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0화
지잉-
이준이 4대 성지의 금역에 모습을 드러냈다.
“뀨우!”
그를 향해 파랑이가 빨빨 달려와 안겼다.
“읏차! 잘 놀고 있었어?”
“뀨웃!”
파랑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볼을 부볐다.
여전히 작은 녀석.
덩치가 더 작아진 느낌이다.
“공자님 오셨어요?”
“황금이도 잘 적응하고 있지?”
“공자님 덕분에 아이들도 잘 크고 있어요.”
황금색 거북이인 황금이 뒤로 앙증맞은 네 마리의 새끼가 있었다.
어미인 황금이의 뒤에서 빼끔 얼굴을 내미는 새끼들.
파랑이만큼 귀여웠다.
‘흐흐. 금구가 무려 다섯 마리라니. 든든하구만.’
황금이처럼 오래 사는 것도 희귀했지만, 금구 자체가 아주 귀했다.
게이트가 열리고 금구는 각성자들이 군침을 흘리게 하는 몬스터였다.
오래 살수록 올라가는 가치.
영약이나, 치료약을 제조하기에도 적합한 몬스터였다.
어디까지나 일반적인 금구일 때의 이야기.
황금이는 만년금구다.
녀석이 낳은 새끼가 어디 보통 금구일까.
레드급 보스 몬스터가 낳은 새끼라 일반 금구와는 급부터가 다를 거다.
“이름은 있어?”
“아직 없어요. 공자님께서 지어주시겠어요?”
“좋아.”
이준이 황금이의 뒤로 가서 쭈그려 앉았다.
황금이의 새끼들이 고개를 껍질에 넣고 안에서 눈을 위로 올렸다.
그가 무서운 모양이다.
“음… 사부님. 어떤 이름으로 지어야 잘 지었다고 정평이 날까요?”
[황금이의 자식이니 신중을 기해야하느니라.]
“사부님이 생각한 이름은 없죠?”
[황일이 어떻느냐.]
“……그게 최선일까요?”
[황금이의 첫 번째 자식이라는 심오한 뜻이니라. 자고로 이름은 쉬워야 사람들의 귀에 또렷이 박힌다.]
“그래도 그건 쫌.”
이준은 괜히 무극자 사부에게 물어봤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라리 파랑이가 훨씬 낫지.
황일이가 무슨 말인가.
그냥 귀를 닫는 게 차라리 나았다.
이준은 쪼그린 자세로 녀석들의 이름을 생각해냈다.
하지만 떠오르는 건 없었다.
아니, 있긴 했다.
“젠장! 왜 자꾸 황일이가 떠오르냐고!”
이준이 자신의 머리를 쥐어뜯었다.
이상한 사부가 옆에 있으니, 자신도 이상해진 것 같았다.
[끌끌 그만큼 사부가 지어준 이름에 임팩트가 있는 것이니라.]
“하.”
[포기하고 사부의 말을 들으면 마음이 편해질터인데. 쯧쯧.]
무극자 사부가 옆에게 계속 쫑알쫑알대자, 생각을 할 수 없었다.
“에라 모르겠다. 너부터 황일이, 황이, 황삼이, 황사. 끝!”
이준은 자신이 말해놓고 부끄러웠는지.
“내가 지은 게 아니고 무극자 사부가 지은 거야. 괜히 내 탓 하지 마.”
“무극자님께서요? 어찌 그런 수고스러움을.”
황금이가 감격에 빠졌다.
지어준 이름이 여간 성의 없었는데, 저렇게 반응할지 예상 못했다.
절대적인 믿음에 가까운 음성이었다.
“그렇게 고마워할 것까지 있어?”
“모르시는 말씀이세요. 무림의 맹주조차 아들의 이름을 지어 달라고 부탁했다가 매몰차게 거절했던 일화가 얼마나 유명했는데요. 저에겐 과분할 정도에요.”
“그, 그정도야? 황일이란 이름이?”
“물론이죠.”
[끌끌. 보았느냐. 네가 이런 위대한 사부의 제자이니라. 성심성의껏 받들어 모시거라.]
무협지에서 봤던 아주 위엄 넘친 사부면 몰라도.
자화자찬은 기본 베이스로 깔고가는 괴짜 사부라 항상 의심부터 들었다.
