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6화
부스럭.
무너져 내진 건물 잔해 속에서 이준이 일어났다.
만신창이가 된 그의 몸.
특수한 소재로 제작된 교복이 너덜너덜해졌다.
이준은 다친 와중에도 파랑이를 품에 꼭 안고 있었다.
“괜찮아?”
“뀨웅.”
파랑이의 귀가 축 처졌다.
자기 때문에 주인이 다쳤다고 생각한 모양.
고개를 휙 돌리더니 앙증맞은 이빨을 보였다.
파랑이의 몸에서 마기가 피어올랐다.
혈불을 적으로 간주한 파랑이가 그를 공격하려 했지만.
“안 돼. 너 죽을지 몰라.”
파랑이가 다 크면 블랙급 몬스터가 된다.
하나, 아직은 레드급 몬스터.
혈불에게 달려든다면 파랑이가 다칠지 모른다.
“뀨웅…”
“여긴 내가 해결할 테니까 게이트에서 기다리고 있을래?”
“뀨웃!”
파랑이가 도리질을 했다.
이준의 손길을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쳤지만 늦었다.
“게이트 소환.”
지잉-
허공에 붉은색 포탈이 작게 생겼다.
“내가 갈 때까지 얌전히 게이트에 있어. 다른 데 나가면 혼나.”
이준이 포탈로 파랑이를 던졌다.
“닫아.”
“뀨우우!!!”
건너편 게이트에서 파랑이가 소리치며 달려왔으나 이미 게이트는 닫힌 후였다.
철컥!
자물쇠로 문을 걸어 잠그는 듯, 쇠사슬이 작은 원에 두르며 사라졌다.
“으음….”
이준이 몸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혈불에게 맞은 옆구리가 욱신거렸다.
기혈도 꼬인 것같이 원활하지 않았다.
“이렇게 만신창이가 된 건 오랜만이네.”
회귀 전에는 항상 이랬던 몸.
무극자 사부를 만나고 혼원신공을 가진 이후부터 다치지 않았다.
자신이 그만큼 강해졌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오늘은 다르다.
혈불이라는 이세계의 악마.
천외천이라 불린 남자에게 몇 수만에 만신창이가 되었다.
확실히 강했다.
대한민국 랭킹 1위에 달하는 검제만큼 말이다.
“테크트리 포인트도 얼마 없으니. 쌩으로 저놈을 이겨야 하네.”
솔직히 자신이 없었다.
18나한을 상대로 가뿐히 이겼을 때와는 전혀 다른 느낌.
처음으로 벽을 느꼈다.
그래도 어째?
손가락만 빨다가 당할 순 없었다.
도망은… 적성에 안 맞았다.
혈불이 죽든 자신이 죽든.
둘 중 하나는 여기서 죽어야 했다.
“뭐라고 혼자 지껄이는지 모르지만, 설마 너도 우리와 같은 동류인가?”
“동류?”
“모르면 됐다. 그보다 너한테 궁금한 게 생겼다.”
혈불이 두 손에 내공을 주입한 채 걸어왔다.
그 뒤에 있던 중도 함께.
이준도 혈전창을 고쳐 잡았다.
혼원신공이 내부를 돌며 꼬인 기혈을 풀고 있었다.
단번에 고쳐지지 않을 것 같지만, 그래도 믿을 건 혼원신공뿐이다.
혈불이 이준에게 다가가면서 물었다.
“어째서 각성자인 네놈이 무신의 무공을 익히고 있단 말이냐.”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네가 방금 쓴 초식은 환영살이었다.”
혈불도 무신의 창법을 아는 듯, 초식명을 꿰뚫고 있었다.
“그게 너랑 뭔 상관인데.”
“상관? 있지. 무신의 무공은… 파천혈신의 무공이니까.”
이준의 눈이 커졌다.
‘사부님. 이명이 대체 몇 개에요.’
[크흠. 저번에도 말했지 않느냐. 사부가 악명을 높였을 때 무림인들이 부르면 이명이었느니라. 아주 부끄러운 단어지.]
‘막 혈신의 지도가 사부님의 비밀 은신처나 이런 곳 아니죠?’
[……]
무극자 사부의 음성이 들려오지 않았다.
‘…진짜예요?’
이준이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설마설마했다.
혈신의 지도.
파천혈신이란 말과 이세계의 악마들.
그러니까 천외천 놈들이 혈신의 지도를 찾고 있다는 걸 알았을 때부터 의심스럽긴 했었다.
그런데 정말로 무극자 사부와 모두 연관이 있다니.
‘그, 그러면 루트를 선택할 때 무신의 길이랑 무극의 길, 파천의 길. 이거 전부 사부님 이명과 관련이 있는 거죠?’
