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2화
무사고에 도착한 이준.
곧장 이사장실로 갔다.
벌컥!
그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니, 한민성과 남지우가 있었다.
두 사람은 TV 화면을 보다가 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이준… 선생?”
이사장실에 나타난 이준을 본 한민성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TV를 보고 계셨군요.”
“아.”
“그러면 제가 이곳에 온 이유를 알겠네요.”
“…면목이 없어요.”
한민성 이사장은 어떠한 변명도 하지 않았다.
도왕이 이렇게 강할 줄 누가 알았겠나. 권왕이 가문에서 나온다면 도왕을 막을 수 있을 거라 여겼다.
하나 그건 한민성만의 생각이었다.
권왕이 막기는커녕, 도왕의 상대도 되지 못했다.
권왕이 그에게 짐으로써 패왕도가의 사기만 올려 줬다.
이 모든 게 한민성의 패착.
그로 인해 신력권가의 피해는 굉장히 컸다.
이준이 제때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신력권가는 끔찍한 상황을 면하지 못했으리라.
“왜 저에게 연락을 안 줬는지 이유나 한번 들어보죠.”
이준은 지극히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자신의 가문이 적에게 공격당했으면 화가 날 법도 하나 그는 아주 평온해 보였다.
아무 일 없는 사람처럼.
그러나 한민성의 눈엔 보였다.
이준의 눈에 깃든 분노가.
‘잘못 말했다간 돌이킬 수 없어.’
이준과 척을 지고 싶지 않았다.
어떻게 매듭을 짓든, 사이만 틀어지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내 실수입니다. 이준 선생이 특별반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성장을 시키는 모습에 전율이 흘렀어요. 조금 더. 조금만 더 이준 선생이 학생들을 성장시키는 걸 보고 싶은 마음에 욕심을 부렸어요.”
한민성은 이실직고했다.
여기서 거짓말을 쳐 봤자 이준의 분노만 살뿐.
한 치의 거짓도 없어야 했다.
이것만이 이준의 화를 풀게 하는 일이었으니까.
“그 욕심 때문에 저와 신기지가의 사이가 틀어질 거란 생각은 안 하셨습니까?”
신기지가란 말이 나오자.
“이건 오직 내 욕심이었어요. 신기지가의 의도가 아니었습니다.”
“맞습니다. 이준 선생님. 한민성 이사장님은 도왕이 신력으로 가는 걸 알고 신기지가의 각성자들을 바로 파견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했습니다. 또 도왕의 이미지를 손상시키기 위한 공작도 실행하셨고요. 이사장님은 절대….”
조금 전까지만 해도 가만히 있지 않으려 했는데 막상 저렇게 납작 엎드리는 것을 본 이준은 문득 생각했다.
사실 한민성이 왜 그렇게 판단했는지는 이해할 수 있었다.
갑자기 AA급에서 S급으로 올라간다는 거 자체가 말이 되지 않았으니까.
그 자신도 잘 몰랐었더라면 고작 AA급 가지고 왜 사람을 오라 가라 호들갑을 떠냐고 짜증을 냈을지도 몰랐다.
게다가 신기지가는 확실히 그냥 버리기 아까운 전력이기도 했다. 암상과는 다른 방향으로 정보력이 뛰어난 곳이었으니까.
게다가 기껏 한지유를 키워 놨는데 냅다 버리기가 좀 그랬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냥 넘기기엔 한민성의 오판이 치명적이기는 했다.
이준은 잠시 고민하다 속으로 씩 웃었다.
‘어쩌면 이거 꽤 좋은 기회일지도.’
“제가 연락도 못 받고 게이트에서 나오지 않았다면 신력권가가 어떻게 됐을까요?”
이준이 짐짓 화가 난 척을 하며 물었다.
“…미안합니다.”
“패왕도가와 같은 꼴이 됐겠네요. 아닌가요?”
“다 내 불찰이에요.”
한민성은 숨을 한번 고르고는 정중하게 말을 이었다.
“이번 사태는 명백한 저의 불찰입니다. 이준 선생이 저와 신기지가를 불신하여 더 이상 연을 맺지 않겠다 하더라도 달게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래요. 그럼 그 말대로 하죠. 앞으로 신기지가의 식객을 그만두겠습니다.”
한민성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하지만 그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만 조아릴 뿐이었다.
