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3화
레드본 클럽 앞에 도착한 이준이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딘가를 한 번 쓱 보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이준이 엘리베이터를 탔다.
지하 경매장이 아닌, 더 밑에 있는 장소.
암상의 회장인 한금만이 있는 곳이다.
띵-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한금만이 이준을 맞이했다.
“어서 오십시오.”
한금만이 이준에게 극진한 예를 갖췄다.
몇십 년 묵은 체증을 확 내려 보내준 은인이 이준이었으니까.
“이러지 않아도 됩니다.”
“제가 직접 모시고 싶어서 그럽니다. 들어가시지요.”
한금만이 방으로 이준을 안내했다.
방으로 들어온 이준이 소파에 앉으려는데 한금만이 그의 손을 덥석 잡았다.
“고맙습니다.”
다짜고짜 감사의 인사부터 날리는 한금만이었다.
“아직 도왕을 처리하지 않았어요.”
“그래도 고맙습니다. 수십 년의 세월 동안 날고 긴다는 각성자나 암살자 집단에 의뢰를 수백 번이나 넣었는데, 모두 실패했었습니다. 안 되겠다 싶어 암상에서 직접 각성자를 키워보기도 했지만 현실의 벽은 너무도 높았습니다. 각성자들을 키우니 알겠더군요. 괜히 오대가문의 축을 담당하는 패왕도가가 아니었습니다. 그들과의 격차를 여실히 느끼며 결국 복수를 포기해야하나 싶었습니다. 당신이 나타나기 전까지 말입니다.”
한금만의 목소리엔 울분이 섞여 있었다.
아들을 죽게 만든 범인의 집단.
그러나 그 집단은 너무 거대했다.
건드려도 무너지지 않은 철옹성.
도리어 회유와 협박을 반복하기까지 했다.
분하고 억울하지만 어쩌랴.
강한 자가 모든 걸 지배하는 세상이다.
아들을 죽인 범인을 알고 있지만, 그 범인을 감옥에 넣지도.
죽이는 건 아예 불가능했다.
범인은 대한민국이 자랑하는 각성자.
오왕 중 한 명이라는 도왕이었으니까.
한금만은 이후로 절망에 빠져 살았다.
만약 손자와 손녀가 없었다면 이미 삶의 끈이 끊겼을 터.
분노를 억지로 마음 한쪽에 묻어두고 손자와 손녀를 키우며 살아가다가 이준이 나타난 것이다.
한금만에겐 귀인.
복수심을 억누른 채 살고 있는데, 그 불씨를 활활 타오르게 붙여준 장본인이었다.
어찌 고맙지 않겠나.
그의 심정으론 이준을 평생 업고 다니라 해도 그럴 수 있었다.
그만큼 이준은 한금만에게 평생의 은인이 되었다.
그와는 달리 이준은 한금만의 태도가 좀 부담스러웠다.
의뢰는 아직 끝나지 않은 상황.
패왕도가의 전력을 상당수 무력화 시켰지만, 쫄딱 망하게 하려면 도왕까지 완벽하게 처리해야만 했다.
그가 돌아와 다시 가문을 재건한다면 순식간에 복구할 수 있기 때문.
도왕의 능력이라면 충분했다.
“의뢰를 완전히 끝내놓은 후 인사를 받아도 늦지 않아요.”
“도왕까지 처리해주신다면 우리 암상은 평생 이준님을 따를 겁니다. 아니, 암상을 주라고 해도 기꺼이 드리겠습니다.”
한금만은 전화로 하지 못했던 고마움을 지금 다 표현하고 있었다.
“그만하세요. 민망해서 집에 가고 싶네요.”
“아, 그럼 안 되지요.”
그제야 한금만이 인사를 마쳤다.
“오늘은 무슨 일이 있으시기에 암상을 찾아오신 겁니까?”
“부탁할 게 좀 있습니다.”
“뭐든 말씀만 하십시오.”
“권신단주 전경훈에 대해서 알아봐주시겠어요?”
“권왕의 호위단의 대장 말입니까?”
“예. 비리에 관련된 내용으로 알아봐주셨으면 합니다.”
“음….”
한금만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권신단주 전경훈의 정보.
그의 머릿속에 든 전경훈에 관한 내용은 이랬다.
“전경훈은 신력의 각성자들에게 지급될 보급품을 빼돌리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더 자세한 건 파봐야 알 것 같습니다.”
그의 말에 이준이 씩하고 웃었다.
역시나.
‘이때부터 빼먹고 있었네?’
전경훈이 신력의 보금품을 빼돌리고 있는 걸 진작 알고 있었다.
이 또한 전생의 기억이다.
뛰어난 전투력이 없었던 대신 발로 뛰어다니며 천외천과 손잡은 이들의 약점을 찾아다녔다.
물론 과거에 터진 사건도 한몫해서 기억에 있던 것.
전경훈은 이보다 더한 짓거리를 벌이고 있었다.
정확한 건 더 파봐야 알 터.
우선 보급품을 빼돌리는 것부터다.
이준의 얼굴에 소름 돋는 미소가 지어진 걸 본 한금만이 침을 꼴깍 삼켰다.
