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9화
이준의 말에 이토 준지로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한참이나 나이가 어린 애송이한테의 굴욕.
일본의 국민 영웅이라고 떠받듦을 받은 그로선 듣도 보지 못한 말이었다.
하지만 이준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날 죽이고 싶어 하는 눈빛인데. 네 실력으로는 어림없어. 망신이나 당하지 말고 눈깔아.”
이토 준지로를 향해 대놓고 도발을 시전했다.
“이 조센징 놈이…!”
그가 모욕을 참지 못하고 주먹을 휘두르려고 했다.
그러다 문득 섬뜩한 느낌이 팔을 스치고 지나가는 게 아닌가.
팔을 휘두르면 서늘한 칼날이 날아와 어깨를 자를 것만 같았다.
‘누구지?’
이토 준지로가 고개를 좌우로 돌렸다.
이 섬뜩하리만치 날카로운 기운을 뿜어낸 사람을 찾고 있었다.
그의 행동에 이준의 입꼬리를 더욱 위로 말아 올려졌다.
“괜히 힘 빼지 말고 시합이나 준비하세요.”
이준은 그 말을 남기고 자리를 떴다.
이토 준지로에게 달려온 일본 대표팀 인원들.
“선생님! 왜 가만히 계신 겁니까?”
“선생님과 일본을 모욕했습니다. 우리의 속국이었던 놈들이 말이에요!”
일본 소속 학생들은 분노했다.
이준의 목소리가 그들의 귀에도 다 들렸기 때문.
이토 준지로는 자신들의 인솔자이자 선생님이었다.
그리고 일본의 국민 영웅이기도 했다.
그를 모독하는 건 자신들과 일본 전체를 모독하는 일.
절대 용서할 수 없었다.
“그만! 우리가 시합을 통해 직접 저 조센징 놈들을 발라 주길 원하신 거다.”
“그런 겁니까?”
“어? 으응! 그렇지.”
두리번거리고 있던 이토 준지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어깨를 갈라 버리는 날카로운 예기가 느껴졌는데, 지금은 말끔히 사라진 상태.
누가 살기를 보냈는지 알아내지 못했다.
‘감히 나한테 살기를 보내? 어떤 놈인지 잡히면 가만두지 않겠어.’
그는 자신에게 살기를 보낸 사람이 이준이라는 건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
앞쪽에서 뿜어져 나온 살기가 아닌, 좌우에서 나타난 살기.
기운을 극한으로 컨트롤할 수 있는 이준이라 가능한 기술이었다.
[곧이어 1일 차 시합을 진행하겠습니다. 첫 번째 시합에 해당하는 대표팀은 출전 선수 명단을 작성해서 제출해 주십시오. 제한 시간은 1시간입니다.]
시합을 알리는 방송이 나왔다.
이토 준지로와 일본 대표팀은 배정된 로커 룸으로 들어갔다.
명단을 가진 그가 대표팀을 향해 말했다.
“누가 저 근본 없는 조센징을 교육시키겠나.”
“제가 하겠습니다.”
방금 전 주위를 조용히 시켰던 남학생.
빡빡머리를 한 하야미 텟페이가 자신 있게 손을 들었다.
“텟페이 네가? 넌 이번 경기에 쉬고 중국팀을 상대해라.”
“제가 선생님과 대 일본 제국을 모욕한 한국 놈을 박살 내겠습니다.”
이토 준지로가 텟페이를 흐뭇하게 보았다.
하야미 텟페이.
A급 각성자로 일본에서 제일가는 유망주다.
상대하기 까다롭다는 궁술을 익히기도 했으며 본인의 나라에 대한 자부심이 뛰어났다.
“좋다. 네가 참가해서 한국을 박살 내고 와라.”
“저도 텟페이군과 나갈게요.”
“저에게 맡겨 주신다면 조센징 놈들의 단전을 전부 깨부수고 돌아오겠습니다.”
연달아 손을 든 여학생과 남학생.
사사키 유우, 미즈시마 요시오라는 하야미 텟페이 다음으로 강한 각성자였다.
일본 최고의 유망주들.
그것도 1, 2, 3위가 나가겠다고 손을 든 것이다.
이 정도의 전력이라면 필승.
질 수가 없었다.
“원래 너희를 출전시킬 생각은 없었지만 이번에는 허락하겠다. 조센징이 다신 무공을 쓰지 못하게 망가트리고 돌아와라.”
“예! 선생님!”
“맡겨만 주십시오.”
이토 준지로와 일본 대표팀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그들의 얼굴은 이미 자신들의 승리로 확신에 차 있었다.
중국을 상대하기 전, 한국 대표팀은 유희일 뿐.
장난감 이상이 아니었다.
* * *
한편 한국 측 로커 룸은 시끌벅적했다.
“준아. 너무 씨게 도발한 거 아니야?”
“쟤들이 먼저 그랬잖아.”
“괜찮겠어? 이토 준지로가 아주 이를 갈던데.”
“그래 봤자 지가 어쩌겠냐. 들이박으면 그대로 돌려줘야지.”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토 준지로가 AA급 각성자라곤 하나 도왕과 같은 경지에 있었다.
