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4화
다음 날.
“최고 엘리트들이 이것 밖에 달리지 못합니까. 아니면 본 교관이 우스워서 게으름을 피우는 겁니까.”
특별반 학생들을 죽도록 굴렸다.
그 다음 날도.
“한지유 교육생! 지금 본 교관을 보는 눈빛은 뭡니까? 지금 반항하는 겁니까? 안 되겠습니다. 운동장 20바퀴 추가합니다.”
빨간 모자를 쓴 군대 조교로 빙의했다.
일주일이 지나고.
드디어 불만이 터졌다.
진씨 가문의 후계자이자, 철룡 진경수가 이준에게 버럭 화를 냈다.
“해도 해도 너무한 것 아니야?”
“지금 뭐라고 했습니까?”
이준이 빨간 모자를 더욱 눌러썼다.
뒷짐을 진 채 진경수의 앞으로 걸어갔다.
움찔.
진경수가 순간 쫄았다.
나이는 한 살 어려도 자신보다 강한 각성자.
아니지.
자신의 아버지도 아래로 볼 수 있는 게 눈앞에 있는 이준이었다.
‘그래도 너무 하잖아. 이건 훈련이 아니고, 그냥 우리랑 기세 싸움을 하는 거야.’
이곳에 모인 사람들의 면면을 보라.
하나 같이 각 가문의 후계자들만 모여 있었다.
검화, 검룡, 빙화, 독화, 암화.
철룡인 자신까지.
학교 최상위 랭킹에 드는 학생이 무려 6명이나 있었다.
이들을 전부 완전히 통제하는 건 힘들지 않을까.
이준은 오왕과는 달리 자신들의 또래였다.
학생이 선생으로 명함만 바뀌었으니, 완전히 통제하려고 학생들을 의미 없이 굴리는 거라고 생각했다.
“해도 해도 너무한 거라고 했어요.”
그래도 버럭 화를 낸 것과는 달리 정신을 차리고 이준에게 존대를 했다.
“교육 중엔 다, 나, 까로 합니다. 어떤 부분이 너무하다는 겁니까?”
“저는 제대로 된 훈련을 받으려고 왔지, 운동장에서 뜀박질이나 하려고 특별반에 든 게 아닙니다.”
“제 훈련이 의미가 없다?”
“비슷… 합니다. 너희들도 그렇잖아?”
진경수가 단짝인 정예나를 보며 말했다.
그녀 또한 가지고 있던 생각이었지만 감히 말할 순 없었다.
그녀의 아버지인 독왕이자 철왕이 이준의 훈련에 토 달지 말라고 했으니까.
불만은 많았으나 아버지의 말을 따라 조용히 있던 그녀였으나, 진경수가 나서자.
“맞습니다. 저흰 강당에서 허수를 가르치셨던 것처럼 난이도 높은 훈련을 원하지 이런 기초 단련을 원하는 게 아닙니다.”
그녀의 동생인 정예은 또한 고개를 끄덕였다.
박정연과 박혁진도 의문은 있었지만, 불만을 보이진 않았다.
이준이 자신들에게 시킨 훈련이 의미 없다고 생각하진 않았으니까.
설령 의미 없다 해도 이준이기에 믿었다.
두 남매가 지금까지 보았던 이준은 이유 없는 행동은 하지 않았다.
다 이유가 있기 때문에 기초 체력 훈련을 시키는 게 아닐까.
“좋습니다. 본 교관이 왜 철환을 차고 훈련을 시켰는지 이유를 가르쳐 주겠습니다. 진경수 교육생은 철환을 푸십시오.”
이준의 말에 따라 진경수가 철환을 풀었다.
몸을 속박하던 족쇄가 풀리자 몸이 너무나 가벼운 진경수였다.
“풀었으면 본 교관을 향해 가진 최고의 무공을 펼칩니다.”
“비무입니까?”
“실시!”
이준의 손이 움직여 진경수의 몸을 두드렸다.
금제시켰던 진경수의 내공을 풀어준 것이다.
