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1화
무사고 운동장 스탠드에 앉아 있는 관객들의 시선은 한쪽에 쏠려 있었다.
제3 비무대를 비추는 대형 스크린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그 이유는 첫날임에도 엄청난 격전을 치르고 있기 때문.
뿐만 아니라 빙화와 검화의 대결이었다.
첫 대결부터 빅 매치.
재미와는 달리 승부 예측에서는 검화가 압승이었다.
학생들만이 아니라 각 가문의 가주들 또한 검화의 승리를 일찌감치 예상했다.
한데 그들의 생각과는 달리 예상외로 박빙의 승부가 이어졌다.
“하아… 하아…”
“후우우… 지유야. 그냥 포기하는 게 어때? 많이 힘들어 보이는데.”
“하아… 선배도… 만만치 않게 힘들어 보여요.”
한지유는 박정연의 말에 한 치도 밀리지 않았다.
“그래. 끝장을 보자.”
웅웅.
박정연의 검이 떨렸다.
A급 각성자 이상부터 낼 수 있는 공명음.
검의 인정을 받고 있다는 증거였다.
이에 질세라.
우웅.
한지유 또한 연휘검이 검명을 토해냈다.
그녀의 검이 빛을 머금은 순간.
촤르륵- 소리와 함께 연휘검에서 아지랑이를 뿜었다.
검기.
연휘검이 허공에 뱀처럼 꿈틀거릴 때마다 수 가닥의 검기가 쏘아져 나갔다.
박정연도 검기를 내보내 대응했다.
쉬쉭- 쾅쾅쾅!
허공에서 검기끼리 부딪혀 터졌다.
먼지구름이 일어나 경기장을 가렸다.
화면에는 잡히지 않지만, 그 속에서 치열한 공방을 이어가고 있는 두 사람.
얼마나 빠르게 합을 주고받는지 소리로 분간을 할 수 없었다.
귀빈석에서 보고 있던 검제 박춘식이 신기지가의 가주인 한지웅을 향해 말했다.
“허, 연검에 쾌검이라니. 지웅이 자네 보물을 감추고 있었구만.”
“과찬이십니다. 오히려 검화는 알려진 것보다 더 강한 거 아닙니까?”
“그런 아이와 대등하게 겨루고 있는 상대가 자네 딸이라네.”
검제 박춘식과 신기가주 한지웅이 흥미롭게 비무대를 보았다.
검기가 난무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특수한 재질로 제작된 비무대가 파괴되었다.
아침부터 시작된 비무는 어느덧 점심까지 지났다.
무려 3시간 이상의 경기.
두 사람의 비무가 지루할 법도 하나, 관객들은 지친 기색이 없었다.
학생들은 비무를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눈을 깜빡이는 것도 자제했다.
귀빈석은 어떤가.
웬만한 현역 각성자보다 강한 두 사람의 수준에 입을 떡 벌렸다.
‘오대 가문의 말석을 차지하고 있어서 신기지가를 얕보고 있었는데, 평가를 다시 해야겠어.’
‘젠장. 우리 신창조가가 오대 가문에 들 절호의 기회였는데 이번에도 틀렸나?”
‘역시 검제님의 핏줄이라 이건가.’
초대받은 귀빈들은 혀를 내두르면서 봤다.
그렇게 계속 시간이 흘렀다.
이후로부터 2시간이 더 지났다.
무려 비무 시간만 5시간을 넘기고 있었다.
다른 비무대는 이미 여러 번 로테이션이 돌아간 상태.
유독 제3 비무대만 아직 경기가 끝나지 않았다.
“오늘 중으로 끝나지 않을 듯싶은데 그렇지 않소?”
“저도 동감입니다.”
“정말 박빙입니다. 누구 하나 결코 밀리지 않아요.”
“신기지가의 미래가 밝습니다.”
“철혈검가는 어떻고요. 정말 넘볼 수 없는 벽이군요.”
귀빈들이 철혈과 신기를 치켜세웠다.
검제와 신기가주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자신들의 손녀와 딸이 칭찬을 듣는데 안 좋아하는 사람이 어딨을까.
그래도 너무 좋아하는 걸 티내면 실례기에 신기가주 한지웅이 검제에게 말했다.
“무승부로 결정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시간이 지난다 해도 결판이 안 날 것 같습니다.”
“좋은 생각이네. 너무 오래 해도 다른 학생들에게 피해만 가.”
박춘식의 말이 옳았다.
빙화와 검화의 대결이라 다른 비무대에서 치러지는 대결은 찬밥신세였다.
오직 관심은 두 사람에게만 있었다.
찬밥신세로 전락한 학생들은 얼마나 서럽겠는가.
