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2화
‘넌 네가 권왕 님의 핏줄이라 여기는 것 같은데, 한 가지 명심해줬으면 좋겠어. 네 엄마는 권왕 님과 하룻밤 지센 많은 여인 중 하나에 불과해. 어쩌다 태어나게 된 쓰레기가 주제넘게 신력의 담을 넘으려하고 있다니. 쯧. 죽고 싶지 않으면 가문에 얼씬도 하지 말아라. 너 따위를 계속 살려두는 것도 신력에 수치니까.’
냉막한 인상으로 자존심을 무참히 짓밟던 전경훈이었다.
자신을 노골적으로 무시했던 이 중 한 사람.
더 웃긴 건 전경훈의 태도였다.
“도련님 오셨습니까.”
자신을 발견한 전경훈이 예의를 잔뜩 차리며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에 이가 갈렸다.
‘아버지 앞에선 저런 태도를 보였지.’
그래서 속았다.
사형준과 같이 가문에서 유일하게 자신에게 예의를 차렸기에.
그 때문에 전경훈에게 부탁했다.
가문의 문턱을 넘을 방법이 없냐고.
아버지에게 인정받고 싶은 아들이 되고 싶다고 했다.
하나 돌아온 대답은 막말이었다.
그 어떤 이보다 더한 수치심을 자신에게 안겨줬다.
이중적인 얼굴을 가진 놈.
저딴 자식이 신력권가의 중요한 대소사를 관리했다.
‘하지만 전생과는 많이 다를 거야.’
전경훈은 그때와 같이 행동하지 못할 거다.
전생과는 달리, 자신은 패배자가 아니었으니까.
아버지인 권왕과 같은 선상에 서게 된 명성을 가지게 된 자신을 함부로 할 순 없을 것이다.
‘네놈이 내 앞에서 기게 만들어줄게.’
속으로 다짐했다.
자신을 제일 비참하게 한 사람 중 한 명. 신력권가를 갈아엎을 때 첫 번째로 숙청해야할 대상이었다.
‘나에겐 너에 대한 정보가 꽤 있거든.’
권왕 이건무를 대신해 많은 일을 처리했던 전경훈이다.
특히 아버지 몰래 해쳐 먹은 게 상당히 많았다.
건너들은 것만 해도 세 개가 넘었다.
마음 먹고 파면 꽤 많은 비리가 나올 터.
그때가 되면 지금처럼 웃고 있지 못하겠지.
이준이 전경훈을 향해 입꼬리를 말아 올리곤 무시해버렸다.
그러자 전경훈의 눈 옆 근육이 씰룩였다.
이준에게 무시당하자, 기분이 나쁜 모양이다.
그러든가 말든가.
이준은 아버지인 이건무를 향해 말했다.
“웬일로 밖에 나와 계셨습니까?”
“네가 올 것 같아 마중나왔다.”
누가 보면 아들을 목 빠지게 기다리는 아버지 같았다.
하지만 권왕은 그런 사람이 아니다.
자신의 아내가 가문에 해가 된다면.
아들의 단전이 망가져 폐인이 되어 가문에 힘을 보탤 수 없게 된다면.
가문을 위해 과감히 버릴 수 있는 사람이다.
냉혈한.
이건무에게 가족은 그저 그의 장기 말에 불과했으니까.
“절 말입니까?”
“당연하지. 그보다, 천왕대와 함께 가문에 온 걸 보면 후계자 자리를 받아들일 생각이구나?”
이건무의 말에 이준이 입매가 더욱 비틀어졌다.
왠지 이 상황이 마음에 안 들었다.
그래도 조금은 기대했건만.
명색에 오대가문 중 하나인 패왕도가와 싸우고 왔다.
다친 곳은 없나, 걱정할 법도 하지 않나.
역시나 그는 자신의 용건 위주로 이야기했다.
정말 변함없는 사람이다.
“그렇다면요? 제게 신력권가를 주실 겁니까?”
“후계라는 의미를 모르는 것이냐. 너는 내 뒤를 이어 나와 함께 신력권가를 이끌게 될 것이다.”
“제 말 뜻은 신력권가 전체를 의미합니다. 아버지가 있을 자리 따윈 없을 겁니다.”
이준이 이건무를 향해 노골적으로 말했다.
순간 정적이 흘렀다.
이건무에게 있어 신력권가는 가문 그 이상이었다.
그가 살아갈 수 있는 원동력이라고 할까.
그런 가문을 아무렇지 않게 달라고 하니, 말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잠시 후.
정적을 깨고 이건무가 큰소리로 웃었다.
“하하하하.”
아주 호쾌한 웃음이다.
가문을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웃음이 끊겼다.
“신력권가의 사람이라면 원하는 걸 반드시 손에 넣는 법. 하물며 그게 신력이라면 응당 부모의 목을 쳐서라도 가질 자격이 있지. 하나 그건 신력권가에 속한 각성자들에게 전부 인정을 받아야만 한다. 알고 있겠지?”
