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9화
이준이 기거하는 별채.
옛날 이름으로는 낙성각이라고 불린 곳에 스무 명이 넘는 인원이 서 있었다.
“오랜만이구만.”
“형님도 잘 지내셨소?”
“선형이 자네는 가문에서 나가더니 신수가 훤해졌어.”
오랜만에 모인 각성자들은 서로 안부를 물었다.
옛 전우들.
가문을 나간 후로는 얼굴도 자주 보지 못했었다.
은퇴하고 나간 이들은 언제나 가문의 감시를 받기 때문.
운이 나쁘면 불미스러운 일과 엮일 수도 있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가문을 나가서 서로 만나지 않았다.
“그런데 저흴 무슨 연유로 불렀을까요?”
“그러게 말이야.”
“도통 감이 안잡힙니다. 이유라도 알았으면 좋으련만.”
부른 곳도 다름 아닌, 낙성각이었다.
가문 사람이라면 기피해야할 곳.
이곳은 신력권가의 안주인이 제일 싫어하는 장소였다.
모인 사람들이 이야기를 하는 사이.
낙성각으로 사형준과 천왕대가 왔다.
“오랜만이구나. 형준아.”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선배님.”
사형준이 저들을 향해 깍듯이 고개를 숙였다.
천왕대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들의 복장이 평범하고, 허름하더라도 보통 인물들이 아니었다.
한때는 신력권가를 지탱했던 인사들.
신력권가의 변해가는 모습에 신물이 나서 낙향한 이들이다.
사형준에게도 대선배가 되었다.
“나야 항상 신력의 감시 속에 살았지. 형준이 네 소식은 간간이 듣고 있어. 권신단의 부단주까지 역임하고 있다고?”
이곳에 모인 사람 중 최연장자.
나이는 권왕보다 10살은 더 많아 보이는 노인이 말했다.
“20대 후반에 권신단의 부단주까지 올랐던 거야?”
“선형 형님도 몰랐습니까?”
“당연하지. 비익단에서 손을 뗀 지가 언젠데.”
탈모가 많이 진행된 듯, 앞머리가 M으로 벗겨진 남자.
송선형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의 은퇴 직전 직급은 비익단주.
신력권가에서도 최고위직급에 해당하는 각성자였다.
지금은 한적한 시골마을에서 이장이나 하고 있지만 말이다.
“역시 전 동의각주였던 선배님이십니다. 비익단주였던 선형 형님보다 정보가 빠르다니. 가문에선 아직도 선배님이 이곳에 남아주셨으면 하는 것 같습니다.”
“일없네. 난 은퇴한 몸이야. 그보다 형준아.”
“말씀하십시오. 선배님.”
“우릴 부른 사람이 누구냐. 가주께서 부르셨으면 권신각으로 모이라고 했을 터인데. 이곳은 낙성각이 아니냐.”
동의각주였다던 노인.
이의태가 사형준을 지그시 보며 말했다.
‘은퇴하시기 전보다 더 강해지신 건가?’
이의태는 의원이다.
신력권가와는 전혀 연관이 없는 내공과 무공을 가진 사람.
그럼에도 신력과 연을 맺은 이유는 오로지 권왕때문이다.
정확히는 패기 넘치던 젊었을 적 권왕이다.
그때의 권왕은 적어도 지금처럼 힘과 권력에 눈이 멀지 않았었다.
의와 협에 기반한 자신감.
이 하나 때문에 이의태는 신력에 투신했다.
한데 시간이 지날수록 그 의와 협은 사라져만 갔다.
권왕의 마음엔 오직 힘밖에 없었다.
그래서 고심 끝에 이의태는 은퇴를 결심한 것.
은퇴를 한 각성자는 실력이 하락하는 게 정상이지만.
이의태는 도리어 강해진 것 같았다.
“형준아. 내 말 듣고 있느냐?”
“죄송합니다. 선배님의 경지가 놀라워 잠시 딴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면 이제 내 질문에 대답해주겠느냐.”
“가주께서 부르신 게 아닌, 신력의 후계자께서 선배님들을 소환했습니다.”
사형준의 말에 모두가 인상을 찌푸렸다.
신력의 후계자.
그들도 눈과 귀를 아예 막고 산 게 아니다.
몇 개월째 TV에서 떠들썩하게 만든 장본인.
신력권가의 무공이 아닌, 창으로 이름을 날린 아이.
귀창 이준이 신력의 후계자가 되었단 소식은 알고 있었다.
이준이 강하다는 것도 귀에 따갑게 들은 소리.
하지만 은퇴한 사람들을 소집시키는 건 가문의 가주밖에 하지 못한다.
그들 또한 가주의 명이라 하여 돌아왔다.
한데 소집한 사람이 후계자라니.
이번 일은 은퇴한 사람들을 배려하지 않은, 예의 없는 행동이었다.
