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0화
‘첫날 대진표는 거의 똑같네.’
전생과 똑같이 짜인 대진표.
한지유와 박정연의 빅매치 또한 같았다.
“준이는 당연히 지유를 응원할 거지?”
“물어볼 걸 물어봐. 지유를 응원 안 할 이유가 있어? 그렇지, 준아?”
박은비의 질문에 서혜지가 핀잔을 줬다.
이준은 박은비 질문에 입을 다물고 있었다.
전생에는 박정연을 응원한 이준.
좋아서가 아니라 강제로 협박을 당해 어쩔 수 없이 응원했다.
그리고 그때는 한지유를 응원할 이유도 없었다.
이름과 얼굴만 알 뿐.
친분이 없었다.
그래서 선택의 여지없이 박정연을 응원한 것.
하나 현생은 전생과 달랐다.
현재는 한지유와도 꽤 친해진 사이.
고민이 되는 건 당연했다.
‘누구를 응원하지?’
자신이 박정연을 응원하면 한지유가 토라지고, 한지유를 응원하자니 후환이 두려웠다.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할 때 고개를 돌렸다.
한지유가 눈에 들어왔는데, 잔뜩 기대하고 있는 모습이다.
저럴 때 상대를 응원한다면 칼을 뽑아 자신에게 휘두를 게 뻔했다.
“응. 당연히 난 한지유를 응원….”
이준이 말꼬리를 흐렸다.
등 뒤에서 살기가 느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을 와락 덮쳐왔다.
“윽.”
“준아. 방금 뭐라고 했어? 누굴 응원한다고?”
굉장히 익숙한 목소리였다.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역시나.
정연 누나가 자신의 등에 매달려 있었다.
“누, 누나 안녕.”
“오랜만이다. 그치?”
“응. 그런데 등에서 내려오지? 천중호수처럼 애들이 오해한다니까.”
“하면 어때? 나한테 장가오면 되지. 나 너 먹여 살릴 정도로 능력은 된다?”
“이 누나가 진짜! 누구 앞길 막을 일이 있나.”
이준이 숙였던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하지만 박정연은 이준의 등에 매달려 내려오지 않았다.
“하던 이야기는 마저 해야지. 준아, 방금 누굴 응원한다고 했어?”
그 말에 직각이던 등을 앞으로 숙였다.
“그게 말이야…”
이준이 슬쩍 한지유를 보았다.
그녀는 이런 것 가지고 경쟁하는 여자가 아니었다.
자신이 반 협박을 당한 걸 보면 이해해 주지 않을까.
그런 안일한 생각으로 한지유를 봤지만.
‘쟤는 또 왜 얼굴이 얼음장이야.’
아주 살벌했다.
한지유의 가늘게 떠진 눈.
분명 자신을 보고 있는 게 분명하다.
[끌끌. 진퇴양난이구나.]
뒤로 도망칠 구석이 없었다.
“응? 빨리 말해 봐. 이 누날 응원할 거지?”
정연 누나의 목소리에서도 간간이 살기가 엿보였다.
뿐인가.
정연 누나의 팬클럽인 일명 검화부대.
아주 죽일 듯한 눈빛을 자신에게 쏘아대고 있었다.
“난… 둘 다 응원해.”
“……”
“뭐?”
이준은 최악의 대답을 했다.
한지유의 표정은 더 냉랭했고, 박정연도 등에서 내려왔다.
이준이 뒤를 돌아보자.
“장난이었어. 얼굴 좀 풀어.”
“제발 내가 어린애도 아니고 사람들 보는 앞에서 자꾸 껴안으면 난감하단 말이야.”
“내 맘이다. 그런데 준이 너 지유랑 많이 친해졌나 봐?”
장난이라는 말과 달리 박정연의 분위기는 쌀쌀해졌다.
마치 자신의 보물을 빼앗긴 표정으로 한지유에게 갔다.
“지유야. 비무대에 올라가서 이 언니랑 한판 할까?”
“좋아요.”
한지유도 지지 않겠다는 듯 비무대로 성큼성큼 올라갔다.
태풍을 무사히 넘겼다 생각한 이준이 숨을 크게 내쉬었다.
“후우우우.”
하지만 주위는 그렇지 않나 보다.
“이준. 최악이야.”
서혜지가 쌩하고 갔다.
“차라리 한 사람을 고르지 그랬어.”
자신이 잘못한 것처럼 말하는 서혜지와 박은비였다.
대체 자신이 뭘 잘못했기에 이런 상황을 겪어야 하는 걸까.
무극자 사부도 한 팔 거들었다.
[제자는 아직 이 사부를 따라오려면 한참 멀었느니라. 여자의 마음을 이렇게 몰라서야. 쯧쯧.]
이준은 자신만 놔두고 가는 친구들을 보고 큰 숨이 아닌 한숨을 푹 쉬었다.
“여자들의 언어란.”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 * *
이준과 아이들은 비무를 보기 위해 관중석으로 왔다.
“주, 준아.”
“왜?”
남선호가 말을 더듬으며 이준의 이름을 불렀다.
“누, 누가 이길 것 같아?”
“결과 나오기 전까지는 나도 몰라.”
“너도… 몰라?”
“어.”
빙화 대 검화의 대결은 박정연의 승리로 끝난다.
압도적인 무력 차.
모두가 박정연을 갓 A급에 든 것으로 쳤지만, 실제로는 A급 완숙에 접어 있었다.
이제 막 A급에 든 한지유가 이기기에는 힘든 상대였다.
결국 방어만 하다가 패배를 하고 말았다.
‘이번에는 다를 거야.’
자신과의 훈련으로 한지유는 갓 A급을 넘어섰다.