“물론이죠.”
이준이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신력의 각성자 모두에게 인정을 받아라. 그러면 가주의 자리에서 물러나 가문을 네게 주마. 네 말대로 그 이후론 일체 가문에 간섭하지 않겠다.”
“후회하실 텐데요?”
“후회? 난 여태껏 단 한 번도 후회된 삶을 살아온 적이 없다.”
“하신 말씀 꼭 지키시기 바랍니다.”
“너나 내 기대에 부응하거라.”
자신의 자리를 뺏길지도 모르는데 여전히 여유로운 표정을 하는 이건무였다.
하긴, 저렇게 자신할 수밖에.
신력의 각성자들은 그의 말이라면 불구덩이 속에 뛰어들 정도의 믿음을 가졌다.
광적인 믿음이라 해도 모자랐다.
그러니 저리 말하는 거겠지.
“그러죠.”
“안으로 들어가겠느냐?”
“개학할 때까지 신력에 머물 테니, 안채와 떨어진 별채 하나만 내어주세요. 안채는 아직 제가 있을 곳이 아니라서 말이에요.”
“너 편한 대로 하거라. 권신단주.”
“예.”
“이준을 별채로 안내해.”
“분부 받들겠습니다.”
전경훈이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아, 물어볼게 있었는데 깜빡했네요.”
“뭐냐.”
“가문에서 제 권한을 사용해도 되죠?”
“후계자 권한을 말이냐?”
“네.”
“마음대로 해라. 다만, 월권은 불가하다.”
“명심하죠.”
이건무의 말에 이준의 입가에 핀 미소가 진해졌다.
* * *
이건무가 머무는 안채와는 동떨어져 있는 건물.
관리가 전혀 안 된 별채였다.
곳곳에 거미줄이 처져 있고, 을씨년스러운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도련님이 어렸을 적 머물었던 공간입니다.”
“……”
왜 모르겠는가.
신력권가의 문턱을 넘으려했던 이유가 이 때문이다.
어머니와의 추억이 깃든 공간이었으니까.
이준은 전경훈의 말에 대답도 하지 않고 한옥으로 된 별채를 눈에 담고 있었다.
이번에도 무시를 당한 전경훈.
그의 눈 옆 근육이 전보다 더 꿈틀거렸다.
그가 언제 이런 대우를 받아본 적이 있나.
권왕 말고는 그가 2인자였다.
이건무의 동생인 패력진권 이민욱도 있었지만 전경훈에겐 그도 한발 양보했다.
그만큼 신력권가에서 전경훈의 영향력은 막강했다.
그런데 실패작이라고 알려진 이준이 후계자로 떡하니 나타났으니.
이건무 다음가는 권력을 지닌 전경훈으로선 이준이 달갑지 않았다.
그럼에도 전경훈은 재빨리 기분 나쁜 표정을 감췄다.
“도련님께서 갑자기 오시는 바람에 청소를 못 했습니다. 지금이라도 할까요?”
“됐어. 내가 할 테니 물러가봐.”
이준이 그를 아랫사람 대하듯 말했다.
기분 나쁠 법도 하지만 전경훈은 개의치 않은 표정이었다.
“편히 머물다 가십시오.”
그가 이준을 향해 정중히 인사를 했다.
고개를 든 그가 사형준에게만 들리게끔 작게 속삭였다.
“형준이는 잠시 나 좀 보자. 권신단의 일이야.”
“알겠습니다.”
사형준이 전경훈을 따라 자리를 옮기려고 하려는 찰나.
이준이 그들을 불렀다.
“사 대주. 아직 경훈이에게 말 안했어?”
사형준는 권신단의 부대주. 전경훈은 대주였다.
전경훈이 사형준보다 지위가 더 높은 인물인 것. 권신단의 대주인 만큼 그에 맞는 호칭으로 불려야 했지만.
이준은 마음대로 전경훈을 이름으로 불렀다.
너 따위는 대주는커녕 아랫사람 취급해주겠다는 뜻.
이를 의식한 사형준이 움찔했지만, 티내지 않고 대답했다.
“훈련에 집중하느라, 보고를 뒤로 미뤘습니다.”
“그래? 그러면 내가 대신 말해줄게. 야, 경훈아.”
“말… 씀 하십시오.”
이준의 부름은 여전히 익숙하지 않은지.
전경훈의 얼굴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으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마치 경멸을 당한 사람처럼 목소리에 은은한 분노가 어려 있었다.
“앞으로 사 대주는 권신단의 일에서 완전히 손을 땔 거야.”
“형준이 네 의지냐?”
“그렇습니다. 권신단의 부단주 직책을 놓고, 오로지 천왕대에만 집중하고 싶습니다.”
“가주께서는 이 사실을 알아?”
“아직 모르십니다.”
“그러면 우선 가주께 허락을.”
“잠깐.”
이준이 전경훈의 말을 중간에 끊어버렸다.
