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9화
유례가 없는 일이 일어났다.
고등학생이, 그것도 단 10명의 인원으로 레드존 게이트를 클리어한 것이다.
매스컴은 또 한 번 들썩이고 있었다.
[도왕을 단숨에 제압한 것도 모자라 단 10명의 무사고 학생들과 레드존 게이트 격파!]
[창왕이라 불리는 이준. 그의 한계는 어디까지인가?]
[날로 유명해지는 이준. 세계에 명성을 날리는 건 시간 문제.]
-ㄷㄷ. 말이 안 나온다.
-도왕이랑 싸우던 게 며칠 전 아님?
-이준은 사실 둘이었던 것임. 이/준 이렇게.
-그런데 10명이서 레드존 게이트를 깰 수 있음?
-ㄴㄴ 절대 불가능. 그랬으면 각 가문의 정예들이 최소 인원만 파견해서 레드존 게이트를 클리어했겠지.
사람들은 불신에 잠겨 있었다.
레드존 게이트는 재앙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만큼 강력한 몬스터들이 즐비한 곳이기도 했고, 만약 균열이 발생한다면 엄청난 피해를 불러오는 곳이기도 했다.
때문에 레드존 게이트의 인식은 일반 게이트와는 차원이 달랐다.
그래서일까.
-오늘부터 나는 이준과 한 몸이다. 이준에 대한 욕은 나에 대한 욕으로 간주하겠다.
- ㄴ 이준에게 악귀 붙은 듯.
- ㄴ 창왕이 네 친구냐. 존함을 함부로 부르지 마라.
-다 필요 없고, 게이트 클리어 동영상 없음?
이준을 찬양함과 동시에 공략 영상을 원했다.
-존잘서생 계십니까?
-나와주세요. 존잘님.
-똑똑. 없으신가요?
그들은 이준에 대한 고급 정보를 많이 아는 존잘서생을 불렀다.
하지만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
지금은 커뮤니티나 하고 있을 상황이 아니었으니까.
무사고 이사장실.
“예. 그러면 회의를 열어 보고 우리 측에서 의견을 모아 전달하겠습니다. 네. 그때 뵙죠.”
뚝.
한민성 이사장이 전화를 끊고 소파로 와서 앉았다.
그의 앞엔 붉은 산맥 게이트 공략을 끝낸 한지유가 있었다.
“기분이 안 좋아 보이는데?”
“아니에요…”
“내가 보기엔 게이트에서 많은 성장을 보인 것 같았는데 만족스럽지 못한 거니?”
“성장은… 만족해요.”
한지유는 계속 뚱해 있었다.
성장?
원 없이 했다.
레드급 몬스터는 혼자 상대할 순 없지만, 블루급 보스 몬스터라면 가능은 할 것 같았다.
그 정도로 몇 주 만에 급성장을 이루었다.
그러니 삼촌인 한민성이 싱글벙글 하고 있는 거겠지.
“만족할 만한 성장을 이뤘으면 좋아해야지. 표정이 왜 그래? 친구들하고 트러블이라도 있었어?”
“그것도 아니에요.”
한지유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박정연이 이준에게 강제로 키스를 했을 때의 마음을.
뭔가 울컥했다.
기분도 매우 나빴다.
자신의 성장에 좋았던 기분이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진 것 같았다.
‘내가 왜 이러는 걸까.’
그녀도 자신이 왜 그런지 알 수 없었다.
이준을 보고 있자면 안심이 된다.
민트 초콜릿을 같이 먹어 주는 친구.
하와이안 피자란 신세계를 맛보여 준 친구.
믿고 의지가 되는 친구라 서서히 마음이 열렸는데, 이준이 다른 여자와 스킨십을 하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준은… 친구잖아.’
아직도 자신의 마음을 모르는 한지유.
연애를 해 봤어야지, 지금 느끼고 있는 감정이 뭔지 정확히 아는데, 그녀는 모쏠이었다.
접근해 오는 남자는 많았지만 모두 거절했던 그녀.
그래서 18살 때까지 연애 한 번 못 해 봤다.
