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8화
“이… 원한… 을… 구천에….”
뚝.
최대웅으로 보이는 인물이 흐릿한 눈으로 이준을 보다가 이내 고개를 떨궜다.
한 세대를 풍미한 각성자치곤 허무한 죽음이었다.
“날 먼저 건드린 건 너희 패왕도가야.”
이준이 최대웅을 내려다보고는 몸을 돌렸다.
원로원들이 모두 죽자, 하얗게 질린 얼굴을 한 패왕도가의 각성자들이었다.
“히이익!”
“괴, 괴물…!”
그들이 뒤로 한걸음 물러났다.
“멍하니 서 있지 말고 남은 놈들을 빨리 정리해.”
패왕도가가 습격을 받았다는 게 각 지부에 알려졌을 터.
지부의 각성자들은 가문이 있는 송도로 모여들고 있을 것이다.
다 어정쩡한 각성자이긴 하나, 그들을 상대하는 건 귀찮은 일이었다.
이곳에 있는 각성자만 무력화 시켜도 전력의 2/3는 끝낸 것과 다름없다.
패왕도가를 재기불능으로 만든 것.
각지에서 모여드는 패왕도가의 잔챙이를 상대할 필요가 없었다.
이준의 말에 넋을 놓고 있었던 천왕대가 정신을 차렸다.
전의를 완전히 상실한 패왕도가의 각성자를 상대하는 건 굉장히 쉬운 일.
A급 끝자락에 있는 사형준까지 있으니, 적을 제압하는 건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 중 제일 열심히 움직이는 사람은 천왕대의 부대주였다.
대원들보다 더 열심히 패왕도가 각성자의 단전을 부쉈다.
“끄으윽!”
“도, 도왕께서… 너희를 가만두지… 억!”
천왕대가 모두를 제압했다.
[서브 퀘스트 - 이준의 의지에 관한 퀘스트를 완료했습니다.]
[보상으로 명성 +50,000 스탯을 획득하셨습니다.]
[명성이 유명에서 이명으로 변환됩니다.]
[당신의 명성도를 분석합니다.]
[이명 창제가 추가 되었습니다.]
…
…
메시지가 주르륵 나왔다.
퀘스트를 완료했는데, 보상인 무극장법은 수많은 메시지에 밀렸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그때 이준의 눈을 잡아끈 메시지가 있었다.
[+세계랭킹에 창제가 등록됩니다.]
[세계랭킹은 세상에서 가장 강한 100인만 볼 수 있습니다.]
“…이런 것도 있었냐.”
전생에는 세계 랭킹 100위는커녕, 뒤에서 세는 게 더 빨랐던 그였다.
전생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강한 힘을 얻으니, 각성자 시스템도 그에 맞춰 더 심오한 것들을 보여주는 듯했다.
이준은 세계랭킹 앞에 있는 십자가 모양을 눌렀다.
……
……
[??? - 99위]
[창제 이준 - 100위]
홀로그램에 뜬 창을 보고 이준이 눈살을 찌푸렸다.
‘내가 고작 100위라고?’
세상에 공표된 S급 각성자는 열 명밖에 없었다.
자신은 그들에게 제일 근접한 각성자. S급에 도달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세상에 숨어 있는 은거기인까지 합치면 20위권 안에는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100위라니.
순위가 낮아도 한참이나 낮았다.
자신의 위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면 좋으련만.
대다수가 물음표로 되어 있어 신원을 알지도 못했다.
세계랭킹 목록이 있다는 것도 지금 알았다.
‘처음으로 미래에 대한 지식이 없는 게 나왔어.’
내심 불안했다.
여태까지는 모두 자신이 알고 있던 범위 내였다.
하지만 세계랭킹은 처음 들어봤다.
그것도 자신이 한참이나 낮은 100위에 있는 게 아닌가.
무공에 자신감을 가진 상태였는데, 이걸 보니 아직 갈 길이 멀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검제님은 몇 위에 있으시지?’
이준이 대한민국 랭킹 1위인 검제의 랭킹을 찾았다.
