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0화
박정연의 포옹에 이준이 기겁했다.
“아, 또! 이러면 사람들이 오해하잖아.”
“날 생각하는 건 역시 준이 밖에 없어.”
그녀가 진한 포옹을 하며 놓아주지 않았다.
찰칵찰칵.
여기저기서 셔터 소리가 들렸다.
플래시가 반짝이며 카메라가 연신 작동했다.
“안 놓으면 준 거 다시 뺏는다.”
이준의 말에 그제야 박정연이 떨어졌다.
“치. 튕기기는. 너도 좋았지?”
“뭘?”
“알면서 뭘 물어봐.”
박정연이 고개를 아래로 내렸다.
운동으로 다져진 몸.
성격만큼이나 화끈하다.
그녀가 은근슬쩍 몸매 자랑을 했다.
살짝 입에 걸친 미소가 뭇 남성들을 홀렸다.
박정연의 의도를 알아차린 이준이 뒤로 황급히 물러나며 삿대질을 했다.
“이 여자가 정말 미쳤나!! 누굴 암살당하게 하려고.”
이준의 주변으로 살기가 요동쳤다.
누가 자신에게 살의를 품고 있는지 알고 있다.
검화부대.
박정연의 팬클럽으로 사생 수준의 집요함을 가졌다.
그들에게 찍힌 순간, 삶이 고달파지는 정도.
정말 다행인 건 여자들이 50%를 차지한다는 것이다.
여자들은 박정연의 걸크러시에 반해 그녀와 만나는 남자가 수준이 맞으면 봐줬다. 그 수준이란 게 아득히 높긴 하지만.
허나 문제는 남자 팬들.
박정연과 수준이 맞든 안 맞든.
자신들이 좋아하는 박정연이 남자와 있는 건 용납하지 않았다.
지금처럼 서슴없이 살기까지 보낸다.
만약 이곳이 으슥한 골목이었다면 진짜 암살을 시도하고도 남았을 터.
골치 아픈 걸 딱 질색으로 여긴 이준은 박정연의 사생과는 엮이고 싶지 않아 했다.
“야, 혁진아. 네 누나 왜 저래?”
“하, 저 관종. 카메라 있으니까 더 오버하네. 후우우. 지친다, 지쳐.”
박혁진이 체념한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박정연은 이준이 준 전진의 수호부를 안쪽 마이 주머니에 소중히 넣었다.
“다녀올게.”
“정말 조심해.”
“알았어.”
박정연은 해맑은 미소를 보이곤 등을 돌렸다.
그 모습을 지켜본 기자들이 수군거렸다.
“연인 같지?”
“찍힌 사진 좀 보십시오. 100프로입니다.”
“연상연하 커플이구만.”
“정말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에요.”
“세기의 커플이 탄생했어. 오늘은 이걸 메인 기사로 쓸 준비해.”
두 기자가 이야기를 나눌 때, 다른 쪽 기자는 의문을 표했다.
“내가 알기론 귀창과 빙화가 썸 타는 분위기였는데.”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알지. 혹시 빙화한테 남자가 있나 뒤를 캤는데, 귀창과 함께 이 앞 피자집을 갔다니까?”
“설마 그거 가지고?”
친구로 보이는 기자가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고작 그런 걸로 추측을 하는 친구가 감이 떨어졌다고 여겼다.
처음 말을 꺼낸 기자가 단호한 눈빛을 보였다.
“내 히든카드로 이걸 가지고 있지. 봐봐. 어때?”
기자가 카메라를 친구 기자에게 들이밀며 하나의 사진을 보여줬다.
이준과 한지유가 행복한 모습으로 피자를 먹는 게 찍혀 있었다.
특히 빙화라 불릴 정도로 냉랭한 모습만을 보이던 한지유가 저렇게 사랑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는 건 처음 보았다.
꼭 연애 초창기의 커플 같았다.
“정말… 이네?”
“그리고 내 추측인데. 이준은 검룡과 제일 친한데 왜 신기지가에 식객으로 들어갔을까?”
