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1화
이준은 서울 숲 게이트에서 나온 직후 줄곧 4대 성지의 금역에 있었다.
눈을 감고 가부좌를 틀고 있는 이준.
그의 몸에서 회색 아지랑이와 붉은 아지랑이가 번갈아 가며 나왔다.
‘쉽사리 살기가 가라앉질 않네요.’
[한 번 튀어나온 파천기를 제어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니라. 어서 빨리 무극장법을 터득하고 무극기를 배우는 게 이롭다.]
무극장법은 15,000,000p가 필요하다.
이 무공을 배우는데도 한참이나 남았는데, 무극기는 어떻겠나.
심지어 무극기를 배우는 데 필요한 테크트리 포인트는 훨씬 더 많이 필요했다.
얼마의 포인트가 더 필요한지는 아직 정확히 모르지만, 무극장법의 몇 배는 넘지 않을까 싶다.
‘무극기를 배우는 거 말고는 제어할 방법이 없어요?’
[있지.]
‘뭔데요?’
[네가 화경의 완숙에 드는 것이니라.]
화경이라 하면 대한민국 최고 전력이라는 검제와 같은 경지이다.
등급으로 치면 S급.
‘무극기를 배우기만큼 어려운 조건이네요.’
[화경도 무극기를 다루기엔 최소한의 조건이니라. 게으름 피우지 말고 강해질 생각을 해야 할 것이야. 아니면 네가 파천기. 정확히는 파천멸기에 지배당할지 몰라.]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에요. 파천멸기란 기운. 너무 위험해요.’
서울 숲 게이트에서 무극자 사부의 호통이 아니었더라면 큰일이 날 뻔했다.
패왕대를 죽이는 건 둘째치고, 자칫 박혁진과 허수를 공격했다면?
생각만 해도 아주 끔찍했다.
[파천멸기는 아주 끈질긴 놈이긴 하지.]
‘그런데 파천멸기는 파천신공에서 나온 가지잖아요. 저는 혼원신공을 쓰는데 왜 파천멸기가 나온 걸까요?”
[아무래도 너의 복수심이 혼원신공에 봉인된 파천멸기를 자극했는지 싶다.]
‘제 복수심이란 말이죠….’
[더불어 너의 약해진 신체도 한 몫 한 것이겠지. 파천멸기는 주인이 약해지면 목덜미를 물어버릴 만큼 약한 놈을 경멸하느니라. 이 모든 게 내 탓이기도 하지.]
소싯적 혈기왕성할 때, 무극자 사부의 성격을 빼다 박은 것.
무관용에 약자 멸시.
황제조차 아래로 깔보는 무림의 신.
파천혈신이란 이명을 가진 무극자는 파천멸기 그 자체였다.
‘다 사부님이 자처하신 거네요?’
[뭬야?]
이준이 혼원신공에 집중하는 척 입을 다물었다.
그의 말에 진중하게 말하던 무극자 사부의 목소리가 어느새 꼬장꼬장하게 변했다.
[다시 말해 보아라. 제자야. 이 사부의 귀가 잘 안 들려서 말이다.]
‘……’
[말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지 알면서 우리 제자가 잔대가리를 굴리는구나.]
무극자 사부의 목소리에 언뜻 살기가 흘렀다.
‘사부님의 오만한 점을 닮은 것 같다 했습니다.’
[……사부가 오냐오냐 해줬더…]
이준이 무극자의 말을 끊기까지 했다.
‘오만. 얼마나 멋있는 말입니까. 하늘 위. 군림하고 있을 때나 어울리는 말 아니겠습니다. 고금제일인이신 사부님에게 딱 어울리는 단어라고 생각됩니다.’
이준이 꿀꺽 침을 삼켰다.
과연 이번에도 통할까.
너무 써먹어서 이젠 안 먹힐 것 같다고 생각할 때였다.
