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6화
발라스가 이준 앞에 섰다.
“너는 다르군.”
“뭐가?”
“저 떨거지랑은 격이 달라.”
“몬스터한테 칭찬을 들으니 좋아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좋아해도 된다. 나 같은 강자에게 칭찬을 듣는다는 건 네가 그만큼 강하다는….”
이준이 귀를 후벼 파며 발라스의 말을 끊었다.
“됐고. 시작하자.”
“건방진.”
스르릉-
발라스가 검을 뽑았다.
먹물처럼 검게 물든 검갑과는 달리, 검에선 아주 청명한 소리가 들렸다.
이준도 그 청명한 소리에 눈이 돌아갔다.
[저게 바로 뇌전검왕의 무기인 천월이니라.]
‘생각했던 것과는 굉장히 다르네요.’
[주인에 따라 색깔이 달라지는 신물이다. 저놈의 색이 검어서 천월의 색도 어두운 거겠지.]
‘음… 뭔가 특이하네요. 파멸겁보다 까다롭고 좋은 병기라는 느낌이….’
[가아아아알!]
“윽!”
이준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 어느 때보다 큰 무극자 사부의 목소리.
노성이 골을 잔뜩 울렸다.
[얻다 대고 내 파멸겁과 저 요상한 무기를 비교한단 말이냐!]
‘그, 그렇다고 갑자기 소리를 지르는 게 어딨어요.’
[내 누누이 말했지만, 고금제일의 야장을 납치해서 만든 게 파멸겁이니라. 저딴 무기와는 수준이 다른 것을 못난 놈이 눈까지 삐었어. 쯧쯧.]
납치하고 협박했다는 걸 자랑스럽게 말하는 사부라니.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저 사람이 고금제일인이라는 걸 진짜 믿어야 하나.
라이벌이라도 나오면 좋으련만.
그 사람을 응원하게.
이준의 마음을 바로 눈치챈 무극자가 대답했다.
[제자가 생각하는 그런 놈 없다. 감히 어디서 나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녀석이 있을까.]
아주 오만한 말.
무극자라 가능한 말이었다.
웅웅.
파멸겁 또한 이준의 말에 기분이 나쁜지.
[파멸겁(기본)이 주인을 마땅치 않게 생각합니다.]
[파멸겁(기본)이 전 주인과 당신을 비교하며 코웃음을 칩니다.]
녀석의 반응에 무극자가 되레 기분이 좋아졌다.
[암. 아무리 내 제자라지만 아직 나와 비교하려면 한참이나 멀었느니라. 내 육신이 있다면 발가락 하나로도 제자를 제압할 수 있지. 암. 그렇고말고.]
아주 쌍으로 난리였다.
누가 옛 주인과 신물의 관계 아니랄까 봐.
참나, 서러워서 살겠나.
“저도 끈끈한 친구라면 파랑이 있거든요.”
이준이 저도 모르게 진성으로 말해 버렸다.
이준의 시선을 받은 파랑이.
“뀨우?”
녀석이 고개를 옆으로 갸웃거리다가 휙 돌려 버렸다.
왠지 파랑이에게까지도 버림받은 느낌이었다.
[끌끌끌. 제자는 모든 게 이 사부보다 한참이나 멀었느니라.]
“쳇. 다 필요 없어.”
이준이 파멸겁을 거칠게 뽑았다.
짧은 단봉이 기다란 붉은 창으로 변했다.
그리곤.
쾅!
땅을 박차고 발라스에게 쇄도했다.
“너 또한 여느 인간과 다를 게 없구나.”
발라스의 입매가 비틀어졌다.
옛날에도 눈앞의 인간과 비슷한 강함을 지닌 남자가 있었다.
그도 무식하게 힘만을 믿고 공격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됐느냐.
자신의 승리였다.
그 남자뿐만 아니라 이곳에 온 인간을 모조리 죽였다.
힘만으로 자신을 죽일 수 있다면 이미 인간의 손에 쓰러졌을 터.
자신을 쓰러트릴 방법을 모른다면 승리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발라스가 들고 있는 검을 이준의 창에 휘둘렀다.
콰앙!
파멸겁과 천월이 허공에서 교차한 순간.
엄청난 기파가 주위로 퍼져 나갔다.
여기까지는 발라스도 얼추 예상했다.
아무리 상대가 강하다 한들 개의치 않았다.
자신은 어둠의 힘을 흡수한 상태였으니까.
그런데.
끼이이익!
“흡!”
검과 교차한 창에서 밀려오는 힘이 장난 아니었다.
“제길. 다 필요 없어. 인생 혼자 사는 거지. 뭐 있겠어?”
창으로 자신을 막아선 남자는 화가 잔뜩 났는지,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상태였다.
