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6화
“예?”
검왕 박영섭이 눈을 끔뻑였다.
그가 아버지인 검제에게 들은 거라곤 세계 랭킹이 바뀌어 100위까지 순위가 생기고, 아버지가 90위에 있다는 말이 다였다.
그런데 눈앞의 아이가 새로 바뀐 순위에 들어 있다니.
심지어 ‘제’의 칭호를 받은 창제란다.
“그러니 이 아이는 천외천에 대해서 들을 충분한 자격이 있어.”
박춘식의 말에 그제야 박영섭이 놀라움을 표했다.
“예에에에? 이 아이가 100위에 있다고요?”
박영섭이 박춘식과 이준을 번갈아 가면서 쳐다봤다.
이준은 무안한 표정을 지었다.
자기를 두고 너무 놀라하니, 도리어 민망할 정도였다.
“호들갑 떨지 말고 앉거라. 네가 그러니까 아직도 나한테 혼나는 것이다.”
박춘식의 말에 박영섭은 자리에 다시 앉았다.
“세계 랭킹은 S급에 들어서야지만 생기는 창이라면서요?”
“그렇지.”
“그러면… 이준이…?”
“당연히 S급이지 않겠느냐.”
“헉!”
박영섭의 시선이 이준에게 꽂혔다.
이 말이 맞냐는 얼굴이었다.
이준은 피식 웃기만 했다.
박영섭의 행동은 꼭 광대와 같았다.
“내 아들은 아무것도 아니었구나.”
박영섭이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이준을 S급으로 확정했다.
‘제’란 이명과 세계랭킹에 드는 건 AA급에선 할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는 모를 거다.
이준이 익힌 혼원신공이, S급에 들지 않아도 그만한 성능을 뽑아 주는 무공이라는 것을.
박춘식은 박영섭을 놔두고 이준과 대화를 나눴다.
“서두가 너무 길었구나.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마. 천외천에 대해 아느냐?”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어?”
박춘식의 눈이 동그래졌다.
이준이 천외천을 알고 있다고 하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천외천은 오대가문에서도 극비로 다뤘다.
정보가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게 철저히 감췄는데.
“네. 천외천은 게이트에서 넘어온 자들 아닙니까.”
“정확히… 알고 있구나. 그들이 왜 이곳으로 넘어왔는지는?”
“혈신에 관련된 물건을 찾고 있지 않습니까?”
“거기까지? 혹시 더 알고 있는 게 있느냐?”
이준은 거의 다 알고 있었다.
“대한민국 어딘가에 숨어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여기까지는 박춘식 또한 아는 내용이었다.
그래서 철혈검가의 정보단체와 신기학사 한지웅이 천외천을 추적하지 않았던가.
하나 번번이 찾는 데에 실패하여 어디에 숨어서 활동하고 있는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더는 일에 진척이 없어 답답하던 와중, 이준이 입을 열었다.
“그리고 그 천외천이 패왕도가에 숨어 있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패왕도가에 숨어 있었더냐!?”
이번엔 검제가 벌떡 일어났다.
그토록 애타게 찾아 헤맸던 천외천이다.
그들은 아주 위험한 존재들.
블랙급 몬스터보다 더 경계를 해야 했다.
“도왕이 천외천과 손을 잡고 있었습니다.”
“허, 도왕이? 그래서 네가 패왕도가를 처리했구나.”
“예.”
“그렇다면 도악과 도련도?”
“그건…”
이준이 난감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도악과 도련은 천외천과 전혀 상관없는 곳이다.
그저 박혁진이 도귀에게 습격을 받았다는 소리에 쳐들어갔을 뿐.
나중에는 그게 쇼라는 걸 알았지만, 어쩌랴.
이미 쑥대밭으로 만든 걸.
이건 절대 자신의 섣부른 판단이 불러온 대참사가 아니었다.
나쁜 짓을 일삼았던 단체의 인과응보였다.
이준의 행동에 박춘식은 단박에 의미를 알아차렸다.
자기 손녀와 손자를 위해 나서준 아이다.
또한 골칫거리 집단인 사마련이기도 했고.
이준이 민망해하지 않게 말을 돌렸다.
“도왕이 천외천과 손을 잡고 그들을 숨기고 있었다는 게 충격적이야.”
“제가 아는 천외천들은 전부 사라졌으니 당분간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패왕도가를 없애 버린 건 다행이긴 한데, 천외천이 몸을 더 숨기려 한다면 큰일이다.”
“한국에 숨어 있는 천외천은 전부 처리했으니 마음 놓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그게 정말이냐?”
한 번 죽었다 살아난 이준이다.
전생에도 한국엔 천외천이 별로 없었다.
이준이 죽인 혈불이 천외천의 대장격.
패왕도가에 숨어든 혈불의 수하들과 심진화가 이끈 귀살대가 전부였다.
나머지는 한국이 아닌 다른 곳에 있었다.
“네. 다만, 아직 끝내지 못한 이들이 있어서…”
“도왕 말이더냐?”