스크롤을 위로 올린 지 얼마 되지 않아 검제의 이름을 볼 수 있었다.
[검제 박춘식 - 90위.]
[??? - 91위]
‘S급 검제님이 랭킹 90위 밖에 안 된다고?’
이준의 눈이 커졌다.
S급은 무협의 경지로는 화경이다.
이런 사람의 위에 무려 90명 가까이의 강한 각성자가 더 있다는 말 아닌가.
‘밸런스 붕괴 아니야?’
무협지에서도 화경의 고수는 얼마 없었다.
절대자들.
손짓 한 번에 산을 없앨 수 있는 이들이다.
그런 자들이 많다고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이준의 마음을 알기라도 한 건지.
무극자 사부 또한 침음을 내었다.
[으음… 이 무슨 해괴한 순위란 말이냐.]
‘제가 이상하게 생각한 거 아니죠?’
[당연하지 않느냐. 화경이 어디 노력으로만 되는 경지인 줄 아느냐. 무림에서도 화경의 경지를 밟은 이들은 손에 꼽힐 정도였으니라.]
‘이상하네요.’
이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가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자, 장내를 정리한 천왕대가 이준을 숨죽여 지켜만 봤다.
오늘에서야 이준이 어떤 능력을 가졌는지 제대로 확인한 천왕대였다.
이미 권왕의 경지를 훌쩍 뛰어 넘은 인물.
앞으로 신력권가를 대표할, 아니 각성자의 시대를 대표할 인물이었다.
천왕대가 경외를 보여야할 사람이었다.
그들은 이준이 먼저 입을 열기 전까지 그를 지켜만 봤다.
* * *
그 무렵.
검제가 머무르는 거처 앞마당.
검제 박춘식이 홀로그램을 보며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수수께끼가 여전히 풀리지 않아.’
얼마 전까지 그의 랭킹은 정확히 10위였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월령검 마츠모토 아카기 - 89위]
[검제 박춘식 - 90위.]
[??? - 91위]
현재는 90위로 한참이나 밀려나 있었다.
시스템이 잘못되었나 싶었던 그였다.
그러나 그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여전히 90위에 있었다.
‘시스템이 잘못된 게 아니었어. 마츠모토 아카기를 보면 알 수 있어.’
일본의 랭킹 1위.
S급에 있는 마츠모토 아카기 또한 89위에 있었다.
바뀌기 전 랭킹은 9위.
박춘식보다 한 단계 위의 각성자였다.
‘세계랭킹이 바뀐 거다. 그런데 어떻게?’
머리를 싸매고 생각해봐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박춘식이 팔짱을 끼고 평상에 앉아 있을 때, 그가 있는 곳으로 급히 달려오는 인물이 있었다.
“아, 아버지. 후우욱.”
검왕 박영섭이었다.
쉬지도 않고 달려왔는지, 그가 박춘식 앞에서 숨을 토해냈다.
“무슨 일이냐.”
“저, 전화가 왔습니다.”
“누구에게?”
“직접 받아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박영섭이 손에든 전화기를 박춘식에게 넘겨줬다.
박춘식이 전화기를 귀에 대고 말했다.
“전화 바꿨소.”
[너도 봤지?]
대뜸 반말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상한 건 말투가 굉장히 어눌했다. 마치 한국 사람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
“마츠모토냐?”
[너도 세계랭킹 봤지?]
상대는 마츠모토 아카기였다.
그는 어눌한 말투로 용건만 간단히 말했다.
“지금도 보고 있다.”
[어떻게 생각해?]
“나도 몰라. 넌?”
[난… 그들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설마! 천외천?”
[천외천 말고는 없지 않나.]
박춘식도 천외천을 아예 생각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은 게이트 너머에서 온 존재들.
그들도 각성자 시스템을 가졌을까?
의문이 들었다.
각성자에게 보이는 상태창은 오로지 각성자에게만 나타난 것이었으니까.
이세계인들은 각성자가 아니지 않나. 그래서 천외천을 배제하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건 그렇군….”