뿐인가.
지금까지 누구를 좋아한다는 감정도 느끼지 못했다.
괜히 감정이 메말라서 빙화란 이명이 붙여진 게 아니었다.
‘이 느낌 별로야. 빨리 잊고 싶어.’
쓸데없는 생각을 지우기엔 훈련이 최고였다.
“저한테 하실 말이 있다고…”
“아, 그렇지. 그게 말이다. 지유야.”
싱글벙글하던 한민성의 얼굴이 급격하게 굳어만 갔다.
“말씀해 보세요.”
“아무래도 가문에 비상이 걸린 것 같다.”
“무슨 일로요?”
가문의 일이란 말에 한지유도 예전의 냉철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내가 욕심을 부렸어.”
“자세히 말씀해 보시겠어요?”
“너희가 게이트에 들어가 있는 동안 도왕이 신력권가를 친 거 알지?”
“네. 태블릿PC로 봤어요.”
“도왕이 나타나서 신력권가로 가고 있다는 걸 이준 선생에게 알렸어야 했는데, 너의 성장을 조금만 더 지켜보고 싶은 마음에 미온적인 태도를 취했어.”
한지유의 고운 아미가 찌푸려졌다.
그 말인 즉슨.
이준이 게이트에서 나갔던 사이에 뭔 일이 생겼다는 뜻이다.
“하시면 안 될 판단을 하셨군요.”
“그렇지. 내 욕심에 안일한 판단을 한 거야.”
“이준이… 어떻게 나오던가요?”
“천강마멸진을 주는 조건으로 이준 선생의 화를 가라앉혔지만, 이전의 관계와는 달라진 것 같아.”
“그러겠죠. 이준은 착하면서 호구 같지만 의외로 성격이 칼이에요.”
“이준 선생과 관계 개선을 하려면 굉장한 노력이 필요할 거야.”
한지유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게이트로 돌아왔을 때 분위기가 이상하긴 했었다.
수련할 때나 간혹 농담을 할 때라던가, 겉보기엔 평소와 크게 다를 것이 없었지만 묘하게 거리를 두는 듯한 느낌이 들었었다.
이준에 관해서라면 빠삭한 그녀다.
그때는 그저 선생과 제자의 관계라 선을 긋는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아니었다.
‘계속 꼬이네.’
수련을 하기 전.
특별반 쪽에 새로 생긴 지 얼마 안 된 아이스크림 집에서 민트 초코아이스크림을 사 먹으려 했는데, 입맛이 뚝 떨어졌다.
“저 가 볼게요.”
“그래. 한동안 네가 옆에서 상황을 면밀히 지켜봐.”
“알았어요.”
한지유가 고개를 살짝 숙이곤 이사장실을 나섰다.
* * *
지잉-
이준은 붉은 산맥을 클리어하고 돌아온 직후 4대 성지의 금역으로 들어왔다.
“뀨우!”
파랑이가 이준의 주머니 속에서 나와 땅을 밟았다.
오랜만에 느껴 보는 금역의 기운.
붉은 산맥의 저속한 냄새와는 달리, 순도 깊은 마기와 공기가 공존하고 있었다.
“좋아.”
“뀨뀨!”
파랑이가 끙끙거리며 대기의 공기를 들이마시고 내쉬었다.
숨 쉬는 걸 반복하자 파랑이의 몸에서 검은 아지랑이가 피어올라 허공으로 사라졌다.
파랑이의 내부에 저장됐던 저속한 기운을 정화한 것.
그제야 만족스러운 표정을 드러냈다.
“뀨!”
하늘을 향해 높이 울어 대는 파랑이.
작은 몸짓 하나하나가 미친 듯 귀여웠다.
이준이 파랑이에게서 시선을 돌리고 새로워진 게이트를 둘러보았다.
“테구르!”
“옛썰!”
이준이 테구르를 부르자, 기다렸다는 듯 나타나는 녀석.
“어떻게 된 거야?”
“무엇을 말씀이십니까요?”
그의 말에 테구르가 불안한 눈동자를 하고 있었다.
“저 집들 말이야.”