“그러게. 왤까? 검화랑 사귀는 거면 차라리 철혈검가가 나은데. 절친인 검룡도 있고 말이야.”
“그렇지! 나도 이것 때문에 한참을 고민했다니까.”
“그래서 결론이 뭔데?”
친구 기자가 눈을 반짝이면서 물었다.
“귀창과 빙화는 사귀는 게 확실해.”
“음… 일리 있는 말이야. 귀창이 굳이 신기지가를 선택한 게 말이 되지.”
“무엇보다 더 중요한 건.”
어느새 두 사람의 이야기에 주위 사람들이 귀를 기울였다.
“아까 검화를 대한 귀창의 태도를 보고 완전히 알았어. 이건 삼각관계야.”
“아!”
기자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 말을 꺼낸 기자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는 듯.
어디서 나타났는지, 빙화가 얼음장같이 차가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살벌한 냉기가 그녀에게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 * *
무사고 학생 관람석.
이준의 옆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냉기가 가득 흐르는 얼굴을 한 한지유가 있었다.
“저기요? 한지유 양?”
이준이 그녀에게 말을 걸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뭐 때문에 이러는 거야?”
그의 말에 한지유가 노려봤다.
그리곤 다시 비무대로 고개를 휙 하고 돌렸다.
“후우, 얘나 정연 누나나 내 주변 여자애들은 왜 다 성격이 꼬였지.”
이준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준아. 딱 봐도 모르냐? 네가 누나한테만 좋은 아티팩트를 줘서 지유가 삐진 거 아니야.”
“안 삐졌거든?”
한지유가 이번엔 박혁진을 노려봤다.
가슴에 품고 있는 연휘검을 살짝 뽑은 채 위협을 가했다.
“너 때문에 나까지 죽게 생겼다.”
“그 주둥아리 좀 다물지? 네가 한지유를 더 빡치게 했잖아.”
“뭐래? 원인은 준이 너거든?”
이준과 박혁진이 서로 티격태격 거렸다.
그러다 한지유와 눈이 마주친 순간, 입을 꾹 다물었다.
눈빛에 살기가 돌았다.
“지유야. 이거 먹을래?”
이준이 주머니에서 민트 초콜릿을 꺼내 한지유에게 슬쩍 내밀었다.
한지유가 환장하는 군것질.
삐진 그녀를 달래기 위한 수단으로 아주 좋았다.
그녀의 눈빛이 흔들리는 게 이준의 눈에 들어왔다.
‘좋아. 걸려라.’
[아이고 두야. 이런 걸 내 제자라고.]
이준의 의도와는 달리 한지유가 고개를 흔들며 마음을 다잡았다.
“안 먹어!”
보기 좋게 실패로 돌아갔다.
이준은 망연자실했다.
민트 초콜릿에 환장한 한지유가 거절했다.
상상도 할 수 없는 일.
민트 초콜릿이면 그 어떤 일도 용서해준다던데.
보기 좋게 빗나갔다.
‘완벽한 정보는 없는 거였어.’
너무 전생의 정보만 믿었다.
민트 초콜릿이면 한지유의 이유 모를 삐침을 풀 수 있을 거라 여겼건만.
어떻게 토라진 걸 풀어줘야 할지 생각나지 않았다.
그러던 찰나.
“준아. 그냥 누나한테 줬던 거랑 비슷한 아티팩트 지유한테도 줘.”
“그게 무슨 소리야?”
“네가 누나한테만 아티팩트를 줘서 지유가 삐진 거잖아.”
“지유가 그걸로 삐졌다는 걸 네가 어떻게 알아?”
“헐. 설마 몰랐던 거야? 그러면서 지유 삐진 걸 풀어주려고 한 거고?”
박혁진이 이준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말했다.
“무, 물론 알았지.”
“진짜? 모른 것 같은데?”
“알았다니까!”
이준이 버럭 소리쳤다.
정말 몰랐다.
설마 정연 누나한테 아티팩트를 줬다고 삐졌다니.
이해할 수 없었다.