그러다 서로 눈이 딱 마주치자.
“뭐, 너도 나 무시하냐? 엉? 한번 뒤져 볼래?”
핀트가 어디서 어긋난지 모를 이준.
2페이즈의 공략법은 개나 줘 버렸다.
이준은 오직 눈을 마주친 발라스를 화풀이 대상으로 인식했다.
* * *
깡!
까강깡깡!
이준이 이성을 잃은 덕에 힘든 건 특별반 학생들이었다.
“읏.”
“이준 선생님이 신호 준다고 하지 않았어?”
“조만간 주시겠지. 눈앞의 적에게 집중해라.”
암기를 날리고 있는 정예은에게 허수가 주의를 줬다.
한눈을 팔았다간 자칫 목이 날아갈 수 있는 상황.
여태껏 상대했던 몬스터 중에 가장 강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밀리는 건 특별반 학생들이었다.
특히 이곳에서 제일 상태가 심각한 건 박은비네 조였다.
“크헙!”
전위에 자리한 남선호가 각혈을 했다.
검은 눈을 빛내고 있는 다크 엘프.
그가 바닥을 뚫고 나온 나무를 조종하며 남선호를 향해 채찍처럼 휘둘렀다.
가시덤불에 의해 몸 곳곳이 상처로 가득했다.
그나마 전위에 있던 남선호가 막아 줘서 다행이지.
아니었다면 다른 조원들도 피해가 상당했을 거다.
“선호야! 선생님이랑 교체하자.”
“…괜찮습니다. 더 할 수 있어요.”
남선호가 손에 든 쌍검에 힘을 주며 말했다.
‘내가 중위로 가면 애들이 더 위험해.’
중위는 언제나 차경진이 도맡아 했다.
진법을 조율하는 사람.
자신은 조율보다는 방어에 특화되어 있다고 이준이 말해 주었다.
안 하던 방위로 자리를 옮겼다간 진법이 와르르 무너질 수도 있는 상황.
이준의 명령이 떨어지기까지 버티는 수밖에 없었다.
남선호가 이를 악물고 온몸으로 상대를 틀어막고 있는 사이.
박혁진이 이준을 향해 버럭 소리쳤다.
“준이 이 새꺄! 언제 신호를 주는 거야!”
그 목소리가 이준의 귀에 닿았을까.
파멸겁으로 무한 찌르기를 반복하던 이준의 손이 그제야 멈췄다.
“크으으… 넌 나를… 죽일 수… 없다.”
엄청난 위압감을 뿜어내며 모습을 드러냈던 발라스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벌집이 된 듯.
만신창이 된 몸으로 힘겹게 입을 연 발라스밖에 없었다.
“후우우. 지성인이 이성을 잃다니. 잠시 추태를 보였어.”
[제자가 지성인이었나? 금시초문이로고.]
여전히 성질을 팍팍 긁어 대는 무극자 사부였다.
이준은 사부의 말을 무시하며 발라스를 유심히 보았다.
패턴이 없는 보스 몬스터였다면 진작에 죽을 치명상.
파멸겁으로 인해 벌집이 되어 검은 피가 울컥울컥 쏟아지고 있음에도 목숨이 붙어 있었다.
“맞는 말이야. 그냥은 죽일 수 없고. 역시 약점을 공략할 수밖에.”
현재 발라스는 그로기 상태였다.
한동안은 움직일 수 없을 터.
이준은 발라스의 빛나는 갑옷을 본 후, 여유로운 목소리로 파랑이를 불렀다.
“파랑아. 잘 상대하고 있지.”
“뀨우!”
파랑이가 활잡이 주위를 빨빨 돌아다니면서 화살을 피하고 있었다.
“콱 물어 버려.”
“뀨뀨!”
이준의 말에 파랑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녀석의 몸에서 검은 불꽃이 올라왔다.
청화가 아닌, 암화.
상대를 아예 흔적도 없이 지워 버리려는 듯.
스킬까지 꺼내며 활잡이에게 달려들었다.
파랑이의 번개 같은 움직임에 적이 당황하며 몸을 뒤로 빼려 했다.
하지만 상대를 놓칠 파랑이가 아니었다.
콰직!
팔의 뼈까지 으스러트릴 만큼 강하게 물었다.
파랑이의 이빨을 통해 활잡이의 팔로 전달된 암화.
“악! 이 쥐새끼가!”
활잡이는 암화를 무시하며 화살을 손에 쥔 채 파랑이를 찔렀다.
그러나 파랑이의 스피드가 더 빨랐다.
재빨리 피해 도망가 버리는 녀석.
멀리서 보고 있는 이준인데도 파랑이가 얄미워 보였다.
어쩜 저 작은 몸으로 빨빨 잘도 피할까.
절로 흐뭇한 미소가 지어졌다.