“마, 마음에 안 드십니까요?”
“여기에도 붉은 산맥에 지은 집이랑 똑같이 만들어 놓은 거야?”
“마, 마음에 안 드시면 당장 원상태로 바꿔 놓겠습니다요. 애들아! 주인님께서 집을.”
“아니! 완전 좋지.”
“예?”
“나 없는 사이에 아주 기특한 일을 했구나?”
“그, 그럽니까요? 헤헤.”
테구르가 머쓱하게 웃었다.
붉은 산맥에 만들어 놓은 집은 현대식 인테리어였다.
4대 성지의 금역 또한 몬스터가 사는 집이 아닌.
현대식의 집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그래서 주인의 허락도 없이 마음대로 만들어 보았는데.
‘마음에 들어 하신다. 해냈어. 테구르!’
주인의 얼굴에 기쁨이 가득했다.
그 모습에 자신도 뿌듯하고 좋았다.
주인의 기쁨은 수하의 행복이란 지론을 가지고 있는 테구르였으니까.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대?”
“주인님이 뭘 좋아하실까 이런 마음을 항상 품고 있었습니다요. 헤헤.”
테구르가 두 손을 비비며 아부를 떨었다.
이준은 테구르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역시 넌 쓸모 있는 녀석이야. 널 봤을 때 딱 알아봤다니까.”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요.”
“에잇! 기분이다. 너한테 계승의 꽃 하나 줘야겠다.”
“네에에에?”
“싫어?”
“왜, 왜 저 같은 하찮은 것에게.”
“내 부하라며. 그리고 넌 하찮지 않아. 얼마나 쓸모가 많은 몬스터인데.”
“아…”
테구르는 감격에 빠졌다.
이준이 그냥 기분이 좋아서 주는 것인데도 불과하고.
어차피 게이트에 차고 넘치는 게 계승의 꽃이다.
테구르가 계승의 꽃을 먹어도 될 조건이 된다면 주려고 생각했었다.
테구르만이 아니라 페어리의 로티틸, 샤크로아의 샥쿠까지, 모두에게 주려고 했던 것.
테구르에게 미리 준다고 해서 나쁠 건 없다고 여겼는데 녀석이 혼자 오해를 해 버렸다.
“주인님께서 저를 이렇게 생각하시는 줄 몰랐습니다요. 엉엉.”
테구르가 이준이 발목을 붙잡고 대성통곡을 했다.
몬스터에게 계승의 꽃이란 신의 꽃이자 축복이다.
약한 몬스터도 강한 힘을 갖게 하는 신비의 보물.
엄청난 걸 아무렇지 않게 준다고 하니 녀석이 오해할 만했다.
“앞으로 충성을! 제 목숨을 바쳐서 모시겠습니다요!”
“그, 그래. 그러니까 이것 좀 놓고.”
“엉엉. 주인니이이임!”
한동안 테구르의 통곡은 멈추지 않았다.
* * *
이준네 특별반이 귀환하고부터 일주일이 지나자 모든 특별반이 학교로 돌아왔다.
그들은 블루존 게이트를 클리어했음에도 주목을 받지 못했다.
고작 15명도 안 된 학생들을 데리고 블루존 게이트를 깬 것만도 대단한 일.
하지만 이준 네 특별반이 워낙 전례가 없는 일을 기록한지라 그들의 일은 소리 소문도 없이 묻혀 버렸다.
학교 대회의실.
특별반 선생을 포함한 학교의 모든 선생이 모여 있었다.
그들은 모두 이준에게 말 하나라도 걸기 위해 애썼다.
특히, 몇 개월 전 이기홍의 단전을 부순 일로 학폭위를 열어서 이준을 면전에서 까던 선생도 있었다.
“이준 선생. 이것 좀 드셔 보게. 요즘 없어서 못 판다는 구슬 아이스크림일세.”
머리가 까진 선생은 땀을 뻘뻘 흘리며 이준에게 아이스크림을 살며시 내밀었다.
이준은 그걸 보자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가 특별반 학생들을 위해 설치한 아이스크림 집.
