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2화
털썩.
일련의 무리에서 중년의 남자가 이준을 보자마자 무릎부터 꿇었다.
“이준 님. 아니, 이준 선생님!”
진경수처럼 바닥에 바짝 엎드린 중년의 남자가 이준을 애타게 불렀다.
“누구시죠?”
“이 아이의 못난 아비 되는 사람입니다.”
이준은 ‘진’이란 글자가 새겨진 무복을 봤을 때부터 직감했다.
그러면서도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진씨 가주에 물었다.
“진씨 가문의 가주님이셨군요. 그런데 여긴 웬일로?”
“제가 선생님을 오해했습니다.”
“무슨 오해요? 전 오해받은 적이 없는데요?”
이준의 냉랭한 태도에 진씨 가주 진병철이 고개를 슬쩍 올려서 그를 쳐다봤다.
손과 발을 빌어도 꿈쩍 안 할 듯한 표정이다.
아들은 이미 그에게 잘못을 빌고 있었는지, 얼굴에 눈물 자국이 선명했다.
‘젠장! 10명이서 레드존 게이트를 깰 줄 누가 알았겠어. 알았으면 경수한테 공략에 적극 참여하라고 했겠지.’
레드존 게이트인 ‘붉은 산맥’에 간다고 할 때 얼마나 펄쩍 뛰었던가.
그 위험한 곳을 고작 10명이서 간다고?
세상이 자신을 천재라고 치켜세워 주니까 자만한 탓인지, 허세가 너무 지나치다 여겼다.
이준에게 직접적으로 욕은 못 했지만, 간접적으로 쌍욕을 퍼부었다.
어디 금쪽같은 내 새끼를 사지로 몰아가려고 그런 미친 짓거리를 하는지.
절대 참가하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혹여나 강제로 참가를 시킨다면 외동인 점을 강조하라고 시키기까지 했다.
가문의 외동은 아주 귀한 존재.
만약 외동이 죽으면 그 가문의 대가 끊기는 불상사가 생기는 것.
그냥 대가 끊기는 게 아니라 대대로 이어져야 할 무공이 사라지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학교 측에서도 외동은 위험한 게이트는 공략에서 가능한 배제시켜 주었다.
외동을 가진 가문에 대한 학교 측의 배려였다.
‘이걸 어쩐단 말이냐. 고급 정보로 듣기론 이준의 성격이 마냥 호구는 아닌 것 같던데.’
직접 와 보고서야 그 심각성을 알았다.
아들이 잘못을 빌고 있는 걸 보면 훈련에서 제외되기라도 했던 모양.
요즘 세상에선 라인을 잘못 타면 이런 경우는 허다했다.
그래서 자신이 직접 이준의 앞에 찾아온 것이기도 했다.
‘빌어서 안 되면 가문의 기둥을 뽑아서라도 쥐어 줘야 해.’
돈이 문제인가.
무려 일취월장한 실력 향상이다.
자식이 명문대만 갈 수 있다면 거금을 투자하던 시절이 있었다.
공부도 이럴 진데 하물며 무공은?
수십억, 수백억이 들어도 된다.
높은 등급의 각성자가 되면 투자했던 돈의 회수는 껌이었으니까.
특히 A급이 되면 돈은 물론 명예까지 함께 온다.
19살, 고등학생의 나이에 A급에 들어선다는 건 곧 국가 전력급으로 성장한다는 소리.
차후 오왕의 자리에 그들이 올라설지도 모른다는 이야기였다.
차세대 오왕의 자리에 오를 수 있다는데 그 어떤 학부모가 투자를 꺼려하겠는가.
가문의 전 재산을 바쳐서라도 그의 밑에서 배우게 하고 싶을 거다.
자신의 아들인 경수는 천금 같은 기회를 잡았는데 놓치게 생겼다.
절대 그런 일만은 없게 해야 했다.
진병철이 연신 고개를 숙이면서 잘못을 빌었다.
“이 모든 게 제 탓입니다. 못난 아비를 둔 경수는 아무 잘못도 없으니 제발 제 아들을 거두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뜬금없이 찾아와서 무릎을 꿇지 않나. 학생을 버리지도 않았는데 버렸다고 하지 않나. 상당히 기분 나쁜데.”