“으어어억!”
이준은 뒤에서 난 신음 때문에 몸을 돌렸다.
“이제 좀 데미지가 들어가나 보네.”
“크흡… 너…!”
그를 보는 발라스의 눈동자가 좌우로 떨렸다.
그 어떤 인간도 알지 못한 약점을 이 인간은 아는 것 같았다.
“네 갑옷 하늘색으로 빛나고 있잖아?”
이준이 발라스를 향해 씨익 웃었다.
갑옷의 색에 따라, 수호성들을 공격하면 발라스가 데미지를 입게 되는 것.
이게 바로 붉은 산맥의 공략법이다.
하늘색 빛을 띠고 있던 갑옷의 색이 점점 짙어지고 있었다.
‘일정한 데미지를 입으면 검은색으로 변하고 완전히 검게 변했을 땐 전멸기를 쓴다고 했어.’
이제 곧 보스 몬스터의 전멸기가 나올 차례.
이준은 학생들을 향해 소리쳤다.
“보스 몬스터의 몸에서 곧 검은 빛이 뿜어질 거야! 그때 너희들이 상대하는 몬스터를 방패 삼아 피해!”
“몬스터가 움직이는데 가능한 이야기야?”
박혁진의 외침이 들렸다.
맞는 말이었다.
말이야 쉽지, 상대의 움직임을 읽고 움직이라는 말 아닌가.
하지만 걱정할 필욘 없었다.
“보스 몬스터가 전멸기를 사용하면 저 네 명의 몬스터는 멈추게 되어 있어.”
발라스의 전멸기임과 동시에 수호성을 강하게 하는 어둠의 힘이었다.
“크윽… 나에게 상처를 낸 네게 죽음을 선사해 주겠다.”
“전멸기야! 모두 일렬로 피해!”
이준의 외침에 학생들은 백호연격진을 풀었다.
그리고 약간 간격을 둔 채 상대하고 있던 몬스터의 맞은 편에 섰다.
꼴깍!
학생들은 침을 삼켰다.
혹여나 이때 공격해 오지 않을까.
잔뜩 긴장한 채, 언제든 출수할 수 있게 공격태세를 갖추었다.
하지만 이준의 말처럼 걱정하지 않아도 됐다.
수호성들이 발라스를 향해 몸을 돌리며 가슴에 손을 얹고 고개를 살짝 숙였기 때문이다.
그들의 태도는 아주 경건했다.
뒤를 돌아선 수호성을 보며 박혁진이 혼잣말을 했다.
“빈틈인데 공격해 볼까?”
지금이면 적을 해치울 수 있지 않을까.
뇌격검을 고쳐 잡고 섬전십삼검뢰를 펼치려는 순간.
“읏!”
수호성의 몸에서 빛이 뿜어져 나왔다.
빨간색, 초록색, 하늘색, 파란색.
원소의 색상이었다.
발라스가 뇌전검왕의 무기인 천월을 하늘 높이 치켜들며 외쳤다.
“모두 어둠에 절망해라!”
천월에서 흘러나온 검은 연기가 원형 모양으로 삽시에 퍼져 나갔다.
* * *
이준은 전멸기가 나오자, 파랑이가 있는 곳으로 빠르게 움직였다.
녀석을 옆구리에 끼고 활쟁이의 뒤에 몸을 숨겼다.
“뀨우?”
“너도 이거 맞으면 죽어.”
“뀨꾸!”
파랑이가 고개를 격하게 저으며.
이준의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
볼을 잔뜩 부풀린 채 팔에서 빠져나가려는 파랑이.
이준은 녀석을 어르고 달랬다.
“일 대 일로 상대하면 당연히 네가 이기지. 넌 태생이 블랙급 몬스터잖아.”
“뀻!”
이번엔 강하게 동의했다.
그러면서 열 개의 꼬리를 활짝 펴는 파랑이.
아주 도도한 자존심이었다.
활짝 편 꼬리를 내리고 이준의 몸에 편하게 기댄 녀석.
‘어째 하나 같이 사부랑 똑같냐.’
파랑이도 그렇고, 심지어 무기인 파멸겁도 그렇고. 무극자 사부와 성격이 비슷하다 느껴지는 건 자신의 생각뿐인가.
주위에 정상이 없으니 정말 피곤했다.
[흠흠. 누가 내 욕을 하는 건지. 귀가 굉장히 가렵구나.]
사부가 괜히 딴지를 걸까 봐 빨리 화제를 전환했다.
“이제 세 번 남았어. 바로 다음 전멸기로 가자!”
이준은 파랑이를 놔두고 지체 없이 발라스를 향해 쏘아져 나갔다.
이제 얼마 안 남았다.
붉은 산맥을 클리어하는 시간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