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8화
‘내가… 사람을 잘못 봤어….’
비익단주는 몸이 망신창이가 된지 오래였다.
걸레가 됐다 해도 믿을 지경.
피거품을 물고 죽었는지, 살았는지.
바닥에 쓰러져 미동조차 없었다.
그를 시작으로 장부에 적혀있는 이들이 하나, 둘씩 비명을 질러 나갔다.
간혹 반항한 이들이 있었지만 그럴수록 자기만 힘들었다.
‘내가 상대할 수 없는 사람이야….’
이준의 손에 모두가 쓰러졌다.
“크윽…”
“용서…를…”
“잘못 했…”
바닥에 쓰러진 채, 이준에게 잘못을 비는 부대장들.
그들은 피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너흴 용서해줄 생각 없다니까. 사대주!”
“예.”
“저것들 전부 무공을 폐쇄해.”
이준의 말에 주변이 웅성거렸다.
부대장들은 모두 A급 각성자.
그들의 무공을 폐쇄한다면 신력권가에 크나큰 손실을 가져올지 모른다.
아니, 가져올 것이다.
가문의 전력이 약해지면 신력의 자리를 노리던 다른 세력들이 노리고 들어올 것이 뻔했다.
사마련 같은 단체들은 손속이 아주 잔인하기에, 이준이 있다 해도 피해가 전혀 없다고 장담할 수 없었다.
“재고를 해주심이 어떻겠습니까.”
사형준도 이와 같은 생각을 했다.
아무리 강한 각성자가 두 명이나 떡하니 버티고 있다지만, 전력이 비어버리면 싸움은 힘들다.
1:1 대인전과 전쟁은 완전히 다른 양상.
혼자서 다수를 감당하지 못한다.
물론 이준의 실력을 의심하는 건 아니다.
사형준은 오직 신력권가.
가문의 지붕 아래에 있는 각성자들이 혹여라도 다칠까봐 걱정을 했다.
그럼에도 이준의 생각은 변함이 없었다.
“불가.”
단호한 음성에 사형준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명을 받듭니다. 천왕대 전원은 부대장들의 단전을 부순다.”
사형준의 명에 따라 천왕대가 부대장들의 단전을 폐쇄했다.
“그리고 쟤들 전부 가문의 감옥에 다 집어넣어.”
“예.”
졸지에 각 부대와 전각의 대장급들의 공백이 생겼다.
아마도 당분간은 가문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을 터.
이 또한 생각이 있었다.
이준이 곧바로 암상의 회장 한금만에게 전화를 걸었다.
“접니다. 이번에도 해줘야할 일이 있습니다. 급한 일이니 시일은 최대한 빠르게 해주셨으면 합니다. 그러면 기다리겠습니다.”
한금만과 몇 마디 나누고 전화를 끊었다.
쭈뼛쭈뼛.
어정쩡한 자세로 만품각에 있는 각성자들을 보았다.
이준이 그들을 향해 외쳤다.
“현 시간부로 내, 외부의 일정을 전부 중단한다. 외부에 나가 있는 신력권가의 각성자들을 전부 불러들여.”
“……”
“……”
조용했다.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대답!”
이준이 소리치자.
“도련님의 명을 받듭니다!”
신력의 아래에 있는 각성자들이 만품각을 떠나가라 소리를 쳤다.
일사불란하게 자리를 떠난 이들.
만품각이 횅해졌다.
전태풍은 사형준의 손에 단전이 파괴되고 감옥으로 끌려갔다.
이 자리에 남은 사람은 두 사람.
이준과 권신단주 전경훈뿐이었다.
“이대로 나한테 단전이 부서지기 아깝지? 한 번 덤벼볼래?”
그가 전경훈에게 기회를 줬다.
한 번 반항을 해볼 기회를 말이다.
“부질없는 짓이란 걸 알고 있습니다. 그냥 제 손으로 단전을 파괴하겠습니다.”
퍽!
전경훈이 배를 부여잡고 쓰러졌다
그가 몸을 부들거렸다.
AA급 각성자라 그런지, 단전이 부숴지자 통증이 엄청난 것 같았다.
“끄으으윽…!”
“귀찮게 안 해서 좋네. 다 네가 저지른 대가라고 생각해. 그동안 많이 해먹었잖아?”
이준이 전경훈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누가 봤다면 이준이 피도 눈물도 없는 악당처럼 보였다.
“대신 내가 친히 감옥으로 데려다줄게.”
이준이 전경훈의 목덜미를 잡고 신력권가 내에 있는 감옥으로 걸음을 옮기려는 순간!
권왕 이건무가 나타났다.
“가문을 아주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놓았군.”
이건무의 음성엔 은은한 분노가 어렸다.
그가 제일 아끼는 곳.
신력권가는 그의 전부였다.
그런 가문을 이준이 망쳐 놨다.