상대가 은인이 아닌.
다른 사람의 미소였다면 위험대상으로 지정했을 터.
이준은 다행히 적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식겁한 건 사실이다.
산전수전 다 겪은 한금만조차 위험하다고 느낄 정도였으니까.
“방금 말씀하신 내용 위주로 조사해주세요. 장부를 얻을 수 있으면 좋고요.”
“며칠만 기다려 주시면 바로 알아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용건도 끝났으니 전 이만 가볼게요.”
이준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한금만도 덩달아 일어났다.
함께 방을 나와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렸다.
한금만이 이준에게 궁금한 걸 슬쩍 물어보았다.
“혹,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하나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물어보세요.”
“권신단주의 비리는 왜 알아보려 하시는 겁니까?”
이준이 신력권가의 후계자로 지목되었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강력한 후계자가 되기 위해서 제일 먼저 손에 넣어야 할 것은 신력권가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권신단의 힘.
약간의 비리를 눈감아주는 대가로 권신단주의 협력을 얻어내는 쪽이 더 이득일 터.
“가문에서 쳐내려고요.”
한금만이 눈을 부릅떴다.
그가 알기에 권신단주는 신력에서 권왕 다음의 실세였다.
그를 따르는 각성자들도 수두룩한데, 그를 어떻게 쳐내려고 할까.
보급품을 빼돌린 장부만으로는 부족할 거라 여겼다.
한금만이 놀란 얼굴을 수습하고 다시 물었다.
“그를 쳐내려고 하는 이유를 알 수 있겠습니까?”
“제가 신력을 먹으려고요. 권신단주 다음은 권왕이에요.”
이준의 목소리엔 스산할 정도로 차가운 냉기가 흘렀다.
“아, 그리고 저 따라오신 분 있잖습니까? 회장님과 잘 아는 사람 같으니 그냥 놔뒀는데, 이젠 그러지 마세요. 누가 제 뒤를 밟는 걸 안 좋아하거든요.”
“불쾌하셨다면 죄송합니다.”
“살기를 내비친 것도 아니고, 호기심인데요 뭘. 그럼 진짜 가봅니다.”
* * *
이준을 배웅한 한금만이 방으로 돌아왔다.
그가 경매장 데스크와 연결된 전화기를 들며 말했다.
“상인아 주인이와 함께 내려오거라.”
잠시 후.
한상인과 한주인이 방으로 들어왔다.
“앉거라.”
“무슨 일이세요?”
“우선. 주인이부터. 그분을 한동안 따라다녔는데 어떠하냐.”
한금만이 손녀인 한주인을 보며 말했다.
“전혀… 알아낸 게 없어요.”
“그럴 테지.”
“도처에 깔린 저희 쪽 정보원이 없었다면 움직이는 것도 눈치챌 수 없었을 거예요. 대체 그 사람의 정체가 뭐에요?”
고등학생이 가질 수 없는 무력.
18살의 나이에 어떻게 오왕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지.
천재 중의 천재라 해도 그녀의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었다.
18살 고등학생이 AA급을 달았다는 건, 게이트가 생긴 이래 단 한 번도 일어나지 않은 대사건이었으니까.
“나도 그분의 이름과 신분밖에 모른다.”
“그래서 제게 알아보라고 한 거군요.”
“그랬지. 혹여나 또 다른 게 나오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역시 우리로선 무리구나.”
“계속 알아보면 언젠간 뭐 하나 걸리겠죠. 제가 계속 그를 파볼게요.”
“됐다. 이미 네가 뒤를 밟고 있다는 걸 그분이 아셨다.”
“아.”
한주인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녀를 아는 사람들은 그저 안내데스크 직원이라 생각할 터.
하지만 그녀의 진짜 정체는 따로 있었다.
무명객.
A급 각성자로 암살, 호위, 잠입 등.
여러 가지 의뢰를 수행하는 청부업자였다.
또한 그녀는 암상에서 손꼽히는 최고수이기도 했다.
은신에 특화된 무공을 지닌 그녀였기에 이번 일을 자신 있게 맡았지만.
여지없이 실패하고 말았다.
“그리고 네가 모르는 이준님의 신분이 있다.”
“뭔데요?”
“파천자. 이준님이 파천자란 코드네임을 가지신 분이다.”
“저, 정말요?
암상에서 사용하는 코드 네임 파천자.
대단한 사람이라는 건 그녀도 안다.
경매에 맡기러 오는 물건이 죄다 심상치 않은 물건이었으니까.
요즘 파천자 때문에 손님이 두 배로 늘기도 했다.
암암리에 퍼진 소문.
파천자의 물건을 하나라도 사는 날엔 로또와 마찬가지인 격.
물건 구매 포인트를 쌓아서 파천자가 파는 물건 중 하나를 선점하게 된다면?
팔자가 피는 거다.
파천자의 물건은 경매장에서도 최상위에 속해 있었으니까.
그 외에는 할아버지와 아는 사이라는 것밖에 몰랐다.
그런데 파천자가 신력권가의 이준이었다니.
전혀 매치가 안 됐다.
