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5화
아이스크림과 군것질거리의 뇌물 공세로 인해, 다행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방금 전까지 지옥 훈련을 받은 게 맞는지 의심들만큼 한지유의 표정은 행복해 보였다.
한쪽 손엔 특제 민트초코 아이스크림을.
다른 한 손에는 민트초코 우유를 들고 번갈아 먹고 있었다.
‘별나다 별나.’
반민초단인 이준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한지유에게서 시선을 돌린 그가 박씨 남매를 보았다.
[박정연]
나이: 19살
등급: A(완숙)
직업: 무사고 3학년
이명: 검화
호감도: 90(신뢰)
특징: 천뢰제왕신공(S), 창궁무애검법(AA), 무한보(A)
[박혁진]
나이: 18살
등급: A(완숙)
직업: 무사고 2학년
이명: 검룡
호감도: 90(신뢰)
특징: 뇌격검(무기), 명안(S), 천뢰제왕신공(S), 무한보(A), 섬전심삽검뢰(AA)
박혁진은 명안이란 아주 좋은 특성이 있었으나, 전투에선 별로 쓸모가 없었다.
박정연은 애초에 특성이 없었고.
그 때문에 천무대전에서 한지유와 박정연이 무승부로 끝난 걸지도 모른다.
그만큼 특성은 각성자에게 있어서 아주 중요했으니까.
특성이 없어도 A급 완숙에 도달한 건 다 S급 무공인 천뢰제왕신공 덕분.
또한 박정연이 천재에 속하니 가능한 성장이었다.
여기서 특성 하나만 생긴다면 엄청난 성장이 이루어질 거다.
‘기초 체력 훈련만 해서 그런지 몰라도 특성을 안 주네.’
하긴 기초 체력만 단련했는데 특성을 주는 건 개사기였다.
테크트리 포인트를 얻는 것만으로도 차고 넘쳤으니까.
‘혁진이랑 정연 누나도 챙겨줄 때가 오긴 했지.’
몇 달 전에 박혁진이 했던 말.
-왜 다른 사람만 챙겨 주냐. 나도 좀 챙겨 줘라.
녀석이 농담으로 말한 걸 안다.
하지만 장난으로 들리지 않았다.
녀석의 말이 맞았으니까.
전생에 보잘 것 없는 자신을 보살펴 줬던 게 두 남매였다.
가족도 버러지라고 버렸는데 유일하게 사람 취급을 해 줬다.
무사고 랭킹 1, 2위이며 전생에선 최연소 AA급에 든 각성자가 말이다.
이번 삶에서도 자신이 너무 비상식적인 성장을 보여서 그렇지 두 남매도 충분히 천재 반열에 들었다. 아니, 오히려 지난 삶보다 더 빠른 성장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동안 너무 소원했어.’
솔직히 허수와 반 아이들을 먼저 챙기기도 했다.
남매를 먼저 챙기는 것이 맞기도 했지만, 철혈검가란 가문의 성격을 간과해 버린 탓도 있었다.
은근 FM인 가문.
박혁진과 정연누나가 천재라 해도 A급을 넘어 AA급에 들어서지 않는다면 자기의 무공을 전수해 주지 않을 검제였다.
아무리 금쪽같은 손자와 손녀라도 말이다.
이 부분에서 큰 착각을 했다.
무사고 학생들이 치고 올라옴에 따라 검제가 박혁진과 정연 누나를 챙기지 않을까.
예상대로 천무대전이 끝나고 두 사람은 검제와 폐관수련을 했다.
그런데 무공 전수는 해 주지 않고 그저 단련만 시킨 것 같았다.
여기서 아차 싶었다.
검제는 자기가 생각한 기준을 철저히 지킨 사람이라는 것을.
‘이참에 특성도 개화시키고 검문의 무공을 찾아다가 쥐어 줘야겠어.’
두 사람에게 미안한 마음을 훌훌 털어 버리고 싶었다.
‘사부님.’
[크흠. 사부가 목이 마르구나.]
이준은 재빨리 페트병 물을 그릇에 따랐다.
그리고 그 앞에 무릎을 꿇고 눈을 감았다.
합장까지 하자.
[제자야. 뭐하느냐?]
‘사부님이 물을 드실 수 있게 빌고 있는데요?’
[가아아알!]
‘귀청이야! 왜 그러세요!?’
[감히 이 사부를 우화등선도 못한 귀신 취급을 하는 것이냐?]
‘귀신 아니셨어요?’
[이, 이 빌어먹을 제자 놈이!]
무극자 사부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오르내렸다.
자칫 큰 사고로 이어질 수 있는 상황.
사부의 노호성이면 내상을 입을지 모른다.
특별반 학생들 앞에서 쪽팔리게 쓰러지는 꼴을 보일 수 있을까.
죽어도 싫었다.
학생들을 가르치는 선생은 언제나 존경받고 위엄이 있어야 했으니까.
‘헤헤. 농담입니다. 농담. 제가 위대한 고금제일인을 귀신이라고 여기겠습니까? 신선계에 자리가 없다면 한 명의 머리끄댕이를 잡고 강제로 자리를 만드실 분 아닌가요? 이 제자는 사부님이 언제나 웃을 수만 있다면 뭐든지 할 수 있습니다.’
