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5화
“우리 정연이에게 마음이 없느냐?”
“아니, 그것보다 갑자기 이야기가 이상하게 빠지는 건 뭡니까?”
자신이 내보낸 기운에 대해 추궁할 줄 알았는데, 뜬금없이 납치혼을 당하게 생겼다.
“이 늙은이에겐 아주 중요한 일이다. 혁진이한테 듣기론 네가 정연이에게 마음이 있다고 들었는데?”
“하, 미친 놈.”
“지금 내 앞에서 우리 손자를 욕한 것이냐?”
“그게 아니라….”
“되었다. 우리 손자가 지 아비를 닮아 좀 모자란 구석이 있지. 하지만! 정연이는 날 닮았다.”
“네?”
“모자란 구석이 하나도 없다는 말이지. 암 그렇고말고.”
이준이 멍하니 박춘식을 쳐다보았다.
이제 알았다.
검왕과 박혁진의 피가 어디서 흘러나왔는지.
최종 보스가 여기에 있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정연 누나는 누구를 닮은 거지? 두 분의 성격은 전혀 안 닮은 것 같은데.’
털털하고 화끈한 성격의 소유자.
뭔가 닮은 듯 하면서도 박정연과는 확실히 달랐다.
박정연은 힘이 좋으니 머리를 쓸 필요가 없는 타입이었으니까.
“검제께서 뭔가 오해가 있으신 것 같은데 정연 누나와 전 아무 사이도 아닙니다.”
“정연이가 널 싫어하는 것이냐? 그건 아닌 것 같은데.”
“전 아직 고등학생이기도 하고, 하아… 내가 왜 이걸 말하고 있어야지?”
갑자기 회의감이 들었다.
어디서 들어본 대사였다.
분명!
어디서 들어봤을까 떠올려 봤는데, 한민성 이사장에게 들었던 말이었다.
그때도 지금과 같이 말한 걸로 기억났다.
한민성 이사장과 이야기 할 때는 주도권을 쥐고 말했는데, 검제와 말할 때는 뭔가 휘둘리는 느낌이다.
“옛날에는 15살 때도 결혼하고 그랬다.”
“지금은 2025년 입니다.”
“결혼이 아니면 약혼이라는 것도 있다.”
“하아…. 저한테 왜 이러세요?”
이준이 크게 한숨을 쉬었다.
도통 말이 안 통했다.
어떻게 말빨로 최강이라는 한민성 이사장보다 어려울까.
두 손 두 발 다 들 지경이다.
이준의 속마음을 눈치 챈 박춘식이 너털 웃었다.
“허허. 지금까진 장난이었다.”
“장난 같지 않았습니다.”
“네가 예전부터 마음에 든 건 사실이다. 우리 정연이의 짝으로 딱이지. 하지만 그건 당사자들의 문제. 난 강요할 생각 없다. 그리고 네가 마공을 익힌 것도 상관치 않아. 이곳에 온 건 심상치 않은 마기를 느껴서인 것도 있지만, 세계 랭킹에 대해서 너와 이야기를 나눌까 하고 왔다.”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군요. 안으로 들어가시죠.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이준은 안채가 아닌, 자신이 살고 있는 낙성각으로 갔다.
안채에 대한 좋은 기억이 없었다.
아버지를 밀어내고 가주가 됐다 하더라도 안채에 살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곧 끝나는 방학.
자신이 안채에서 살 일은 없을 것이다.
이준이 박춘식과 박영섭을 데리고 낙성각으로 사라지자.
남은 신력권가의 수뇌부들도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 * *
그 무렵.
박혁진과 티격태격 대던 박정연이 검제의 처소 뒷마당에 있었다.
“누가 이 할미 욕을 하나보구나.”
“죽고 싶어서 환장한 사람 아니면 어떤 간 큰 사람이 할머니 욕을 하겠어요.”
“예끼. 다 늙은 노인네가 뭐가 무섭다고.”
철혈검가 내에 있는 밭.
박정연이 쭈그려 앉아 백발의 중년 여자의 행동을 유심히 관찰했다.
호미를 들고 밭을 가는 여자.
영락없이 밭일을 직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 같았다.
그녀는 박정연의 할머니이자, 검제의 부인.
철혈여검이라 불린 김혜연이었다.
이신의 엄마인 패도나찰 최미진 이전.
여자로써 최초로 AA급에 오른 여장부였다.
현재는 철혈검가 외에는 밖으로 단 한발자국도 나가지 않았다.
“할머니.”
“응?”
“나가서 그런 말 하면 욕먹어요.”
“왜?”
“할머니 얼굴을 보세요. 누가 70대로 볼 거에요? 많이 봐도 40대 후반으로 보겠다.”
머리만 새하얗고 피부는 아직도 탱탱했다.
마치 잘 관리한 중년 여자의 피부였다.
밖에 나가 나이를 안 밝히면 영락없는 40대 여자라 착각할 거다.