이준이 거리를 벌리자 진경수가 두 다리에 내공을 불어넣었다.
그의 가문은 유일하게 구파일방의 무공을 계승하지 않은 곳이다.
진씨 가문의 계승 무공은 철완심법과 철심각.
각법으로 유명한 가문이다.
팟!
진경수의 진형이 앞으로 총알같이 튀어 나갔다.
그를 보고 있던 정예나의 눈이 커졌다.
“저 곰탱이가 저렇게 빨랐어?”
철룡의 등치는 190cm인 허수와 같았다.
거기에 육중한 무게까지.
언제나 굼뜬 움직임에 곰이란 별명으로 불린 그였다.
하나 지금의 움직임은 곰이 아니었다.
마치 호랑이가 먹이를 향해 뛰어가는 모습과도 같았다.
정예은만 놀란 게 아니라 당사자도 덩달아 놀라했다.
“무, 뭐야?”
“적을 향해 뛰어들었으면 죽일 각오로 덤벼들었어야지. 안 그렇습니까, 진경수 교육생?”
이준의 목소리가 지척에서 들리자 진경수가 오른쪽 발을 하늘 위로 들어 올렸다.
그의 자랑인 철심각이란 무공이었다.
300은 넘을 것 같은 크기의 발에 푸른빛이 맴돌았다.
그 발을 이준의 머리 위를 향해 내려찍었다.
쾅!
콰직-
진경수의 철심각이 박힌 땅이 거미줄처럼 쫙 갈라졌다.
“어딜 맞추는 겁니까? 전 여기에 있습니다.”
팟!
이준의 목소리에 진경수가 전광석화와 같은 속도로 움직였다.
예전의 그였다면 흉내도 낼 수 없었던 스피드.
이준의 도발에 바로 걸려든 그는 자신이 어떤 속도를 내고 있는지 금세 잊어버렸다.
쾅쾅!
그의 철심각은 애꿎게 땅만을 공격했다.
철룡이란 이명이 괜히 지어진 게 아닌 듯.
육중한 각법은 하나하나 위력이 대단했다.
정통으로 맞았다간 뼈를 못 추릴 것만 같은 느낌이랄까.
약이 잔뜩 오른 진경수가 철심각을 극성으로 펼쳤다.
족적을 남기며 하늘 높이 올라간 그가 발을 머리 위로 올렸다.
목표는 이준의 머리.
머리를 부숴 버리겠다는 일념을 담아 아래로 내려찍으려는 찰나!
이준의 손이 불쑥 나타나 진경수의 발을 덥석 잡았다.
손아귀에 힘을 줌과 동시에 진경수를 뒤로 넘겼다.
콰앙!
운동장에 먼지가 피어올랐다.
결과는 안 봐도 뻔했다.
“크윽!”
피었던 먼지가 걷히고 진경수가 바닥에 처박힌 채 신음을 토해 내고 있었다.
“아쉽지만 진경수 교육생과 본 교관의 수준 차이는 많이 납니다.”
“빌어먹을.”
“그래도 훌륭한 공격이었습니다.”
진경수가 인상을 찌푸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떻습니까? 이래도 본 교관이 괜히 여러분을 괴롭힌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이준이 폐허가 된 운동장 바닥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모든 게 진경수의 각법으로 생긴 흔적들이다.
곳곳에 만들어진 구덩이와 돌이 위, 아래로 튀어나와 있었다.
마지막 철심각에는 거대한 웅덩이가 생기기까지.
이전에 진경수의 실력이었다면 이런 스피드와 위력을 보이진 않았으리라.
“제 생각이 잘못 된 것 같습니다.”
“그럼 교육을 계속해도 됩니까?”
“…물론입니다.”
“다른 분들은 불만 없습니까?”
“없습니다!”
“알겠습니다. 다시 교육을 시작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학생들의 눈에 불꽃이 일렁였다.
100kg짜리 철환 네 짝을 차고 일주일 동안 운동장만 주구장창 뛰었다.
그런데 이 무슨 효과란 말인지.
