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0화
해가 지고 어둠이 찾아왔다.
주변은 굉장히 어두웠다.
각성자라도 눈에 내공을 집중하지 않으면 앞이 보이지 않았다.
붉은 산맥의 특징.
밤이 되자 유독 짙어진 마기가 시야를 가렸다.
“쌤. 밤의 나락을 상대하려면 밤보다는 대낮이 좋지 않나요?”
저녁이 되서야 움직인 이준이 도통 이해가 안 가는 박정연이었다.
“맞습니다.”
“그런데 왜 저녁에 움직여요?”
“훈련이지 않습니까?”
이준이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게이트에 들어와서 종종 보이는 미소였다.
“그래도 훈련을 단계별로 진행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그건 제가 정합니다. 교육생들은 절 따라오시기만 하면 됩니다.”
교관일 때는 굉장히 냉랭하게 말하는 이준이었다.
그 모습에 섭섭해 할 법도 하지만.
‘저건 저대로 매력 있네?’
그녀는 전혀 개의치 않아했다.
오히려 이건 또 색달랐다.
마냥 어릴 줄만 알았던 옆집 소년이 갑자기 훤칠한 남자가 되어서 나타난 것 같다 해야 하나.
묘하게 설렜다.
그녀가 한눈을 팔고 있는 사이.
“아야!”
앞에 가던 이준이 걸음을 멈췄다.
뒤따라가던 박정연이 이준의 등에 이마를 꽁 박았다.
“쉿!”
이준이 앞을 가리켰다.
그의 손가락이 가리킨 곳엔 밤의 나락으로 보이는 다크 엘프가 있었다.
그것도 혼자였다.
“저놈이 밤의 나락이구나….”
“근데… 와, 얼굴 미쳤나 봐.”
“응.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 같아.”
정예나와 정예은이 밤의 나락을 본 평가였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제정신이냐.
미친 것 아니냐, 라고 말했겠지만, 이곳에 있는 모두가 인정할 정도였다.
“와, 씨! 저 얼굴로 다니면 무슨 느낌일까?”
박혁진의 말에 허수가 그를 보았다.
“응? 왜 그렇게 봐?”
“가진 사람이 더 한다는 생각을 받았습니다.”
그의 말을 들은 박혁진이 씨익 웃었다.
“가진 사람? 가진 사람이 무슨 뜻이야?”
답은 이미 정해진 질문.
허수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아 뭔데! 왜 말을 하다 말아!!”
‘쟤가 저러는 게 한두 번이냐’ 하는 얼굴들을 했다.
“쉿, 조용!”
이준이 학생들을 집중시켰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세 명이 더 합류했다.
망루 교대 인원들.
들었던 정보대로 정확히 저녁 8시에 교대를 했다.
어느덧 그들은 망루의 시야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그들이 향하는 곳은 다크 엘프의 근거지가 있는 방향이 아니었다.
그들이 가는 곳은 바로 제단.
다크 엘프의 힘이 모여 있는 장소였다.
다크 엘프가 강한 이유는 바로 이 어둠의 제단 덕분.
근무하는 동안 어둠의 힘은 조금씩 사라진다.
원래부터 강한 녀석들이지만 어둠의 힘을 받은 직후가 힘이 제일 강성할 때였다.
그래서 근무가 끝나면 사라진 힘을 재충전하러 제단으로 먼저 향하는 것이었다.
이때가 경계도 느슨할 때라 학생들이 훈련하기엔 딱 좋았다.
“허수야. 준비 됐지?”
“예!”
“가자.”
이준이 파랑이를 품에서 꺼냈다.
파랑이의 역할은 녀석들이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거다.
파랑이의 정체는 몬스터.
몬스터끼리는 종족이 달라도 서열이 있었다.
일반 레드급 몬스터인 다크 엘프들이 레드급 보스 몬스터인 파랑이를 본다면 일반 레드급 몬스터인 다크 엘프들은 온몸이 그대로 굳을 터.
아마 도망조차 못 칠 것이었다.
그거면 됐다.
이 네 명의 다크 엘프로 백호연격진의 숙련도만 높이면 되니까.
허수가 그들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인간?”
특별반 학생들이 속속 나타나자 밤의 나락이 서로 눈을 마주쳤다.
그중 한 명이 뒤를 돌아서 망루 쪽으로 가려는 순간!
우뚝.
“몬스터?”
움직이는 걸 멈췄다.
밤의 나락 뒤편.
언제 그들의 뒤를 점했는지 파랑이가 바닥에 앉아서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고 있었다.
“뭐해? 어서 발라스 님께 알려!”
그들이 있는 이 지점은 다크 엘프에게 가장 중요한 곳.
힘의 근원인 어둠의 제단이 근처에 있었다.
다른 장소였다면 몰라도 제단이 있는 곳에 인간이 나타났다는 건 경계해야할 일.