[홀홀. 아무렴. 이 사부 말고 그 누가 오만이란 단어가 어울린단 말이냐. 제자의 안목은 여전히 뛰어나구나.]
‘과찬이십니다.’
또 먹혔다.
이준은 십년감수했다.
이 입방정 때문에 이번에는 쉽게 넘어가지 않을 거라고 여겼는데 아니었다.
참 단순한 사부 덕에 마음이 놓였다.
괜히 또 쓸데없는 말을 지껄일까 봐 입을 다물고 운공에 집중한 이준이었다.
한편.
이준의 주변에는 파랑이와 황금이를 비롯한 몬스터들이 몰려 있었다.
“헉! 주인이 노하신 거 아닐까요?”
테구르가 고개를 좌우로 돌리면서 불안한 마음을 내비쳤다.
“이전의 우리 행동에 마음에 안 드신 모양이야.”
샥쿠가 진지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히이이익! 지금까지 잘 해왔건만. 공든 탑이 한순간에 무너지다니.”
테구르가 절망에 빠진 표정을 지었다.
대장의 태도에 다른 스케먼들도 절망에 빠졌다.
잘 살고 있었는데, 이제 죽는 건가 하는 얼굴이다.
그들의 귀로 천사의 목소리가 들여왔다.
“저건 이준 공자께서 운기행공을 하는 거예요. 몸에 이상이 없나 점검하는 거니 다들 걱정하지 말아요.”
만년금구인 황금이가 모두를 안심시켰다.
“저, 정말입니까?”
제일 먼저 테구르가 물었다.
참 걱정이 많은 스케먼이다.
“네. 그러니 보고 있지 말고 각자 하던 일 하세요.”
“휴우우. 십년감수했다.”
황금이의 말에 모두가 뿔뿔이 흩어졌다.
마지막으로 테구르가 이준을 향해 경례하곤 일을 시작했다.
스케먼이 하는 일은 농사.
죽음의 고비를 넘겼다고 생각했을까.
테구르는 다른 스케먼들을 닦달하며 전보다 더욱 열정적으로 일을 했다.
스케먼들은 일심동체라서 그런지.
테구르의 마음을 느낀 녀석 중 게으름피우는 녀석은 한 마리도 없었다.
* * *
중국 산둥성 청도 해안에 있었던 당소미가 인주를 맞이한 후, 혈불을 만나기 위해 혼자 비행기에 올라 한국에 도착했다.
그녀가 쓰고 있던 선글라스를 벗었다.
“뭐야? 이 평화는. 어지럽히고 싶게 정말.”
당소미의 입매가 비틀어졌다.
그녀의 눈에 비친 광경은 중국과 전혀 달랐다.
현재의 중국은 소리 없는 소리 없는 전쟁이 시작된 참이었다.
현시대의 천마와 활불이란 자의 제거.
자신은 이곳에 정착하고 수십 년을 음지에서 해왔던 일을.
인주는 며칠 만에 중국 절반을 차지한 천마의 세력을 반 토막 냈다.
경이로울 정도의 힘.
괜히 현경에 닿아 있는 사람이 아니다.
중국의 상황과는 달리 한국은 굉장히 평화로웠다.
마치 게이트에서 몬스터가 튀어나오지 않은 청정구역 같달까.
그만큼 당소미의 눈에 보이는 공항은 안전했다.
“그런데 이 땡중 새끼의 부하들은 코빼기도 안 보여?”
주변을 찾아봤지만, 극락사의 승려나 신도는 없었다.
당소미는 팔짱을 끼고 기다렸다.
오기만 하면 가만히 안 두겠다는 얼굴이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만 갔다.
“이 새끼들이 미쳤나.”
당소미의 얼굴이 악귀처럼 일그러졌다. 자존심에 계속 기다렸건만, 결국 핸드폰을 꺼내게 했다.
혈불의 신도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만 걸리고 받지 않자.
“악!”
폰을 공항 바닥에 내던졌다.