기초 체력만 다졌음에도 실력이 올라가는 건 생각지도 못했다.
왜 진작 이런 훈련을 하지 않았을까.
후회도 들 지경이다.
하지만 특별반 학생들은 곧바로 절망에 빠졌다.
“여러분이 100kg에 적응된 것 같으니, 그 두 배인 200kg으로 철환을 바꾸겠습니다.”
“예에에?”
“실시합니다! 제일 늦은 교육생은 운동장 10바퀴 추가!”
박정연이 진경수를 노려봤다.
이게 다 이준에게 불만을 제기한 진경수 때문.
뒤통수에 살기 가득한 눈빛이 쏘아지자, 그는 애써 무시했다.
조금이라도 눈을 마주치기라도 한다면 어떤 소리를 들을지 모르니까.
“200kg짜리 철환 네 짝을 차고 운동장을 뛰기 전에 여러분이 할 일이 있습니다. 바로 엉망이 된 운동장을 원상 복구하는 것입니다. 알겠습니까?”
학생들을 배려해 주는 차원에서 이준이 할 수도 있었지만 그는 절대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않았다.
덕분에 진경수만 주구장창 학생들의 욕을 들어야 했다.
* * *
“여러분은 온실 속 화초로 자랐습니다. 본 교관은 여러분의 여린 부분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싹 개조를 시켜 생명력이 질긴 잡초로 새로 태어나게 할 겁니다. 알아들었습니까?”
“예에!”
“아악!”
“죽어!”
여러 가지 대답이 들려왔다.
이상한 대답도 섞였지만, 그냥 봐주기로 했다.
이렇게 철환을 차고 운동장을 달린지 한 달 가까이가 지났다.
철환의 무게는 점점 더해져 지금은 총 1600kg.
몸에 1.5톤 트럭을 지니고 달리는 것과 진배없었다.
특별반 학생들이 초인적인 육체를 가진 각성자라 가능한 무게였다.
그들의 눈빛은 처음과 많이 달라져 있었다.
되게 거칠어졌다고 해야 하나.
언뜻 눈빛엔 살기가 스치기도 했다.
그 모습을 본 이준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아, 스트레스 풀려. 여태껏 당한 걸 왕창 돌려줘야지.”
박씨 남매의 생각은 틀렸다.
좀 더 일찍 기초 체력을 끝낼 수 있었지만, 이준은 그러지 않았다.
한지유와 박정연에게 당했던 수모를 갚아 주기 위해 굴리고 또 굴렸다.
한 명은 시도 때도 없이 민트초코를 먹여 댔고, 다른 한명은 무슨 나무늘보도 아니고 자신의 몸에 붙어 늘어지느라 바빴으니.
[그 제자야.]
“왜요?”
[사부가 말 안 한 게 있는 것 같구나.]
“무슨 말이요?”
[저 아이들의 뒷감당은 생각해 보고 이렇게 굴리는 것이냐?]
“……”
[전혀 생각을 안 한 모양이구나. 쯧쯧.]
저들의 눈에 독기가 가득 찬 이유는 딱 하나.
한 시간 뛰고 고작 5분밖에 쉬지 못하게 했다.
무극자 사부도 10분을 쉬게 해 주었는데 이준은 거기에 반 밖에 해당하지 않는 시간만 주었다.
사부의 지도를 받고 생긴 인내심과 독기.
마음을 독하게 먹게 된 계기가 여기서부터 시작됐다.
“…사부는 뒷감당하고 훈련시키셨어요?”
[이 사부가 뒷감당할 일이 있더냐. 모두 사부의 발밑에 있었느니라.]
“그러면 저는 어떻게 해요?”
[그건 네 일이지 않느냐. 제자야. 이 사부와는 상관없는 일이니라.]
“아악!”
이준이 머리에 쓰고 있던 빨간 모자를 잡고 와락 구겼다.
망했다.
왜 이제야 알았을까.
한지유의 꽁한 성격.
이건 민트 초콜릿과 민트초코우유로는 감당할 수 없는 것이었다.
왜?