“아이고 경훈아, 권신단의 단주며 총관이 신력의 규칙도 제대로 모르나?”
“무… 슨 말을?”
“천왕대주가 신력의 후계자를 인정하고 따르기로 했으면 그 누구의 명령도 거부할 수 있는 권한이 사 대주에게 있는 걸로 아는데? 이게 가주께 허락받을 일인가?”
“그래도 가주께 알려야….”
“사 대주는 나와 할 일이 있으니, 네가 알리면 되겠네. 경훈아, 이의 없지?”
포커페이스를 지키고 있던 전경훈의 얼굴이 처음으로 찡그려졌다.
오늘 여러 번 체면을 구긴 그였다.
말이 여러 번 끊긴 건 물론, 이젠 부하였던 이를 대신해 보고까지 맡게 생겼다.
자신을 이리 대할 수 있는 건 신력에서 권왕뿐이었다.
가주의 아내인 최미진도 자신에겐 이러지 못했는데.
이제 막 후계자가 된 애송이 따위가 눈에 뵈는 것도 없는지.
안하무인하게 행동하고 있었다.
뿌득.
전경훈이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후계자가 돼서 모든 게 다 네놈께 된 것 같지? 실패작이었던 게 감히 날 아랫사람 부리듯 해? 후회하게 만들어 주겠어.’
속마음과 달리, 전경훈은 표정을 싹 바꾸곤 대답을 했다.
“가주께는 제가 대신 말하겠습니다. 그럼 쉬십시오.”
다시 한 차례 고개를 숙이고 그가 자리를 떠났다.
그는 권신단의 단주.
신력권가의 최정예 각성자를 이끄는 대장이다.
가문의 후계자라 해도 함부로 대할 순 없는 사람이었다.
그게 아니더라도 총관이 역할까지 겸임하고 있어서 이준에겐 꼭 필요하기도 했다.
“도련님. 권신단주에게 한 행동은 실수 하신 겁니다.”
“왜?”
“신력의 각성자는 가주를 신뢰하고, 권신단주를 제일 잘 따릅니다.”
“권신단주가 있어야 신력의 각성자들에게 인정받기 쉽다 이거지?”
“네. 그렇습니다.”
“난 또 뭐라고. 괜찮아. 나도 생각이 있어. 그보다 집이 먼지 구덩인데 청소부터 하자.”
이준이 별일 아니라는 듯, 손을 흔들어 보였다.
천왕대와 함께 별채로 들어간 이준.
그의 뒷모습을 보며 중얼거리는 사형준이었다.
“무슨 생각을 가지고 계시는지 알 수 없는 분이야.”
* * *
천왕대의 도움으로 별채는 순식간에 새건물이 되었다.
낡아빠진 외벽 보수와 내부를 청소하니, 그제야 유령의 집에서 벗어났다.
“그래도 다행이네. 남은 물건이 있어서.”
엄마와 같이 찍은 사진을 들었다.
어딘지 모르게 아파보이는 얼굴이지만 환하게 웃고 있는 게 보였다.
‘저 돌아왔어요.’
어렸을 때 말곤 한 번도 오지 못했던 곳.
곳곳에는 여전히 엄마와의 추억이 어려 있었다.
별채 안방으로 들어간 이준의 얼굴이 갑자기 굳어졌다.
예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이세계 악마.
천외천의 놈에게 살인 당한 엄마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때의 기억은 여전히 선명했다.
마치 어제의 일처럼 말이다.
“반드시… 복수해드릴게요.”
모든 건 이세계에서 넘어온 천외천으로부터 시작됐다.
그들이 이 세상에 나타나지 않았다면, 엄마는 안 죽지 않았을까.
자신이 컸다면, 지금과 같이 강했다면 엄마를 지킬 수 있지 않았을까.
후회스러웠다.
적어도 아버지는 막을 힘이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엄마보다는 오직 가문을 위해서만 움직인 아버지.
그가 원망스러웠다.
지금은 죽도록 싫었고.
“방학이 끝나기 전. 신력을 내 손에 넣겠어.”
가장 아끼는 것에 버려지는 심정이 어떤지.
아버지인 권왕에게 느끼게 해줄 생각이다.
그러기 위해선 우선 제일 먼저 제거해야할 자가 있다.
권신단주 전경훈.
그의 약점부터 노려야 했다.
“이런 일은 기가 막히게 잘하는 곳이 있지.”
이준이 알고 있는 두 개의 정보 단체 중 한 곳.
암상이 상대의 약점을 쥐고 흔드는 일을 아주 기똥차게 했다.
“바로 움직여 볼까?”
이준은 사형준과 천왕대에게 수련을 명했다.
집 안으로 들어오는 걸 절대 금하고 포탈을 열어 게이트로 들어갔다.
그가 포탈에서 다시 나왔을 때는 강남 빌딩 옥상이었다.
무극군림보를 펼쳐 레드본 클럽이 있는 홍대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