대단하신 건 알지만, 마음에서 우러나오지 않는달까?
[이놈이! 왜 대답이 없느냐!]
지금과 같이 말이다.
말투가 너무 가볍지 않나.
고금제일인이면 신비스러움이 있어야하는데, 그냥 꼬장꼬장한 노인네 같았다.
“당연합습죠. 전 제 조상님을 사부님이라 생각하고 뫼시고 있습니다.”
[큼큼. 아주 기특한 생각이니라.]
심지어 단순하기까지.
사기치기 딱 좋은 성격을 가진 무극자 사부였다.
이준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 헷갈리니까 표시를 해둬야겠다.”
게이트를 열어 나갔다가 다시 돌아왔다.
이준의 손엔 네 가지 색깔의 두꺼운 실이 있었다.
황일이는 빨간색, 황이는 노란색.
황삼이는 초록색, 황사는 파란색.
강아지가 새끼를 낳았을 때 헷갈리지 않게 하기 위해서 하는 일.
황금이의 새끼들한테 해봤다.
이러니까 정말로 헷갈리는 게 덜했다.
마지막으로 황금이의 목에 검은색 실을 걸어주었다.
“이러면 새끼들이 커도 구분할 수 있겠지?”
“감사합니다. 공자님.”
“별 것도 아닌데 뭘. 난 볼일만 보고 나갈 테니까 일 봐.”
이준이 황금이에게 손짓을 하곤 남쪽을 향해 내려갔다.
* * *
바닥에 수많은 검은 꽃들이 펴 있었다.
수백 명을 먹일 수 있는 분량이다.
아직 피지 않은 꽃까지 합치면 천 명은 거뜬히 먹일 수 있었다.
이 모든게 파랑이 덕분.
계승의 꽃이 핀 이곳을 관리하는 건 파랑이였다.
녀석이 이곳에서 마기를 흡수하고 퍼트리기를 반복하자.
한송이만 심어졌던 계승의 꽃이 어느새 수백 송이가 된 것이다.
기연.
파랑이와 계승의 꽃이 만난 건 이준에게 엄청난 행운이었다.
“보고만 있어도 배가 부르네.”
황금덩어리라고 볼 수 있는 계승의 꽃.
이 자리는 금맥이기 전에 또 다른 기능이 있었다.
꽃들 사이에 잔뜩 낀 짙은 마기들이 눈에 들어왔다.
보통 사람이라면 마기의 기운에 잡아 먹혔을 터.
이준에겐 마기의 영향이 미치지 못했다.
아니지.
오히려 이준에겐 아주 좋은 연공처였다.
이곳에서 혼원신공을 수련한다면 호흡법이 도움이 될 거다.
“동의각주 손녀에게 먹일 꽃을 따볼까?”
이준이 계승의 꽃을 한 송이 꺾었다.
원래라면 꺾는 순간부터 차차 시들기 시작하지만, 주변에 짙은 마기가 깔려 있어서인지.
계승의 꽃에 든 마기가 흩어지지 않았다.
“파랑아. 오랜만에 같이 밖으로 나갈까?”
“뀨우!”
파랑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준의 후드집업 주머니로 쏙 들어가는 녀석.
몸집이 작아서 그런지, 딱 알맞은 공간이었다.
“소환.”
이준이 게이트를 열고 밖으로 나갔다.
파랑이의 등급이 오른 후부터 게이트 통로의 연결에 제약이 없었다.
어디든 연결할 수 있어서, 자신의 집에도 설치해뒀다.
편리한 이동수단으로 인해 밖으로 쉽게 나온 이준.
그가 낙성각 마당, 훈련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대기하고 있었네요?”
“예…”
동의각주 이의태가 반신반의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이준이 그의 옆에 있는 소녀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이의태의 손녀로 보이는 여자 아이.
핏기 한 점 없는 창백한 얼굴.
훅 불면 날아갈 것 같은 가녀린 체구와 단정한 이목구비.
흑발이 아닌, 은발을 하고 있어서 그런가.
신비로운 분위기에 청초하기까지 했다.
청순한 게 한지유와 쌍벽을 이뤘다.
‘전생에 이지안에 대해 이야기가 없는 걸 보면 구음절맥 때문에 죽었나보네.’