그것도 난장판으로 말이다.
“내가 월권은 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전 월권을 한 기억이 없습니다만?”
“부대장급들 전부의 단전을 부순 게 월권이 아니면 뭐라는 것이냐!”
“제가 이유 없이 단전을 부쉈다면 월권이겠죠. 후계자의 권한은 가문을 위협으로 몰아간 이를 독단으로 처단할 권리가 있습니다. 가주께서 모르는 건 아니겠지요?”
이준은 이건무를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았다.
가주라고 딱 잘라 말했다.
이건무와 거리를 두었다.
“부대장들이 가문을 위협으로 몰아갔다는 소리로 들리는구나?”
“맞습니다. 한 번 읊어 볼까요? 더러운 내용이 많아서 제 입으로 말하기도 민망하네요. 신력권가의 정보단인 비익단주가 비리를 찾아서 고발하는 것도 모자랄 판국에 만품각주가 비밀리에 만든 성매매 업소를 감춰줬더군요. 또한 여자들을 납치해 감금하다시피해서 부대장들의 이상 성욕을 채웠습니다. 이 모두가 전경훈이 꾸민 짓입니다. 더 있는데 말해드릴까요?”
이건무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전혀 모르는 내용이었다.
권신단주에게 시킨 건 부대장들의 약점을 만들어 놓는 것.
그 이상은 어떠한 명령도 하지 않았다.
이건무는 가문을 위해 아내와 자식을 버릴지언정.
사마련이나 하는 짓거리는 하지 않았다.
“모르시고 계실 수밖에요. 신력권가가 망가지고 있는 것도 모른 채, 가문의 일은 뒷전이고 수련에만 미쳐 있으셨으니까요.”
이준의 말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이건무를 도발하는 오만한 말을 내뱉었다.
“그리고 이게 가주의 방식 아니셨습니까? 강력한 힘만 있으면 그 어떤 잘못도 용서할 수 있는 분이 가주셨잖습니까?”
이건무는 반박하지 못했다.
이준이 한 말이 다 맞기 때문.
잘했다고 칭찬이라도 해줘야 했다.
파격적이고 가차 없이 행동하면 언제나 ‘자신의 아들이면 당연히 그래야지.’ 하고 호탕하게 웃은 이건무였으니까.
“안채로 돌아가세요. 그리고 지켜보세요. 제가 어떻게 가문을 잡아먹는지를.”
이준이 이건무의 눈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강렬한 눈빛.
이건무는 이준에게 어떤 말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그저 이준이 옆을 지나가는 걸 지켜보기만 했다.
* * *
다음 날.
이른 아침부터 찾아온 손님이 있었다.
암상의 한주인이다.
“이준님이 부탁하신 명부에요. 그리고 뱀파이어 로드의 피로 만든 약입니다.”
[뱀파이어 로드의 피(B+)를 획득하셨습니다.]
“고마워요. 대금은 제 암상 계좌에서 빼가세요.”
이준이 해맑게 웃으며 한주인에게 인사를 했다.
한주인은 그를 뚫어지게 보았다.
“제 얼굴에 뭐라도 묻었나요?”
“아, 아니에요.”
그녀가 냉큼 고래를 저었다.
암상의 코드네임이 파천자이자, 이준이 신력권가의 사람이라는 걸 알고 난 후.
암상은 신력권가의 일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어제 신력권가에서 일어난 일 또한 알고 있다.
이준의 파격적인 행보.
능력이 없다면 감히 엄두도 못 낼 처사였다.
누가 감히 신력권가의 2인자인 권신단주를 죄인취급 할까.
제정신이 아니고서야 이렇듯 행동하지 못한다.
이 일을 한 사람이 눈앞에 있으니, 신기하기도 했다.
“여기에 적힌 명부가 각부대장의 명을 거부해서 좌천당한 사람이라고요?”
“네. 신력권가의 행동에 실망해서 낙향한 이들도 포함됐어요. 그런데 이들은 왜?”
“전력의 공백이 났으니, 채워야죠.”
암상에서 가지고 명부는 신력권가에 회의를 느껴 은퇴한 이들이었다.
하나하나가 뛰어난 각성자들.
가문을 떠나 살고 있지만, 각성자로 사는 동안은 영원히 신력권가의 사람.
그들은 타 가문에 들 수도 없었다.
가진 무공이 신력권가의 무공이었으니까.
만약 그 무공을 가지고 타 가문에 든다면 그때부터는 척살 대상이었다.
그러니 은퇴를 하면 한적한 시골에서 생활하는 게 다였다.
“명부에 적힌 사람들도 비리는 있어요.”
“적어도 더러운 짓은 안 했겠죠?”
“네. 적어도 선은 지킨 자들이에요.”
“그러면 됐습니다. 이들을 호출해야겠네요.”
“전 시키신 일을 다 했으니 가볼게요.”