여기서 더 했다간 다른 학생들에게 민폐가 된다고 판단했다.
“그러면 무승부로 끝내겠습니다.”
두 사람의 이야기를 알아들은 한민성 이사장이 무전을 호출했다.
그러자 제3 비무대 심판 선생이 한지유와 박정연의 싸움에 끼어들었다.
무대 중앙으로 난입한 그가 손을 휘저으면서 중재시켰다.
다행인 건 두 사람이 힘들어서 호흡을 고르고 있을 때였다.
“시합을 끝내겠습니다.”
“하악… 아직… 하악… 안 끝났는… 데요… 하악…”
“누구 맘대로… 허억… 끝내요…. 허억…”
“이사장님의 지시로 두 사람의 비무는 무승부입니다.”
한지유와 박정연이 귀빈석으로 고개를 돌렸다.
더 할 수 있다는 눈빛이었다.
짝짝짝짝!
“멋지다!”
“잘 싸웠다.”
여기저기서 박수 소리가 이어졌다.
결국 두 사람은 비무를 이어가겠다는 의지를 꺾었다.
“허억… 허억… 아쉽… 네… 허억….”
“그러게… 하악… 말이에… 하악.. 요….”
두 사람은 서 있을 힘도 없을 텐데 어떻게든 안 쓰러지려고 버텼다.
그대로 기 싸움을 더 이어가다가 가문의 인원에 의해 부축을 받고 내려갔다.
* * *
“개 쩐다.”
“빙화가 저렇게 강할 줄 몰랐어.”
“우리 무사고의 수준 실화냐?”
“현역보다 강한 것 같지?”
“어. 100%로. 현역 찜 쪄 먹을 수준이지.”
귀빈들과 함께 온 현역 각성자들도 인정하는 분위기였다.
각성자 시대는 실력 지상주의.
현역으로 나오면 상관으로 모셔야 할 판이다.
나이고 뭐고 강하면 끝이었다.
한지유가 신기지가의 인원들의 부축을 받고 내려왔다.
“지유야, 고생했어.”
“여자인 내가 봐도 진짜 멋지더라.”
박은비와 서혜지가 내려온 한지유를 맞이했다.
한지유는 두 사람의 이야기를 흘려들었다.
그러면서 눈으로 누군가를 찾았다.
“지유야, 누구 찾아?”
박은비가 그녀에게 물었지만, 목소리는 뒤에서 나왔다.
“이준. 이 자식. 그새 튄 거야?”
박정연이 눈에 불을 켜고 주변을 둘러봤다.
“어? 조금 전까지 여기로 같이 왔는데.”
“어디로 갔지?”
박은비와 서혜지도 같이 이준을 찾는데 박정연이 씩씩대었다.
“준이 이 자식! 튀었어. 잡히면 뒤질 줄 알아.”
한편 이준은 한지유와 박정연의 경기가 끝나자, 슬금슬금 뒤로 빠졌다.
도망쳐온 곳은 제3 비무대와 제일 멀찍이 떨어진 제6 비무대였다.
무대가 원체 커서 맨 끝으로 오면 자신을 찾을 수 없을 거다.
“휴우. 곤란한 상황은 모면했다.”
경기에 올라가기 전과 같은 상황이 일어나면 어떻게 될까.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다들 나한테 왜 이러는지 모르겠네.”
[제자야.]
‘왜요?’
[정말 그 이유를 모르느냐?]
‘네. 사부님은 아세요?”
[모르면 되었다.]
‘뭔데요. 가르쳐 주세요.’
[아니니라. 그냥 평생을 모르고 혼자 살다 죽거라.]
그 말을 남기고 무극자 사부가 입을 다물었다.
‘아, 궁금하게 정말 이야기 안 해 주실 겁니까?’
이준이 무극자 사부를 애타게 불렀지만,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렇게 첫날의 천무대전이 끝났다.
하지만 무사고의 밤은 아직이다.
천무대전은 기말고사임과 동시에 축제.
낮에는 비무가 있다면 밤에는 상점이 열린다.
다양한 전구가 주렁주렁 달린 상점.
상점 앞에 학생들이 먹을 걸 사 먹기 위해 줄을 섰다.
이준도 오랜만에 무사고 축제의 정취를 느끼느라 정신이 없었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윽.”
앞 사람과 부딪치고 말았다.
거구의 사내였다.
그가 뒤를 돌았다.
“이준 도련… 님?”
“아.”
신력권가의 천왕대주인 사형준이었다.
이준이 이마를 부여잡고 그에게 물었다.
“이신 곁에 있어야 할 천왕대주가 이 시간에 여긴 왜 있어? 혹시 이신이 이곳에 있는 거야?”
