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0화
골이 흔들렸다.
몸 상태가 안 좋은데 무극자 사부의 일갈을 들으니 정신이 나갈 것만 같았다.
[내 때는 말이다, 사부가 눈물을 보인다는 것은…]
요즘 휴업하나 싶었더니, 오랜만에 라떼 사부가 나타났다.
설교를 무려 두 시간 가량 듣고 나서야 라떼 사부가 사라졌다.
[큼큼. 목이 메었더니 칼칼하구나. 네가 깨어난 걸 확인도 했고, 사부는 들어가 보마.]
그 뒤로 무극자 사부의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이제 좀 휴식을 취할 수 있을 것 같았으나.
“아, 파멸겁!”
뒤늦게 파멸겁이 떠올랐다.
의식을 잃고 쓰러졌으면 파멸겁은 어떻게 됐을까.
그냥 쇠 막대기인 줄 알고 게이트에 버리고 온 게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하는데.
번쩍.
병실 허공이 빛으로 반짝이더니, 하나의 무기가 나타났다.
무의식 속에서 들었던 창.
파멸겁이 자신의 옆에 존재감을 드러내며 나타났다.
[파멸겁이 주인의 부름이 응답했습니다.]
“헐. 이거 내가 부른 거야?”
신병은 주인의 부름에 응답한다고 알려졌다.
서양의 성검이 그랬으니까.
아시아 지역에선 신병이라 불리는 무기가 없었다.
이준도 이런 현상을 실제로 처음 보는 거다.
“대박. 쇠막대기였던데 존멋으로 바뀌었어.”
쇠봉이던 파멸겁이 진한 붉은색 창으로 변형되어 있었다.
한눈에 봐도 고급져 보였다.
S급?
아니다.
적어도 SS급은 됐다.
이준이 파멸겁을 쥐었다.
파멸겁에서 나온 회색의 기운이 이준의 몸으로 들어갔다 다시 나왔다.
[파멸겁이 혼원신공을 인식했습니다.]
[파멸겁이 당신에게 예속되었습니다.]
“음… 멋있긴 한데, 눈에 너무 튀는데 좀 작아졌으면 하는데.”
이준의 말에 파멸겁의 길이가 점차 줄어들었다.
순식간에 6cm짜리의 봉으로 변한 파멸겁.
그의 눈이 커졌다.
“설마 내 생각에 따라 변하는 거야?”
조금 전 같이 창의 형태가 됐으면 하는 바람을 보이자.
다시 붉은 창으로 변했다.
“주, 죽인다.”
이러면 자신이 마겁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아무도 모를 터.
아주 만족스러웠다.
이젠 파멸겁을 확인할 차례.
숨을 크게 내쉬곤 파멸겁의 정보를 불러왔다.
[파멸겁(1단계)]
등급: SSS
설명: 파천혈신의 제1 마병. 파천멸기에 반응하며, 주인의 손길 외에는 모두를 거부한다. 잘못 만졌다가는 소멸되거나, 영혼이 사로잡혀 꼭두각시가 되고 만다.
옵션: 확인 불가.
“트리플S!”
옵션을 확인하지 않아도 됐다.
등급이 모두 알려줬다.
대단한 무기라고.
이 하나만 봐도 충분했다.
“내가 트리플S 등급의 무기를 얻다니.”
전생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무기였다.
D등급만 얻어도 감지덕지.
감회가 새로웠다.
“앞으로 잘해 보자.”
웅웅.
이준의 말을 알아들었는지, 파멸겁이 창음을 내었다.
그는 기절한 탓에 보지 못한 메시지를 주르륵 훑어봤다.
퀘스트가 완료됐다는 것까지.
전부 살펴보곤 창을 껐다.
이제 마지막 남은 것 하나.
“이제 뒷수습을 해야겠지?”
한지유에게 자세히 들어보니 얼추 알겠다.
허수가 사는 도봉구에 갑자기 거대한 얼음벽이 나타났다는 것.
그것도 수십 마리의 몬스터가 출몰했다는 거다.
자신들이 파견 나갔던 이유는 각 가문이 마겁을 찾느라 여유 병력이 없어서였다고 한다.
몬스터들이 득실한 곳에 갔을 때 허수를 만나 구했다는 이야기까지.
이걸 듣고 알 수 있었다.
얼음 속성 몬스터는 몇 없다.
전생에도 샤크로아 말고는 얼음 속성을 지닌 레드급 몬스터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렇다는 건 자신이 돌보고 있는 샤크로아들의 짓.
자세한 내용은 모르니, 직접 확인해 보는 것뿐이다.
이준이 팔에 꽂힌 링거 바늘을 뺐다.
“뀨?”
파랑이가 일어나지 말라고 옷깃을 잡았지만.
“일 수습하고 다시 돌아올 거야.”
이준이 파멸겁을 챙겼다.
파랑이도 옆구리에 끼곤.
“게이트 소환.”
지잉-
허공에 나타난 게이트로 이준이 들어갔다.
* * *
“샥쿠 님. 밖에 인간들이 많이 몰려 있는 것 같습니다요.”
“으음…”
금역의 주인이 게이트에서 나온 직후 문은 곧바로 닫혔다.
