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6화
4대 성지의 금역으로 온 이준은 몬스터들부터 확인했다.
“부상당한 애들은 얼마나 있어?”
“헤헤. 샥쿠 님의 무시무시한 힘 덕분에 다친 애들이 별로 없었습니다요. 그리고 로티틸 님이 부상자를 치료해주시기도 했고요.”
“피해가 없다니 다행이네.”
주위를 둘러보았다.
평소와 같은 모습.
다친 녀석들은 없는 것 같았다.
이준이 일일이 몬스터를 살펴보는 걸 느낀 로티틸이 말했다.
“주인님은 언제나 상냥하셔.”
“우리 주인님은 츤데레 같은 성격을 가지고 계시다.”
“츤데레요?”
샥쿠의 말에 로티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허수의 동생들이 가르쳐 준 이 세계의 언어다. 무관심한 척하면서 챙겨 주는 걸 츤데레라 말하더군. 아이들이 나한테도 츤데레라 했으니 아주 좋은 말일 거다.”
“호, 주인님이 츤데레셨군요. 이제 알았어요. 그러면 앞으로 츤데레 주인님이라고 부르면 되겠어요.”
“하지 마!”
두 몬스터의 이야기에 이준이 버럭 소리쳤다.
츤데레 주인이라니, 듣기만 해도 오글거렸다.
그러나 로티틸은 포기하지 않았다.
“왜 그러셔요. 츤데레 주인님.”
“하지 말라니깐! 나 츤데레 아니야.”
“샥쿠님께서 좋은 단어라 했는데… 주인님은 싫으신 거예요?”
로티틸이 순진한 얼굴로 눈을 반짝반짝 빛내고 있었다.
순딩순딩한 아이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소리를 치지 못했다.
“하아아. 너희 알아서 해라.”
“알겠어요! 츤데레 주인님.”
이준은 샥쿠를 노려봤다.
어디서 이상한 걸 배워 와서는, 이래서 지능 높은 몬스터는 위험했다.
이준은 빨리 화제를 전환했다.
“대족장의 묘에서 얻은 아티팩트들은 어딨어?”
“제가 안전한 곳에 보관해 놓았습니다요. 절 따라오십시오.”
테구르가 이준을 안내하며 어딘가로 향했다.
그가 도착한 곳은 스케먼들이 사는 공간이었다.
주변에 빼곡히 있는 나무 집들.
다 똑같이 생긴 집이라 구분이 안 갔다.
단 하나 다른 점이라곤 현판이었다.
떡 하니 창고라고 쓰여 있는 게 아닌가.
그것도 한글로 말이다.
“저 글자 네가 쓴 거야?”
“네. 그럽습죠. 혹시 마음에 안 드십니까요?”
“한글은 언제 배웠데?”
“주인님의 부하가 된 이상, 이곳의 언어를 모르면 안 되지 않겠습니까요?”
“기특한 생각을 했네.”
“헤헤. 과찬이십니다요.”
저 간사하게 웃는 것만 아니면 아주 좋으련만.
등급이 올랐다 해도 생김새와 천성은 어쩔 수 없나 보다.
“그런데 이런 곳에 아티팩트를 처박아 놓아도 되냐?”
“처, 처박아 놓았다니 무슨 그런 심한 말씀을!”
테구르가 화들짝 놀라 했다.
이준이 엄청나게 큰 오해를 하는 것 같아, 테구르가 나무 창고의 손잡이를 시계 방향으로 돌렸다.
지잉-
나무 창고 앞에 뜬 수식들이 원형을 그리며 푸른색으로 반짝였다.
“마법진?”
처음 보는 건 아니지만 놀랍긴 했다.
스케먼이 마법진까지 다루다니.
듣도 보도 못한 소리였다.
[호오, 결계인가 보구나. 진법과는 결이 다르구나.]
무극자가 순수하게 감탄했다.
그는 오로지 무로 정점을 찍은 사람.
무공과는 다른 마법진을 보자 신기해한 것이다.
“헤헤. 알아보셨습니까요? 주인님의 보물 창고라 제가 심혈을 기울여 제작했습니다요.”
테구르가 손을 비비며 말했다.
빨리 칭찬해 달라는 표정이었다.
“그런데 내가 어떻게 들어가?”
이준이 칭찬을 안 해 주자 시무룩한 테구르였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제가 이미 준비해 뒀습니다요. 잠시만 실례하겠습니다요.”
테구르가 이준의 손을 덥석 잡았다.
손을 활짝 편 채 마법진의 중앙에 가져다 댔다.
그리곤 뾰족한 바늘로 이준의 검지를 찔러 피를 낸 뒤 마법진에 떨어트렸다.
지잉-
[테구르의 마법 결계 창고에 ‘사용자’의 혈액과 지문을 등록합니다.]
파랗던 마법진이 강한 빛을 뿜어내다가 이내 사라졌다.
