화를 돌렸다.
그들이 하는 말은 같았다.
적의 기척이 사라졌다는 것.
은오의 반응과 똑같았다.
상대의 움직임이 감쪽같이 증발했다는 소리였다.
땅으로 꺼졌나 하늘로 솟았나.
원래부터 없었던 사람처럼 사라졌다.
“어떻게 된 거지?”
은호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잔잔하고 고요한 바다소리가 왠지 불쾌하게 들렸다.
“느낌이 좋지 않아.”
사냥을 시작했는데 되레 안 좋은 느낌을 받았다.
기감을 넓혔음에도 별다른 징조가 없었다.
만에 하나라도 기습을 당했다면 공간이 어그러지는 게 정상.
이런 낌새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따르릉-
“무슨 일이냐?”
-3조장이 연락을 받지 않습니다.
“그건 또 무슨 소리냐.”
-다른 조장들도 1조장과 연락이 안 된다 합니다.
“내가 마지막으로 통화한 사람이 1조장인데?”
-전 방금 연락을 했는데 안 받아서 바로 대주님께 연락드린 겁니다.
“내가 해 보지.”
은오가 전화를 끊고 1조장에게 연락했다.
수신음만 들리고 상대가 받지 않았다.
어떻게 된 걸까.
한 번도 연락이 끊긴 적이 없던 1조장이었는데, 소식이 없자 불안해졌다.
시간은 점점 흘렀다.
생각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불안감은 높아만 갔다.
“안되겠다. 이곳으로 전원 모이게 해야겠어.”
지울 수 없는 불안감 때문인지 은오는 비살대를 불렀다.
일일이 전화를 돌려 모이게 하는 것보다 옛날 방식이 더 빨랐다.
품에서 폭죽을 꺼내 하늘 위로 쐈다.
펑!
비살대가 붉은 빛을 본다면 이곳으로 다 모일 거다.
은오는 비살대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폭죽이 터진 지 1분이 지나자 해안가로 사람이 몰려왔다.
비살대의 대원들.
하나 둘씩 모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은오는 그들을 보며 인상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너희들뿐이냐.”
“조장은 안 왔습니까?”
“너희가 먼저 도착했다.”
“저희 3조 조장도 아직 도착 안했습니다.”
“그 양반들이 대주의 신호를 못 볼 리 없을 텐…”
푸확!
비살대의 대원 중 한 명이 말을 하다 말고 쓰러졌다.
몸이 반으로 잘려 죽은 것이다.
갑작스러운 동료의 죽음.
은오를 포함한 비살대의 몸이 잔뜩 굳었다.
“누구냐?”
“누구긴 나지.”
적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은오는 반사적으로 몸을 틀어 암기를 날렸다.
허공을 가르는 구체가 펑하고 터지더니 수십 개의 침이 쏘아졌다.
이화정.
사천당가의 암기로 현대에 있는 이화정과는 위력 자체가 달랐다.
열 배는 더 강력한 위력이었다.
따당따당-!
하나 무림의 이화정은 목표물을 벌집으로 만들지 못하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투명한 막에 가로 막혀 힘을 잃었다.
“너, 너는?”
은오의 눈이 앞으로 튀어나올 만큼 커졌다.
비살대를 죽인 사람은 자신들이 노리고 있던 인물이었으니까.
“사라졌던 내가 나타니깐 놀랍나 봐?”
이준이 한쪽 입꼬리를 비틀고 있었다.
그보다 은오의 눈에 들어온 건 그의 손.
피로 흥건하게 물든 손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