그들의 인상을 쓴 이유였다.
그때였다.
낙성각으로 잘생긴 남자가 안으로 들어왔다.
* * *
“다 모였어?”
“예.”
사형준이 고개를 숙이면서 대답했다.
은퇴한 이들은 처음 보는 광경이다.
권룡 이신이 후계자가 되었을 때부터 사형준이 이신을 보필했다.
예의는 차렸으나, 마음에서 우러나온 행동이 아닌.
그저 형식에 불과한 인사만을 하던 사형준이었다.
그런데 눈앞의 청년에겐 아주 깍듯이 대하는 게 아닌가.
심지어 마음에서 진심으로 우러나온 행동이었다.
사형준의 마음을 얻기란 쉽지 않다는 걸 알고 있던 은퇴자들이다.
권왕이 말하길.
사형준의 마음을 얻으면 신력을 얻는 것과 진배없다는 말까지 했다.
미래에 신력권가를 떠받칠 기둥.
차기 AA급 각성자.
차기 신력권가의 가주 다음으로 2인자가 될 이는 사형준으로 내정을 해버렸다.
그 눈물도 피도 없는 권왕이 말이다.
그때문인지.
은퇴한 이들을 비롯한 이의태가 청년을 유심히 보았다.
그들의 눈빛을 읽었을까.
이준이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제가 궁금하겠지만, 나중에 차차 알아가세요. 지금은 더 중요한 일을 해야 돼요.”
“중요한 일이라시면?”
“가문에 공백이 생겼어요.”
이준의 말에 은퇴자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여태껏 가문의 공백이 있었던가?
자신들이 가문을 나갔을 때도 공백은커녕.
그 자리를 곧바로 차지한 이들에 의해 가문은 잘 돌아갔다.
은퇴자들은 이준의 말이 좀처럼 이해되지 않았다.
“권신단주를 비롯한 고위 직급에 있는 모든 각성자들을 해임한 상태에요.”
“누, 누가 말입니까?”
“제가요.”
“예에?”
은퇴자들이 웅성거렸다.
고위직급 각성자들은 그래, 후계자의 지위에 있는 이준이 처냈다고 치자.
하지만 권신단주는 달랐다.
가주가 신임하는 인물이다.
가문의 2인자기도 했다.
고작, 이제 막 후계자가 된 이준이 처낼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가주… 께서 가만히 계신 겁니까?”
“권신단주가 가문을 통째로 말아먹고 있었는데, 가주가 무슨 상관이죠?”
“가주의 승인도 없이 권신단주를 해임하셨단 말입니까?”
“네.”
“가주께서 아신다면….”
“이미 아세요. 권신단주가 단전이 부셔져서 가문의 감옥에 들어가 있는 것도 잘 알고 있으시고요.”
“허….”
이의태가 말을 잃었다.
권신단주가 이준에 의해 권력에서 물러난 것도 모자라, 단전이 부서졌다니.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패왕도가를 천왕대만 이끌고 멸문에 가까운 피해를 입혔다고 하더니… 사실인 모양이군.’
이 말을 누가 믿을까.
사실 뉴스에 나왔다 해도 이의태는 믿기가 어려웠다.
이준의 행적을 언론에서 과장했다는 뜻이 아니라, 너무 말도 안 되는 업적이다 보니 뇌가 받아들이기를 거부했다 해야 할까.
자신이 기억하고 있던 이준은 분명 F급 각성자.
각성자의 실력이 일취월장하는 일은 아주 아주 가끔 있긴 했지만 F급에서 AA급, 아니 S급의 실력으로 올라서는 일은 그냥 전무후무 했다.
작은 고양이가 호랑이 떼를 물어 죽였다는 이야기를 듣는 느낌이라 해야 할까.
상식을 너무 아득히 넘는 이야기다보니 자신의 머리로는 이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 한계가 있었다.
권신단주가 이준에게 밀려났다는 사실을 듣지 않았다면 지금도 과장이 됐을 거라고 여겼을 것이다.
그만큼 이준의 행동은 파격적이었으니까.
“여러분이 빈 공백을 맡아주셔야겠어요.”
“저희가 말입니까?”
“이미 은퇴를 한 몸인데….”
“여러분같이 능력 있는 각성자가 시골에 짱 박혀 사는 건 가문의 손실이기 이전에 국가적 손실이에요. 동의각주님을 예로 들 수 있죠.”
이의태가 은퇴하기 전의 등급은 A급 초입이었다.
현재는 어떤가.
이준이 봤을 때 이의태의 경지는 권신단주와 동급.
정확히는 권신단주보다 한 단계 위였다.
가주인 권왕이 AA급 절정, 끝자락에 있다면 이의태는 AA급 완숙에 접어든 경지.