그래서 그들은 상관에게 보고하고자 빠르게 움직이려 들었다.
“알았어.”
그러나 아직까지는 파랑이가 기운을 다 드러내지 않은 상황.
때문에 밤의 나락이 파랑이란 존재를 무시하고 움직였다.
그 결과는 참혹했다.
“끄윽…!”
어느새 파랑이의 송곳니에 물린 밤의 나락이 신음을 토했다.
화르륵!
밤의 나락은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파랑이의 스킬.
암화에 휩싸여 재가 되었다.
밤의 나락은 뒤늦게야 파랑이의 정체를 알았다.
파랑이가 스킬을 쓰자 보인 꼬리.
무려 7개의 꼬리가 눈앞에 펼쳐졌다.
“청호?”
“보스 몬스터가 붉은 산맥에 왜?”
밤의 나락이 불신 가득한 눈으로 파랑이를 보았다.
몬스터는 인간의 적.
간혹 청호와 같이 인간과 붙어먹은 몬스터가 있었지만, 대부분 등급이 다 낮았다.
결국 인간에게 있으나 마나한 존재.
그런데 눈앞의 청호는 질적으로 달랐다.
동료를 단숨에 죽인 몬스터.
못해도 자신들보다 강했다.
* * *
“애완동물 아니었어?”
“그 귀여운 게 몬스터라니…”
정예나와 정예은이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저 송곳니가 자신의 피부를 파고들면 어떻게 될까.
지금 보고 있는 것처럼 검은 불꽃에 휩싸여 아주 고통스럽게 죽겠지?
정예나는 몸을 흠칫 떨었다.
저런 괴물 같은 몬스터를 어떻게 길들였을까.
이준이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다.
두 자매와 마찬가지로 놀란 두 사람.
박정연과 박혁진은 파랑이가 몬스터임을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로 강할 줄은 몰랐다.
쬐그만 게 강해 봤자 얼마나 강할까.
귀엽게 생긴 것만으로도 키우기에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여겼다.
그러나 지금 그 생각이 송두리째 흔들렸다.
“어쩜 좋아! 귀여운데 능력도 좋아. 애완동물은 주인이랑 닮는다더니, 딱 우리 준이 쌤이잖아?”
박정연이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준이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다가 아차 싶었다.
현재 자신은 근엄 있고 존경 가득한 선생님이다.
저런 말로 헤벌쭉해선 안 됐다.
“수와 정예나, 정예은 교육생은 백호연격진을 펼칩니다.”
이준의 말에 세 사람이 정신을 차리고 밤의 나락 앞에 섰다.
3:3의 대치였다.
허수가 참마도를 적에게 겨눴다.
“갑니다!”
팟!
전방 선 허수가 땅을 박찼다.
그와 동시에 밤의 나락도 함께 움직였다.
정확하게는 딱 한 명만이 허수네 조를 향해 뛰어들었다.
나머지는 이준과 파랑이에 의해 움직임이 막혔다.
“허튼짓하면 죽는다.”
“뀨!”
이준의 말에 밤의 나락이 인상을 찌푸렸다.
정확히 공격권에 서 있는 남자와 청호였다.
까딱 움직였다간 청호의 송곳니에 목이 뜯겨 나갈 판.
그들은 눈알만 굴렸다.
“가만히 보고 있어. 네 동료가 어떻게 죽어 가는지.”
밤의 나락은 인간들을 가장 많이 죽인 몬스터에 해당했다.
생김새는 인간과 다름없지만, 피에 굶주린 몬스터들.
어둠의 힘에 침식당한 살육자일 뿐이었다.
카강깡!
옆에선 쇠가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허수의 참마도와 밤의 나락의 무기인 쌍단검이 교차하는 음이었다.
그래도 레드급 몬스터라 그런지.
B급 각성자들이 진을 이루어 공격을 하는데도 흐트러짐이 없었다.
아니 레드급 몬스터를 상대로 B급 셋이서 이만큼 버티고 있는 것 자체가 세상이 뒤집어질 일이었다.
“내가 할게!”
허수가 참마도를 회수했다.
곧바로 정예은이 암기를 날렸다.
그녀의 이명은 암화.
암기들이 허공에 수놓아졌다.
타당탕탕!
밤의 나락이 정예은의 암기를 쳐 내고 피했다.
암살자답게 움직임이 아주 기가 막혔다.
물 흐르듯 이동하는 발걸음.
인간들을 요령으로 살인을 한 게 아니라고 증명을 하는듯한 움직임이었다.
“어림없다!”
정예은의 암기를 뚫고 불쑥 튀어나온 단검.
그녀의 허벅지를 베려는 게 정예나의 눈에 들어왔다.
“예은아, 나….”
그 다음 차례는 언니인 정예나의 차례.
