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2화
천왕대주 사형준은 급히 본가로 귀환했다.
그가 다녀온 곳은 철혈검가였다.
그곳의 금옥에 신력권가의 안주인이 갇혀 있단 소리를 듣고 다녀온 길이다.
‘신력권가가 난감한 상황에 놓였어.’
사형준의 얼굴은 잔뜩 굳어 있었다.
철혈검가에 갔던 일엔 성과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 일을 자신이 모신 권왕에게 알려야 할 터.
그래서 급히 귀환했다.
한남동에 있는 신력권가에 도착해서 곧바로 권왕 이건무를 만났다.
이준이 수미천왕신공을 터득하고 나서부터 폐관에 들지 않은 이건무였다.
드르륵.
안채의 문이 좌우로 열렸다.
“갔던 일은 어떻게 됐나?”
“철혈검가에서 불가하단 말밖에 전해오지 않았습니다.”
“집사람의 얼굴도 보지 못했느냐?”
“예….”
“철혈검가 쪽에서 작심을 했구나.”
이건무의 음성은 전혀 급해 보이지 않았다.
걱정이 없는 얼굴이랄까.
오히려 홀가분한 표정까지 엿보였다.
“전쟁도 할 생각인 듯합니다.”
“그 목표가 패왕도가겠지?”
“예. 저희 신력권가에도 경고를 했습니다.”
“뭐라고 하더냐.”
“사모님을 포기한다면 신력은 피해가 없을 거라고 합니다.”
“음…”
이건무가 턱을 매만졌다.
난감한 표정을 지은 그가 말했다.
“우리가 가만히 있으면 도왕의 분노가 우리에게도 향할 거고, 나서자니 득보다는 실이 커. 형준이 네 생각은 어떠냐.”
“외람된 말이지만 사모님이 저지른 일은 무인으로서 절대 해서는 안 되는 행동이었습니다. 죗값을 치러야 한다면 겸허히 받아들이는 쪽이 무인으로 해야 할 도리라 생각합니다.”
사형준은 그의 성격답게 그가 옳다고 생각하는 무인으로서의 방향을 제시했다.
이건무의 생각도 크게 다르진 않았다.
최미진은 자신의 아내임과 동시에 도왕의 여동생.
그 이유 하나만으로 패왕도가는 신력권가의 위에 서려 했다.
이건무는 이런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철혈검가는 몰라도, 같은 왕의 서열에 있는 패왕도가였다.
꿀릴 이유가 없으나 그들보다 세력이 약해, 지고 들어가야 했다.
‘이젠 아니지. 정예인 패왕대도 없고, 부인을 돕던 정체불명의 병력도 없어졌으니 패왕도가의 전력이 약해졌을 거야.’
이건무가 최미진에게 끌려다닌 이유.
그녀의 친가인 패왕도가도 문제긴 했다.
하나 가장 큰 이유는 그녀가 신력권가로 올 때 데려온 인물들이다.
뒷조사를 시켰으나, 신상을 전혀 알아낼 수 없었다.
마치 가상으로 만들어진 인물처럼.
의심이 들어 신력의 최정예인 권신단을 시켜 정체를 알아보라고 시켰으나.
‘얻은 건 없지.’
한 명 한 명의 실력이 범상치 않아, 분명 어딘가에 이름이 알려졌을 법도 한데, 그 어디에도 과거의 흔적이 전혀 남아있지 않아 정체를 밝히는 건 포기했다.
그가 아는 건 최미진을 보호하는 각성자라는 것.
이 하나가 끝이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이들을 가문으로 들이는 게 찜찜했으나 어쩌랴.
최미진의 호위단을 돌려보낼 순 없었다.
이건무가 결혼한 시절에는 신력권가가 쇠퇴의 길을 걷던 때라 패왕도가가 필요했으니까.
철혈검가의 검제처럼 S급에 달한 전력은 없었지만, 대신 초입이라도 AA급에 들어선 각성자들을 몇 명이나 보유하고 있던 가문이었다.
물론 그들이 모두 모여도 검제 한 명에 비교조차 되지 않겠지만, 가문이 기울어지고 있는 마당에 한 명이라도 더 많은 고등급의 각성자와 연합하는 것이 중요했다.
