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1화
한지유 일행은 민트초코 아이스크림을 사서 동두천시로 향했다.
그들이 선택한 게이트는 절망의 숲이다.
리젠 게이트라 그런지, 사냥하려는 사람이 많았다.
“어?”
“왜 이렇게 늦게와.”
“네가 여기에 왜 있어?”
“차 선생님이 불러서 왔지.”
게이트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두 사람.
박혁진과 박정연이었다.
무사고의 학생들은 언제나 외부의 주목을 받는다.
특히 외모가 뛰어난 학생들은 현직 아이돌을 뛰어넘는 인기를 구사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박정연.
화려한 외모에 더해 화끈한 성격 때문에 남녀노소 불문하고 무사고 밖에서도 인기가 많았다.
그녀를 둘러싸고 싸인을 받는 남자들.
그녀의 손짓 하나하나에 헤벌쭉해 했다.
“빙화다!”
“헉!”
“검화에 빙화까지! 오늘 운 제대로 붙었어.”
박정연에게 싸인과 사진을 요청했던 남자들이 한지유에게 대거 이동했다.
빠직-
그런 남자들을 보고 박정연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한지유의 등장에 관심이 분산된 게 마음에 들지 않은 모양이다.
“싸, 싸인 좀 부탁…”
“…….”
완벽한 무시.
싸인을 부탁한 남자가 다시 한 번 물었다.
“그러면… 사진이라도?”
“…….”
또다시 완벽한 무시.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나한테 말 걸지 마라.
한지유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그녀의 주변에서 찬바람이 쌩쌩 불고 있었다.
얼굴은 어떤가.
냉기가 흐르고 있었다.
표정이 전혀 없으니 꼭 화난 사람 같았다.
아이러니한 건 손에 쥔 민트초코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다는 것.
그게 아니었다면 일행들도 한지유가 화난 줄 알았을 거다.
“와- 완전 칼이야.”
“예, 옛날 지유를 보는 것 같지 않아?”
“난 지유의 성격이 조금 바뀐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
일행들은 한지유와 친구인 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니었다면, 지금 저기서 무시 당한 사람 중 한 명이 될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도 민망했다.
일행들이 고개를 가로젓는 사이에도 남자 팬들은 끈질겼다.
“제발 한 번만 부탁드릴게요. 빙화와 사진 찍는 게 제 소원입니다.”
한지유가 얼음 같은 표정으로 남자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녀의 시선에 움찔한 남자가 간신히 말을 덧붙였다.
“그럼 개인 사진이라도 안 될까요?”
한지유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거절하겠습니다.”
짝짝.
박혁진이 박수를 치며 남자팬들을 말렸다.
“자자. 모두 물러나세요. 지금은 지유가 기분이 안 좋나 봐요.”
더 억지를 부렸다간 한지유의 성격이 드러날 수 있었다.
핀트가 어긋나면 한 성깔 하는 그녀.
어쩌면 남자 팬들에게 검을 겨눌지도 몰랐다.
‘아니, 준이는 어떻게 이런 애를 홀딱 넘어가게 한 거야.’
박혁진은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현재는 자신이 잘 알던 한지유가 있었다.
어느 순간 이준에겐 고분고분하던 순한 양이 아닌, 앙칼진 고양이로.
‘진짜 대단하다. 비위를 다 맞춰주는 척 하면서 애를 완전히 길들여놨네.’
절친한 친구지만, 엄청난 녀석이다.
박혁진의 말에 남자 팬들이 아쉬운 얼굴을 했다.
“빙화 사진은 레어 아이템인데.”
“몰래라도 찍을까?”
“그런데 무사고 애들 허락 없이 찍으면 나중에 문제 되는 거 아니야?”
“그런 걸 왜 걱정해. 다들 찍는데.”
“찍을 수만 있다면 대박이지.”
검화는 무사고 밖에서도 대대적으로 잘 알려졌다.
그러나 빙화는 달랐다.
이름과 얼굴, 그녀가 익힌 무공 이외에는 알려진 게 없다.
신기지가에서 한지유에 대한 정보는 싹 통제했던 것.
저들이 아는 건 커뮤니티에 도는 카더라가 다였다.
오늘 게이트로 나온 빙화의 모습을 찍어서 올린다면?
빙화의 팬들은 사진을 구하기 위해 얼마든 투자를 할 거다.
이곳에 각성자가 아닌, 일반인이 있는 이유기도 했다.
각성자들의 위상은 연예인보다 위였다. 아니, 이젠 각성자들이 연예인이라 하는 게 옳을 터.
이 때문에 일반인들이 게이트 주위를 서성거리며 파파라치 역할을 했다.
“시선 좀 끌어봐. 내가 몰래 찍을 게.”
“알았어. 잘 찍어라.”
2인조는 한지유의 사진을 득템하기 위해 연기를 시작하려 했지만.
“저기요,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박정연이 2인조에게 다가와 말했다.
2인조는 작게 속삭인다고 생각했을 테지만, 각성자에겐 무용지물이다.