그녀의 손이 초록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녀가 만독암가의 독장인 비사장을 발출하려는데 정예은의 앞에 자기 몸만 한 대도가 나타나 앞을 가로막았다.
그그그윽!
밤의 나락이 쥐고 있던 단검이 참마도를 훑고 지나쳤다.
아주 위험한 공격.
“고마….”
정예은이 감사의 인사를 하려는 찰나.
“누님! 공격하셔야 합니다.”
허수가 다음 공격자를 향해 외쳤다.
“어? 어!”
정예나가 정신을 차리고 비사장을 발출했다.
“귀찮게 칫!”
밤의 나락이 신형을 뒤로 주르륵 뺐다.
눈 깜짝할 사이에 공수를 교차한 네 명이었다.
밤의 나락이 뒤로 뺀 덕에 잠시 소강상태가 됐다.
정예나가 허수를 돌아봤다.
‘방금 방어는 차 쌤이 보여 준 방어식이었어.’
그녀도 독화란 별명을 지닌 천재였다.
자신의 공격 차례임에도 허수가 나서서 상대의 공격을 막은 의도를 알아차렸다.
박은비네 조가 보여 줬던 공격과 방어식.
전면에 있는 사람이 공격하면 방어는 중앙에 있는 사람이 한다.
네 명이 백호연격진을 이룰 때 보이는 움직임이었으나.
허수는 3인일 때 적용했다.
이게 실력인지 우연인지 아직 모른다.
‘한 번 더 해 보면 알 수 있지 않을까?’
정예나가 허수를 향해 말했다.
“다시 공격하자.”
“이번에도 제가 먼저 하겠습니다. 누님.”
허수가 참마도를 들고 밤의 나락에 쇄도했다.
위험해 보이는 이준과 청호가 가만히 있는 걸 본 밤의 나락은.
“인간이라 그런가? 너무 멍청해!”
뒤통수 당할 일은 없다고 생각해 허수네 조를 향해 마음 놓고 뛰어들었다.
허수의 참마도와 쌍단검이 또 한 번 부딪혔다.
깡깡!
밤의 나락이 몸을 옆으로 움직였다.
허수의 오른편을 점하려는 행동.
하나 호락호락할 그가 아니었다.
그도 똑같이 몸을 비틀자 뒤편에서 백호연격진을 이루고 있던 정예나와 정예은도 덩달아 옆으로 빠르게 이동했다.
허수의 공격이 끝나고 정예은의 공격 차례가 왔다.
앞서 했던 패턴과 똑같자,
“날 너무 얕보는구나!”
밤의 나락이 아주 짧은 틈을 비집고 공격했다.
정예은은 몸을 뒤로 빼며 나비 모양의 암기를 날렸다.
하지만 그녀보다 밤의 나락의 속도가 훨씬 빨랐다.
막는 방법은 하나.
정예은의 공격과 정예나의 공격이 동시에 이루어지면 밤의 나락의 공격을 상쇄시킬 수 있었다.
두 자매가 한 생각을 했는지.
정예은이 암기를 날리고 정예나가 비사장을 펼침과 동시에 자리를 바꿨다.
따당-
쾅!
밤의 나락이 암기를 쳐 냈지만, 왼팔에 비사장을 맞고 말았다.
“성공했어!”
정예나가 좋아했다.
자신이 레드급 몬스터를 상대하는 것도 모자라 몸에 독장을 적중시켰으니까.
기뻐할만 했다.
그러나 그게 실수였다.
상대는 인간을 많이 죽여 본 몬스터.
무엇보다 이곳은 자신들의 근거지가 있는 곳이다.
상처는 치료하면 그만.
인간을 죽이는 게 더 중요했다.
밤의 나락의 오른손에 들린 긴 단검이 정예나의 목을 향해 날아왔다.
위험을 느낀 그녀가 몸을 뒤로 빼려고 했지만.
‘늦…어…’
단검이 너무도 빨랐다.
정예나가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한데 근처에서 쇳소리가 들려왔다.
깡!
“또, 또!”
전과 같이 허수의 참마도가 밤의 나락의 공격을 막고 있었다.
‘허수가 차 쌤 역할을 하고 있는 거였어.’
그랬다.
정예나는 자신이 이 백호연격진의 중심이라고 생각했지만.
실상은 허수가 공격진을 조율하고 있었던 것이다.
진법을 조율하는 건 조를 이루는 조원보다 뛰어나야 했다.
그렇다는 건 허수가 동생과 자신보다 실력이 좋다는 말이었다.
‘그러고 보니까 쟤가 쓰고 있는 도법. 패왕도가의 도법과 비슷하단 말이야.’
좀 더 자세히 알고 싶었지만 그럴 상황이 아니었다.
앞에는 아직도 적이 있었기 때문에.
그것도 굉장히 화가 난 상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