“…알겠… 습니다.”
“아니다, 생각해보니 다른 게 더 좋을 것 같아요.”
“?”
“천강마멸진을 주세요. 제가 지유한테 퍼 준 게 얼마나 많은데 그건 다 돌려받고 가야죠.”
“어떻게 이준 선생이 천강마멸진을 알아요?!”
한민성이 또 한 번 놀랐다.
천강마멸진은 신기지가가 극비로 개발하고 있는 진법이다.
이름은 섬뜩하기 그지없지만, 천강마멸진은 이름 값을 하지 못했다.
투자한 자본과 시간치고는 형편없는 진법.
차라리 수속성 방어진인 수보진이 훨씬 좋았다.
“제가 퍼 준 값치고는 엄청 싼 것 같은데 아닌가요? 그 진법 신기지가에는 계륵 같은 거잖아요.”
천강마멸진의 속성은 어둠.
마인을 상대하기 위해 여러 진법을 조합해서 만들었지만, 미완성의 진법.
개발을 거듭할수록 틈이 더 벌어졌다.
완성도가 높아지는 게 아닌, 더 떨어지는 진법.
그래서 현재는 신기지가에서 손을 놓은 상태였다.
그 천강마멸진을 이준이 요구한 것이다.
“그건 미완성의 진법이에요. 아무짝에도 쓸모없을 텐데… 오히려 진법을 쓰는 각성자들만 다치게 할 수 있어요.”
“그래서 달라는 거예요. 미완성이라.”
이준이 씩 웃었다.
천강마멸진은 현재 미완성의 진법이다.
하나 미래에는 엄청난 파괴력을 지닌 진법으로 변모한다.
개발 의도와 같이 특히 마인들을 상대로 효과가 뛰어났던 것.
신기지가의 가주.
신기학사가 천외천을 상대하려면 꼭 천강마멸진이 필요하다며 버려둔 걸 찾아, 뒤늦게 완성시켰다.
신기학사의 집념.
물론 그는 천강마멸진이 사용되는 걸 보지 못했다.
천외천이 신기지가를 놔 뒀다간 골치 아플 거라고 제일 먼저 멸문시켜 버렸으니까.
“선생이 완성시키려고 하나요?”
“신력권가에도 진법 하나 있으면 좋겠다 싶어서 말하는 거예요.”
백호연격진도 좋지만, 이준의 궁극적인 목표는 천외천을 상대하는 것.
백호연격진으로는 천외천을 상대하기에 역부족이었다.
천강마멸진이 딱 좋았다.
완성된 천강마멸진은 마인들에게 최소 두 배의 위력을 보였다.
“음…. 좋아요. 천강마멸진 하나로 선생의 마음이 풀린다면 드리겠습니다.”
이준의 제안에 생각을 하는 척하던 한민성이 수락을 했다.
천강마멸진은 신기지가의 가주도 포기한 진법.
시간과 비용을 투자한 게 아깝긴 하나.
계륵 같은 진법 하나를 넘겨주고 이준의 화가 풀린다면 그거대로 좋았다.
거기다가 천강마멸진은 자신도 포기한 진법.
이준이라면…? 하는 생각이 문득 스쳤다.
‘아니야, 아무리 이준 선생이 뛰어나다 해도. 진법과 무공은 궤가 완전히 다른데. 아니, 그래도 이준 선생이 여태 보여 준 걸 보면.’
한민성 이사가 턱을 잡고 고뇌하는 사이 이준이 밝게 웃으며 대답했다.
“거래 성사네요.”
이준은 한민성이 고뇌하는 모습을 보며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아주 큰 대가를 받았다.
지금 시점에서야 그렇지, 이건 신기지가의 어떤 진보다도 귀중한 진법이었다.
* * *
중국 북경.
독나찰 당소미는 인주의 명을 받고 북경 아카데미로 왔다.
그녀의 앞에 있는 한 남자.
아카데미의 원장이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오늘은 어인 일로…”
“주인의 명을 전하러 왔어.”
“주인이라시면… 인주라는 그분을 말씀하시는지?”
“어.”
인주라는 단어가 나오자 북경 아카데미의 원장.
진천우가 식은땀을 흘렸다.
이름만 들어도 오금을 저리게 하는 괴물이 인주라는 자였다.