찜찜한 기분이 들었지만 넘어가야만 했다.
그때였다.
이건무의 눈에 들어온 한 사람.
최미진의 유모란 사람이었다.
심진화란 이름을 가졌으며 최미진이 유독 아끼는 여자였다.
그 유모란 사람의 발걸음을 보았는데, 보폭에서 소리가 나지 않았다.
암살자같이 특유의 조용한 발걸음.
그게 이건무의 눈에 들어왔다.
유모란 여자가 신경을 쓰자, 여러 상황이 눈에 들어왔다.
호위단들이 죄다 유모를 어려워하는 것.
이 하나로 모든 게 설명됐다.
호위단의 인물 중 유모가 서열이 가장 높았다.
차기 대한민국을 이끌어갈 인물 중 하나였던 이건무.
그런 그가 고작 유모란 사람의 기운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이 말은 자신보다 강하다는 이야기.
이것 말고는 말이 되지 않았다.
패왕대보다 강한 최미진의 호위부대.
그녀와 패왕도가를 조심히 대해야 했던 이유였다.
‘이젠 걸릴 게 없어.’
이건무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걸렸다 사라졌다.
그가 사형준을 향해 말했다.
“우리 신력권가는 이번 일에서 손을 뗀다.”
“정말이십니까?”
“네가 그러는 게 신력에 이득이라 하지 않았더냐.”
“무인의 도리를 말씀드린 거지, 그런 의미로 말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모두에게 그리 전하고 이준 그 아이를 후계자로 한다고 알려.”
사형준의 눈이 커졌다.
설마 이준을 후계자로 내정할 줄은 몰랐다.
첫째인 이신보다 이준이 더 신력의 후계자로 어울리긴 하나, 과연 그가 받아들일까.
미지수였다.
“그리하겠습니다.”
“이제 네가 맡아야 할 사람은 이준이다.”
“알겠습니다.”
사형준의 대답에 이건무가 몸을 돌렸다.
이건무가 안채를 나가려 했다.
“어디 가십니까?”
“수련동에 간다.”
“폐관은 끝나신 거 아니셨습니까?”
“무공에 끝이 어디 있겠느냐. 당분간 수련에 집중할 테니 찾지 말아라. 급한 일이라도 들어오지 말고.”
“예… 알겠습니다.”
사형준을 뒤로 하고 수련동으로 향한 이건무였다.
* * *
패왕도가의 문을 두드리기 전.
이준에겐 할 일이 있었다.
신기지가와의 약속.
혈고독술을 주겠다고 한 약속을 지키러 가는 길이다.
이준은 이사장실을 찾았다.
그를 본 남 비서가 재빨리 맞이했다.
“이준 학생. 무슨 일로 오셨어요?”
언제 들어도 어색한 말투였다.
“안에 이사장님 계시죠?”
“네. 들어가 보세요.”
전이었다면 여러 절차를 거쳤을 테지만, 지금은 바로 이사장실의 문이 열렸다.
이준이 이사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서류에 파묻혀 있던 한민성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리 이준 학생께서 무슨 일로 오셨나. 자리에 앉아.”
바쁜 와중에도 이준을 반갑게 맞이하는 한민성이었다.
이준은 소파에 앉자마자 본론을 꺼냈다.
마이를 열어 하나의 무공서를 탁자에 올려놓았다.
“여기 신기지가에서 원하신 물건이에요.”
“이, 이건!”
한민성이 덜덜 떨리는 손으로 탁자에 놓인 무공서를 집어 들었다.
“약속했던 대로 혈고독술이에요.”
“진본이야?”
“가짜면 다시 돌려주시게요?”
이준의 말에 한민성이 얼른 품으로 숨겼다.
어째 봤던 장면인 것 같았다.
“큼큼. 내가 당황해서 그랬어. 기분 나빴다면 사과하지.”
“됐어요. 그런데 혈고독술은 누가 배울 거예요?”
“그게 문제긴 한데….”
“지유가 배울 건 아니죠?”
“신기지가를 이끌어갈 아이라 그 생각도 안 해본 건 아니지.”
“지유는 못 배울 거예요. 고독의 암수를 키워야 하는데, 걔 성격에는 어림없어요.”