이준이 나직이 중얼거리자.
“제, 제가 실언을 했습니다. 전 다만 제 아들이 게이트 공략에 참여하지 않아서 소외될까 봐….”
진병철의 얼굴이 잿빛이 되었다.
잘못을 빌러 왔는데 되레 이준의 화만 돋우는 꼴.
“됐습니다. 그만 일어나서 가세요. 수업에 방해됩니다.”
이준이 몸까지 돌려 매몰차게 말했다.
그런 그를 진병철이 바짓가랑이를 잡고 늘어졌다.
“아이고 선생님!”
한 가문을 이끄는 가주가 체면도 내팽개쳤다.
이준의 아래서 무공을 배우는 건 기연 그 자체.
가주의 체면이고 뭐고 없었다.
“하, 왜 이러세요. 이러면 제가 곤란하다고요.”
“저와 제 아들의 잘못을 받아 주실 때까지 못 놓습니다! 뭣들 하나. 이준 선생님께 애원하지 않고?”
진병철이 함께 온 이들에게 버럭 소리쳤다.
어정쩡하게 서 있던 이들이 이준을 둘러싸며 바짓가랑이를 붙잡았다.
다른 이들이 보기엔 심히 우스꽝스러운 꼴이었다.
“이런다고 달라지는 건 없습니다.”
“안 됩니다! 제발 경수에게 한 번만 기회를 주십시오!”
“아, 참 안 된다니까요.”
이준과 진병철의 실랑이는 계속되었다.
* * *
진병철은 끈질긴 구애 끝에 특별반 건물 내에 있는 이준의 개인 교무실에 입성했다.
“호로록.”
이준이 한 손을 찻잔 밑에 받치고 기품 있게 차를 마셨다.
진병철도 차를 한입 마셨으나, 눈만큼은 그에게서 떼지 않았다.
‘내가 이준 선생님을 잘못 봤어. 저 어디가 근본도 없다고 알려진 사람이란 말이냐.’
차를 마시는 그의 모습은 기품이 넘쳤다.
마치 태어나면서부터 가지고 있었던 아우라 마냥, 동작 하나하나가 고결했다.
18살 고등학생에게 절대 볼 수 없는 모습.
그가 왜 도왕을 단숨에 제압할 수 있었는지, 직접 보니 어느 정도 이해가 갔다.
‘내 눈이 썩어 있었어. 귀인을 몰라보다니.’
이준을 자세히 들여다본 진병철은 자신이 가졌던 생각을 모조리 지웠다.
진병철은 이준의 이미지를 새롭게 저장했다.
한편 차를 홀짝이고 있던 이준은 무극자 티격태격하고 있었다.
‘이렇게 하면 되는 겁니까?’
[상대를 발아래에 두는 느낌으로 더 여유롭게 행동하거라.]
‘이렇게요?’
[그게 아니다. 천하를 오시하는 듯한 느낌으로 말이다. 이 쉬운 걸 어찌 못할꼬.]
‘말처럼 쉬운 게 아니거든요. 그런데 꼭 이런 걸 배워야 해요?’
[가아아아알! 네 행동 하나하나가 상대방을 압박할 수 있는 수단이란 걸 모르느냐. 이 좋은 걸 가르쳐 주는데도 따박따박 말대꾸라니.]
무극자 사부의 호통에 이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어떻게든 뇌리에 울리는 대미지를 참아 보려고 했다.
그 때문에 이마와 눈 옆 근육이 꿈틀거렸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차만 홀짝이는 이준.
그냥 골이 아파서 찡그린 것일 뿐인데, 뭔가 심사가 뒤틀린 듯한 느낌을 이준에게서 받은 진병철은 식은땀을 흘려야만 했다.
‘내 무례한 태도 때문이다. 진병철 이 멍청한 놈아. 아들을 가르친 선생님을 만나러 오는데 어떻게 빈손으로 올 수 있단 말이냐.’