[그렇다고 볼 수 있느니라.]
‘아니. 어차피 다 사부님이면 왜 그런 선택지를 줍니까? 제가 파천을 선택했으면 뭐, 파천기부터 배울 수 있게 해줬던 거예요?’
[…….]
또 다시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맞나 보네.’
이걸 이제야 알았다니, 정말 멍청했다.
사부가 첫째 제자의 이야기를 했을 때, 집중해서 들을걸.
바보같이 지금에서야 사부님의 정체를 알다니.
제자로서 실격이었다.
‘그거 아세요?’
[무엇을 말이냐?]
‘저 혈불이란 놈을 보고 알 수 있었어요. 사부님이 정말 고금제일인이었다는 걸요.’
이준이 해맑게 웃었다.
혈불이라는 강적이 눈앞에 있는 상황. 강심장이 따로 없었다.
이준이 가진 무공 중 가장 강한 건 무극창법. 이걸로 혈불을 상대해야만 한다.
사부의 최후 무공인 파천기가 없어도 괜찮았다.
자신에겐 고금제일의 사부가 곁에 있지 않나.
설마 여기서 죽을까. 그것도 사부의 첫째 제자의 제일 약한 수하에게 말이다.
[경고! 적으로부터 강한 마기가 느껴집니다.]
[경고! 적으로부터 강한 마기가 느껴집니다.]
이준의 메시지 창에 불이 났다.
혈불은 소림사의 무공을 익혔으면서 마기도 함께 지녔다.
정순한 내기와 불쾌하기 짝이 없는 마기.
어찌 상반된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충돌을 일으키지 않는 건지.
혈불의 장력은 엄청난 위력을 자랑했다.
괜히 무공명 앞에 ‘혈’ 자가 붙은 게 아닌 듯.
살기가 굉장히 짙었다.
쾅쾅!
혈나한장이 이준을 향해 폭사됐다.
호신강기를 일으켜 장력을 막았으나, 그럼에도 피해는 어쩔 수 없었다.
“으윽…”
혈불은 이준이 공격할 틈도 주지 않았다.
손을 움직일 때마다 소림사의 절기가 끊임없이 나왔다.
[일지선(一指線)이다. 피하거라.]
무극자 사부가 피하라고 말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푹푹푹-
혈불의 손가락에서 뻗어 나온 세 가닥의 경력이 이준의 어깨를 관통했다.
“커헉!”
뚫린 어깨가 불에 댄 듯 아팠다.
상처 부위가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며 썩어 갔다.
[네 실력으로는 아직 혈불을 이기지 못하느니라. 나중을 기약하는 게 좋을 듯싶구나.]
무극자 사부는 마겁을 놔두고 도망치라고 말했다.
자신이 극락사를 찾았다는 건.
혈불도 4대 성지의 금역을 찾을 수 있다는 뜻
그래서 도망칠 수 없었다.
그곳엔 파랑이를 포함한 다른 몬스터들이 있기 때문.
주인님하고 따르는 녀석들을 저 무자비한 혈불에게 죽게 놔둘 순 없지 않나.
‘후욱… 할 수 있어… 후욱… 요.’
몸이 만신창이가 되어도.
혼원신공의 내공이 중간중간에 끊어져도.
이준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가 할 수 있는 건 단 하나.
여태껏 사용하지 않았던 무극창법 후 2식을 사용하는 거다.
이준이 머릿속에 잠든 후 2식을 꺼내 들었다.
“광극인가?”
이준의 자세를 알아본 혈불이 사제인 현무와 눈이 마주쳤다.
현무란 무승이 고개를 끄덕였다.
소리 없이 움직인 무승이 이준의 뒤편에 나타났다.
혈불 만큼은 아니나, 현무 또한 강한 무공을 가진 중.
그가 수도를 바짝 세웠다.
푸욱-
손을 뻗어 이준의 오른쪽 등을 쑤셨다.
“커허억!”
가슴을 관통하고 나온 손에, 이준이 쓰러졌다.
이준의 입에서 피거품이 나왔다.
“쿨럭쿨럭.”
[제자야! 어서 일어나거라!]
무극자 사부의 목소리가 귀에 들렸다.
눈꺼풀이 무거워지면서 주변의 소리가 점점 멀어져만 갔다.
‘죽는… 건가?’
처음 죽었을 때의 느낌이 들었다.
그때의 무서웠던 감정이 올라왔다.
파노라마처럼 눈을 떴을 때부터의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무극자 사부와의 지옥 훈련.
파랑이를 처음 만났을 때.
한지유와 하와이안 피자를 먹었을 적.
운명인지 혁진이가 허수를 스카우트하려고 꼬드기는 모습까지.