[사용자 등록이 완료되었습니다.]
[테구르의 마법 결계 창고의 주인이 되셨습니다. 앞으로 마음껏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철컥!
기관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리며 창고의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와.”
외관은 평범한 창고로 보이나 열리는 문부터 심상치 않았다.
쿵.
문이 활짝 열리자 이준의 눈이 동그래졌다.
* * *
바깥과는 전혀 다른 외관이 펼쳐졌다.
세련된 박물관을 연상케 하는 정리 정돈.
깔끔한 건 둘째치고 인테리어가 끝장났다.
고급 대리석으로 도배되어 있으며 장인이 한 땀 한 땀 만들어 놓은 소파와 옷걸이까지.
보물 창고가 아니고 중세의 대저택 내부를 연상케 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헤헤. 결계에 환각 효과를 일으키는 마법도 설치했습니다요.”
“너 능력자구나?”
이제야 이준의 칭찬을 들은 테구르.
녀석의 입이 귀에 걸렸다.
그럴 때마다 더욱 허리를 굽실댔다.
기분이 좋으면 몸을 낮추고 아부를 더 하는 성격이었다.
“헤헤.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요.”
“아주 마음에 들어.”
“주인님께서 마음에 들어 하시니, 이 테구르. 이제야 마음이 놓입니다요.”
테구르가 우쭐해졌다.
벌써 주인에게 칭찬을 두 번이나 받았다.
앞으로 받을 칭찬까지 합치면 무려 다섯 번이 넘는다.
주인의 칭찬은 곧 부하로서의 위신이 서는 것.
테구르가 슬쩍 이준의 뒤에 있는 샥쿠와 로티틸을 보았다.
샥쿠와 로티틸은 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테구르가 주인의 칭찬을 독차지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기존 창고가 허름해서 다시 만든다고 하더니. 치사한 테구르 님.’
‘손재주로 주인님의 예쁨을 독차지하는 걸 보면 테구르도 보통 놈은 아니군. 앞으로 조심해야겠다.’
로티틸과 샥쿠가 이번에는 졌지만 다음에는 테구르에게 지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이준은 세 몬스터가 서로 주인의 칭찬을 받으려고 안달내고 있는 사실을 알까.
그는 세 몬스터의 충성 경쟁은 생각지도 않고 벽면에 걸려 있는 장비를 가리켰다.
“여기에 있는 것들 전부 대족장의 묘에서 얻은 거지?”
“맞습니다요.”
무기는 벽면, 갑옷 같은 방어구는 옷걸이, 포션과 마정석은 장식장에 넣어져 있었다.
그렇다면 무공서와 같은 종류는 어디에 있을까?
“살상진은 어딨어?”
“헤헤. 절 따라오십시오.”
테구르가 이준을 안쪽으로 데리고 갔다.
다음 방으로 들어가자 무공서들이 투명한 유리에 하나하나 놓여 있는 게 아닌가.
물론 저 책들은 무공서가 아니다.
진본은 살상진 하나뿐.
나머진 무공서의 사본으로 사용할 수 있는 계승 서책이었다.
“여기가 제일 마음에 들어.”
이준은 무공을 계승한 각성자였다.
여러 무공을 가지고 싶은 건 모든 각성자의 꿈.
그도 꿈에 한 발짝 다가서고 있었다.
원래라면 계승 서책에 진본을 복사해 놓고 사본을 가져가야 했지만, 오늘 할 일은 진법을 개조하는 일.
살상진의 진본을 집었다.
[살상진(A)를 획득하셨습니다.]
“나갈까?”
“알겠습니다요.”
뒤에서 기다렸던 세 몬스터가 잽싸게 이준의 뒤로 섰다.
이준이 창고에서 나왔다.
“다들 게이트를 깨느라 수고했어. 난 할 일 마치고 나가 볼 테니까 각자 일 봐.”
“옙! 주인님!”
그의 명령에 세 몬스터가 흩어졌다.
이준은 오아시스 옆 커다란 나무 그늘로 가서 앉았다.
“사부님. 살상진 구해 왔는데 뭐부터 해야 할까요?”
[제자야. 우선 묻고 싶은 게 있구나.]
“말씀하세요.”
[전륜살상진을 만들면 천강마멸진을 어디에 쓸 작정이냐.]
“음… 이게 문제긴 하네요. 뭐 좋은 게 두 개면 더 좋은 거 아닐까요.”
딱히 생각해 보지 않은 문제였다. 그냥 좋은 건 다 가져오자는 생각에 일단 뺏고 본 거였을 뿐이었다.
[그래서 말이다. 사부가 제자를 위해 좋은 생각을 해 봤느니라.]
“어떤 생각이요?”
[전륜살상진에 천강마멸진을 합치는 게 어떻겠느냐?]
무극자 사부의 말에 이준이 벙쪘다.
이게 가능한가?