구음절맥은 20살이 되면 모든 혈맥이 막혀 죽는 병이다.
대신 엄청난 장점이 있었다.
첫 번째로는 음기가 엄청나 내공이 무지막지했다.
음공을 익히면 적어도 A급으로 시작할 터.
하지만 음공을 익히는 것은 그들에겐 수명을 당겨 쓰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즉, 20살도 되지 못하고 죽을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었다.
그걸 알기에 이의태는 손녀에게 무공을 금지시켰다.
두 번째로는 외모였다.
구음절맥을 타고난 여자는 열에 열은 미인.
젊었을 때 모든 걸 누리라고 하늘이 내리는 마지막 배려였다.
실제로 이지안은 굉장한 미인이었다. 얼음 같은 한지유나 화려한 불꽃같은 박정연하고는 전혀 다른 신비로운 이미지.
마치 아주 섬세한 유리 공예품을 보는 기분이라 남자들의 보호 본능을 아주 강하게 자극하는 여인이었다.
물론 이 두 가지 장점을 제외하고는 단점이 너무 크지만.
병을 고칠 수만 있다면 그 어느 때보다 좋은 조건을 타고난 거다.
“준비물은 가져왔죠?”
“여기 있습니다.”
이의태 대신 사형준이 이준에게 물건을 건넸다.
이름 하여 스킬북이었다.
타인에게 무공을 전수해줄 수 있는 아이템이다.
스킬북에 무공 구결을 쓴다 해서 100% 배울 수 있는 건 아니다.
주는 사람의 능력에 따라 확률은 천차만별.
특히 심법류, 등급이 높은 신공류의 확률은 더욱 안 좋았다.
그럼에도 이준은 자신 있게 스킬북을 폈다.
하얀 백지.
안에는 한 글자도 쓰여 있지 않았다.
이준은 함께 받은 팬으로 글을 써 나갔다.
그 모습을 뚫어지게 보고 있는 한 사람.
이의태가 이준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정말 지안이에게 수미천왕신공을 주는 걸까? S급 무공을 아무렇지 않게 줄 수 있어?’
수미천왕신공을 내어준다고 했을 때 어떤 생각이 들었나.
처음에는 미쳤다고 생각했다.
오늘 날까지 전해지는 S급 무공서는 얼마 없었다.
심법과 관련된 무공서는 더욱 희귀했다.
그런데 목숨보다 귀중한 무공서를 손녀에게 내주겠다니.
자신의 귀가 잘못된 줄 알았다.
‘나를 가지고 장난치시는 건가?’
진지한 얼굴로 펜대를 굴리는 걸 보면 거짓이 아니었다.
‘무슨 생각을 가지고 계시는 건지 모르겠어…. 만약 손녀의 병을 고친다면 내 목숨도 내놓을 수 있어. 제발 그리 되게 해주십시오. 이준 도련님.’
이의태가 간절한 얼굴로 이준을 바라보고 있는 사이.
이준은 어느새 작업을 끝냈다.
“지안이라고 했지?”
“…네… 도, 련님.”
“도련님 말고 오빠. 네가 이 무공을 익히면 완전한 신력권가의 사람이 되는 거야. 할아버지한테 조건 들었지?”
“네. 들었어요.”
이준은 수미천왕신공을 주겠다하고 조건을 걸었다.
완전한 신력권가의 가족이 될 것.
현대의 시대.
각성자의 집단은 혈족 중심이다.
신기지가란 특이한 케이스가 있지만, 불완전했다.
가족이 아닌 각성자가 50%나 섞여 있어서 그런지.
신기지가를 향한 반란을 염두해 두어야 했다.
그 때문에 한민성 이사장이 혈고독술을 찾으려 했던 것이고.
아무튼 이지안이 수미천왕신공을 얻으면 좋든, 싫든.
신력권가의 가족이 되어야 했다.
크면 직계나 방계의 인물과 결혼해서 무공을 잇게 하는 것.
각성자 가문이 무너지지 않은 방법이다.
또한 가문으로부터 이지안을 보호하는 방법이기도 했다.
아버지인 권왕이 이 소식을 듣기라도 해봐라.
외부 출신의 인사에게.
S급 무공인 수미천왕신공을 유출했다는 건, 권왕으로선 절대 가만히 둘 수 없는 일이었다.