‘왜? 뭐 때문에 나한테 화난 거지? 정연 누나가 위험할까 봐 소모성 아티팩트를 준 것뿐인데?’
이준이 고개를 갸웃했다.
자신이 잘못한 것도 아닌데 괜히 찔렸다.
그의 중얼거림을 들은 무극자 사부가 고개를 저었다.
[제자야.]
‘제가 생각할 게 있어서요. 이따 말씀하시면 안 될까요?’
[사부가 아둔한 제자를 위해 해결책을 내려주겠노라.]
‘어떻게요?’
[남궁세가의 검보다 좋은 검법을 준다고 말해라. 그러면 단번에 화가 누그러질 것이니라.]
‘사부님….’
이준이 무극자 사부를 조심스럽게 불렀다.
그리곤 뒷말을 이었다.
‘사부님이 무공 네비게이션이라지만, 너무 무공을 남발하시는 거 아닙니까? 그리고 남궁세가의 검법보다 더 뛰어난 검법이 어딨어요? 철혈검가는 패왕도가처럼 상위 무공을 얻지 못한 게 아니에요.’
이준의 말이 옳았다.
패왕도가는 건곤미허신공이라는 상위 무공을 얻지 못했으나.
철혈검가는 천뢰제왕신공이라는 상위 무공을 얻었다.
심지어 제왕검형까지.
남궁세가의 검법보다 더 뛰어난 건 없다고 생각했다.
[왜 없느냐. 중원 무림의 무공보다 우리 고려의 무공이 훨씬 대단하느니라.]
‘그럼 설마!’
[허수에게 줄 도문과 같은 곳을 찾으면 되느니라.]
한지유는 신기지가의 검법이 약한 걸 안다.
더 좋은 검법이 있으면 좋겠지만, 15가문의 검법을 제외하면 다 신기지가 것보다 못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계속 가문의 무공을 익혔다.
‘그러면 화는 풀리겠네요. 그런데 제가 이렇게까지 해야 할까요?’
또다시 드는 의문.
정말 자신은 잘못한 게 없기에.
[이렇게까지 해야지. 여자의 마음을 모르는 건 죄악이니라.]
‘제가 왜 여자의 마음을 몰라요?’
[됐다. 제자와 말을 하면 사부까지 덜떨어진 고자가 되는 느낌이니라. 그만 말하자꾸나.]
그 말을 끝으로 무극자 사부가 입을 다물었다.
이준은 굉장히 억울했지만, 그러려니 했다.
우선 이 불편한 상황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을 뿐이다.
이준은 한지유를 향해 전음을 날렸다.
[지유야. 내가 정연 누나한테만 아티팩트를 줘서 화난 거야?]
[……아니.]
‘맞네. 이것 때문이네.’
한지유의 목소리를 듣고 알 수 있었다.
[그러면 내가 정연 누나한테 일회용으로 줬던 아티팩트 말고 네가 그토록 가지고 싶은 거 줄게.]
[…뭐?]
가지고 싶은 걸 준다는 말에 한지유가 고개를 돌려 이준을 보았다.
화난 게 좀 풀린 표정이었다.
[철혈검가의 검법보다 더 좋은 검법.]
“정말!?”
한지유가 눈을 크게 뜨며 육성으로 말했다.
너무 놀라 전음을 한 것도 까먹은 모양이다.
“뭐지? 나 빼고 둘만 또 비밀 이야기하는 건 아니지?”
이럴 때만 귀신같이 눈치가 빠른 박혁진이었다.
“아니야. 임마. 누나 경기하니까. 집중해.”
이준의 말에 박혁진이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다가 이내 비무대로 고개를 돌렸다.
[전음을 끊으면 어떻게 해.]
[너무… 놀라서. 그런데 정말 철혈검가의 검법보다 더 좋은 검법을 가르쳐 줄 수 있어?]
[당연하지. 나 이준이야. 못 믿어?]
다른 사람이 말했다면 ‘미친 새끼 아니야?’ 이러고 말 터.
이준의 말이라 신빙성이 있었다.
지금까지 보여준 이준의 능력이라면 충분하지 않을까.