[몸을 숨긴 그들이 활동을 시작한 게 아닐까?]
“천마 류웨이나 활불 왕역봉한테 연락은?”
[안 했다. 무례하고 겸손하지 못한 놈들하곤 연락하고 싶지 않아.]
세계 랭킹 1, 2위에 있던 천마와 활불 또한 랭킹이 밀려 있었다.
그들은 유일하게 70위권에 속했다.
확실히 천마신공과 달마역근경은 타 신공에 비해 월등히 좋았다.
그러니 랭킹 70위권 안에 있는 거겠지.
하나 그들로도 어쩔 수 없었다.
이세계에서 넘어온 악마들.
천외천은 괴물 중의 괴물들.
제 1차 격변에서 블랙존 게이트에서 나왔던 이들은 하나하나가 재앙 그 자체였다.
보고만 있어도 몸이 절로 굳게 만든 괴물.
그들이 랭킹에 속해 있다면 얼추 이해가 갔다.
“하는 수 없이 내가 연락해보지.”
[알았다. 이야기 나누고 연락 줘라.]
뚝.
마츠모토 아카기가 자신의 할 말을 하고 끊어버렸다.
“저 놈의 원숭이 자식. 나이가 들어도 싸가지 없는 건 여전해.”
“무슨 일로 월령검에게서 전화가 온 겁니까?”
“넌 알 거 없다.”
박춘식이 딱 잘라 말한 후,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들리지만 상대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통화를 끊고 다음 상대에게 했다.
하지만 두 번째 상대 또한 응답이 없었다.
그래도 서로 연락은 닿고 지냈는데, 왜 안 받는 걸까.
‘일이라도 생겼나?’
천외천을 생각하니 오만가지가 떠올랐다.
그들은 재앙의 씨앗.
존재해선 안 될 이들이었다.
* * *
[혹, 혈불 이런 놈들도 순위에 속해 있더냐?]
‘제가 죽여서 없지 않을까요?’
혈불을 만날 때 세계랭킹이 표시가 됐다면 알 수 있었을 테지만, 지금은 불가능했다.
혈불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니까.
[혈불과 같은 놈들이 순위에 속해 있다면 이 랭킹이 말이 되느니라.]
이준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들이 아니면 자신의 위에 누가 있을까?
검제나, 천마, 활불.
이런 절대자의 위치에 있는 각성자 말고는 없을 거다.
‘역시… 위험한 놈들이에요.’
[위험하지. 패왕도가와는 차원이 다른 적이니라.]
이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전생에도 겪어보지 않았던가.
천외천이 본격적으로 야욕을 드러내자, 세상은 쑥대밭이 되었다.
아포칼립스가 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
그들은 세상의 종말을 원한 것처럼 행동했다.
‘혈불 말고도 다른 놈들이 있는지 찾아봐야겠군요.’
[아직은 위험하니, 몸을 사리면서 행동하거라.]
‘알겠습니다.’
무극자 사부가 걱정의 목소리로 말했다.
이준은 대답을 하곤 모든 메시지를 둘러보곤 껐다.
[보상으로 무극장법(SS+)이 주어집니다.]
[앞으로 무극장법(SS+)를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무극장법도 배웠겠다, 도왕의 반응이 올 때까진 시간이 남았다.
그동안 수련하면서 기다리면 될 터.
세계랭킹을 보면 아직 힘이 부족했다.
준비 안 된 상태로 천외천을 만났다간 골로 갈 거다.
지금 자신의 경지가 그랬다.
“이제 돌아가자.”
천왕대를 향해 말하곤 주위를 둘러봤다.
고급스러운 조경은 온 데 간 데 없고 폐허가 된 정원이 눈에 들어왔다.
건물은 어떤가.
기의 충돌로 인해 폭삭 내려앉은 게 보였다.
저 비싼 건물들은 마정석으로 만들어진 것들이다.
웬만한 힘으로는 흠집조차 내기 힘든 단단함을 지녔는데.