“무, 무슨 일인지.”
“4년에 한 번 개최한다는 아시아 학원 대항전을 열었으면 해.”
“아, 아직 6개월이나 더 있어야 하는데… 흡!”
당소미의 눈이 독색으로 빛났다.
그 순간.
푸스스스-
그녀가 잡고 있는 의자걸이가 녹아내렸다.
그뿐이라면 진천우가 기겁하지도 않았을 터.
그는 북경 아카데미의 원장 겸.
중국에서 천마와 활불을 제외하면 가장 강하다는 십존에 속한 사람이었다.
진천우의 이명은 검존, AA급 각성자였다.
그런 그가 이렇게 놀란 이유는.
“그, 그만!”
당소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독기가 그의 호신강기를 뚫고 살에 닿으려고 했기 때문이다.
AA급 각성자의 호신강기를 뚫는 막강한 독기.
그녀의 독공에 당하면 시체도 남길 수 없었다.
‘이, 이세계 게이트에는 저런 괴물들이 득실할 거다. 반항은 죽음뿐이야. 천마가 죽는 걸 내 눈으로 똑바로 봤잖아.’
인주란 괴물한테 끔찍하게 살해당했다.
그 오만하고 강력한.
세계 랭킹 1위에 달한 천마 왕웨이가 말이다.
인주만 강하다면 모를까.
그와 같이 나타난 이들 또한 강한 실력자들이었다.
이 앞에 있는 여자도 마찬가지.
괴물이 따로 없었다.
“하, 하겠습니다. 대항전! 아시아 학원 대항전을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실행해 보겠습니다.”
아시아 학원 대항전이 6개월밖에 남지 않은 시점.
아시아 국가 간의 이사장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긴 했다.
시일의 조율부터 주체국을 정하는 일까지.
나라에 많은 이득을 가져올 행사기에 각국은 신중을 기해 회의를 하는 중이었다.
“진작 그렇게 나올 것이지.”
“허억… 허어억…”
진천우가 큰 숨을 내쉬었다.
그러던 그때!
“원장님! 큰일…”
비서가 원장의 허락도 없이 안으로 들어왔다.
안 그래도 눈앞에 있는 괴물 때문에 짜증 나 죽겠는데, 비서까지 마음대로 행동하니.
“지금 중요한 손님을 맞이하고 있는 거 몰라!”
진천우가 버럭 소리쳤다.
비서가 황급히 무릎을 꿇었다.
그도 당소미가 어떤 여자인지 알고 있었다.
경솔한 행동에 두려움이 몰려온 그였다.
“요, 용서해 주십시오!”
“무슨 용무로 내가 있는데 그리 행동했을까?”
당소미가 화사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정체를 모르고 봤다면 굉장히 매력적이었을 터.
하지만 그녀의 정체를 아는 진천우와 비서는 몸을 잘게 떨었다.
저 미소는 죽음의 미소였으니까.
“제, 제발 용서를…”
“그러니까 어떤 일이냐고 묻잖아.”
“한국의 도왕이… 죽었다고 합니다.”
“응? 갑자기?”
당소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비서는 무릎으로 기어가 그녀에게 도왕에 관련 기사를 보여 줬다.
“혈불의 힘을 받은 도왕이 죽을 수 있나? 누가 죽였는지 알아?”
“이준이라는 놈입니다.”
비서가 이준의 얼굴을 홀로그램에 띄우자.
당소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결국 이놈한테 죽었구나.”
“이 애송이를 아십니까?”
“알지. 내가 직접 봤거든.”
“당소미님께서 말입니까?”
“어. 인주께서 관심을 가지고 계셔.”
“이 애송이가 뭐기에… 그분께서?”
“기사 봤잖아? 도왕을 죽인 게 이놈이라고. 넌 18살의 나이에 도왕을 죽일 수 있어?”
“…불가능합니다.”
“인주께서 관심을 가지기에는 충분한 이유야.”
무엇보다 도왕은 평범하지 않았다.
파천멸기의 파편을 몸에 지녔던 각성자였다.
그런 도왕을 이곳의 각성자가 이기기란 쉽지 않았다.
그게 한국의 검제라 할지라도.
“그리고 인주께서 이놈을 보고 싶어 하셔.”