“천외천에게 힘을 받았을 겁니다.”
전생에 신력권가와 패왕도가가 최전방에 서서 사람들을 도륙했던 이유는 하나였다.
천외천의 끄나풀이 되어 강한 힘을 받았기 때문.
그 힘에 취해서 미쳐 날뛴 것이다.
현재의 도왕도 분명 천외천에게 힘을 받았을 것이다.
“좋지 않은 느낌은 받았지만, 별 다른 건 느끼지 못했다.”
“그랬을 겁니다. 천외천의 힘은 보통이 아니니깐요.”
“도왕은….”
“제가 마무리하겠습니다.”
이왕 시작한 일.
깔끔히 처리하는 게 이준의 성격이었다.
박춘식도 이에 동의했다.
“그러거라. 너에게 하나 더 물어보마. 너는 천외천과 관련이 없느냐?”
박춘식이 직설적으로 물었다.
이준이 가진 무공은 15가문 연맹의 무공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사마련 쪽 무공으로 보기도 힘들었다.
현재는 거의 모든 무공이 밝혀진 상태.
비록 무공서 대부분을 아직 얻지는 못했지만 그것의 존재만큼은 알려져 있었다.
하나 이준이 가진 무공은 검제인 박춘식도 알지 못했다.
마기를 뿜어내는 것이 마공 같다가도 어느 순간 신룡사의 장엄한 정공이 느껴졌다.
마치, 천마와 활불의 신공을 합쳐놓은 듯한 느낌.
이준이 뿜어내던 기운은 두 가지의 성질이 섞여 있었다.
뿐인가.
어이없게도 이준에게서는 조금이지만 천외천의 기운마저 엿보이기까지 했다.
“없습니다. 오히려 천외천은 저와 원수지간에 가깝습니다.”
“이유를 물어봐도 되나? 말하기 싫으면 안 해도 좋다.”
“천외천 손에 저희 엄마가 죽었으니까요. 원수에게 복수는 했지만, 결국 엄마를 죽게 만든 건 천외천입니다. 그들을 꼭 다 없애 버릴 겁니다.”
이준의 눈에서 회색 안광이 쏘아졌다.
엄청난 살기가 뿜어졌다가 이내 곧 옅어졌다.
순간 박춘식조차 움찔할 정도로 엄청난 살기였다.
박춘식은 이준이 연기를 하는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천외천에 대한 분노 속에서 그의 진심을 본 걸까.
그는 이준을 믿기로 했다.
“그것참… 안타깝구나.”
박춘식은 이준의 무공에 대해서 더 묻고 싶었지만, 그만 물어보기로 했다.
이미 오늘 많은 걸 알아냈다.
이준의 진면목을 알아보기도 했고, 천외천에 대해서 듣기도 했다.
여태 지지부진했는데 이만하면 엄청난 성과였다.
“지금은 괜찮습니다.”
“한 가지 부탁을 하고 싶다.”
“말씀해 보십시오.”
“천외천에 대한 일을 우리 철혈검가와 신기학사 한지웅에게 공유해 줄 수 있으냐.”
“어려운 일 아니니 그렇게 하겠습니다.”
“고맙구나. 끄응차. 이야기는 얼추 한 것 같으니 그만 일어나야겠구나.”
박춘식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자, 덩달아 박영섭도 일어났다.
“다음에 뵙겠습니다.”
“이제 가주가 되었으니 나도 그에 맞는 예우를 갖춰야겠군. 신력의 주인이 된 것을 축하하오.”
박춘식이 처음으로 이준에게 존댓말을 써주었다.
이준을 신력권가의 가주로 인정하고 예의를 갖춘 거다.
이준이 빙그레 웃어 보였다.
“참 어색하네요.”
“앞으로 어색한 일이 많을 텐데 괜찮겠소?”
“제가 가주가 됐다는 걸 밖에 알릴 생각 없어서요. 오늘 신력은 아무 일도 없던 겁니다.”
“알겠소. 들었지?”
“아버지. 저도 귀가 있습… 아악! 아파요!”
“그럼 먼저 가 보겠소. 다음에 또 보도록 합시다.”
박춘식이 박영섭의 귀를 잡아당기며 신력을 나섰다.
이준도 두 사람에게 인사를 한 후, 몸을 돌렸다.
“비익단주.”
“여기 있습니다.”
이준이 허공에 대고 말하자 송선형이 하늘에서 뚝 떨어졌다.
“신력의 일이 바깥으로 새어 나가지 못하게 했지?”
“타 가문의 정보원들을 전부 잡아 놨습니다.”
“전부 기억의 비약을 먹여.”
“분부 받들겠습니다.”
송선형이 고개를 숙이곤 사라졌다.
기억의 비약은 이름과 같이 하루치 기억을 아예 통째로 날려 버리는 물약.
타 가문의 정보원들에게 쓰기 딱 좋은 약물이었다.
비밀을 감추기엔 최고였으니까.
* * *
일주일이 금세 지나갔다.