이준이 무극자의 호통에 의해 고통을 받고 있다는 생각은 추호도 못 한 채, 속으로 자책하는 진병철이었다.
탁-!
이준이 들고 있는 찻잔을 테이블에 놓았다.
그순간 진병철은 놀라운 걸 보았다.
찻잔 안에 있는 물이 마치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거칠게 파르르 떨리는 게 아닌가.
그것만이라면 딱히 놀랄 일도 아니었다.
멍하니 찻잔을 보고 있는데 잔에 서서히 금이 가기 시작했다.
쩌억-
그리고는 이내 찻잔이 쨍그랑 깨졌다.
“헉!”
그 모습에 진병철이 헛바람을 집어삼켰다.
그는 제 눈을 의심했다. 분명 잔이 깨졌건만, 찻잔 안에 담겨 있던 물이 흩어지기는커녕, 그 모양 그대로 소용돌이 치고 있는 게 아닌가.
‘저, 저건 일전에 검제께서 선보였던 공부!’
극한의 내공 컨트롤을 바탕으로 하는 신기에 가까운 기술이었다.
진병철은 이걸 보고 다짐했다.
가문의 기둥뿌리가 중요한가.
대대로 내려오는 가보를 뇌물로 줘서라도 진경수를 이준의 밑에서 배우게 하겠다고 생각했다.
이준의 밑에서 1년만 배운다면 A급이 문제인가.
어쩌면 학교를 졸업하기 전에 A급 끝자락에 도달할 수 있다고 여겼다.
이준이 아이들을 잘 가르치는 건 이미 증명이 된 셈이다.
“저… 선생님. 제 무례를 용서….”
진병철의 행동은 그 어느 때보다 조심스러웠다.
다시 없을 천재란 걸 알고 있었지만, 그는 이준을 막연하게 어린아이로 여기고 있었다.
아직 세상 물정도 사회생활도 할 줄 모르는 힘만 센 애송이로.
하나, 이딴 생각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 자리를 차지한 단어는 톱스타 강사 이준이었다.
대치동 100억 강사의 뺨을 후리고 갈 실력의 각성자 이준이 말이다.
“이…런. 실례했네요. 잠시 머리가 아파서.”
“후우우. 제가 무례해서 기분이 나쁘신 줄 알았습니다.”
진병철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간혹 빌어먹을 두통이 와서 말이에요. 개의치 마세요. 그럼 이야기를 진행해 볼까요? 제가 일이 있어서요. 길게는 어려울 듯하네요.”
아주 무례한 말.
한 가문의 가주 앞에 두고 할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진병철은 전혀 기분 나빠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준과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사실에 기뻐했다.
“예, 예. 알겠습니다. 이렇게 말씀 나눠 주셔서 감사합니다.”
“인사는 됐고 본론이요.”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제 아들이 선생님의 밑에서 계속 배웠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지금도 충분히 배우고 있습니다만.”
“이래 봐도 한 가문의 가주입니다. 이곳에 와서 곧바로 선생님의 바짓가랑이를 잡았지만 알 수 있었습니다. 학생 중 제 아들이 제일 약하다는 사실을요.”
“수업에 빠졌는데 어쩌겠어요. 다 자기 팔자인걸.”
“그래서 드리는 말씀인데… 실례가 안 된다면 보충수업이라도 안 되는지…”
“지금 선생인 저에게 가주님의 아들을 따로 봐 달라는 소립니까?”
이준이 목소리가 커졌다.
[풉!]
무극자 사부의 비웃음 소리가 크게 들렸다.
‘저기요. 사부님?’
[네가 그리 말하니 웃겨서 그런다.]
이 사부가 진짜.
일 중에는 좀 가만히 계시면 어디가 덧나나.
언제는 기품 있고 위엄 넘치는 모습을 보이라더니, 사부 때문에 다 망했다.
이준은 무극자 사부의 비웃음을 무시해 버렸다.
“선생님께 실례인 줄은 알지만 어떻게 좀 안 되겠습니까? 제가 대가는 충분히 치르… 아, 이 입이 방정입니다. 선생님께서 대가를 받으실 리가…”
진병철이 손으로 자신의 입을 때렸다.