아직 살상진을 전륜살상진으로 개조하지도 않았다.
한데 천강마멸진까지 더하자니.
사부의 말처럼 만들어 낼 수 있을까 의문이 들었다.
“더 좋은 진법을 만들 수 있으면 저야 좋지만 가능할지 모르겠네요. 전 사부님처럼 뛰어나지도 않고 무엇보다 지금 시간이 없어요. 길어야 일주일? 중국으로 가기 전에 애들도 새로운 진법 연습을 해야 하지 않을까요?”
[끌끌. 제자의 옆에는 이 세상 모든 무공을 알고 있는 사부가 있다는 걸 잊었느냐. 문제없느니라.]
언제나 불신을 하긴 했지만 그래도 무극자 사부를 믿었다.
사부는 거짓말하는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지금은 회의적이었다.
시간이 없기 때문.
무공이면 몰라도 진법은 복잡한 술식으로 되어 있는지라 다를 거라 생각했다.
의심의 눈초리에 무극자가 여유롭게 웃었다.
[괜찮대도? 이 사부만 믿거라. 끌끌.]
* * *
뇌전이 허공을 갈랐다.
마치 번개가 번쩍이는 것처럼 시야가 순간 하얗게 변했다가 원상 복구가 됐다.
쾅!
뒤이어 들리는 굉음에 박혁진이 빽하고 소리쳤다.
“날 죽일 셈이야!”
“어머. 미안. 아직 힘 조절이 안 돼서 쏴리.”
박정연이 벽운을 어깨에 걸치며 웃고 있었다.
방금 전 무시무시한 뇌전의 검기를 날렸던 사람이 맞나 할 정도로 여유로웠다.
“저 괴물. 대체 준이는 왜 박정연한테 나보다 높은 등급의 특성을 개화시켜 준 거야!”
박혁진이 이준을 원망했다.
SS급 특성을 개화할 때까지만 해도 얼마나 좋았던가.
여태껏 쌓였던 울분을 풀 수 있어서 기뻤건만 아니었다.
이준은 자신을 더 절망에 빠트렸다.
기존의 악마가 루시퍼로 업그레이드가 된 것이다.
“지금 우리 준이 욕한 거야? 뒤져 볼래?”
파직!
쾅!
박정연의 몸에서 전류가 흐른 순간 검기가 날아갔다.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강해진 상태.
가문의 무공을 버리길 잘한 것 같았다.
“이 사람이 진짜! 그래 어디 끝까지 한번 가 보자. 나도 더는 못 참아!”
박혁진이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도 천월에 뇌신공의 기운을 가득 담았다.
박정연과 사생결단을 할 모양.
박혁진이 뇌운보를 펼치자 잔상만을 남기며 박정연과 격돌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한지유가 자신의 검을 꽉 쥐었다.
“혜지야, 조금 전 혁진이의 움직임 봤어?”
“은비, 너도 안 보이는데 내가 어떻게 봐.”
“선호도 못 봤지?”
“으응. 움직인다는 사실조차 인지를 못 했어.”
“정말… 괴물 같은 남매구나.”
“지유는… 어? 지유야, 어디가?”
박은비가 한지유에게 고개를 돌렸을 때, 그녀는 몸을 돌려 건물로 들어가 버렸다.
“레드존 게이트에서 돌아오고 나서부터 기분이 안 좋아 보여.”
“그건 그래.”
박은비와 서혜지가 한지유를 걱정스럽게 바라볼 때 정예나가 불쑥 끼어들었다.
“정연이랑 라이벌 의식이 있어서 그래.”
“지유랑 정연 선배랑요?”
“응. 무공 말고도 여러 면에서 말이지.”
“아, 무슨 뜻인지 알겠어요.”
“너희 눈치 빠르구나?”
“눈치를 못 챘을 리가요. 지유가 은근히 얼굴에 속마음이 다 드러나더라고요.”
“넌 누구한테 걸래?”
“당연히 지유죠.”
“정연이도 만만치 않을걸? 이거 굉장히 재밌겠는데.”
남 이야기만큼 재미있는 것은 없는 법이었다. 여자들은 킬킬거리며 소리를 낮춰 이야기를 나눴지만, 남선호는 그 대화에 감히 끼어들 수가 없었다.
그나마 남아 있는 사람이라곤 철룡 진경수뿐이었다.
허수와 정예은은 무공에 대해서 서로 열변을 토하고 있었으니까.
철룡 선배도 딱히 말을 걸기 힘들긴 했다.
두 남매의 대결에서 한 치도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
한편 진경수는 여자들의 대화 따윈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오직 눈앞의 대결에 혼이 쏙 빠진 상태였다.
‘레드존 게이트에 다녀왔다고 저렇게 강해질 순 없어. 분명 이준 선생님의 작품이야.’
진경수가 생각하는 이준은 상식을 깨는 사람이다.
두 남매의 강함도 이준이 만들어줬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