신력권가는 완전히 이준의 손에 떨어졌다.
권왕의 흔적을 완전히 지운 후, 무극대와 이지안의 훈련에 박차를 가했다.
구음절맥을 치료한 이지안의 성장력은 상상을 초월.
16살의 나이에 S급 무공을 두 개나 지녔으니, 굉장히 빠르게 컸다.
“으음… 늦겠는데.”
이준이 정문에 서서 누군가를 기다렸다.
동의각주 이의태는 안절부절못했다.
이준이 기다리는 사람이 손녀인 이지안이었기 때문.
가솔이 가주를 기다리게 하는 건 가문의 법도에 어긋났다.
“송구합니다. 가주님.”
“됐어요. 오늘이 첫 등교이니 설레서 잠을 못 잘만 하죠. 때마침 저기 오네요.”
탐스러운 은발을 휘날리며 이지안이 헐레벌떡 뛰어왔다.
“죄송… 합니다.”
그녀는 오자마자 이준에게 90도로 고개를 숙였다.
이준의 곁에 있던 이의태가 버럭 소리쳤다.
“가주님을 기다리게 하는 게 어딨느냐.”
“잠을 설쳐서….”
“가주님이 널 예뻐해서 망정이지. 다음부턴 이런 일 없도록 해라.”
“네….”
“그만하세요. 오늘부터 중등부 기숙사로 들어가면 한동안 못 볼 텐데, 격려를 해 줘도 부족할 판국에 야단치면 어떻게 해요.”
“가문의 법도는 중요합니다.”
“저한테는 가문의 법도보다 제가 보살피는 이들의 감정이 더 중요해요.”
“가주님….”
이의태가 감격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그의 상태창에 있는 [영원한 충성] 때문에 무슨 말만 하면 저런 표정을 지었다.
부담스러울 지경.
빨리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다.
“지안아 가자.”
이준이 이지안의 손을 덥석 잡고는 차에 태웠다.
이지안이 화들짝 놀랐다.
남자의 손에 팔목이 잡힌 건 처음.
이준은 아무렇지 않은지 그녀를 차에 태우곤 자신도 얼른 탔다.
“갈게요. 저 없는 동안 수고하세요.”
“염려 마십시오.”
“저 송선형이 가문을 살피러 온 쥐새끼들을 전부 처리하겠습니다.”
이준과 이지안을 태운 차가 학교로 떠났다.
무사고가 있는 학교까지 20분.
얼마 걸리지 않은 거리였다.
“가주님. 거의 다 왔습니다.”
“밖에선 가주라고 부르지 말라고 했지?”
“헤헤 제가 실수했습니다. 다음부턴 안 그러겠습니다.”
가주의 차를 모는 사람은 다름 아닌 김봉팔이었다.
무극대의 부대주.
굳이 그가 몰지 않아도 됐는데, 2학기가 시작하는 특별한 날이라고 우겨서 기사 자리를 꿰찼다.
“저 화상. 사 대주에게 치우라고 하던지 해야지.”
“귀농 안 한 건뎁쇼?”
“내가 강제로 시킬 거다.”
“엑!?”
“풉!”
이지안이 손을 가리고 웃었다.
이준과 김봉팔의 대화가 웃겨 보였나 보다.
“넌 왜 웃어?”
“아, 죄송해요.”
“사과하라고 물어본 건 아닌데.”
이지안은 몸이 아팠던 탓에 사람과 교류를 하지 않아서인지.
낯가림이 무척 심했다.
할아버지인 이의태와 이준, 수련을 같이한 무극대 말고는 거의 대화 자체가 안 되는 수준이었다.
이지안이 학교에 적응을 잘 할 수 있을까 걱정이기도 했다.
“학교 적응 잘 할 수 있지?”
“네? 그, 그럼요.”
“내가 아는 선생님이 없어서… 봉팔아. 너 무사중에 아는 교사 있냐?”
“하 참. 주군!”
김봉팔의 어깨가 한껏 위로 올라갔다.
얼굴에는 자신만만한 표정이 가득했다.
“있어? 누군데?”
“제가 있겠습니까? 대주라면 몰라도.”
이준이 눈을 질끈 감고 이마를 부여잡았다.
김봉팔에게 농락당한 느낌이다.
“아우 저걸 그냥 콱! 기대한 내가 미쳤지.”
이준은 김봉팔을 보며 한탄했다.
“주군. 다 왔습니다.”
“너 가문으로 돌아가면 보자.”
“그보다 주군.”
“왜 자꾸 불러.”
“내릴 수 있겠습니까?”
김봉팔이 창문을 가리켰다.
아까부터 차가 굼벵이처럼 가더니.
다 이유가 있었다.
차 유리 너머로 수많은 인파가 카메라를 들고 있는 게 아닌가.
“저 사람들 다 뭐야?”
“제가 알겠습니까?”
“넌 대체 아는 게 뭐냐?”
이준이 끓어오르는 화를 주체하고 있을 때.
따르르릉.
전화벨이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