이준은 도왕도 쉽게 발라 버린 실력을 가졌다.
이토 준지로가 도왕보다 강하지 않은 이상, 이준을 향해 이빨을 들이댄다 해도 타격이 없을 터.
걱정할 필욘 없었다.
아니, 이준을 걱정하는 게 세상에서 제일 불필요한 걱정이다.
로커 룸에 들어와서 이야기로 시간만 축내고 있는 그때, 차경진이 학생들을 향해 물었다.
“누가 대표로 나가시겠어요?”
“저요. 저! 저! 혁진이가 나갈래요.”
“그러면 저도 나가겠습니다.”
박혁진이 손을 들자 허수가 따라나섰다.
허수를 힐끗 쳐다보며 슬며시 손을 드는 정예은까지.
세 사람이 똘망똘망한 눈빛을 하고 있는데 이준이 고개를 저었다.
“너희들은 기회가 많으니까 다음에.”
“칫. 전륜마멸진의 위력 좀 보려고 했더만.”
“사실 저도 같은 생각이었습니다.”
“그치? 역시 나랑 수는 잘 통한다니까. 그래서 말인데 너 우리 철혈검가 오지 않을래?”
그사이 영업하는 박혁진이다.
참 끈질긴 녀석.
아직도 허수를 자기 가문으로 영입하려는 걸 포기하지 않고 있었다.
“전 이미 선생님께 충성을 맹세한 몸. 거절하겠습니다.”
“잘 생각해 보라니깐. 내가 특별히 할아버지께 말씀드려서 새끈한 도 하나 줄게. 패왕도보다 더 좋은 거 말이야.”
“전 이걸로 충분합니다.”
허수가 참마도를 가리키며 말했다.
절대 넘어오지 않은 허수를 보며 입맛을 다시는 박혁진.
눈동자엔 아쉬움이 가득했다.
“내가 먼저 허수를 발견했어야 했는데”
“헛소리 그만하고. 차 선생님은 누가 출전했으면 좋겠어요?”
“전….”
차경진이 학생들을 훑어보았다.
그들의 눈동자는 초롱초롱했다.
자기를 뽑아 달라는 구원의 눈빛이었다.
차경진이 입을 열기만을 기다리는 학생들.
드디어 차경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은비와 선호가 출전했으면 합니다.”
“제, 제가요?”
박은비가 놀라서 토끼 눈을 떴다.
대표팀에서 최약체로 평가받았다.
일본은 강국.
여기서 지면 16강에 올라가지도 못하고 탈락한다.
그러면 중국 대표팀과는 싸우지도 못하고 귀국할지 모른다.
게다가 일본 대표팀은 한국 알기를 아주 우습게 알지 않나.
맘 같아서야 매타작을 하고 싶지만 실력에 밀려 쪽만 당하고 올까 봐 걱정이었다.
그 부담감에 화들짝 놀란 거다.
“지금의 은비와 선호라면 일본을 상대할 수 있을 겁니다.”
“제가 잘할 수 있을까요? 괜히 저 때문에 대표팀에 피해가…”
“은비는 중국에 온 순간부터 자격을 갖추고 있는 겁니다. 자신감이 없는 게 더 대표팀에 피해를 주는 거니, 자신을 깎아내리지 마세요.”
차경진이 박은비를 치켜 세워 줬다.
다른 학생들도 한마디씩 했다.
“그동안 열심히 했잖아. 잘할 거야.”
“부담 갖지 마. 차 쌤이 생각 없이 널 지목했겠어? 다 전략에 있어서 널 선택하셨겠지.”
“너 자신을 믿어. 그리고 가서 본때를 보여 줘. 한국을 무시한 대가가 어떤지!”
그들의 응원에 박은비가 힘을 얻었다.
잔뜩 얼어 있던 남선호 또한 긴장이 풀렸다.
“은비와 선호는 확정. 남은 사람은요?”
“진경수 학생으로 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차경진의 호명에 진경수가 벌떡 일어났다.
“탁월한 선택이십니다! 절대 후회하지 않은 결과를 가져오겠습니다. 크크.”
“잘해라.”
“지는 순간 넌 그냥 걸어서 귀국하는 줄 알아.”
그의 친구인 박정연과 정예나가 말을 툭 뱉었다.
박은비와 남선호를 응원할 때와는 전혀 다른 말투였다.
심지어 싸늘하기까지.
일본한테 지고 오면 큰일 날 것만 같은 분위기였다.
“걱정 마. 특훈의 성과를 보여 주고 올 테니까.”
대진표가 정해졌다.
스타트를 먼저 하는 사람은 박은비.
두 번째로 남선호가.
마지막은 진경수가 나가기로 했다.
엄청난 파란을 일으킬 순서.
아시아 학원 대항전을 보고 있는 전 세계가 한국의 무력에 놀라게 되는 시발점이었다.
* * *
돈과 넓은 땅덩어리를 자랑하는 중국 클래스답게.
아시아 학원 대항전이 열리는 경기장엔 사람들로 가득했다.
족히 10만 명은 되었다.
