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7화
“저, 저 천인공노할 놈을 보았나! 신성한 천무대전에서 악독한 손속도 모자라 도왕인 나마저 무시한단 말이냐! 좋다. 내 오늘 너의 버릇을 단단히 고쳐 줄 것이다.”
최강규의 무릎이 굽혀졌다.
발이 땅에 닿아 있는 부분에서 기류가 몰려들었다.
퍼석.
땅에서 발에서 떨어진 순간.
디딤 발이 닿은 곳이 부서짐과 동시에 가루가 되었다.
최강규가 이준을 향해 달려들었다.
패왕도가 웅웅거리며 빛에 감싸였다.
아지랑이가 한 겹, 한 겹 둘러싼 도.
사람들은 이걸 강기라 부른다.
AA급 각성자의 전유물.
최강규가 들고 있는 도처럼 선명한 도강을 펼치려면 숙련된 경지에 들어야 할 터.
도강은 현재 최강규의 실력을 나타내고 있었다.
그가 도강이 깃든 패왕도를 이준을 향해 힘껏 휘둘렀다.
이준은 최강규의 움직임에 반응을 못 한 듯, 멀뚱히 눈만 깜빡였다.
‘그러면 그렇지. 제깟 놈이 아무리 강해 봤자 내 밑이지. 괜히 과민 반응한 거야. 이참에 이놈을 죽여야겠어. 아니면 태민이가 영영 빛을 못 볼 거야.’
천중호수에 갔다 오고 나서 한동안 바깥출입을 하지 않은 아들이었다.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는지.
밥까지 끊으며 방에 처박혀 있지 않았나.
조그만 소리에도 화들짝 놀라는 겁쟁이가 됐다.
가문의 영약이란 영약은 다 먹이고, 간신히 어르고 달랬다.
예전만큼 자신감 있게 행동하진 않았으나 그래도 폐인에선 벗어났다.
아들이 이렇게 된 건 다 이준 때문.
모든 일을 꼬이게 한 원흉이었다.
“한 번 내 패왕도도 받아 보아라.”
최강규는 음흉한 속내를 감췄다.
아랫사람을 벌하는 사람처럼 근엄한 목소리를 내며 말했다.
모든 걸 파괴할 힘이 깃든 도강에, 이미 자신의 승리를 장담한 최강규가 희미하게 웃었다.
그 미소엔 살의가 듬뿍 담겨 있었다.
이준은 최강규의 도에 담긴 힘을 똑똑히 보았다.
‘사부님.’
[보고 있느니라. 저놈 또한 파천기의 파편을 지니고 있다니…]
최강규의 도에는 아주 미세하게 이신이 사용했던 힘이 담겨 있었다.
이준이 전생에서 봤던 힘과는 사뭇 달랐다.
자신이 전생에서 본 건 부산에서 죽인 심진화의 음산한 힘.
현재 최강규가 지닌 건 심진화보다 더 끈적하고 음침했다.
잠깐씩 보이는 패력까지.
굉장히 위험해 보였다.
[허어. 그놈이 결국 일을 냈구나. 내가 그리 말렸거만. 쯧쯧.]
무극자의 중얼거림을 못 들은 이준이 군림보를 사용했다.
몸을 옆으로 빼며 도강의 사정거리에서 벗어났다.
쾅!
도강으로 인해 비무대가 산산조각이 났다.
엄청난 위력을 발휘하고도 눈을 크게 뜬 최강규였다.
이준이 그의 도를 아슬아슬하게 피한 것.
믿을 수 없는 사실에 놀랐지만, 그래도 명색에 AA급 각성자였다.
계속 놀라고만 있을 뜨내기가 아니었다.
“이 쥐새끼가!”
도를 회수한 최강규가 다시 이준을 공격해 갔다.
이준은 군림보를 밟으며 손을 한쪽으로 뻗었다.
비무대 뒤편에 박혀 있던 창을 뽑으려는 움직임.
이준의 손에 따라 창이 땅에서 나와 허공을 갈랐다.
척.
혈전창이 이준의 손에 잡혔다.
“어림없다.”
최강규가 이준에게 공격할 틈을 주지 않기 위해 몰아쳤다.
쩌엉-
공세를 취하려던 이준이 재빨리 방어식으로 돌아섰다.
생각보다 빠른 도왕의 공격에 태세를 전환했다.
혈전창과 패왕도가 맞부딪쳤다.
주변으로 기파가 폭풍같이 불었다.
쾅! 콰광쾅쾅-
공기에 울려 퍼진 굉음에 관중들은 귀를 막아야만 했다.
AA급 각성자의 싸움이라 그런가.
최첨단 시설로도 그 여파를 다 막지 못했다.
‘도왕의 움직임이… 희미하게라도 다 보여.’