그때부터 폐차장에서 꼼짝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나가서 싸울 수도 없는 노릇.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다.
정말 다행인 건 이곳에 로티틸이 있다는 거다.
페어리는 자연의 주인.
곡식을 잘 자랄 수 있게 해줄 수 있으며, 과일도 열릴 수 있게 할 수 있었다.
집을 설계할 때 마당에 과일나무와 밭과 채소를 딸 수 있게 해뒀다.
덕분에 며칠간 얼음벽 안에서 버텼다.
하나 이젠 그것도 끝이다.
이 많은 인원이 먹을 식량이 떨어졌다.
“안 되겠다. 이대로 뚫어나갈 수…”
“뭘 뚫고 나가?”
샥쿠는 말을 끝마치지 못했다.
게이트에서 나타난 이준이 말을 가로챘다.
“주인님.”
“오오! 주인님이야.”
“찍찍!”
자리를 비웠던 이준이 게이트에서 나타나자 몬스터들이 반가운 얼굴을 했다.
“뭘 잘했다고 날 불러.”
“읍.”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몬스터들이 이준의 눈치를 봤다.
자기들이 뭘 잘못한 건지 아는 모양이다.
“허수!”
“넵!”
“이게 어떻게 된 건지. 자세히 말해 봐.”
이준은 게이트에서 나오고 줄곧 주변을 둘러봤다.
사방이 얼음벽으로 되어 있었다.
신기한 건 어둡지 않았다.
도리어 밖보다 여기가 더 밝아 보였다.
“제가 걱정된다고 데려다주다가 이렇게 됐습니다.”
“그리고.”
“폐차장인 저희 집을 보고 테구르 님이 집을 만들어 주시다가 그만…”
“하아.”
이준이 고개를 돌려 테구르를 보았다.
“히에에엑!”
그가 아무 짓도 안 했건만, 혼자 겁을 잔뜩 집어먹은 테구르였다.
“죄, 죄송합니다. 주, 주인님. 하, 한 번만 자비를.”
“누가 보면 내가 너 죽이려고 하는 줄 알겠다.”
“아, 아닙니까?”
“죽여 줘?”
“히에엑!”
테구르가 기겁하며 고개를 땅에 처박았다.
“저 집 만든 거야?”
“네? 네.”
이준의 질문에 테구르가 고개를 슬쩍 들어 연신 끄덕였다.
“8명이 살기에 좀 크긴 한데 잘 만들었네.”
“저, 정말입니까?”
“더 칭찬해 줘?”
“아닙니다. 헤헤.”
이준이 자신을 죽이지 않을 것 같자, 테구르가 그제야 웃었다.
“다른 건 설명 됐고. 이 얼음벽은 뭐냐?”
“쓰레기장 같아서 대신 방어벽으로 만들었습니다.”
샥쿠가 자신 있게 말했다.
테구르가 이준에게 용서를 받자, 자신도 괜찮을 거라 여겼다.
“파랑아. 저걸 어떻게 하지?”
“뀨우!”
파랑이가 샥쿠를 향해 송곳니를 드러냈다.
“어억! 그, 금역의 주인이시어. 용서를!”
테구르는 용서받고 자신은 꾸지람을 듣자 억울했다.
하지만 어쩌랴.
금역의 주인이 화가 났는데 납작 엎드릴 수밖에 없었다.
“과묵한 줄 알았더니. 생각보다 뻔뻔한 구석이 있네.”
“요, 용서를!”
“용서는 무슨. 일어나서 다들 집으로 돌아가.”
이준이 게이트를 열어 줬다.
스케먼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4대 성지의 금역으로 돌아갔다.
테구르와 로티틸, 마지막으로 샥쿠까지.
게이트로 사라졌다.
그 많은 인원이 없어지자, 텅 비어버린 느낌이다.
“이 얼음 마력은 어쩌지?”
샥쿠가 생성한 얼음벽.
녀석의 말은 농담이 아니었다.
자동차가 올려져 있던 곳이 졸지에 단단한 방어벽으로 탈바꿈이 된 상태다.
레드존 이하의 몬스터는 접근조차 꺼리는.
A급 각성자도 흠집 내지 못한 굉장히 쓸모 있는 빙벽이다.
“이대로 그냥 놔둘까?”
그의 눈에 들어온 허수의 동생들.
너무 어렸다.
도봉구는 게이트 청정 구역이긴 하나, 언제 생길지 모르는 지역.
저 어린 동생들이 만약 몬스터에게 해를 당한다면?
허수가 굉장히 슬퍼할 거다.
허수도 마음 놓고 학교를 다녀야 하지 않을까.
오히려 이 얼음벽이 허수에게는 고마운 벽일 수도 있었다.
“저 얼음 천장은 테구르한테 손 좀 봐 달라고 해야겠네.”
이준은 얼음벽을 이대로 두기로 결정했다.
“형님… 저 때문에 괜히.”
“됐어. 거짓말 좀 치면 돼.”
이준이 벽에 손을 댔다.
혼원신공의 내기를 손에 집중시켰다.