최근까지의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많은 이들이 떠올랐지만, 자신과 항상 같이 있었던 사람.
무극자 사부가 생각났다.
‘사부님한테… 더 잘해 드릴걸….’
죽음의 구렁텅이에 여러 번 밀어 넣었지만, 밉지 않았다.
다 자신을 강하게 키우기 위한 것.
지금에서야 그때 무극자 사부님이 어떤 심정이었는지 느껴졌다.
걱정.
말은 무심하게 하며 몬스터에게 밀어 넣었지만,
한편으로는 걱정하는 모습이었다.
처음이다.
자신을 걱정해주는 사람은.
‘그동안… 고마웠어요. 사부.’
[고맙긴, 빌어먹을 녀석아! 당장 일어나지 못할까! 노부의 제자라면 심장이 뚫려도 일어날 수 있어야 하느니라!]
‘그럴 힘이 없네요.’
이준이 희미하게 웃었다.
여전히 까랑까랑한 사부의 목소리였다.
이젠 이 목소리를 다시 못 듣다니 아쉬웠다.
더는 눈꺼풀을 들고 있을 힘이 없어 눈을 감았다.
[못난 놈. 이렇게 심지가 약해서야… 아직은 때가 아니지만, 어쩔 수 없구나.]
무극자 사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흡!”
“현무 사제! 그놈에게서 떨어져!”
혈불의 말을 듣고 현무가 이준의 곁에서 물러섰다.
이준의 몸에서 익숙한 기운이 느껴졌기 때문.
혈불이 그 힘을 느끼기 위해 기감을 집중시켰다.
그러다 혈불의 눈이 부릅떠졌다.
“온전한 파천기라니!”
자신의 주군이 가진 기운을 고작 각성자라는 존재가 가지고 있는 것이다.
* * *
극락사 대웅전 지하.
불상 앞에 세워져 있던 마겁이 부들부들 떨렸다.
허공을 타고 어디선가 날아온 아지랑이가 마겁에 스며들었다.
아지랑이가 마겁에 다 스며들자.
쾅!
마겁이 지하의 천장을 뚫고 위로 솟구쳤다.
극락사 대웅전의 천장까지 부수며 하늘 위에 고고한 자태로 존재를 표출하기 시작했다.
“사형! 대웅전 하늘을 보십시오!”
혈불도 뒤에서 발하는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그가 고개를 돌려 뒤를 본 순간.
“마겁이….”
“저 물건은 주군의 기운에만 발하는 거 아니었습니까?”
“이놈의 파천기에 반응했어.”
마겁이 허공에 붕 뜬 상태로 자신들 쪽으로 오고 있었다.
혈불이 이준에게 고개를 휙 돌렸다.
“저놈을 당장 죽여야 해!”
그의 손에 혈나한장이 맺혔다.
이준을 한 방에 죽이려고 장력을 뿌렸다.
혈나한장이 공기를 태우며 빠른 속도로 날아가 이준에게 폭사하려는 찰나!
마겁이 이준의 앞을 가로막았다.
마겁에서 나온 아지랑이가 생명처럼 움직이며 혈나한장을 소멸시켰다.
“이럴 수가!”
“사제. 감탄할 시간이 없어. 전 내공을 사용해 저놈을 죽여야 해!”
“알겠습니다.”
혈불과 현무가 가진 내공을 극한까지 끌어올려 이준을 공격했다.
그때였다.
뻗어 있던 이준의 신형이 공중으로 떴다.
정신을 잃은 듯 힘이 없는 몸.
마겁이 의지를 가지고 저절로 움직이며 이준의 손에 잡힌 순간, 주변으로 빛이 뿜어졌다.
“윽!”
“이런!”
몸에 힘이 없던 이준이 바닥에 내려앉았다.
그의 눈동자가 회색빛으로 번뜩였다.
“크르르.”
그러면서 거친 숨을 내뱉었다.
짐승과 같은 소리를 내며 혈불과 현무를 노려보는 이준.
서서히 발걸음을 뗐다.
쿠우웅!
한 걸음을 떼자, 지진이 일어났다.
거대한 극락사 대웅전이 이준의 발걸음 한 번에 폭삭 주저앉고 말았다.
“대, 대웅전이!”
현무가 무너진 대웅전을 보며 망연자실했다.
[군림보가(B) 각성했습니다.]
[새로운 무공으로 바뀝니다.]
[군림보(B)의 이름이 무극군림보(SS)로 정정합니다.]
[앞으로 무극군림보를 사용할 수 있습니다.]
……
……
정신을 잃은 이준은 볼 수 없었지만, 군림보가 성장했다.
그뿐만 아니라 다른 메시지가 계속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