“이게 다 이 할미의 노력 덕분이야. 정연이도 할미의 노하우를 전수해주랴?”
“내공만 많으면 할머니처럼 젊음을 유지하는 거 아니에요?”
“내공도 많아야지만 그것보다 효과가 더 좋은 게 있어.”
“뭔데요?”
박정연의 눈이 초롱초롱하게 빛났다.
그녀도 여자였다.
여자가 예뻐 보이려면 첫 번째.
피부가 티끌 없이 맑아야 했다.
잡티 한 점 없는 피부는 미인의 조건이었으니까.
그녀도 피부로는 어딜 가든 꿀리지 않았지만 그걸로 만족하지 않았다.
어렸을때부터 관리를 해야 할머니처럼 젊음을 유지할 수 있다고 철석같이 믿은 그녀였다.
그녀의 집중에 김혜연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요정의 꿀이라고 페어리들이 가진 꿀을 먹으면 된단다.”
“아, 구하고 싶어도 못 구한다는 안티에이징의 끝판 왕요?”
그녀도 요정의 꿀은 알고 있었다.
향기롭고 달콤한 꿀.
안티에이징과 미용에 엄청난 효과를 가져다주는 것이라 부잣집 사모님들 사이에서는 불티나게 팔리고 있었다.
가장 낮은 등급조차 없어서 못 팔 정도.
거기다 맛도 좋아서 설탕 대신 요정의 꿀을 사용하면 달달하고 맛있었다.
뭐 돈이 아주 썩어 넘치지 않고서야 값비싼 요정의 꿀을 설탕대신 넣어 먹는 미친 사람은 없겠지만.
뿐만이 아니다.
향기가 좋아, 향초로도 만들어졌다.
불면증에 시달린 사람이 요정의 꿀로 만든 향초로 단번에 꿀잠을 자기도 했다.
그만큼 효과가 탁월.
쓰임새가 굉장히 많았다.
이 때문에 채집을 업으로 삼는 각성자들의 꿈은 고등급 요정의 꿀을 얻는 것이었다.
B등급 이상만 되도 로또 당첨이 부럽지 않다.
하지만 그 명성만큼이나 요정의 꿀은 구하기가 극도로 어려웠다.
요정의 꿀 자체를 채집하는 게 극히 어렵기도 했지만 시중에 나오는 순간 완판 되는 물건이었다.
차라리 모 유명 소년단의 콘서트 티켓팅이 더 쉬울 정도.
F~C급이라도 구할 수만 있다면야 감지덕지였다.
있기만 하면 대박이라곤 하지만 고등급의 요정의 꿀은 너무 희귀해서 수지타산이 맞질 않았다.
난이도도 엄청나서 일반 각성자들이 아니라 적어도 A급 각성자는 되어야 채집이 가능한 수준.
A급 각성자들은 내노라하는 가문에서도 수뇌부에 속한 터.
이걸 위해 가문의 일이나 높은 등급의 게이트 공략을 포기한다?
한탕 도박을 위해 모든 걸 포기하는 것과 똑같았다.
그 시간에 게이트나 깨는 게 훨씬 이득이었다.
그래서 가문과 재벌가 사모님들이 환장한 요정의 꿀이라도 공급이 부족했던 이유였다.
“그래. 이건 돈이 있어도 못 사.”
없어서 못 파는데다 수요는 하늘을 찌르니 구하기 힘들었다.
김혜연도 요정의 꿀은 공식 경매장이 아닌, 지하의 조직.
암상을 통해 얻었다.
의외로 암상에선 쏠쏠한 물건들이 많았으니까.
“그런데 할머니는 어디서 구해요? 저는 키워드 알람까지 설정했는데도 올라올 때마다 매번 놓쳐요. 다들 앱만 보고 사는지.”
“알려주랴?”
“네!”
김혜연이 호미를 사용해 땅을 팠다.
퍽퍽퍽!
호미에 딸려 나온 흙들.
땅에 구덩이가 생기더니 안쪽에 항아리가 있었다.
“이 할미가 누구냐.”
“…….”
김혜연이 엄청난 소리를 했다.
김혜연은 각성자로 한창 활동하던 시절, 쾌검의 소유자로 유명했다.
눈 깜박할 시간에 수백 번 검을 휘둘러 보스급 몬스터들을 순식간에 도륙하던 그녀가 암상에서 나온 물건 중.
제일로 좋은 요정의 꿀을 사기 위해 봉인해뒀던 내공까지 사용했단다.
그 결과 항아리에서 있는 요정의 꿀을 얻을 수 있었다.
“우와.”
박정연이 항아리를 향해 고개를 바짝 숙였다.
달콤한 향기가 공기를 타고 전해져 왔다.
먹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황홀하기까지 했다.
“어떠냐?”
“머, 먹어보고 싶어요!”
“그 전에 이 꿀의 등급이 뭔지 아느냐?”
“아니요.”
박정연이 고개를 흔들었다.