한민성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혈고독술은… 이준에겐 차마 설명할 수 없지만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무공이었다.
“신기가주님께 혈고독술을 전하세요.”
“혈고독술이 필요했다면 그 양반이 먼저 구했겠지. 지유랑 마찬가지로 이런 야비한 무공을 익히는 걸 아주 싫어해.”
“하긴. 그러니 신기지가가 망….”
“응? 왜 말하다 말아?”
“아니에요.”
이준은 뒷말을 삼켰다.
신기지가의 가주 한지웅이 가문에 조금만이라도 신경을 썼다면 덜 늦게 가문에 멸망했을 터.
천외천의 인물을 조사하는데 너무 몰두했다.
그 때문에 신기지가가 제일 먼저 망하게 됐다.
그리고 혈고독술을 신기가주에게 준다 하더라도 그는 배우지 않을 거다.
음흉한 구석이 전혀 없는 사람.
맑은 영혼의 소유자가 신기학사란 이명을 가진 한지웅의 성격이었다.
“그러면 답은 정해져 있네요.”
“설마. 내가 익히라는 거야?”
“그러면 남 주게요?”
“아니! 얼마나 힘겹게 이 무공을 얻었는데. 그럴 수 없지.”
“됐네요. 이사장님이 익히세요.”
“하… 나도 일이 많은데….”
한민성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준은 그를 지그시 보며 말했다.
“정말 할 일이 많으셔서 안 배우시려는 거예요? 벌레가 무서운 게 아니고?”
“버, 벌레가 무섭다니! 내가 이렇게 유약해 보여도 A급 각성자야. 고작 벌레한테 겁을 먹을 리 있나.”
이준이 살짝 떠봤는데 반응이 크게 왔다.
전생에 알려졌던 한민성 이사장에 관련된 것.
현생에 그를 처음 만나봐서 확인차 말해본 거였는데, 역시나 맞았다.
한민성 이사장은 벌레를 싫어했다.
그것도 극도로.
무사고의 이사장씩이나 되는 사람의 약점이 고작 벌레라는 사실을 누가 알았을까.
“아무튼 전 약속 지켰습니다. 그 무공을 배우든지 말든지, 신기지가에서 알아서 하세요.”
“그러고 그냥 가려고?”
“아니, 제가 혈고독술을 누가 배워야 할지 의논도 해줘야 해요?”
“우리 사이에 이러기야? 잠시 신기지가의 관계자와 식객의 관계로 의논을 하는 거지.”
“그럼 전 가볼게요.”
한민성의 말을 무시한 이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가려는데 한민성이 불러 세웠다.
“잠깐! 이왕 온 김에 봐줬으면 하는 게 있어.”
“제가요?”
이준이 고개를 갸웃했다.
한민성이 서류가 수북하게 쌓인 책상으로 가서 하나의 결재 서류를 가져왔다.
“이것 좀 봐.”
그가 이준에게 서류를 넘겼다.
빼곡히 적혀 있는 글자를 본 이준의 얼굴이 점점 찌푸려졌다.
“지금 저보고… 제 또래를 가르치라는 말이에요?”
“학교 선생들 사이에서 이준 학생 말이 많아. 도왕과 손을 섞은 건 물론 등급이 AA급에 올랐다는 추측이 난무하고 있어.”
“그런 걸 떠나서 말도 안 되는 거 아시죠?”
서류의 내용은 이러했다.
이준을 조기졸업 시켜 곧바로 현역으로 활동하게 하는 것보다, 그를 학교에 잡아두자는 거다.
학생이 아닌, 선생으로서의 역할.
예를 들어 현장실습을 들 수 있다.
실습을 나가면 안전이 증명된 게이트를 간다.
잠깐 둘러보고 오는 게 끝.
어쩌면 알맹이가 빠진 학습이다.
학생이라지만 언제든 몬스터의 습격에 대비해야 하는 각성자.
나이를 떠나서 전투요원이다.
학생들에게 높은 등급을 경험하게 해줌으로써 경각심과 사명감을 심어줄 수 있지 않을까.
…은 명분이고, 희대의 천재이자 차세대를 이끌어나갈 각성자로 지목된 그를 모든 가문에서 노리고 있었다.