무너져 내렸으니.
고치고 수리하는 데만 수십, 어쩌면 수백억이 들지 몰랐다.
물론 패왕도가가 다시 일어설 수 있다면 푼돈에 불과했다.
하지만 패왕도가가 재기할 일은 없을 터.
도왕이 돌아온다 하더라도 패왕의 몰락은 확정이었다.
“가자.”
이준이 시선을 거두곤 경공을 펼쳤다.
패왕도가의 정문에서 많은 기척이 느껴졌다. 그 기척을 피해 반대편 담을 넘었다.
이준은 인천을 벗어나 학교로 돌아왔다.
“다행히 귀찮은 이들은 벌어지지 않았네.”
패왕도가를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은 사람치곤 아무렇지 않아했다.
“도련님 궁금한 게 있습니다.”
사형준의 물음이었다.
“뭔데?”
“도련님이 가진 무공의 정체가 뭡니까?”
“어떤 거? 수미천왕신공? 아니면 창법?”
“두 개 다 궁금합니다.”
이준이 사형준을 향해 씩 웃었다.
그러다 어깨를 으쓱했다.
“나도 궁금해. 내 무공이 어떤 무공까지 품을 수 있나.”
성질이 다른 내공이 두 개면 충돌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준은 두 개를 지니면서도 단 한 번도 내공의 충돌을 일으키지 않았다.
이 모든 게 혼원신공 때문.
S급 신공인 수미천왕신공뿐만 아니라, 그 어떤 신공도 전부 품을 만큼 그릇이 컸다.
혼원신공의 경지가 높아질수록 S급인 수미천왕신공이 정말 보잘 것 없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너 수미천왕신공 좀 배워볼래?”
“제, 제가 말입니까?”
수미천왕신공을 시장에서 파는 물건처럼 쉽게 넘겨주려 했다.
물론 사형준이니까.
허수 외에 이만한 인재와 충성심을 가진 사람은 보기 드물었다.
그의 사람 됨됨이를 알기 때문에 수미천왕신공을 아무렇지 않게 주는 것이기도 했다.
이준의 말에 사형준의 눈이 동그래졌다.
S급 신공을 전수한다고 말하는 게 아닌가.
다른 무공은 몰라도 심법류는 가볍게 가르쳐줄 수 있게 아니었다.
“배우기 싫어?”
“제가 배울 수 있습니까?”
“나한테만 충성할 거라며? 아니야?”
“맞습니다.”
“그러면 배우면 되겠네. 수하가 약하면 주인 된 입장에서 상당히 면이 안 살거든.”
“신공은 계승의 꽃이 필요한데.”
“괜찮아. 나 돈 많아. 그리고 계승의 꽃은 뭐.”
4대 성지의 금역에 널린 게 계승의 꽃이었다.
이것들만 팔아도 나라를 살 수 있지 않을까?
돈은 차고 넘쳤다.
심지어 서울 숲 게이트라는 마정석 광산도 있었다.
이 두 개를 합치면 재벌은 저리가라였다.
“퍼주는 김에 벽력신장도 배우자.”
“벼, 벽력신장까지…”
사형준은 정신이 혼미해졌다.
S급 무공을 아무렇지 않게 주려고 하는 이준의 배포에 이성을 유지하고 있을 수 없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이준은 천왕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너희들은 패권부터 나한테 제대로 배우고, 벽력신장을 배우자.”
자신만의 세력을 이끌기로 결심한 이준.
오늘 패왕도가를 박살냄으로써 자신의 입지는 이전과는 비교할 수도 없이 올라갔을 것이다.
거기다 아버지가 자신을 후계자로 지목하지 않았나.
천왕대가 자기 밑으로 들어왔겠다, 이참에 세력의 힘을 확실하게 키워 아버지를 신력권가에서 내쫓는 것도 아주 재미있을 것 같았다
거기다가 앞으로 이세계의 악마들을 상대하기 위해선 더 큰 힘이 필요했다.
이준은 천왕대도 함께 챙겨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