“그동안 두 개 다 못 먹게 했는데….”
훈련을 하는 동안 일체 먹지 못하게 했다.
자신에게 반항하지 못한 한지유의 고통을 지켜보기 위해.
중간에 한 번씩은 민트초코우유를 마시게 해줬어야하는데 민트초코 금지령을 때릴 때마다 솜사탕 잃은 너구리같은 표정을 짓는 한지유의 반응이 귀여운 나머지 선을 넘어 버렸다.
“한 달 선생 노릇 했으니까 학교 관둘까요?”
이준의 물음에 무극자 사부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대로라면 훈련이 끝난 후, 한지유가 제공한 민트초코향의 온갖 음식들을 코스로 먹게 되거나 평생 박정연을 등에 달고 다니게 될지도 몰랐다.
아니면 죽는 것뿐.
계속 불안한 나머지.
그가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마지막 훈련이 끝날 무렵.
검은색 차량이 특별반이 있는 곳으로 들어왔다.
뒤에는 커다란 냉장 트럭과, 냉동 트럭을 동반하고 있었다.
이준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이걸로 됐어!”
검은색 외제차 세단에서 노인이 내렸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회장님도 잘 계셨어요?”
암상의 회장 한금만이었다.
이준의 부탁으로 그가 직접 무사고로 행차했다.
“저야 요즘 이준 님 덕분에 아주 잘 자고 있습니다.”
“다행이네요.”
“그런데 정말 이걸로 되겠습니까?”
냉장 트럭과 냉동 트럭에 든 건 다름 아닌 아이스크림과 음료수였다.
식재료도 한가득.
여기서 3개월을 합숙해도 될 정도의 양이었다.
“이걸로 충분해요. 제일 좋은 걸로 구했죠?”
“요정의 꿀이 발라진 최고급 민트초코 아이스크림으로 가져왔습니다.”
“회장님이 제 목숨을 구하는 거예요.”
이준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냥 민트초코 아이스크림으로는 어림없었다.
아직 소문이 안 난.
매니아들 사이에서도 이제 막 퍼져 나가기 시작한 초인기 아이스크림을 구해 왔다.
이것만 있으면 한지유의 보복은 피할 것이다.
물론 민트초코 아이스크림만 가지고는 한 사람밖에 피할 수 없다.
남은 다른 사람.
박정연과 독화.
두 사람은 반민초단.
아무리 요정의 꿀이 발라진 민초 아이스크림이라도 살해당할지 모른다.
반민초단에게 민초를 들이미는 건 죽여 달라는 신호였으니까.
“그런데 이준 님이 말씀하신 레시피대로 만들어 왔는데 이게 정말 맞는 건지?”
한금만이 난처한 표정을 했다.
냉동고 안, 통에 보이는 아이스크림.
냄새가 썩 좋지 않았다.
이준이 손가락으로 푹 눌렀다.
꽁꽁 얼어붙은 아이스크림 안으로 손가락이 쏙 들어갔다.
손을 빼서 맛을 보자.
“잘 조합했네요.”
“냄새가 좋지 않은데…”
“드셔 보실래요?”
이준이 한금만에게 작은 양의 초코 아이스크림을 건넸다.
한금만이 마지못해 먹었는데.
“이, 이건!”
“엄청 맛있죠?”
“이런 맛은 처음입니다.”
“이 레시피 기억하시죠?”
“아무렴요.”
“지분 7:3로 회장님이 가게 하나 차리실래요? 제가 레시피 제공했으니 7인 거 아시죠?”
뻔뻔한 날강도가 여기에 있었다.
암상의 회장한테 지분을 후려치고 있는 이준인데도 한금만은 거절하지 않았다.
“바로 진행해 보겠습니다.”
“역시 돈 냄새를 맡는 걸로는 회장님을 따라갈 자는 없죠.”
두 사람이 먹은 초코 아이스크림의 재료.
우드 엘프의 수액과 요정의 꿀 + 초콜릿을 함께 들어 있었다.
미래에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아이스크림을 이준과 한금만이 독점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