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0화
사사키 유우는 오늘 한국 대표팀을 확실하게 짓밟아 줄 생각으로 비무에 나섰다.
그녀는 굉장히 오만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외모에 특히 자신이 있었고, 항상 본인이 제일 돋보이기를 바랐다.
그래서 자신보다 조금이라도 눈에 띄는 사람은 용납하지 못했다.
그런데 오늘 비무 상대로 나온 박은비라는 여자애가 딱 그녀가 싫어하는 타입이었다. 거기다가.
‘하찮은 조센징 주제에 나를 무시해?’
다른 사람의 시선을 가로챈 것으로도 모자라 자신을 무시하기까지.
저 박은비란 여자애가 다시는 나대지 못하게 짓밟아 주기로 결심했다.
한편, 박은비는 허공을 격하며 공격해 오는 채찍을 똑바로 봤다.
‘지유의 연검처럼 공격 루트가 까다로워.’
하지만 걱정하지 않았다.
한지유와의 연습 대련 때문인지.
너무나도 익숙한 공격이었다.
아니, 한지유의 공격만큼 날카롭지 않았고 느렸다.
공격 경로가 눈에 훤히 들어왔다.
‘옛날의 나였다면 못 막았을 테지만 지금은 아니야. 막을 수 있어.’
그녀가 단전에서 내공을 뽑았다.
전보다 세상이 느려졌다.
이 정도의 속도면 반격을 준비하기에 시간은 충분했다.
[전륜마멸진을 펼쳤습니다.]
[모든 능력치가 두 배로 상승합니다.]
[살상력이 100% 증가했습니다.]
[어떤 속성을 선택하시겠습니까?]
‘내가 펼칠 속성을 선택하라고 했지?’
전륜마멸진을 배웠으나, 익힌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아직도 익숙하지 않을 뿐더러 혼자 펼치는 진법이라 그런지.
더욱 어색한 면이 있었다.
‘빙 속성.’
[주 속성을 ‘빙’으로 선택하셨습니다.]
[전륜마멸진의 속성이 빙 속성으로 전환됩니다.]
쩌억-
쩌어억!
박은비의 발밑에서부터 시작된 한기가 비무대 바닥을 타고 영역을 넓혀 갔다.
극한의 냉기.
한기에 의해 대기조차 차가워졌다.
그러나 여기서 끝날 거면 굳이 고급 인력인 무극자가 손을 대지 않았을 터.
전륜마멸진의 효과는 더 있었다.
[부 속성을 선택하십시오.]
‘사독절편은 정공도 아니고, 마공도 아니야. 사파인들이 익히는 사공! 속성으로 따지면 독에 가깝지만 주 속성은 풍이야.’
전륜마멸진을 가르쳐 주면서 이준이 말하길 속성의 관계도를 잘 이해하라고 했다.
상대의 속성만 파악하면 게임은 끝.
왜 전륜마멸진이 여타 진과는 비교가 불가하다 했는지 그때 알게 될 거라고 했다.
‘바람은 불에 약하니 부 속성은 화로 해야겠어.’
[부 속성을 ‘화’로 선택하셨습니다.]
[전륜마멸진의 효과가 발동됩니다.]
[빙 속성의 공격력 +250%]
[화 속성 저항력 -100%]
[화 속성 공격력 +100%]
[수 속성 저항력 - 50%]
속성 공격력을 대폭 상향시키는 전륜마멸진.
이것만 보면 완전 공격에 치우친 진법이라 할 수 있지만, 전륜마멸진을 효과적으로 사용하지 못할 때나 하는 소리다.
전륜마멸진의 가장 큰 장점은 따로 있었다.
적과 싸우면서 언제든 속성을 바꿀 수 있는 것.
상대가 땅의 속성을 가지고 있으면 바람으로.
바람 속성을 가지고 있으면 불로.
불 속성을 가졌다면 물로.
전륜마멸진에 익숙해지면 언제든 바꾸는 게 가능했다.
상대의 약점에 알맞게 바꾸는 속성진.
공격력은 극대화하되, 방어력 또한 그에 못지않게 올리는 진법.