이준은 방어를 하면서도 도왕이 휘두르는 경로를 관찰할 수 있었다.
중단전이 열리며 얻은 능력.
SS급 특성인 투신체 덕분이다.
괜히 SS등급을 지닌 특성이 아닌 듯, 엄청난 효용을 자랑했다.
‘조금 더 하고 싶지만, 그럴 수 없겠지?’
귀빈석에서 검제가 자리에서 일어난 게 보였다.
아마 무대에 개입하려는 것일 터.
최강규가 파천기의 파편을 가지고 있다는 걸 눈으로 직접 확인도 했으니 더는 비무를 할 필요가 없었다.
‘그래도 이대로 끝내긴 아쉬우니까 선물 하나 줘야지.’
이준의 입가에 그어진 호선이 짙어졌다.
웅웅.
혈전창이 울음을 토해냈다.
원래라면 혼원신공을 꺼내 무극창법을 사용했겠지만 현재는 수미천왕공을 운용하고 있는 상태.
제 위력은 발휘되지 못하겠지만, 최강규에게 엿을 먹일 수는 있었다.
이준은 머릿속에 떠오른 무극창법 중 하나를 꺼냈다.
무극자 사부가 생전에 사용했던 창법.
1초식 환영살, 2초식 투경을 넘겼다.
그리고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던 3초식 흑룡벽을 펼쳤다.
* * *
바닥을 향해 내려찍은 창.
창두에 흙과 바닥의 재료가 하늘로 치솟았다.
끼아악!
그리고 하나의 형상이 만들어졌다.
원래라면 흑룡이 나와야겠지만, 내공의 기반은 수미천왕신공이다.
흑룡 대신 적룡이 만들어지며 울부짖었다.
그와 동시에 최강규가 펼친 도강을 막았다.
콰아아앙-!
그 충격파로 인해 주변이 아수라장이 되었다.
아니, 이준이 서 있는 자리만 폐허가 됐다.
최첨단 장비로도 버티지 못한 여파.
관중들도 휩쓸릴 수도 있었지만, 다행히 나선 사람이 있었다.
대한민국의 최강자라 불린 자.
귀빈석에서 일어선 검제가 검을 뽑아 땅에 박았다.
그가 천뢰제왕신공을 운용해 하나의 거대한 막을 생성했다.
검벽.
검막을 바탕으로 새로운 무공을 탄생시킨 검제의 최후 방어 무공이었다.
이준은 검제가 나설 줄 것을 알았기에 무극창법 3초식인 흑룡벽을 사용했다.
‘모든 게 엄청나네. 이것 때문에 단전이 텅 비었어.’
흑룡벽은 이름과 달랐다.
방어 무공인 줄 알지만, 공격 무공.
무려 광역기였던 것이다.
한 명을 죽이려고 사용하는 게 아닌, 대량 학살용.
대체 무극자 사부님은 어떤 생각으로 이런 엄청난 무공을 만들었을까.
만약 여기에 AA급 각성자인 최강규말고 그보다 등급이 낮은 이들이 있었다면 떼 몰살을 당했을 것이다.
그만큼 광범위한 위력을 자랑했다.
주변만 봐도 알 수 있지 않나.
비무대였던 장소는 어느새 커다란 구덩이로 변해 있었다.
검제의 방어 무공이 아니었다면, 주변 또한 피해가 극심했을 터.
함부로 사용하면 안 될 무공이었다.
만약 수미천왕신공이 아닌 혼원신공이었다면?
‘소름.’
[홀홀. 전3식 가지고 그리 호들갑이냐. 후3식을 보면 아주 기절하겠구나, 제자야.]
‘정말 대단합니다.’
[사부가 괜히 생전에 무신이란 칭호를 얻은 게 아니었느니라.]
이준이 한껏 치켜 올려주자 무극자 사부도 어깨가 으쓱해졌다.
두 사제가 시시덕거리고 있는 사이.
옷이 넝마가 된 최강규와 이건무에게 검제 박춘식이 다가왔다.
“다들 그만하면 되었네. 이 무슨 민폐 거리인가.”
도왕과 권왕을 향해 박춘식이 호통을 쳤다.
그의 외침에 정신이 번쩍 든 두 사람.
최강규가 기겁한 표정을 수습하고 이준을 노려봤다.
그리곤 도를 집어넣었다.
“운 좋구나. 애송이.”
최강규의 목소리는 누구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잘게 떨렸다.
그걸 알아채지 못할 이준이 아니었다.
‘반응을 보니, 꽤 놀랐나 보네. 그래. 오늘은 살려줄 테니까, 당신 뒤편에 있는 놈들이나 데려와.’
속으로 중얼거리는 것과는 달리, 이준은 자리에 주저앉았다.
마치 최후의 무공을 써서 탈진한 모습이었다.