현재 그는 신기지가의 식객임을 자처한 상황이지만, 학교에 조금이라도 오래 남아있다면 그를 영입할 수 있는 확률이 아주 조금이라도 높아지지 않을까.
이런 차원에서 나온 건의였다.
신기지가의 사람인만큼 한민성도 그들의 속셈을 눈치채고 있긴 했지만, 그는 이준을 믿었다.
게다가 그로서도 이준이 학교에 남아 학생들을 지도해 준다면 환영이었다.
그의 가르침을 받았던 서혜지, 남선호, 박은비가 상식을 뛰어넘는 성장을 보여줬던 걸 생각하면, 그는 놓쳐서는 안 될 인재였다.
“말이 안 되긴. 배우는데 나이가 있나. 이준 학생이 수락만 하면 무사고의 최연소 선생이 될 수 있어. 이 명예로운 자리를 거절할 거야?”
“네. 거절합니다. 전 누굴 가르칠 생각 전혀 없어요.”
이준이 단칼에 거절했다.
원래의 계획에는 없던 일.
사실 자신이 학교에 다닌 이유는 오로지 혈신의 지도와 마겁 때문이었다.
천무대전을 우승하면 주어지는 부상.그 외에 얻을 것은 딱히 없었고, 미련도 없었다.
전생과는 달리, 강자로서 학교의 생활을 포기하는 건 아쉬운 일이긴 하나 학교 밖에서 얻는 게 더 많았다.
굳이 행동에 제약을 받으면서까지 학교에 있을 필욘 없었다.
“칼 같이 거절할 게 아니야. 학교 선생이 되면 얼마나 많은 특권이 있는데. 아직 시간은 많으니 신중하게 생각해봐.”
“싫어요, 안 합니다.”
“만약 이준 학생이 수락한다면 특별반이 개설될 거야.”
“특별반이요?”
“오직 이준 학생만을 위한 반이지. 반의 학생은 이준 학생이 직접 뽑아갈 수 있어. 어때? 이래도 안 땡겨?”
솔깃한 제안이긴 하나, 그래도 선생 짓은 하고 싶지 않았다.
“네. 안 땡겨요. 그럼 다음에 뵐게요. 안녕히 계세요.”
이준이 한민성에게 고개를 숙이곤 방을 나갔다.
뒤에선 한민성의 목소리가 계속 들렸지만, 귀를 닫았다.
이준은 건물에서 나와 운동장 쪽을 걸었다.
[좋은 제안이던데 왜 거절하느냐.]
‘귀찮은 일은 딱 질색이에요. 허수랑 지유 가르치는 것도 바빠요.’
[제자가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구나.]
‘제가 뭘 모르는데요?’
[테크트리 포인트 얻고 싶지 않으냐?]
‘그건 게이트에서도 얻습니다만?’
이준이 지지 않고 대답했지만, 들려오는 건 무극자 사부의 비웃음이었다.
[끌끌.]
‘또 뭔데요?’
[네 경지가 높아져서 낮은 등급의 게이트를 깬다면 포인트가 적게 오를 텐데, 못 느꼈느냐?]
‘아.’
아차 싶었다.
능력치 하락 전의 등급은 AA급.
레드존을 클리어해야지만, 포인트를 그나마 많이 얻을 수 있었다.
서울 숲 블루존 게이트를 깨고 얻은 포인트는 많아봤자 200만 포인트 이하였다.
테크트리 능력치 항목을 두 개밖에 올리지 못할 포인트.
레드존 게이트를 깨지 않으면 효율이 안 높았다.
‘그런데 사부님. 특성 개화시키는 것도 하루 만에 할 수는 없잖아요. 가르쳐서 테크트리 포인트를 얻는 것도 한계가 있어요.’
[그렇담.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게이트를 클리어하면 어떻겠느냐.]
‘와, 천재.’
정말 솔깃한 방법이긴 했다.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게이트를 클리어한다.
효율이 높지 못하면 효율을 높이는 방법을 찾으면 됐다.
무극자 사부가 말해준 건 그 효율을 높이는 방법이었다.
마침.
띠링-
알림이 울림과 동시에 새로운 퀘스트가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