“회장님께 고맙다고 전해주세요.”
“별말씀을. 언제든 연락주세요.”
한주인이 인사를 하고 연기처럼 사라졌다.
공공문의 잠행술.
무극자 사부가 말했던 것처럼 정말 뛰어난 무공이었다.
한주인의 잠행술에 감탄한 후 밖을 향해 소리쳤다.
“사 대주. 밖에 있으면 들어와.”
드르륵.
문이 열리며 사형준이 들어왔다.
“명부에 있는 사람 전부 소집해. 한 명도 빠짐없이 오후에 도착할 수 있도록 해놔.”
“오후 말입니까?”
“천재지변이나 가정사가 있는 게 아니면 뛰어난 각성자들이니까 충분히 올 수 있는 시간 아니야?”
“그렇긴 합니다.”
“그럼 됐네. 긴급으로 불러.”
* * *
이준은 낙향한 각성자들이 오기 전, 각 전각들을 들렸다.
부대장들의 자리는 모두 공석.
상관이 없어도 기본적인 건 잘 돌아가나 보는 중이었다.
이준이 처음 들린 곳은 동의각이다.
신력권가의 부상자들을 치료하는 장소다.
갑작스러운 이준의 출몰.
동의각의 각성자들의 몸이 얼어붙었다.
“도, 도련님을 뵙습니다.”
“여, 여긴 어쩐 일로…?”
동의각에 속한 각성자들이 말을 더듬으면서 물었다.
“부대장이 없어도 일 잘하고 있나 보러왔지. 자리에 공백이 있어도 잘 돌아가네.”
“가, 감사합니다.”
동의각 소속 각성자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모두가 이준을 어려워했다.
당연한 게 어제 그 광경을 목도하고, 안 무서워할 수 있나?
간 큰 놈이라도 해도 오줌을 지릴 공포였다.
이준을 보고 안 놀라는 게 비정상이었다.
“일조대주는 어딨어?”
“제,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안내에 따라 한 병실로 들어갔다.
침상에 전신을 붕대로 감은 인물이 눈에 들어왔다.
“얘야?”
“네. 일조대주 여경수입니다.”
“아주 만신창이네. 의식은?”
“아직 안 깨어났습니다.”
“치료약이랑 너희 침술이면 바로 일어나지 않나?”
이준의 물음에 우물쭈물한 동의각 각성자였다.
“일조대주에게 먹일 약값이 아까운 건가?”
“그, 그게…”
“저, 저의 동의각도 쓸 수 있는 자금에 한계가 있어서….”
동의각 각성자들이 서로 눈치를 봤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일조대주에겐 치료약도 아깝다고 했을 터.
이준이라 말 한마디가 조심스러웠다.
“이해해. 동의각주도 지원받은 금액을 꽤 많이 해 먹었으니까. 재정이 부족하겠지. 그래도 사람 목숨가지고, 쩨쩨하게 그러는 거 아니야.”
그가 품에서 새빨간 병을 꺼냈다.
“그, 그건 혹시! 배, 뱀파이어 로드의 피입니까?”
“동의각 각성자라 그런지 잘 아네.”
“헉!”
“그 비싼 걸… 일조대주에게…”
그냥 뱀파이어 피도 100만 원은 되었다.
그런데 뱀파이어 로드의 피라면 얼마나 할까?
효과도 일반 치료약에 10배는 됐다.
단전 빼고 다 고친다는 명약이었다.
이준이 병마개를 열어 일조대주의 입에 부었다.
콸콸.
뱀파이어 로드의 피가 목으로 다 넘어가지 않고 옆으로 흘러내렸다.
“내 일은 끝났고. 일조대주 깨어나면 천왕대주를 찾으라 해.”
“아, 알겠습니다.”
“그럼 다음은 비익단에게 가볼까?”
이준이 뒷짐을 지고, 동의각을 빠져나갔다.
얼마나 긴장했는지, 동의각 각성자들의 휘청거렸다.
“하아아. 숨 막혀 죽는 줄 알았다.”
“나도.”
“근데 의외지 않아?”
“일조대주에게 한 행동?”
“어. 신력권가에서 제일 떨거지 취급하는 집단아니야? 말이 대주지. 그냥 잡일꾼인데 뱀파이어 로드 피까지 먹이셨어.”
“그건 그래. 돈이 많아도 비싼 치료약을 공짜로 주는 건 쉽지 않아.”
동의각의 각성자들은 이준의 새로운 면을 보았다.
전날에는 공포스러운 모습을.
오늘은 이준의 자애로운 모습을 잠시 엿봤다.
권왕에게선 느낄 수 없었던 지도자의 자애와 넘볼 수 없는 위엄. 이에 따라오는 넘치는 존경심.
두렵게만 느껴진 이준이 다시 느껴지기 시작한 동의각 각성자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