아직 상태가 호전되지 않아서 내공을 끌어올릴 때마다 목구멍에서 피가 올라오는 느낌이다.
쾅!
억지로 내기를 내보내 입구 쪽 얼음벽을 부숴버렸다.
* * *
쾅!
토벌대의 앞.
폭음과 함께 얼음벽이 부서졌다.
두 개의 그림자가 먼지를 뚫고 나왔다.
“이준 도련님?”
토벌대로 지원 온 사람은 사형준과 천왕대였다.
신기지가의 비선도 있었지만, 딱히 도움 될 만한 전력은 아니었다.
“오, 사형준이네?”
이렇게 운이 좋을 수가.
토벌대로 편성된 자로 이준이 잘 아는 사형준이었다.
“어떻게 그곳에서 나오는 길입니까?”
“보면 몰라? 몬스터가 있단 소리에 달려 나왔지.”
사형준은 이준이 며칠간 쓰러진 지 모른다.
신기지가의 비선도 마찬가지.
이준의 거짓말에 바로 속아 넘어갔다.
“안쪽은 어떻게 됐습니까?”
“다 처리했어.”
“예?”
“몬스터 탐지기 있지? 한번 봐봐.”
사형준이 천왕대원에게 고개를 돌렸다.
몬스터 탐지기를 들고 있던 천왕대원이 말을 더듬었다.
“그, 그 많던 몬스터가… 없습니다!”
신기지가의 비선도 탐지기를 확인했다.
수십 개로 표시된 점들이 없어져 있었다.
“맞지?”
이준이 뻔뻔한 얼굴로 거짓말을 했다.
허수는 이준처럼 철판을 깔지 못해 얼굴을 푹 숙이고 있었다.
“혼자 처리 하신 겁니까?”
“보시다시피. 두 명. 사실 몬스터가 나온 저기가 얘 집이야. 그래서 내가 부랴부랴 달려 온 거고. 그렇지 허수야?”
“예? 네.”
허수의 얼굴이 빨개졌다.
거짓말을 하니 홍당무가 됐다.
그러나 토벌대는 허수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레드급 몬스터를 단 두 명이서…”
“사실이면 엄청난 일이야.”
“당연히 사실이지. 몬스터 탐지기에 몬스터가 한 마리도 잡히지 않는데.”
천왕대가 호들갑을 떨었다.
이준이 부정하고 있으나, 신력권가의 출신.
그의 명성이 하늘을 찌르면, 덩달아 신력권가도 명성이 높아진다.
그런 가문에 속한 천왕대는 자부심을 가질 수 있었다.
“제가 확인해 봐도 되겠습니까?”
“그러던지.”
사형준이 천왕대를 이끌고 얼음벽으로 들어갔다.
그 안에는 어린아이들이 있었다.
“걔들은 얘 동생.”
이준도 따라 들어와 옆에 있는 허수를 가리켰다.
천왕대와 신기지가의 비선이 곳곳을 샅샅이 뒤졌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몬스터와 게이트는 보이지 않았다.
“게이트는 내가 닫았고, 밖으로 나온 몬스터는 그린급 잔챙이. 게이트에서 나온 기운이 주변을 꽁꽁 얼어붙게 만든 거야.”
이준의 입에서 거짓말이 술술 나왔다.
그들은 그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이 안에 몬스터가 한 마리도 없었으며, 게이트 또한 존재하지 않았다.
더 이상 조사는 괜한 전력만 낭비할 뿐.
사형준이 철수를 지시했다.
“본가로 돌아간다.”
“예.”
“보고서는 당신들이 대신 작성해 주시오.”
비선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비선들이 신기지가로 돌아가려는 그때, 이준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 비선분들에게 할 말이 있었는데.”
“말씀하십시오.”
“15가문 연맹 수뇌부에게 전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여긴 이 애의 집이니 괜히 이 얼음벽이 탐나서 뺏을 생각하지 말라고 하세요. 특히 패왕도가나 검산그룹. 그 쪽네들. 만약 게이트가 나올지 모른다, 위험하다 이런 이상한 꼬투리로 집을 넘기라고 협박하면 내가 가만 안 놔둔다고 전해 주세요.”
신기지가의 비선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보기에도 이 얼음벽.
좋은 방패였다.
몬스터는 자신보다 강한 몬스터를 두려워한다.
얼음벽은 레드급 몬스터가 뿜어낸 냉기.
얼음 마력으로 되어 있어 햇살에도 녹아내리지 않을 터.
얼음벽은 방벽의 역할을 했다.
어떤 가문이라도 탐낼 만한 곳.
조금만 손본다면 요새로 삼아도 될 충분한 장소였다.
비선들도 돌아가면 상부에 제시할 내용.
이준의 말이 있고 나서 아예 기억에서 지워버렸다.
얼음벽을 탐내는 건 이준과 적으로 돌아서겠다는 이야기.
신기지가는 이준을 아군으로 생각하지, 적군으로 두지 않았다.
그건 사형준도 같았다.
“저희 신력은 이준 도련님의 뜻을 따릅니다.”
“신기지가에서도 얼음벽을 탐낼 일이 없습니다. 패왕과 검산에 이준님의 뜻을 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