그녀가 주인이 아니라서 그런지 요정의 꿀의 정보를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저 이름밖에 나오지 않은 상황.
김혜연이 말해주고서야 항아리에 든 꿀의 정보를 볼 수 있었다.
[요정의 꿀]
등급: AA
설명: 꽃밭의 지배자 로티틸이 손수 만든 꿀이다. 새로운 보금자리로 인해 마음 놓고 꿀을 만들어 등급이 높게 나왔다.
효과: +피부재생, 모든 능력치 +15(30분간 지속)
“등급에 비해서는 딱히 좋은 게 아니지 않아요?”
“피부재생 효과를 눌러 보거라.”
박정연이 김혜연의 말에 피부재생을 클릭했다.
[피부재생]
설명: 화상, 아토피, 피부병, 상처를 단번에 낳게 할 수 있다. 특히 노화가 진행된 피부일수록 안티에이징 효과가 뛰어나다. 꾸준히 바를수록 좋으며 등급에 따라 늙은 사람은 최대 80년까지 어려 보이게도 된다.
단, 같은 수준의 등급이어만 가능하다.
“어떠냐? 이 할미가 꾸준히 바를 만하지?”
“파, 팔십 년 가까이 어려보일 수 있어요? 그러면 이걸 꾸준히 바르면 할머니도 저처럼 될 수 있다는 거잖아요?”
“그렇긴 하지만, 구하는 게 어려워.”
“그래도 구할 수만 있다면 최고라는 소리잖아요?”
“그렇지. 아마도 부르는 게 값일 거야. 이번에 네 아버지를 닦달해서 돈을 뜯어냈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이 꿀을 못 사고 놓칠 뻔했어.”
“놓쳤으면… 큰일 날 뻔 했네요. 정말.”
박정연이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에겐 최고의 명약이다.
“할머니. 저도 조금만 바르면 안 돼요?”
“왜 안 되겠느냐. 내 손년데 당연히 되지.”
“아싸. 감사해요!”
할머니와 손녀는 서로 얼굴에 발라주면서 웃음꽃을 피웠다.
“네 할아버지한테는 비밀이다만, 이 꿀을 사느라. 할아버지 비상금을 할미가 몽땅 써버렸어. 할아버지가 난리를 쳐도 넌 모른 척 하거라. 알았지?”
“헤헤. 당연하죠!”
박정연이 연신 고개를 끄덕이면서 대답했다.
* * *
“으음…”
“아버지 왜 몸을 떠십니까?”
“갑자기… 불길한 기분이 들어서 말이다. 예감이 썩 좋지 않아.”
박춘식과 박영섭은 이준의 안내로 낙성각 안, 거실에 자리 잡고 앉아 있었다.
박춘식은 오한이 들어 뜨거운 차를 연신 마시고서야 몸의 떨림이 멈췄다.
“이제야 좀 낮군.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마. 너도 세계 랭킹을 봤겠지?”
그가 이준을 향해 물었다.
“네.”
“봤으면 알겠지만, 세계 랭킹이 어느 순간 바뀌었다.”
“언제 바뀌었는지 아십니까?”
“거의 두 달이 되어 간다.”
이준이 인상을 찌푸렸다.
세계 랭킹에 등록 되었을 때는 몰랐다.
시간이 지나고 보니 이상했다.
왜 목록들이 전부 ???일까.
아마도 대면한 사람은 랭킹 목록에 자동으로 등록되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니 검제가 90위에 등록된 게 버젓이 보이는 걸 터.
그렇다면 ???는 자신이 만나지 않은 각성자들이다.
처음에는 은거기인들이라 생각했지만, 그들은 아니었다.
은거기인은 이렇게 많지 않았다.
예상할 수 있는 건 하나.
자신이 죽였던 귀살대주 심진화.
천외천의 인물들 말고는 생각나지 않았다.
추측뿐이라 그저 생각만 했던 것.
검제가 세계 랭킹에 대해서 물어보러 온 건 아마도 자신에 관한 이야기와 천외천에 대한 말일 거다.
아니나 다를까.
“천외천에 대해서 아느냐?”
“아버지!”
옆에 있던 박영섭이 화들짝 놀랐다.
천외천은 철혈검가와 신기지가의 가주 한지웅만이 은밀히 조사하고 있는 내용이었다.
고등학생에게 함부로 누설할 이야기가 아니다.
“괜찮다.”
“그래도 이건 극비사항입니다.”
박영섭의 얼굴은 진지했다.
그 어떤 장난도 표정에 들어 있지 않았다.
그만큼 천외천은 심각한 사안이었다.
“이 아이라면 말해도 된다.”
“그래도….”
“네 마음 이해한다. 혹시나 그들의 이야기가 조금이라도 샐까봐 불안하겠지. 그런데 말이다. 이 아이는 나와 같이 세계 랭킹에 등록되어 있단다.”
“예?”
“세계 랭킹 100위. 창제가 바로 이 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