“무슨 생각으로 이런 짓을 벌이는지 모르지만, 실수했다. 패왕도가가 어떤 곳인지 넌 아직 모른다. 실수한 거야.”
“제가 알아서 할 테니 신경 끄십시오. 언제부터 저한테 관심 있으셨다고요.”
이준은 여전히 이건무에게 날카로웠다.
이신의 단전이 깨지기 바로 직전.
아버지가 나타난 타이밍도 기가 막혔다.
아마도 이 상황을 막을 수 있다 판단하셨겠지.
사람들은 신기가주 한지웅을 여우라 여기지만 자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도왕 쪽이 더 여우, 아버지도 마찬가지였다.
도왕은 속내를, 이중적인 얼굴을 가렸다.
일반인들에겐 사람 좋은 척, 속여 왔다.
반면 아버지는 어떤가.
속내를 들키지 않으려고 과묵으로 포장했다.
뒤에서 모든 걸 관조하듯 보는 사람.
중요한 순간에만 나섰다.
신력권가에 이득이 되는 때에만 말이다.
지금처럼, 그래서 싫었다.
이신도 처리하고, 도왕의 기운도 알아냈겠다 몸을 돌렸다.
* * *
천무대전이 열리고 연일 기사가 쏟아져 나왔다.
그중 이준에 관한 게 90%를 차지했다.
[귀창 이준, 권룡의 단전을 부수다.]
[무자비한 손속, 이대로 괜찮은가?]
[후계자 싸움의 무서운 결말.]
기자들은 자극적인 제목으로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애초부터 이준을 싫어하는 네티즌들은 열등감을 폭발해 냈다.
-ㄷㄷㄷ 무섭다 무서워. 거의 사마련 수준이네.
-저거 패륜 아님?
-아무리 미워도 형을 폐인으로 만들다니. 인성 무엇?
악의적인 기사에 벌 떼 같이 달려든 악플러들.
기사를 쓴 사람은 패왕도가와 친한 언론사였다.
-사람들이 잘한다 잘한다 하니까 지 꼴리는 대로 하는 거지 뭐.
-저러다 진짜 사마련에 가입하겠다. 그전에 제제를 가해야 하는 거 아님?
-15가문 연맹은 뭐하냐. 일 안 해?
그들과는 반대로 이준을 찬양하는 기사도 나왔다.
당연히 신기지가 쪽과 연계된 언론사였다.
[귀창은 얼마나 강한 것인가!!]
[엄청난 신위를 보인 이준, 도왕의 앞에서도 당당하다!]
[새로운 육왕의 탄생?]
[귀창 vs 도왕. 누가 더 강한 것인가?]
이준의 활약 덕에 더 유명해진 사람이 있었다.
바로 유니.
레드걸스 안에서 단발좌로 유명한 걸 그룹이었다.
유니가 저녁에 켠 B앱 덕분이다.
그곳에서 유니가 한 말이 있었다.
귀창의 팬이라는 것.
그리고 귀창은 고3이 되기 전에 육왕이 될 거라고 동영상에서 말했다.
유니 팬들은 당연히 안 믿었다.
풍사도를 이긴 이준이지만, 오왕과는 차이가 컸다.
이 차이는 단 몇 개월 흐른다고 메꿔질 게 아니었으니.
유니가 사심을 왕창 넣어 말한 거라고 넘겨짚었다.
그런데 유니의 말이 현실이 됐다.
덕분에 유니가 했던 말을 찾아보러 온 사람들이 폭주했다.
1000만의 조회 수를 가뿐히 넘은 것.
각성자들의 인기가 대단하다는 증거였다.
-여기가 그렇게 맛집이라고요?
-성지 순례왔습니다.
-오늘부터 예언좌 팬합니다.
-이준 직캠 보고 싶은 분 좌표 찍습니다. 233.985.XXX
이준과 도왕의 직캠은 올라오지 못했다.
두 사람의 기운에 가져간 캠이 버티질 못하고 부서졌다.
방송국 장비 또한 마찬가지.
그 누구도 얻지 못한 직캠 동영상의 좌표가 떴다.
그것도 유니의 열혈팬 중 한 명이 올렸다.
-헐. 존잘 서생 강림!
-설마 예언좌의 팬이었음?
-돌았다. 예언좌 당신은 대체 이런 신비인까지 팬으로 두시는 겁니까.
유니의 B앱 동영상 댓글이 활활 타올랐다.
불이 꺼진 방.
컴퓨터의 불빛만 켜진 곳에서 한 여자가 키보드에서 손을 뗐다.
할 일을 마쳤는지 안경을 벗고 의자에 기댔다.
“하아… 이런 일 시킬 거면 보너스라도 많이 주면 좋겠네.”
그 어느 때보다도 피곤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녀
한민성의 비서 남지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