그의 눈에 새롭게 박힌 이준은 굉장히 청렴결백한 선생님이었다.
촌지 같은 걸 주고받는 그런 선생이 아니었던 것이다.
하나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충분한 대가라시면 뭡니까?”
“네?”
“아들을 가르쳐 주면 제게 뭘 줄 거냐고요.”
이준의 말에 붕 떴던 진병철이 정신을 바짝 차렸다.
뭔가 대화가 통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혹, 선생님께서 원하시는 거라고 있으십니까? 어떤 것이든 제가 구해 오겠습니다.”
“그렇단 말씀이시죠?”
이준이 씩 웃었다.
사실 진씨 세가의 도움이 필요하긴 했었다.
무극자 사부가 말했던 살상진을 얻는 레드존 게이트를 클리어하는데 필요한 게 몇 가지 있었다.
원래라면 진씨 세가 모르게 진행하려고 했지만, 저쪽에서 도와주겠다하니 그러면 도움을 받아야지.
“예! 제가 할 수 있는 건 뭐든지 하겠습니다.”
“그러면 블루존 게이트 세 개만 클리어해 주시겠어요?”
“네?”
진병철이 의문을 표했다.
대가를 바랄 줄 알았건만 갑자기 블루존 게이트 세 개를 깨라니.
생각지도 않은 말에 잠시 뇌 정지가 왔다.
“흡고블린 소굴, 망령의 무덤, 폐철 광산. 이 세 개 진씨 가문 영역에 있죠?”
“맞습니다. 그런데 이 세 곳의 게이트는 왜?”
“뭐, 별건 아니고 지금 진씨 가문의 전력이 어느 정도인지 파악하려 합니다. 제대로 수업을 하려면 학생의 환경도 완벽하게 알고 있어야 하니까요.”
핑계였다.
살상진을 얻을 레드존 게이트를 클리어하기 위한 조건 중 첫 번째.
레드존 게이트의 아래에 있는 몇 개의 게이트를 깨야 했다.
흡고블린 소굴, 망령의 무덤, 폐철 광산.
이곳을 깨야지만 레드존 게이트인 대족장의 묘가 열린다.
정확히 말해 보스 몬스터를 공략할 수 있는 문이 열리는 것.
대족장의 묘를 클리어하기 위해선 저 세 곳을 먼저 깨야 했다.
“할 수 있으세요?”
“물론입니다!”
“듣기론 저기서 꽤 많은 이득을 얻는다고 들었는데.”
각성자들이 실전 훈련하기 좋은 장소로 꼽히는 세 곳이었다.
리젠 게이트며 난이도 또한 적당해 훌륭한 돈 수급처였다.
그래서 진씨 가문에서는 일부러 세 곳의 게이트를 클리어하지 않고 놔둔 상태였다.
굳이 가문의 각성자를 파견하지 않아도 타 가문의 각성자들에게 게이트 이용 수수료가 들어오니까.
만약 클리어하게 된다면 재정에 타격을 받을 순 있었다.
“선생님의 부탁이신데 당연히 깨야지요.”
진병철는 말을 하면서도 이준을 다시 보았다.
아니, 보면 볼수록 이준은 욕심이 없는 사람이었다.
사실 그 세 게이트를 달라고 해도 줄 생각이었다.
한 집안에서 어린 나이의 A급 각성자가 나온다는 것은 그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니까.
하나, 이준은 그런 물질적인 것을 하나도 바라지 않았다.
오직 각성자의 성장만을 생각하는 참된 스승의 자세.
그런 이준의 모습을 보니, 돈을 위해 게이트를 클리어하지 않고 방치해 둔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고등학생의 나이라도 존경스러울 지경이다.
‘이 사람은 진짜야. 우리 같은 속물과는 달라.’
진병철은 점점 이준에게 빠져들었다.
구세주가 있다면 이준을 두고 하는 말 같았다.
그가 이준을 반짝이는 눈으로 우러러보기 시작했다.
아주 작은 오해는 눈덩이처럼 점점 커져만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