이게 전륜마멸진의 가장 큰 장점이었다.
모든 준비가 끝났다.
이제 상대를 발라 버리는 일만 남았다.
어느새 얼굴 근처까지 다가온 채찍.
박은비가 몸을 비틀었다.
채찍이 아슬아슬하게 옆을 스쳐 지나가자 그녀의 오른손이 번개같이 움직였다.
촥!
박은비의 손에 채찍이 붙잡혔다.
“……!”
채찍에는 날카로운 가시들이 돋아나 있어 함부로 잡았다간 각성자라 해도 치명적인 상처를 입을 터였다.
하나 박은비는 아무렇지 않았다.
손을 내공으로 보호한 상태.
고작 이 따위 채찍에 상처를 받으려고 이준의 곁에서 훈련한 게 아니다.
오히려 채찍을 붙잡은 오른손에 힘을 꽉 주었다.
쩌어억.
냉기가 서서히 채찍을 얼려 버리기 시작했다.
“어떻게…”
사사키 유우의 눈동자가 커졌다.
너무 놀란 나머지 다음 공격을 잊은 그녀.
방금 전까지 기세등등했던 그녀가 한 번의 공격으로 넋이 나가 버렸다.
이를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일본 대표팀의 동료가 크게 외쳤다.
“사사키 유우! 정신 차려! 멀뚱히 서서 뭐 하는 거야?”
뒤늦게 정신을 차린 그녀가 채찍을 회수하려 했지만.
쩌저적!
이미 채찍은 얼음덩이로 거의 다 변해 있었다.
그녀가 잡고 있는 구간까지도 한기로 인해 얼어붙고 있는 상황.
채찍을 놓지 않으면 손까지 얼음덩이로 변하고 말 것이다.
그녀는 황급히 채찍을 놓아 버렸다.
얼음덩이로 변한 채찍을 상대방이 가져가 버렸다.
제대로 된 합을 나눠 보지도 못한 채 무기까지 잃어버린 것.
일본 대표팀이자, 유망주 순위 2위에 있던 사사키 유우로선 엄청난 수치였다.
검화나 독화, 못해도 빙화면 체면이 구긴 걸로 끝나겠지만.
상대는 무명의 각성자.
일본에선 박은비에 대해 알려진 게 없었다.
그래서 더 수치스러웠다.
그때 앞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설마 비무를 포기한 건 아니죠?”
박은비의 입가에 미소가 맺혀 있었다.
퍽-
사사키 유우가 놓친 채찍을 들곤 비무대 바닥을 향해 내리쳤다.
얼어붙었던 얼음이 깨지면서 본래의 모양으로 돌아온 채찍.
툭.
박은비는 채찍을 사사키 유우를 향해 던졌다.
“허무하게 비무가 끝나면 사람들이 오해해요. 제가 사술을 썼다고 착각할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최선을 다해 공격해 주세요.”
나긋나긋하게 말하면서 사사키 유우를 도발했다.
[어, 어떻게 된 거죠?]
[그러게 말입니다…]
해설진과 캐스터가 멍하니 모니터를 봤다.
그들의 예측은 사사키 유우의 압승.
결과가 이미 나와 있는 대결이었다.
화면을 보고 당황한 것도 이 때문이다.
설마 사사키 유우가 자신의 무기를 놓칠 거라 누가 상상이라도 했겠나.
예상 밖의 상황에 잠시 당황했다.
해설진이 정신을 차리고 입을 열었다.
[사사키 유우 선수가 채찍을 놓아 버렸습니다. 박은비 선수의 내공으로 인해 채찍이 얼어붙었다지만, 채찍을 놓아 버린 건 사사키 유우 선수의 실수 같습니다.]
그들이 보기에는 사사키 유우의 작은 실수.
그냥 방심한 탓이라고 여겼고 그래서 대세에 변화는 없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그들만의 착각이었다.
박은비가 던져 준 채찍을 든 사사키 유우가 맹렬히 공격했다.
사독이란 이명답게 채찍의 경로가 아주 지독했으나, 박은비는 한빙장을 통해 모두 막아 버렸다.