일반 경기장보다는 10배는 컸으며 최첨단 시설까지 갖췄다.
중국은 이번 대회에 공을 많이 들였다.
[아시아 학원 대항전 1일 차. 첫 번째 시합을 진행하겠습니다.]
방송이 나왔다.
시끌벅적하게 떠들던 관객들이 전광판에 집중했다.
과연 어떤 각성자가 출전을 할까 모두 기대를 하고 있었다.
[일본 대표팀의 첫 번째 출전자는 사독 사사키 유우입니다.]
“사독이 첫 번째라니!”
“오늘 오길 정말 잘했어.”
사독 사사키 유우는 국제적으로 팬이 많았다.
베이글녀의 대표격.
그녀를 보고 잠 못 이루는 남자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사사키 유우가 모습을 드러내자.
“휘이이익!”
“사사키 유우!”
“예쁘고 섹시하다!”
그녀를 향한 칭찬으로 가득했다.
사사키 유우도 관객의 함성에 나쁘지 않은지, 그들을 향해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 함성이 끝나기도 전에 다음 출전자가 호명됐다.
[사독 사사키 유우를 상대할 한국 대표팀의 출전자는 빙결장 박은비입니다. 무대로 나와 주세요.]
사사키 유우를 호명할 때와는 반응이 달랐다.
“빙결장? 그게 누구지?”
“처음 들어 보는 이명이야.”
“한국에 그런 각성자도 있었어?”
박은비는 사사키 유우와는 달리 무명이었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E급 각성자였던 그녀였다.
국내에서야 꽤 유명 인사가 되긴 했지만 아직 국제적으로 명성이 없는 건 당연한 소리다.
무엇보다 누가 몇 달 새에 E급에서 A급에 올랐다고 생각하겠나.
애초에 상식적으로 불가능했다.
그러니 박은비를 모를 수밖에.
“한국 미쳤구만.”
“우리 유우의 상대로 무명을 출전 시켜?”
“우우우우. 당장 꺼져라!”
관람석에 있는 모든 국가의 관객들이 야유를 보냈다.
한국에서 응원 온 사람들과 기자들까지도 의문을 표했다.
“빙결장이 급성장한 건 아는데 사사키 유우한테는 못 비비지 않나.”
“그러게 말이에요. 밸런스가 안 맞긴 한데.”
“첫 번째 순서는 전력을 파악하려는가 봅니다.”
한국인들 또한 박은비는 버리는 패라고 생각했다.
대형 스크린에 박은비가 입장하는 모습을 비췄다.
잔뜩 긴장한 모습이긴 하나, 묵묵히 무대 위로 올라갔다.
“어?”
“우리 유우랑은 다른 매력이 있잖아?”
“풋풋하면서 청순하다. 그렇지?”
“어… 한국은 미인들이 넘쳐난다더니 그 말이 사실이야.”
몇몇 관객들은 야유를 멈췄다.
사사키 유우의 팬에서 박은비로 갈아타는 사람까지 나타났다.
무공을 익힌 각성자답게, 사사키 유우의 귀로 관객들의 반응이 들렸다.
그녀의 못마땅한 눈빛에 박은비가 움찔 했지만.
“후우우우.”
박은비가 큰 숨을 내쉬며 긴장을 풀었다.
박은비의 모습에 사사키 유우가 팔짱을 낀 채 말했다.
“검룡이나 검화, 못해도 독화나 빙화는 나올 줄 알았는데 이건 뭔 듣보잡이지?”
사사키 유우가 박은비를 깎아내렸음에도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대신 심판을 향한 박은비의 목소리가 들렸다.
“언제 시작하나요?”
“두 선수 준비 끝나셨으면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전 준비 끝났어요.”
박은비의 행동에 사사키 유우의 얼굴이 굳어졌다.
명백한 무시.
자신보다 명성이 높은 것도 아닌데 무시를 하자, 자존심에 스크래치가 난 거다.
“사사키 유우 선수는 준비됐습니까?”
“네.”
“그럼 비무를 시작하겠습니다.”
삐-
호루라기가 경기장에 울려 퍼졌다.
심판은 널찍한 비무대에서 내려갔다.
박은비와 사사키 유우만 남은 상황.
팔짱을 끼고 있던 사사키 유우가 무기를 꺼내 들었다.
그녀의 특기는 편법.
사독절편이란 무공을 사용해 상대를 괴롭혀서 굴복시키는 게 그녀의 장점이었다.
“빙결장? 난 네 이름을 못 들어 봤는데. 한국에서 랭킹이 어떻게 되지?”
“……”
박은비는 여전히 그녀의 말을 무시했다.
대신 단전에서 내공을 끌어 올렸다.
한껏 늘어진 두 팔을 향해 내공을 보내자, 양손에는 냉기가 흘러나왔다.
“이년이! 어디 끝까지 날 무시할 수 있는지 보자.”
촤라락!
사독이라는 이명을 사사키 유우에게 붙여 준 무공.
사독절편이 펼쳐졌다.
허공을 향해 뻗어 나가는 그녀의 채찍.
독사가 사냥감을 향해 이를 드러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