그의 성격이라면 죽여서라도 회수하려 할 터.
그러나 아버지의 분노 따위는 이제 안중에도 없는 이준이었다.
회귀 전엔 그의 눈밖에 날까봐 집안에서 숨 쉬는 것조차 조심했었지만, 머지않아 숨 쉬는 것도 조심하는 쪽은 권왕이 될 터.
그를 전혀 신경 쓸 필요 없었다. 지금 이준의 목표는 자기만의 세력을 꾸리는 것이니까.
그런 의미로 이지안은 아주 좋은 인재였고 그런 그녀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직계든 방계든, 가족이 되는 것만이 이지안이 살 길이다.
그 전까진 자신이 지켜줄 테지만 말이다.
“네가 들은 것만 지켜주면 돼. 자, 이거 받아.”
이준이 이지안에게 계승의 꽃을 주었다.
“계, 계승의 꽃! 도련님께서 이걸 가지고 계셨습니까?”
이의태의 눈이 커졌다.
계승의 꽃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닌가.
그 귀하디귀한 아티팩트를 실제로 보자, 놀란 이의태였다.
“놀라긴. 너희들은 시들기 전에 빨리 먹고 심법을 초기화 시켜.”
손에 들린 계승의 꽃을 보고 있던 지안이 잠시 고민을 하다가 단번에 삼켰다.
* * *
그 무렵.
신기지가의 정문 앞에서 한지유가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고 있었다.
따르릉-
신호음이 계속 울렸지만, 상대방은 받지 않았다.
“이준이 내 전화 또 씹었어.”
한지유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패왕도가의 일을 수습하느라 바쁠 거야.”
“우리끼리 게이트나 돌자. 차 쌤도 계시잖아.”
“지유 네가 전화를 했으니까 폰을 보면 준이가 다시 연락하지 않을까?”
박은비와 서혜지가 한지유를 달랬다.
한지유는 당이 떨어졌는지, 옷에서 주섬주섬 민트 초콜릿을 꺼내 먹었다.
친구들에게 나눠줄 법도 한데, 민트 초콜릿은 죽어도 안 줬다.
대신 다른 초콜릿을 나눠줬다.
“자. 너희도 먹어.”
“고마워.”
“잘 먹을 게 지유야.”
민트 초코를 받지 않은 아이들이 안심한 얼굴로 대답했다.
한지유도 민트 초콜릿을 먹어서 그나마 기분이 풀린 표정이었다.
다시 분위기가 다운되기 전에 박은비가 얼른 화제를 바꿨다.
“차 쌤. 저희 어느 게이트로 가요?”
“제가 전날에 선별해 놓은 게이트가 있어요. 모두 블루존이고, 개척된 곳이에요.”
“어딘데요?”
“절망의 숲과 이단자의 심처에요. 문제가 있다면… 사마련의 영역이라는 거죠.”
절망의 숲과 이단자의 심처는 서울 동두천 쪽에 위치해 있었다.
이미 검증된 게이트.
사마련의 영역이었지만, 많은 각성자들이 이 두 게이트로 사냥을 왔다.
리젠 게이트이며 훈련하기 딱 좋은 장소였다.
“사마련의 영역이라 좀 그런데….”
박은비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저도 수련할 곳을 뽑아놓고 잘한 짓인지 모르겠어요. 그냥 다른 곳으로 갈까요?”
“아니요. 그냥 두 곳 중 한곳으로 해요. 사마련이 나쁜 놈들이라고 해도, 여태까지 무사고 학생들은 건드리지 않았잖아요.”
“그래서 선별한 게이트기도 한데, 꺼림칙하면 다른 곳으로 가도 좋아요.”
“은비 넌 어때?”
“차 쌤이랑 지유가 있으니까… 가볼까?”
“선호는 무조건 가야하고. 지유 넌?”
“나도 상관없어.”
“그러면 정해졌네요. 동두천으로 넘어가요. 쌤.”
“제가 안전장치는 마련해 놓을게요.”
차경진이 누군가에게 깨톡을 보냈다.
그리고 모두 출발하려는데, 한지유가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우리 저거 먹으면서 가자.”
“…또야?”
한지유가 가리킨 곳은 민트초코 아이스크림을 파는 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