예쁜 구두를 신고 있던 그녀가 힐로 폰의 액정에 화풀이했다.
그녀의 커다란 목소리에 주위의 시선이 모였다.
미친 여잔가 하는 표정으로 보는 사람들.
당소미는 아랑곳하지 않고 화를 풀었다.
얼굴이 찌푸려질 정도로 시끄럽자 공항의 보안 요원이 나섰다.
“손님.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당소미의 발이 우뚝 멈췄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말했다.
“설마 지금 나한테 그런 거야?”
아주 관능미 넘치는 목소리였다.
그녀의 음성에 잠시 멍을 때린 보안 요원이 고개를 흔들고 정신을 차렸다.
그는 각성자.
공항 주변에 있는 게이트를 감시하고, 혹 몬스터가 튀어나올 것 대비해 사람들을 보호하는 역할을 했다.
그 때문인지 당소미의 관능미 넘치는 목소리에도 벗어날 수 있었다.
“네. 주변 손님들도 있으니, 피해가 가지 않게끔 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배짱 한 번 좋아.”
당소미가 보안 요원의 볼을 손가락으로 살짝 두드렸다.
볼을 타고 내려온 손가락이 목을 살짝 스치고 지나갔다.
“잘 가.”
당소미가 보안 요원에게서 몸을 돌렸다.
잘 가란 말과 함께 사라지는 당소미.
보안 요원은 여자를 이상하게 봤다.
왜 자신에게 ‘잘 가’란 말을 할까.
의문스러웠지만,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그런데.
고개가 움직이지 않았다.
몸 또한 마찬가지.
어느 순간 세상이 기우는 것 같았다.
뚝.
데구르르.
보안 요원의 목이 깔끔하게 몸과 분리됐다.
잘린 몸에선 피 분수가 났다.
“꺄아아아!”
제일 처음 보안 요원을 발견한 여자가 비명을 질렀다.
그의 죽음으로 인해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한 공항.
공항에서 나온 당소미는 이를 갈며 경공을 펼치고 있었다.
“중국에 있을 때부터 연락을 안 받더니 빌어먹을 땡중 자식이 날 엿 먹이는 거야.”
원래는 자동차를 타고 편하게 오려 했던 계획.
혈불의 수하들이 전화를 안 받는 통에 경공을 써야만 했다.
당장 혈불에게 가서 한바탕할 기세였다.
그녀가 인천공항에서 인왕산 자락에 도착한 건 고작 20분.
엄청난 속도로 극락사가 있는 게이트 입구에 도착했다.
“이래도 마중을 안 나온다 이거지?”
당소미가 게이트로 들어갔다.
저 계단 위.
극락사 스님들이 입구를 지키고 있어야 했는데, 보이지 않았다.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당소미가 빠르게 계단을 밟고 올라갔다.
그녀가 극락사의 현판이 걸려 있는 곳에 도착했는데.
“이, 이게 무슨 일이야!”
극락사를 대표하는 대웅전과 전각들은 모두 폭삭 내려앉아 있었다.
이곳에 아무도 없는 것처럼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혈불! 어딨어? 있으면 대답해!”
그녀가 목소리에 내공을 담아 외쳤다.
하나 들려오는 대답은 없었다.
기척은 없고, 그녀의 눈에 보이는 자국들.
누군가와 싸움을 벌인 흔적이다.
곳곳에 핏자국도 있었다.
“누가 이곳까지 와서 혈불과 싸움을 한 거야!”
당소미는 도저히 못 믿겠다는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 * *
이준이 운공을 끝내고 게이트에서 나왔다.
기숙사 침대에 벌러덩 누웠다.
잠깐만 쉬려고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우지끈.
기숙사 방문이 부서지면서 한지유가 안으로 들어왔다.
“이준!”
“또 너냐. 노크 좀 하지 그러냐.”
“노크가 중요해? 습격받았다며. 괜찮아?”