2인조가 전음을 하지 않은 이상 모두 들을 수 있는 존재가 각성자였으니까.
이곳에 있는 모든 각성자가 2인조의 음성을 들었겠지.
2인조만 그 사실을 모를 뿐이었다.
“네?”
“지유가 싫다고 하니까 제가 찍어줄게요. 제 후배니까 제 말은 듣겠죠.”
“그, 그렇다면 부탁드립니다.”
남자 팬들이 카메라를 내밀었다. 카메라를 받아 든 박정연이 싱긋 웃었다.
빠직!
“억! 내 카메라!”
“이, 이게 무슨 짓이에요! 이 카메라가 얼마나 비싼데.”
“무사고 학생들의 사진은 기자를 제외하곤 학교의 허락 없인 찍을 수 없어요. 설마 모르시는 거 아니죠?”
박정연이 완력으로 남자팬의 카메라를 부숴버렸다.
그녀의 말이 맞았다.
무사고의 학생들, 이준은 말할 것도 없고 한지유나 자신 혹은 자신의 동생 정도의 각성자는 국가 입장에서 귀중한 전력이다.
고작 사진 정도가 어때서? 라고 할 수도 있지만, 원칙적으로는 금지였다.
안쪽에 있는 저장칩까지 아예 무쓸모로 만들려는지.
카메라가 종이짝이 된 듯 구겨졌다.
종래엔 바닥으로 검은 가루가 떨어지는 게 아닌가.
박정연이 내공을 일으켜 카메라를 가루로 만들었다.
“아, 안 돼!”
“보상금은 여기. 앞으로 무사고의 학생들 사진은 누구든 맘대로 찍지 마세요.”
그녀가 남자 팬에게 경고를 하면서 귀에대고 속삭였다.
“그러다 죽. 어. 요.”
“히이익!”
남자 팬은 얼굴이 사색이 되어 도망쳤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각성자들.
박정연의 행동에 황홀한 표정을 지었다.
“지렸다.”
“누, 누나… 나 죽어!”
“패, 패왕색이 날 감쌌어….”
“검화한테 빠면 다른 사람으로 갈아타지 못한다던데… 그 말이 사실이네….”
“나 검화 좋아했구나?”
한지유에게 향했던 관심이 다시 박정연에게로 돌아왔다.
* * *
을씨년스러운 분위기의 숲.
앙상한 나뭇가지로 이루어진 숲을 걷고 있었다.
한지유의 일행이 아닌, 각성자들은 사냥을 뒤로 한 채 뒤를 따라 오고 있었다.
마치 호위를 하는 듯한 대형을 갖추며 말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박혁진은 박정연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내가 보기엔 스케먼 형님 같은데 뭐가 좋다고 난리들이지.”
“지금 뭐라고 했냐? 스케먼?”
“아무 말도 안했는데요?”
박혁진의 말에 박정연이 쌍심지를 켰다. 황급히 손으로 입을 닫는 박혁진이었다.
“풉!”
“왜 웃어?”
“쟤 원래 저런 성격이었어?”
“너희는 잘 모르겠구나. 쟤 원래 좀 이상해.”
박은비의 물음에 한지유가 대답했다.
박혁진의 행동을 멀리서 보긴 했는데,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건 처음이다.
그래서 그런지 새로웠다.
검룡 박혁진은 박은비와 서혜지, 남선호가 닿을 수 없는 높이에 있는 각성자.
같은 학년의 학생이지만, 엮일 일이곤 전혀 없는 그런 존재였다.
그런데 지금은 같은 공간에 있었다.
공략파티를 맺은 상태로.
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날일까.
박혁진과의 멀었던 거리가 좁혀진 느낌이 든 세 사람이었다.
“차 쌤이 말한 보험이라는 게 검화 선배님과 검룡이었어요?”
“네. 이준 도련님께서 만약 게이트로 나갈 일이 있으면 저 두 사람도 데려가라고 했어요.”
차경진은 학교의 선생이지만, 이제는 이준을 도련님이라 불렀다.
신력권가의 정식 후계자.
무엇보다 이준은 이제 학생 신분이 아니었다.
무사고 최연소 특별반 선생님으로 오는 사람이다.
이미 학생 신분의 수준을 벗어난 실력을 가지고 있으니.
학생으로 대할 수 없었다.
그래서 차경진은 이준을 가문의 호칭으로 불렀다.
“준이가 그랬어요?”
“네. 곧 있으면 개학도 할 건데, 특별반 학생들끼리 미리 합을 맞춰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라 하셨거든요.”
“저희가… 특별반에 들어갈 깜냥이 될까요?”
“들어보니까 여기에 철룡 선배님과 독화 선배님 암화까지 있던데….”
“그나마 위안인 건 1학년 허수야.”
“우리만 너무 떨어지는 것 같았는데, 동지가 있어서 다행이야. 휴우우.”
세 사람은 몰랐다.
허수가 방학동안 얼마나 일취월장했는지.
눈앞에 있는 벽을 두세 개씩 부수면서 크고 있었다.
연락을 주고받은 박혁진만 아는 내용.