또한 현재 한지유에겐 완성된 강한 검법이 필요했다.
그래서 더욱 이준의 말을 믿고 싶은지 모른다.
[믿어.]
[그러니까 화 풀어. 정연 누나는 소모인데, 넌 평생 가질 수 있는 무공이잖아?]
한지유의 귀에는 하나의 문구밖에 들리지 않았다.
‘평생 가질 수 있는 무공…’
주겠다는 사람도 이준이었다.
그래서인지 그 말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거짓말 아니지?]
[응.]
[알았어. 다음부터는 조심해 줘.]
뭘 조심해 달라는 건지 모르지만, 이준은 우선 대답을 했다.
[그래. 이제 화 풀렸지?]
[화난 적 없다니까.]
짐짓 냉랭한 대답이었지만 이준은 이미 그녀가 화를 다 풀었다는 걸 눈치챘다.
이렇게 쉽게 풀어질 거.
다른 사람한테 아티팩트 같은 걸 줄 때 조심해야겠단 생각이 든 이준이었다.
‘내 물건 마음대로 주지도 못하는 팔자네.’
자신의 처치를 비관하며 비무대를 보았다.
* * *
검화 박정연과 도룡 최태민의 비무는 예상대로였다.
박정연의 일방적인 공격.
천뢰제왕신공을 바탕으로 한 창궁무애검법은 강했다.
중검의 묘리임과 동시에 강검도 품은 검법.
괜히 남궁세가의 무공을 이은 철혈검가가 대한민국 최고라고 불리는 게 아니었다.
깡깡깡!
쌍둥이 늪지대와 천중호수의 일 때를 되갚아 주듯.
박정연은 검으로 최태민의 도를 찍어 눌렀다.
한 발짝, 한 발짝 앞으로 나아갔다.
‘안 돼. 여기서 밀릴 수 없어! 천무대전에서 우승해 마겁을 가문에 가져가야 해!’
최태민은 그의 아버지인 도왕에게 하나의 명령을 받았다.
그건 바로 마겁의 회수.
가문이 몰래 가졌던 마겁을 천중호수의 실수로 인해 세상에 공개해야만 했다.
‘으득. 이럴 줄 알고 미리 준비한 게 있지.’
천무대전은 그 어떤 것도 허용됐다.
자신이 뭘 하든 이기기만 하면 되는 경기.
손가락질을 해도 상관없다.
어차피 평판은 이미 망가졌으니, 실속을 챙겨야 했다.
마겁은 패왕도가에 꼭 필요한 물건.
자신이 천무대전을 우승하고 마겁을 가져간다면 아버지가 분명 좋아할 것이다.
머릿속으로 생각을 마친 최태민이 뒤로 몸을 뺐다.
“도망치게 둘 것 같아?’
박정연이 보법으로 최태민을 따라붙으며 검을 움직였다.
푸욱-
최태민의 어깨에 검이 박혔다.
“크윽.”
너무도 쉽게 유효타를 날리자 도리어 놀란 사람은 박정연이다.
최태민이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하아… 역시 너한테는 안 돼.”
그는 경기를 포기한 듯 경기장 바닥에 주저앉았다.
“널 더 패줬어야 했는데.”
“후욱… 아쉽겠어.”
“칫.”
푸확-
박정연이 최태민의 어깨에 박힌 검을 뽑았다.
상처에선 피 분수가 났다.
최태민이 한쪽 손으로 어깨를 부여잡아 피가 나오지 않게 하려고 지혈했다.
“이대로 끝났다고 생각하지 마.”
박정연이 최태민을 내려다보다가 이내 몸을 돌렸다.
그 순간, 최태민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어렸다.
뒤를 돈 박정연은 무방비 상태.
최태민이 그토록 원하는 순간이었다.
그가 도의 손잡이 끝부분을 매만졌다.
“박정연.”
조금 전과는 달리 싸늘한 음성으로 말하는 최태민이다.
그의 목소리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박정연이 뒤를 돌아본 찰나, 딸깍 소리와 함께 도 손잡이 끝부분이 열리며 암기가 발사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