또한 이의태는 전투 각성자가 아닌, 보조 각성자.
서포터의 위치에 있는 치료 계열이다.
가뜩이나 치료 계열의 각성자는 적은 편인데 AA급 완숙의 경지의 각성자라면 온 나라를 뒤져도 한두 명 건질까 말까 한 정도.
이런 자가 가문으로 돌아오지 않은 건 크나큰 손실이다.
“전 가문에 회의를 느껴 은퇴한 몸. 죽을 때까지 시골에서 노인들이나 진찰하며 살고 싶습니다.”
“정말 그게 다에요?”
이번엔 이준이 이의태를 지그시 보았다.
그 눈빛에 이의태가 움찔했다.
‘이제는 그 누구를 봐도 자신 있을 줄 알았는데….’
AA급 각성자는 격이 다른 존재다.
왜 국가에서 AA급 각성자에게 쩔쩔매는지 알았다.
AA급이 되고나서야 달라 보이는 세상.
모든 게 아래로 보였다.
침술 하나에 머리가 통째로 날아가던 몬스터들.
A급에 있을 때는 힘겹게 잡은 몬스터도, 침 하나면 끝이었다.
무서운 게 없어졌던 이의태조차 이준의 눈빛에 자신감이 사라졌다.
“그렇습… 니다.”
“흠… 내가 본 내용은 그게 아닌데.”
이준이 턱을 매만지면서 한주인이 준 명부를 떠올리며 말했다.
“이름 이지안. 나이 16살. 동의각주 이의태의 손녀. 특이사항으로는 구음절맥을 앓고 있음. 이의태는 손녀의 병을 고치기 위해 만년화리의 내단을 찾고 있음.”
이의태가 눈을 부릅떴다.
그가 가문을 나가자마자 한 일은 구음절맥의 치료제를 얻는 것.
만년화리의 내단을 찾는 일이었다.
만년화리의 내단이 대한민국 땅끝 마을에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이의태가 해남에 정착한 이유기도 했다.
“어떻게…?”
그는 의원이기도 했고, 해남에 정착했을 때는 해녀들에게 물질을 배웠다.
마을 사람들을 치료한 후, 바다로 나가는 게 일상.
겉으로는 바다의 해산물을 따오는 것 같지만 그는 물에서 만년화리를 찾고 있었던 것이다.
“내 눈은 피할 수 없거든요.”
미래를 안다지만 모든 걸 알 수 없었다.
그렇기에 세세한 것까지 전부 알 수 있는 암상이 필요했다.
자신은 암상의 은인.
VVIP만 이용한다는 특급 정보를 얻는 건 식은 죽 먹기였다.
“알고 계신다면 말하기 더 수월하겠군요. 전 손녀를 치료해야 돼서 신력에 다시 들어가지 못할 것 같습니다.”
“내가 치료를 해주면 신력에 다시 들어올 거예요?”
“만년화리의 내단이 없으면 치료는 불가능….”
이준이 이의태의 말을 끊어버렸다.
“쉬운 방법이 있는데 왜 치료를 못해요.”
“어떤 방법인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손녀한테 수미천왕신공을 드리죠. 이 무공이면 구음절맥을 고칠 수 있을 거예요.”
이준의 말도 동시에 귀로 익숙한 알림음이 들렸다.
띠링-
[서브 퀘스트 - ]
난이도 - A
설명: 이의태의 손녀는 구음절맥에 걸려 있습니다. 20살이 되면 모든 혈맥이 막혀 죽을지도 모릅니다. 그 전에 구음절맥을 치료하십시오.
보상: 이의태의 충성, 테크트리 포인트 3,500,000P
오랜만의 퀘스트였다.
이번에도 보상을 가지고 가라는 듯 쉬웠다.
‘개꿀.’
이준의 속마음과는 달리, 이의태의 목소리가 떨렸다.
“지, 지금… 수, 수미천왕신공을… 말하셨습니까!?”
“네. 문제라도 있어요?”
“그, 그건 아니지만… 가주께 허락을 맡아야….”
“내 무공을 내 사람의 가족에게 전수해주겠다는데 가주가 무슨 권한으로 제 행사를 막습니까? 허락은 필요 없습니다.”
이준이 딱 잘라 말했다.
수미천왕신공은 이준이 얻은 무공.
가주인 권왕의 허락을 맡을 필요가 없었다.
가주가 반대를 한다 해도 전수해줄 생각이다.
이의태 같은 사람을 얻을 수만 있다면 무공 말고도 다른 것도 내 줄 수 있었다.
물론 몇 가지 제한을 걸 터.
제시한 내용만 잘 지켜만 주면 되었다.
“그것 말고도 여러 문제가 있습니다.”
“계승의 꽃이 문제라면 걱정하지마세요. 차고 넘치도록 많으니까.”
이준이 이의태를 향해 씩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