그는 굳이 세 사람의 말을 굳이 정정해주지 않았다.
말했다간 괜히 기죽을 테니까.
“준이가 너희들을 뽑은 이유가 있을 거야. 천무대전에서도 우수한 성적을 냈잖아? 자신감을 가져.”
박혁진이 세 사람을 응원했다.
그가 해맑게 웃어 보이자, 박은비가 고개를 푹 숙였다.
“고, 고마워.”
말까지 더듬으면서 얼굴이 빨갛게 변했다.
그녀만이 아니었다.
옆에 있던 서혜지 또한 같은 얼굴색이다.
무사고의 우상.
랭킹 1위였던 검룡의 응원이다.
조각 같은 얼굴로 응원을 하니, 얼굴이 화끈거리는 박은비와 서혜지였다.
그 옆에 있던 한지유는 얼굴색 하나 안 변해 있었다.
확연히 차이가 나는 반응.
한지유는 네 행동 따윈 전혀 관심 없다는 모양새였다.
“야. 얻다 대고 눈웃음이야.”
“내가 뭘? 괜히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야.”
“이 눈치 없는 화상아.”
“아우, 스케먼 같이 생긴 게. 누나란 거 몰랐으면 스케먼인 줄 알고 그냥 콱….”
“그냥 뭐? 한 판 뜰래?”
“아니 그냥 그렇다고 뭘 자꾸 떠. 누나도 지유처럼 검부터 꺼내더라. 준이는 그런 여자 싫어한다?”
박정연과 한지유의 표정이 동시에 굳었다.
박혁진의 말에 잠시 충격을 받은 얼굴.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한지유와 박정연이 버럭 소리쳤다.
“검부터 꺼내는 게 뭐!”
“이 새끼가. 게이트에서 오늘 뒤져봐라.
“악! 내가 뭘 잘못했다고 이래?”
이준이 없는 박혁진은 동네북 신세가 되었다.
* * *
낙성각의 앞마당 겸 수련장.
후우웅.
수련장 중앙으로 태풍이 몰아쳤다.
계승의 꽃을 먹은 이지안의 몸에서 마기가 뿜어져 나왔다.
이지안이 가진 심법을 초기화 시키고 있는 현상이다.
“뀨우.”
엄청난 마기에 파랑이가 주머니에서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마기 먹고 싶지?”
“뀻!”
“가서 먹을래?”
“꾸웃!”
파랑이가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이준이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주머니에서 파랑이를 꺼내 바닥에 내려놓았다.
빨빨빨.
파랑이가 달려가 이지안의 앞에 앉아 입을 벌렸다.
하늘로 치솟던 마기가 파랑이의 주둥아리로 빨려 들어갔다.
“저건!”
갑자기 나타난 한 마리의 동물.
천왕대는 그 동물이 누구 것인지 잘 알고 있었다.
하나 이의태는 달랐다.
손녀의 앞에 앉은 동물이 혹여나 초기화를 방해할까봐 움직이려는 찰나.
“제 애완동물이에요.”
이준의 손에 가로 막혔다.
“저 자그만 녀석이 도련님이 키우는 동물이라는 말씀이십니까?”
“네. 손녀에게도 도움이 될 테니 가만히 지켜보세요.”
예전 사형준이 계승의 꽃을 먹었을 때는 얼굴에 땀만 잔뜩 났지, 별다른 일이 없었다.
반대로 이지안은 어떤가.
얼굴에 고통스러워하는 표정이 가득했다.
“으윽…”
예쁜 얼굴을 찡그리고 있는 모습.
앵두 같은 입술 사이로 신음이 비집고 나왔다.
입가엔 선혈이 흐르기도 했다.
이의태가 노심초사한 얼굴로 손녀를 보았다.
“정말 괜찮을까요?”
“잘 되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심법을 초기화 하느라 몸의 균형이 무너졌을 뿐이에요. 초기화를 끝내고 수미천왕신공으로 양기를 보충하면 될 겁니다.”
“도련님의 말씀이 맞기만을 바랍니다.”
이준의 관찰은 정확했다.
이지안의 몸 안에 흐르고 있던 기의 균형이 깨지자 음기가 밀쳐 날뛰고 있는 것.
그나마 지니고 있던 양기도 전부 날아갔다.
그 때문에 균형이 완전히 무너져 고통스러워하고 있는 거다.
“동의각주는 운이 아주 좋은 사람이에요?”
“제가 말입니까?”
“네. 첫 번째로는 저 같은 유능한 주인을 둔 것. 누가 수미천왕신공과 계승의 꽃을 구할 수 있겠어요.”
“옳으신 말씀이십니다.”
이준이 자신의 얼굴에 금칠을 했다.
누가 무극자의 제자 아니랄까봐.
그 사부에 그 제자였다.
“두 번째로는 파랑이가 있다는 거죠.”
이준이 흐뭇하게 웃으며 파랑이를 보았다.
마기를 빨아들이던 파랑이의 몸이 마침 파랗게 타올랐다.
청염.
파랑이가 지닌 양강의 기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