여기까지도 봐줄 만했다.
그러나 그다음부터가 문제였다.
[박은비 선수 이제야 반격하나요.]
[아, 저렇게 근접전을 펼치면 안 됩니다. 장법의 장점은 원거리 공격. 아무리 다재다능한 무공이 장법이라지만 근거리는 사사키 유우 선수의 영역이에요. 제 발로 호랑이 굴에 들어가는 것과 마찬가지죠.]
[맞습니다. 사사키 유우 선수가 괜히 사독이겠습니까. 사사키 유우는 가시가 돋친 장미입니다. 그것도 독장미죠. 그녀의 품으로 절대 들어가선 안 됩니다.]
캐스터와 해설진 모두가 반대하는 공격을 펼쳤다.
박은비가 몸을 깊숙이 숙이며 사사키 유우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그와 동시에 채찍 손잡이에서 기계가 작동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펑!
쾅!
검은 연기가 터지며 주변이 자욱해졌다.
사사키 유우는 사파의 무공을 익힌 각성자.
특히 일본 특유의 음험함이 있어서 그녀에게 아주 잘 맞은 무공이었다.
채찍 손잡이 장치에 숨겨둔 건 ‘사독연’
음양사의 맹독을 뽑아 가루로 만든 독연이다.
사사키 유우를 아는 사람이라면 제일 경계하는 게 바로 이 무기였다.
[예상대롭니다.]
[사사키 유우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면 절대 근접 공격을 시도하지 않았을 텐데 말이죠.]
[한국 대표팀의 인솔자는 뭐 하는 사람인지 모르겠습니다.]
[아군에게 상대 선수에 대한 공략 정보를 안 가르쳐 주다니요. 인솔자로서 탈락입니다.]
일본에 대한 편파 중계도 모자라 이준을 까기 바빴다.
아주 기다렸다는 듯, 맹렬히 비판했다.
잠시 후 연기가 가라앉았다.
안의 상황을 들여다보지 않아도 뻔히 보이는 결과.
사사키 유우의 승리를 중계하려고 해설진이 입을 여는 순간!
캐스터가 손으로 앞을 가리키며 말을 더듬었다.
[지, 지금 제가 뭘 잘못 본 건가요. 쓰러져 있어야 할 박은비 선수가 서 있고, 되려 사사키 유우 선수가 얼굴을 감싸고 있습니다.]
해설진도 뭐라고 설명을 하지 못했다.
그들도 각성자이지만 지금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전혀 예상되지 않았다.
[이게 어떻게 된 건가요?]
[저건… 화, 화상 같습니다.]
[화상이요? 박은비 선수는 빙공을 쓰는 각성자가 아니었습니까? 화공이라면 몰라도 빙공으로 상대에게 화상을 입힐 수가 있는 겁니까?]
한편, 비무대 아래에서는 사사키 유우가 고통에 울부짖고 있었다.
“아아아악!”
그녀의 예쁜 얼굴은 붉은 기로 가득했으며 시간이 흐르자 진물이 흘러내렸다.
사사키 유우의 비명을 지켜보고 있는 박은비.
그녀 또한 결과가 이렇게 나올 줄 몰랐다.
분명 검은 연기가 터지고 한빙장을 사사키 유우의 몸에 날렸는데, 예상 밖의 결과가 나왔다.
‘설마 부 속성을 불로 해서 이런 거야?’
한빙장을 끌어 올릴 때 전륜마멸진도 같이 반응했다.
빙 속성 공격력 +250%.
그냥 펼쳤을 때와는 격이 다른 공격력이었다.
여기에 더해 아주 잠깐이지만, 뜨거운 기운까지도 느껴졌다.
몸에서가 아닌, 외부에서.
오직 박은비만이 느낄 수 있는 미세한 기운이었다.
한빙장의 한기는 사사키 유우의 몸에 적중했고, 부 속성의 화기는 독연에 부딪혀 폭발을 일으킨 것이다.
‘얼음 속성 공격력에 가려져 화 속성의 공격이 잘 안 느껴졌나 봐.’