“아시아 학원 대항전을 빨리 열었으면 하시는 게 이놈 때문입니까?”
“이제야 머리가 돌아가? 그러니까 꼭 열어야겠지?”
“일정을 잡아 보겠습니다.”
“인주께선 인내심이 없어. 빠르게 진행해야 할 거야.”
“명심하겠습니다.”
***
“뀨우!”
이준이 붉은 산맥 게이트로 돌아왔다.
그가 나타나자 파랑이가 제일 먼저 알아차리고 달려 나갔다.
“읏차. 아무 일 없었지?”
“뀨웃!”
파랑이가 주둥이를 하늘로 올렸다.
자신만만한 표정이었다.
“잘 있었구나.”
파랑이가 있는데 무슨 일이라도 있었을까.
붉은 산맥 게이트의 보스 몬스터가 와도 녀석에겐 안 됐다.
그래서 게이트를 나가기 전 파랑이를 이곳에 두고 간 것이기도 했고.
“나 없는 동안 훈련은 열심히 했…”
“예엣!”
이준이 말도 끝내기 전에 특별반 학생들이 대답을 했다.
그것도 아주 우렁차게.
게이트가 떠나가라 목청껏 외쳤다.
반짝반짝한 눈빛, 존경심을 가득 담은 미소.
평소에 이준만 보면 덜덜 떨며 죽상을 짓던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익숙하지 않은 그들의 행동에 이준이 차경진에게 물었다.
“차 선생님. 쟤들 왜 저래요?”
“도련님과 도왕의 싸움을 봐서 그런 것 같습니다.”
차경진이 폰을 흔들어 보였다.
하긴 보란 듯이 기세를 드러냈는데 모를 리가.
“앞으로의 교육은 편하겠구만.”
“선생님. 저흰 준비됐습니다. 다음 교육으로 넘어가시죠.”
박혁진의 말이었다.
녀석의 눈엔 훈련의 의지가 가득했다.
다른 학생들 또한 같은 눈빛.
모두가 전과는 달라진 태도를 보였다.
전에는 생존을 위한 훈련이었다면, 지금은 강해지겠다는 의지였다.
“밥은 진작 다 먹었겠고. 예정대로 어둠의 제단으로 가자.”
“옙!”
학생들이 분주히 움직였다.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챙겨야 할 물건들을 넣었다.
일사불란하게 움직인 끝에 준비를 끝마친 특별반 학생들.
이준은 그들을 데리고 어둠의 제단으로 갔다.
* * *
어둠의 제단은 사방에 둘러싸인 산맥 밑에 있었다.
굉장히 외진 곳.
산세 때문에 붉은 산맥을 클리어하려는 각성자들이 어둠의 제단을 찾지 못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게다가 다크 엘프들이라, 그들의 기척을 찾는 게 더 힘들기도 했다.
“삼엄하다.”
“여길 우리가 뚫을 수 있을까?”
“다크 엘프들이 어둠의 힘을 충전하는 곳이라면 굉장히 중요한 장소 아니야? 본진에서도 신경을 많이 쓸 것 같은데.”
암살자인 밤의 나락을 포함한.
창과 검, 궁을 들고 있는 다크 엘프들도 보였다.
심지어 세 명씩 짝을 지어 다니는 다크 엘프들.
그들은 2.5M 정도 되는 리자드맨을 등에 탄 채 정해진 구역을 정찰하고 있었다.
망루와는 전혀 다른 전력에 의지가 꺾이려는 찰나.
“강해지기 싫으면 안 해도 되고.”
이준이 학생들을 떠봤다.
그러자 조금 전까지 걱정을 하던 학생들은 어디 갔는지.
“난 자신 있어.”
“이 정도는 되어야 시련이라고 할 수 있지.”
“서포터는 저에게 맡겨 주세요.”
각자 팔을 걷어붙였다.
이준이 도왕과 싸워서 이긴 게 그들에게는 강해지고 싶은 동기가 된 듯싶었다.
그들의 몸에는 투기가 가득했다.
“난 정면으로 치고 갈 생각은 아니었는데.”
학생들의 몸에서 나온 투기 때문에 경계를 하던 다크 엘프들이 그들이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친 다크 엘프와 학생들.
“각자 진을 펼쳐서 공격해.”
이미 들켜 버린 통에 이준은 학생들에게 공격 명령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