특별반에 구경 온 학생들이 먹는 걸 보곤 입소문이 탔다.
달콤함에 빠져들어 헤어 나오지 못한다는 맛.
안 먹어 본 사람은 많아도 한 번만 먹은 사람은 없을 정도로 대인기를 끌고 있었다.
쉽게 살만한 아이스크림이 아닌데.
이 꼰대가, 권위에 찌들어 있는 사람이 구슬 아이스크림을 사려고 줄을 서서 기다렸나 보다.
“괜찮습니다. 저 아이스크림 싫어해요.”
“그, 그런가? 내가 듣기론 민트 초코아이스크림을 좋아한다던데…”
이준이 무안하라며 거절했지만 머리가 까진 선생은 그의 앞에서 연신 허리를 굽혔다.
선생들은 그를 안쓰럽게 보았다.
“자기보다 서른 살이나 어린 아이한테 고개를 숙이는 꼴 하고는.”
“신력권가의 질긴 끈이 드디어 끊어졌으니 어쩌겠어.”
“그러게 애초에 차별을 안 했어야지.”
“이준 선생을 보면 인생 참 어떻게 될지 몰라.”
“누가 아니래. 저 김 선생의 처지가 나락으로 떨어질 줄 누가 알았겠어.”
머리가 까진 선생은 주위 선생들의 목소리를 듣고도 모른 척했다.
그는 신력권가와 끈이 떨어진 상태라 예전처럼 큰 목소리를 낼 수 없었다.
선생들의 권력은 가문의 지원에서 나왔으니까.
현재 그는 이곳에서 제일 힘없는 사람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누누이 말하지만 이준은 막, 뒤끝이 없는 게 아니다.
오히려 뒤끝이 미친 듯이 길었다.
그렇기에 이준은 머리가 벗겨진 선생의 말을 철저히 무시했다.
그러는 사이 대회의실로 한민성 이사장이 들어왔다.
그가 들어오자 일어서는 사람들.
한민성은 그들을 향해 손을 위에서 아래로 내렸다.
“인사는 괜찮아요. 다들 앉으세요.”
그의 말에 모두가 자리에 착석했다.
“특별반이 돌아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선생님들을 이렇게 모이게 한 이유는 급한 안건이 있어서입니다.”
“급한 안건이라 하시면?”
“몇 주 전부터 북경 아카데미 쪽에서 연락이 오고 있어요.”
회의실에 있는 모두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북경 아카데미는 한국의 무사고, 일본의 세이호 특별 고교와 같이 각성자가 모인 학교였다.
서로 라이벌의 관계.
일본 쪽 세이호 특별 고교와는 교류가 종종 있었지만, 북경 아카데미 쪽과는 교류가 일절 없었다.
중국에서 일방적으로 관계를 멀리했으니까.
교류를 안 해도 아시아 국가에선 자기들이 최고라나 뭐라나.
‘내가 생각한 그건 아니겠지?’
이준은 폰으로 날짜를 보았다.
아직 2025년.
중국에서 한국에 수작을 거는 건 5년이나 더 남았다.
이준은 한민성의 이야기를 더 들어 보기 위해 집중을 했다.
“무슨 낯짝으로 연락한답니까?”
“최근 벌어지고 있는 혈겁 때문인가요?”
“아니면 실종된 천마와 활불을 찾게 도와달라는 겁니까?”
선생들의 반응은 하나같이 날이 서 있었다.
지긋지긋한 중국인들.
한국이 뭐만 하면 자기네들이 원조라고 지껄이는 족속들이었다.
특히 무공에선 아주 가관이었다.
본래 자기들 것이라 한국과 일본이 속국에 해당된다 하던가.
아주 만나면 입 안에 있는 옥수수들을 그냥 줘 터트려 주고 싶을 지경이다.
“자자. 진정들 하세요.”
선생들의 날 선 목소리에 한민성이 그들을 진정시켰다.
그리고 북경 아카데미의 원장.
검존 진천우가 제안한 걸 말했다.
“중국의 검존이 아시아 학원 대항전을 가까운 시일 내에 개최하자고 하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