그러니 이런 결과가 나왔겠지.
이준이 전륜마멸진을 왜 직접 느껴보라고 한지 조금은 알 것만 같았다.
전 세계에 유일무이한 S급 진법.
각성자를 보조하는 게 진법이라곤 하나, 전륜마멸진을 보조 진법이라 부르기엔 엄청났다.
“아으으으…”
사사키 유우가 부들부들 떤 채 신음을 토했다.
박은비는 그녀를 내려다보면서 입을 열었다.
“이렇게 될 줄 몰랐어. 미안.”
사과를 했지만 전혀 미안한 표정이 아니었다.
상대는 한국을 속국이라 칭하며 제국주의적인 말을 계속 꺼냈다.
이건 그에 대한 대가.
옛 영광에 사로잡혀 주제 파악하지 못하고 나대서 대가를 치르게 된 거다.
“으윽… 사, 사술이 틀림없어! 날 어떻게 한 거야!”
사사키 유우는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리고 소리쳤다.
결과에 승복할 줄 알아야 하건만.
아직도 비무 전인 줄 착각하고 있는 듯했다.
그때였다.
박은비의 귀로 이준의 전음이 들려왔다.
[아직 정신 못 차리네. 정신 확 깨게 만들어 줘.]
[어떻게?]
[품에 거울 가지고 있지?]
[응. 쿠션은 여자의 필수품이잖아?]
[열어서 저 여자한테 보여 줘.]
[너무 치욕적일텐데.]
[은비 네가 힘이 없었다면 그 치욕을 받은 사람은 너였을 거야.]
그랬다.
현재는 힘의 시대.
대 각성자가 살아가는 약육강식의 세상이었다.
힘없는 사람은 천민으로 힘 있는 각성자는 귀족으로 분류됐다.
이준의 말처럼 자신이 힘이 없었다면.
아시아 학원 대항전에서 치욕을 당한 사람은 반대로 자신이었을 거다.
더 나아가 사사키 유우가 했던 말.
옛날 일본의 속국이었다고 한국을 비하했던 말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월령검 마츠모토 아카기가 친한파라서 다행이지.
만약 그조차 혐한파였으면 이미 전쟁이 벌어졌을지도 모른다.
아니, 이미 전쟁이 벌어졌을 것이다.
마츠모토 아카기가 친한파라 지금은 억제하고 있을 뿐.
혐한파 각성자는 언제든 마츠모토 아카기를 젖히고 한국과 전쟁을 하고 싶어했다.
물론 한국에는 검제가 있다지만, 현재의 전력으로는 일본을 막기엔 어려웠다.
무엇보다 일본은 계속 전력이 상승하고 있는데 반해 한국은 나날이 각성자가 약해졌으니.
마츠모토 아카기가 끝까지 반대할 명분이 사라지고 있었다.
이 모든 게 힘 때문!
이준의 말처럼 힘이 없으면 밟히게 되는 건 자신이었다.
[확실하게 정신을 무너뜨려줘.]
박은비가 고개를 끄덕이며 품에서 쿠션을 꺼내 열었다.
“내가 보여 줄 게 있어. 한번 볼래?”
그녀의 나긋나긋한 목소리에 악을 지르던 사사키 유우가 끝내 괴성을 질렀다.
“내, 내 얼굴이… 아아아아악!”
그녀가 가장 자신 있어 하는 부분인 얼굴이 녹아내리고 있었다.
자신의 얼굴을 본 사사키 유우가 충격으로 인해 기절하고 말았다.
할 일을 끝낸 박은비가 심판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멍하니 있던 심판.
박은비의 시선에 화들짝 놀라며 제 할 일을 했다.
“비무의 승자는… 빙결장 박은비입니다!”
심판의 외침에 주변이 조용해졌다.
사사키 유우를 응원하던 이들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일본의 응원단은 어떤가.
박은비를 조롱하던 목소리는 어디 가고 아무 말도 못한 채 놀란 표정만 짓고 있었다.
그들을 뒤로 한 박은비가 무대에서 내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