“아닙니다.”
“그러면?”
“잠시 휴가를 내었습니다.”
“휴가? 천왕대주가?”
“예.”
이준이 진심으로 놀라 했다.
자신이 아는 천왕대주에게 휴가란 없었다.
오로지 이신을 지키는 게 그의 임무이자 사명.
권신단의 단주에 오르기 전까지 단 한 번도 휴가를 쓰지 않던 사람이 갑자기 휴가라니.
무슨 바람이 불어서 이곳에 있을까.
굉장히 궁금했다.
그 이유는 금방 알았다.
“차 쌤?”
“도련님….”
사형준의 뒤에 새로운 담임이 된 차경진이 있었다.
“두 사람, 여기서 뭐 합니까?”
이준이 사형준과 차경진을 번갈아 봤다.
나이대도 얼마 차이 나지 않은 두 사람. 그것도 같은 신력권가의 사람이기도 했다.
“휴, 휴가 나온 김에 돌아다니고 있었습니다.”
사형준이 어울리지 않게 말을 더듬었다.
꽤 당황한 모습이다.
설마 걸릴지 몰랐다는 표정이랄까.
그래서 재밌었다.
‘전생에는 두 사람이 만난다는 이야기는 없었는데, 분위기를 보니까 그렇지도 않네.’
사형준이 차경진을 조심하는 눈치였다.
“굳이 같이?”
“그렇… 습니다.”
[제자야. 눈치 없게 있지 말고 비켜주거라.]
‘그러려고 했습니다.’
이준은 괜히 심통이 났는지.
사형준을 향해 대놓고 말했다.
“그래 뭐. 천왕대주도 연애는 해야 하니까.”
“그, 그런 거 아닙니다.”
“너무 부정하지 마. 경진 샘이 서운해하겠어.”
“아, 그게 아니라 이건 그러니까.”
사형준이 허둥대며 차경진과 이준을 번갈아 보았다.
“난 신경 끄고 둘이 재밌게 놀아.”
이준이 사형준에게 손을 흔들고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이준이 남기고 간 바람이, 태풍이 되어 사형준을 강타했다.
차경진이 화가 난 얼굴로 무어라 말하고 있었다.
사형준은 변명과 같은 제스처를 취하며 해명했지만, 잘 안된 모양이다.
차경진이 휙, 하고 몸을 돌리는 게 아닌가.
먼저 가버린 그녀를 뒤쫓는 사형준이었다.
이준은 멀리서 두 사람을 보며 입가에 미소를 그렸다.
‘천왕대주가 차 쌤을 좋아한다라, 이거 재밌겠는데?’
* * *
분명 전생에는 천왕대주는 휴가 따윈 없었다.
오직 이신의 옆에만 붙어 있었기 때문.
하지만 현생은 달랐다.
천왕대주의 휴가.
이건 의미가 컸다.
‘이신의 호위에서 손을 뗐다는 소리지.’
이신에 대한 신뢰를 완전히 잃은 지금, 사형준을 얻을 기회였다.
하나 급하게 갈 필요가 없어졌다.
사형준과 썸 타고 있는 여자가 차경진이라는 것.
이건 자신에게 엄청난 이득을 가져왔다.
차경진은 현재 자신과 함께 수련을 하고 있었다.
아이들과 함께 하는 수련에 점점 빠져들고 있는 게 보였다.
여기서 그녀의 막힌 벽을 한 단계 뚫어 주면 어떻게 될까.
안 그래도 지금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눈빛이 심상치 않다.
경외하고 있달까.
차경진이 그렇게 자신 있어 하는 수련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지옥 훈련을 시켜 줬더니 자신에게 완전 빠졌다.
정확히는 수련법에 빠졌다.
대체 어떻게 이런 수련법을 고안했는지 의아해했다.
다 무극자 사부님의 덕.
아이들과 차경진에게 하는 건 다 무극자 사부에게 배운 것들이다.
자칭 고금제일인의 수련법이니 얼마나 효과가 있을까.
또한 자신에겐 악마 교관이란 엄청난 특성이 있다.
성장은 물론, 상대의 특성을 개화시키는 능력.
‘여기서 차 쌤의 특성만 개화시켜준다면 게임 오버지.’
차경진이 우러러만 볼까.
자신에 대한 경외심을 보일 거다.
그녀는 그러고도 남았다.
차경진을 통해 사형준을 포섭하는 일.
생각보다 쉬울 것이다.
사형준 같은 남자는 자신이 좋아하는 여자에게 일편단심이었으니까.
‘이러면 꼭 내가 나쁜 놈 같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