이준이 장황하게 말을 늘어놓았다.
무극자 사부를 하늘 위로 치켜세우는 걸 목표로.
이준의 정성이 사부에게 닿았는지.
[끌끌. 이 사부가 갸륵한 제자를 오해했나 보구나. 그래, 계속 말하려무나.]
무극자 사부가 아예 자리를 깔고 칭찬을 듣기 시작했다.
이준의 입은 속사포로 움직였다.
대체 어디서 이런 말을 생각해 냈는지, 갖은 아부를 떨었다.
[나보다 먼저 신선계로 올라갔다고 선배 노릇하는 꼬라지들은 쯧쯧.]
‘당연히 사부님께서 신선계의 일좌를 차지하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무공으로 보나 외모로 보나 신선 모두를 찜쪄먹을 수 있지 않을까 사료되옵니다.’
[홀홀. 제자는 그만 이 사부를 띄워 주거라. 낯간지럽구나.]
더 칭찬을 해 보라고 할 때는 언제고.
참 비위 맞추기 힘들다.
이게 사회생활이라는 건가.
회사원들이 존경스러울 지경이다.
얼추 무극자 사부가 기분이 좋아진 듯 보였다.
‘그래서 말입니다. 사부님.’
[검문의 무공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싶다는 말이구나?]
‘제자가 두 남매한테 은혜를 갚을 수 있게 해주세요.’
[큼큼. 특별히 네게만 가르쳐 주겠느니라. 저어얼대! 사부가 기분이 좋아서 알려 주는 게 아니니라.]
‘아무렴요!’
* * *
서걱!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남자의 창이 승포를 입은 한 노인의 목을 갈랐다.
창날에 목이 잘린 사람은 다름 아닌, 소림사의 주지.
세계 랭킹 2위이자 활불이라 불리는 왕역봉이었다.
“기대한 내가 바보지. 약해. 너무도 약해.”
“인주께서 강하신 겁니다.”
“이곳은 강한 이들이 넘쳐날 줄 알았건만, 무림보다 못하군.”
인주라 불린 남자의 손에 세계 랭킹 2위가 죽었다.
그것도 반항 한 번 제대로 못 하고 몸만 떨다 갔다.
“대웅전에 태워라.”
“예!”
인주의 수하들이 소림사의 대웅전에 불을 붙였다.
타닥탁탁.
소림사의 건물이 화마에 휩쓸렸다.
남은 소림사의 승려들은 그저 멍하니 불에 타고 있는 대웅전을 보아야만 했다.
저항은 불가였다.
주변에 널린 승려들의 시체들.
이 모두가 인주란 남자로 인해 불귀의 객이 되었다.
그들을 바라보던 독나찰 당소미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들은 어떻게 할 생각으로 살려 두신 건가요?”
“우릴 따를 자들은 살려 두고 아닌 놈들은 모두 죽여.”
“명!”
인주의 수하들이 당소미 대신 대답했다.
인주가 몸을 돌렸다.
흥미가 잔뜩 떨어진 얼굴이었다.
이곳의 천마란 자와 활불이란 자도 그를 만족시켜주지 못했다.
새로운 곳이라면 강자가 득실할 줄 알았건만.
기대 밖이었다.
그때였다.
“인주.”
“뭐냐?”
“외람된 말씀이온데…”
“소미가 어떤 말을 하려고 이리 뜸을 들이는 걸까?”
“인주의 창법을 보았어요.”
“내 창법?”
인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잘 이해되지 않는 모양이다.
그가 다시 되묻기 전에 당소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아마도… 인주의 무공도 이 세계에서 계승되고 있는 게, 컥!”
인주의 팔이 번개같이 움직여 당소미의 목을 옥죄였다.
그의 눈에선 검은 안광이 쏘아져 나왔다.
“다시 한 번 말해 보거라. 뭐가 어째? 내 무공이 이곳에 나타났다고?”
“큭… 그, 그렇… 습니다….”
털썩!
인주가 당소미의 목을 놓아주었다.
“쿨럭쿨럭!”
당소미가 기침을 하며 숨을 골랐다.
“알아듣게 자세히 설명해 봐.”
인주의 말에 당소미가 자리에서 일어나 한국에서 보았던 일을 고했다.
듣고 있던 인주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 얼굴을 확인한 당소미가 더 말해야 할까 고민하다가 결국 다 말했다.
“그걸 왜 이제야 말하지?”
“제가… 인주의 창법을 잘못 본 게 아닐까 하고… 같은 듯 달랐으니까요. 그런데 오늘 보니 확실해졌어요.”
인주는 활불을 잡을 때 그의 고유 무공을 사용했다.
사부로부터 받은 창법.
그를 무림에서 무신이라 불리게 해준 무공의 이름은 백영창법이었다.
‘그 빌어먹을 노괴의 무공은 아무나 익히는 게 아니야.’
무림에서도 천재 중의 천재.
만 명 중 한 명, 있을까 말까한 그런 극소수의 천재들이나 익힐 수 있는 무공이다.