“오빠는 알았어?”
“나도 그분의 얼굴을 처음 봤을 때는 식겁했어.”
항상 후드티를 뒤집어쓴 모습으로 나타난 파천자.
이후에는 한상인이 준 가면을 썼다.
“생각도 못했어.”
“주인이는 이준 님을 따라다니는 걸 접고, 다른 일을 맡아줘야겠구나.”
“말씀하세요.”
“암상에 있는 정보를 토대로 신력권가의 권신단주 전경훈의 비리를 집중적으로 파보아라.”
옆에서 듣고 있던 한상인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한금만에게 말했다.
“신력권가는 이준 님의 가문인데 위험하지 않을까요? 혹시라도 이준 님이 아시기라도 하는 날엔 저희 암상과의 관계에 금이 갈 텐데….”
“괜찮아. 이번 일은 이준 님께서 직접 부탁하셨어.”
“네? 이준 님이 권신단주의 약점을 잡아서 뭐하신답니까?”
“그분께서 신력을 접수하신다는구나.”
“헉!”
“와….”
한상인과 한주인이 말을 잃었다.
그 누가 이런 말을 내뱉겠나.
검룡 박혁진이라도, 오왕들에겐 햇병아리에 불과했다.
그런데 이준이 이렇게 말하니 달라보였다.
그냥 다른 세상 사람처럼 보인달까.
마치 인생 2회차를 산 사람처럼 멈춤이 없었다.
* * *
신력권가 권신단의 숙소.
단주실에서 무언가 우지끈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꽝!
전경훈이 주먹으로 책상을 박살냈다.
어디 족보도 없는 게 가문으로 와서는 주인행세를 하는 게 아닌가.
“그리고 뭐? 형준이는 앞으로 권신단의 일에서 손을 뗄 테니, 가주께 보고는 나한테 하라고? 그 빌어먹을 자식이!”
전경훈의 몸에서 패기가 줄기차게 뻗었다.
그는 AA급 각성자.
국가에서도 나라의 전력이라고 치켜 세워주는 사람이었다.
한낱 애송이 따위의 시중이나 들 능력이 아니다.
“넌 아주 잘못된 선택을 한 거야. 가문의 각성자들에게 신뢰는커녕, 무시만 당하게 해주마. 밖에 누구 없느냐!”
전경훈의 부름에 권신단원이 안으로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단주.”
“애들은 뭐하고 있지?”
“각자 개인 정비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이라도 있으셨습니까?”
“대희, 넌 이준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음… 강인한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구체적으로 어떤게?”
“혈족계승도 못 받으신 분이 어떤 연유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수미천왕신공을 익혀 밑바닥에서 우뚝 서신 분 아닙니까. 신력에 속한 말단들은 전부 이준 도련님을 우상으로 생각하고 있을 겁니다.”
권신단원의 말에 전경훈의 얼굴이 잔뜩 굳어졌다.
“만약에 말이다.”
“예.”
“나와 이준을 선택하라면 넌 누굴 선택할 거냐.”
“두 분 중 한 분을 꼭 선택해야합니까?”
“그래. 꼭 고르라면 말이다.”
대희라는 권신단원이 손가락으로 볼을 긁적였다.
난감한 질문 때문인지, 고민에 빠졌다.
“전….”
전경훈이 권신단원의 입가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누구를 고를까, 두근거렸다.
“단주님을 선택할 겁니다.”
“이유는?”
“이준 도련님은 강인한 분이시긴 하나, 경험이 부족합니다. 이번 패왕도가의 일도 그렇습니다. 만약 도왕이 가문에 있었다면 상황은 많이 달라졌을 겁니다. 이준 도련님은 신력의 후계자 아닙니까. 그분의 경솔한 행동으로 인해 신력과 패왕이 서로 전쟁을 할지도 모르는 상황입니다. 그와 반대로 단주님은 오로지 신력을 위해서 사시는 분 아닙니까. 저는 가주를 섬기지만, 충성은 단주님께 합니다.”
권신단원이 단호하게 말하자, 전경훈이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단원의 말이 마음에 든 모양이다.
조금 불안했던 생각이 가셨다.
“고맙다.”
“저만 이렇게 생각하는 게 아닙니다. 모든 신력의 각성자도 저와 같은 생각일 겁니다.”
“권신단원들도 마찬가지겠지?”
“당연합니다.”
“나와 이준은 생각이 많이 다른 것 같다. 앞으로 꽤 부딪힐 것 같으니, 너희가 나를 도와다오. 그럴 수 있지?”
“최선을 다해 옆에서 보필하겠습니다.”
“그래. 애들한테도 내 생각을 전해줘.”
“그리하겠습니다.”
권신단원이 나가고, 혼자 남게 된 전경훈.
그는 아직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그때 머릿속에 뇌전이 스쳐 지나갔다.
“패력진권. 그분이 있었지?”
이준과는 앙숙관계.
아니, 거의 원수와도 같았다.
이민욱은 현재 가문 내에 감금되다시피 하고 있었다.
“한 번 패력진권께 들려야겠어.”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이민욱이 자숙하고 있는 건물로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