평소의 얼음 꽃 같던 그녀는 어디 갔는지.
지금 그녀는 드물게 굉장히 흥분해 있었다.
항상 단정하게 정리되어 있던 머리카락도 헝클어져 있고,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보시다시피.”
이준이 어깨를 으쓱했다.
“나 걱정돼서 온 거야?”
“아, 아니! 그냥… 네가 훈련에 안 나오니까 와 봤지.”
“아닌 것 같은데? 나 걱정돼서 온 것 같은데.”
“아니라니까.”
한지유의 얼굴이 빨갛게 변했다.
민망한지 고개를 푹 숙이며 버럭 소리쳤다.
“멀쩡한 거 봤으면 됐지?”
“…응.”
이준의 말에 한지유가 몸을 돌렸다.
그러다가 마이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민트 초콜릿을 빼서 이준의 손에 쥐여줬다.
“먹어.”
“헐. 두 개씩이나 나 주는 거야?”
“먹고 기운 차려서 훈련 나와. 애들 다 너 기다리고 있어.”
점점 목소리가 작아지더니, 왔던 속도만큼 빠르게 돌아갔다.
이준이 피식 웃었다.
걱정돼왔으면서 아닌 척은.
거짓말 못 하는 게 확 티가 나는 한지유였다.
이준이 부서진 문을 보고 중얼거렸다.
“고쳐봤자 또 고장 날 게 뻔한데 그냥 놔두자.”
침대에 벌러덩 누웠는데, 폰이 울렸다.
화면을 보니 박혁진이었다.
“어. 왜?”
[왜긴 왜야. 나한테 일 맡겼으면서.]
“네가 아니라 철혈검가. 말은 바로 하지?”
[내가 곧 철혈검가야 인마. 준이 너 요즘 들어, 나 자꾸 무시한다?]
수화기 너머에서 박혁진의 서운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장난이야. 장난.”
[그렇지? 난 또. 겁나 서운할 뿐 했네.]
“알았으니까. 말부터 해봐.”
[너희 가문 쪽에서 사람이 왔어.]
“누구?”
[천왕대주 사형준.]
그럴 줄 알았다.
자기 부인이 철혈검가의 금옥에 갇혀 있음에도 아랫사람이나 보냈다.
가족보다 명예가 중요한 사람.
타 가문에 머리를 숙이고 들어가고 싶지 않을 터.
그러니 사형준만 보냈겠지.
‘여전하십니다.’
이 또한 예상했다.
하나 사람들은 모르고, 오로지 이준만 아는 사실이 하나 있다.
아니지.
자신과 사형준만 아는 사실이다.
명예와 오직 가문의 번창만 생각하는 아버지.
세상 사람들도 아버지를 이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이라고 하지 않던가.
이건 그의 본성을 숨기기 위한 위장에 불과했다.
‘이러니 제가 당신과 신력권가를 더 싫어하는 겁니다.’
그래도 아버지라고, 이전의 삶에선 그에게 인정받고 싶었다.
어렸을 적.
우연히 봤던 아버지의 감춰진 비밀을 보기 전까진.
그때를 생각하니 눈살이 절로 찌푸려졌다.
“거래는 안 했지?”
[준아. 우리 철혈검가야. 너한테는 미안한 말이지만, 신력이 우리한테 거래를 걸만한 짬이 되냐?]
박혁진의 목소리에 자부심이 가득했다.
“그래 너희 가문 존나 강하다.”
[알아 나도.]
“패왕도가는?”
[안쪽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소식이 없네. 천무대전 이후로 패왕도가가 완전 문을 닫고 안에서 아무도 안 나와.]
“내가 먼저 문을 두드려봐야겠구만.”
[혼자 또 뭐 하려고.]
“뭘 하긴. 아무것도 안 해.”
이준의 입꼬리가 슬쩍 말려 올라갔다.
마치 일을 벌이기 직전의 장난스러운 미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