그런데 백영창법을 익혔어?
확인해 볼 필요는 있었다.
“소미, 네가 볼 땐 어떻더냐?”
“초절정은 되어보였어요.”
“당연하지. 그게 어떤 무공인데.”
“파천혈… 아! 죄, 죄송합니다.”
“그 이름을 다신 입에 올리지 마라. 천주 사형이었다면 넌 지금 한줌의 혈수가 됐을 거야.”
“기, 깊이 새겨 들을 게요.”
“백영창법을 배운 놈의 나이가 어떻게 되더냐?”
“약관(20세)도… 안 되어 보였습니다.”
“뭐라!?”
이곳으로 온 이후로 인주가 제일 놀란 표정을 지었다.
“네가 잘못 본 게 아니냐?”
“한 달 지나도록 고심한 이유도 그 때문이었어요.”
“음…”
인주의 인상을 좀처럼 펴지지 않았다.
그 백영창법이.
자신의 사부였던 죽지 않은 노괴가 전수해 줬던 무공이 현대에 내려왔다.
그것도 스무 살도 안 된 어린놈이 익혔단다.
그 어려운 백영창법을 익히고 초절정에 올라섰다는 건, 꽤 위험한 소식이었다.
“내가 오랑캐 나라에 갔다 와야겠다.”
“…또다시 외람된 말씀이오나 인주께선 하셔야 할 일이 있지 않나요?”
“잠깐이면 된다.”
“지주께서 인주를 기다리고 계실 겁니다.”
“으음….”
지주 같은 엄청난 실력을 소유한 자를 이곳으로 소환하려면 굉장히 많은 피와 내공이 소모된다.
그래서 그를 소환하려면 인주 말고는 역천진을 운용할 사람이 없었다.
그럼에도 인주는 쉽게 마음을 정하지 못했다.
현대에 백영창법이 있다는 건, 풍뢰공과 파천신공도 있는 게 아닐까.
이 모든 게 자신의 사부.
고금제일인이었던 노괴의 무공이었다.
인주의 걱정을 알기라도 한 듯.
“제가 이미 생각해 놓은 방법이 있어요. 들어 보시겠어요?”
당소미가 인주에게 기가 막힌 계책을 제안했다.
그녀의 음성이 들릴 때마다 인주의 굳었던 얼굴이 펴졌다.
그녀의 말이 끝났을 땐.
“크하하하. 아주 괜찮은 방법이구나. 내 조금만 기다려 주지.”
* * *
철컥!
“오, 이준 선생. 정말 오랜만에 보는 것 같군요”
학교 대회의실 안에 먼저 앉아 있었던 한민성 이사장이 반갑게 맞이했다.
일반반 같은 경우에는 같은 건물에 있어서 얼굴을 마주칠 일이 많겠지만, 특별반은 달랐다.
건물 자체가 달랐으며 본관과는 동 떨어져 있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좀 늦었네요.”
“괜찮습니다. 다른 선생님들도 다 이제 막 도착했으니까요.”
개학하고 오늘까지 정확히 한 달이 지났다.
2학기 들어 첫 번째 실전이 있는 달이었다.
이준이 남은 자리에 앉았다.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뵙소. 특별반 지도를 엄청 강도 있게 하고 있다는 소문이 학교 내에 자자하오.”
“그냥 기초 체력 훈련이에요.”
“허허. 기초 체력 훈련만으로 학교의 랭커들이 초주검이 된단 말이오?”
“체력은 형편이 없더라고요.”
“이준 선생의 눈이 높으신 모양이오.”
이준과 청운 스님이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남 비서가 회의실 스크린을 켰다.
화면에는 여러 개의 게이트가 나왔다.
청운 스님과 이야기를 나누던 이준도 화면을 보았다.
‘천변의 호수, 독나의 숲, 공포의 요새…… 죽음의 길 우리 반이 갈 곳은 없네?’
요번 실전은 박씨 남매의 특성을 개화해 줄뿐더러 검문의 무공을 얻으러 가려한다.
화면에 나온 게이트에는 원하던 이름이 없었다.
“저 이사장님.”
“네. 이준 선생. 할 말이라도 있을까요?”
“저 화면에 나온 게이트들은 특별반과 일반반이 선별해서 가는 게이트죠?”
“맞습니다. 무슨 문제라도 있을까요?”
“저희 특별반은 다른 게이트를 가고 싶은데 양해 좀 해 주시면 안 될까요?”
선별한 게이트는 난이도가 굉장히 높았다.
블루존 게이트 중에서도 최상위 난이도에 속해 있었다.
그런데 다른 게이트를 가겠다니.
대체 어떤 게이트를 가고 싶길래 저러는 걸까.
궁금해하던 찰나에 이준의 옆에 있던 청운 스님이 먼저 물었다.
“이준 선생은 어느 게이트를 가고 싶길래 저 게이트를 마다하는 것이오? 빈승이 보기에는 학생들의 수준으로는 목록에 있는 게이트도 버거워 보이오만.”
“제가 가고 싶은 게이트는….”
대회의실에 있는 모든 선생이 이준의 입만을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