중간고사 1등으로 인한 상품으로 A급 무기인 연휘검도 얻었다.
무엇보다 그녀를 제일 성장시킨 건 특성이다.
무려 S급 특성이 검후.
이걸로 인해 박정연과 벌어진 격차는 확실히 메꿔진 격이다.
“비무 잘 봐. 너희들에게도 도움 될 거야.”
“알았어.”
“드디어 시작한다.”
마침 비무 시작을 알리는 휘슬이 울렸다.
한지유가 검집에서 연휘검을 꺼냈다.
촤르륵-
검신이 흐물거리며 땅바닥에 떨어졌다.
연검의 특징.
내공을 주입해야지만, 빳빳해진다.
연휘검을 바로 코앞에서 보는 건 처음이라 박정연이 호기심을 드러냈다.
“연검은 어떻게 연습한 거야?”
“준이가 가르쳐 줬어요.”
“준이가?”
“네.”
“항상 혼자 다니더니 준이랑은 언제 친해졌대?”
“어쩌다 보니요.”
“그런데 나한테 삐친 게 있니?”
“아니요. 없어요.”
“있는 것 같은데.”
“없다니까요?”
박정연이 이준의 등에 업힐 때부터 목소리에서 냉기가 흐르는 한지유였다.
“그래?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지. 아참. 너한테 말할 게 있는데.”
“말씀하세요.”
“준이랑 너무 친하게 지내지 마.”
“왜 그래야 하죠?”
이준의 이야기나 나오자 한지유가 발끈했다.
“내가 준이를 좋아하니까. 준이는 내가 옆에서 챙겨 줘야 할 애야.”
“……”
한지유가 입을 다물었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박정연이 재차 말했다.
“알아들은 걸로 알게.”
“…싫어요.”
“뭐?”
“싫다고 말했어요.”
“너… 준이 좋아해?”
“아, 아니요!”
“그런데 왜?”
“제가 그걸 선배한테 이야기해야 하나요?”
한지유가 차갑게 말하자 박정연이 피식 웃었다.
“그래? 근데 너 지금 나 죽일 듯한 기세다?”
“……”
이번에도 한지유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박정연이 하나를 제안했다.
“그러면 비무 결과에 따라 정하는 게 어때?”
“비무 결과요?”
“어. 지면 이준을 포기하는 걸로. 콜?”
한지유가 잠시 고민에 빠졌다.
상대는 학교에서 비공식 랭킹 1위다.
랭킹 1위인 박혁진보다 강한 사람.
그런 사람을 상대로 자신이 이길 수 있을까.
걱정이 앞섰지만.
‘할 수 있어. 그동안 이준이랑 힘들게 수련했잖아.’
마음을 다잡았다.
“할게요.”
“물리기 없기다.”
“선배도 뒷말 없기예요.”
박정연이 검을 뽑았다.
쿠웅- 파직!
그녀의 몸에서 천뢰제왕신공의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읏!”
“무, 무슨 놈의 기운이 이렇게 강해!”
“처음부터 전력으로 다할 생각이야!?”
천뢰제왕신공의 여파가 관중석을 강타했다.
펜스를 비롯한 관중석을 보호하는 투명한 막에 전류가 흘렀다.
뇌기의 강력함을 지닌 신공.
남궁세가의 무공을 이은 철혈검가의 무공이자 검제 박춘식의 내공이었다.
“이 언니가 다른 건 다 포기해도 우리 준이는 포기 못 하거든? 그러니까 전력을 다할게.”
파지직-
팟!
박정연이 땅을 박차고 한지유를 향해 쇄도했다.
지척에 도달한 박정연.
검을 하늘 높이 쳐들고 곧장 한지유를 향해 내리쳤다.
쾅-!
흐물거리던 한지유의 연휘검이 빳빳하게 섰다.
그녀가 박정연의 검을 막았다.
끼이익.
검에 내공이 잔뜩 주입한 채, 막고 있는 한지유를 위에서 아래로 내려찍는 박정연.
교차한 두 검에서 듣기 싫은 쇳소리가 났다.
가까스로 버티고 있던 한지유가 몸을 틀었다.
힘을 주고 있던 박정연의 검이 바닥을 강타했다.
쾅!
한지유가 보법을 사용해 뒤로 몸을 뺐다.
그리고 연휘검을 늘어트렸다.
그대로 박정연을 향해 연휘검을 휘두른 한지유였다.
늘어진 연휘검이 뱀이 먹이를 공격하듯.
박정연에게 짓쳐갔다.
까강깡깡-
박정연이 공격해오는 연휘검을 쳐냈다.
하지만 연휘검은 그녀를 집요하게 괴롭혔다.
쳐내도 다시 날아와 공격했다.
‘귀찮은 검법이야. 신기지가에 이런 무공이 존재했어?’
박정연은 연휘검을 쳐내면서 한지유를 보았다.
자신과는 멀리 떨어진 채, 검을 움직이고 있었다.
거의 원거리에서 공격하는 것과 마찬가지.
신기지가에 연검을 이용한 무공이 있다는 건 듣지 못했다.
‘굉장히 골치 아픈 무공이야.’
근거리 무기인 검으로 원거리에서 자신을 공격하고 있는 게 아닌가.
연검을 잘 휘두르니 사기에 가까운 무기였다.
‘지유에게 접근할 수만 있다면 내가 이겨.’
연검의 단점은 근접전에 있다.
원거리에서 파괴적인 힘을 보이는 연검은 근접전에선 그저 일반적인 검에 불과했다.
처음 한지유를 검으로 찍어 누를 때 보지 않았나.
한지유가 힘겨워하는 게 느껴졌다.
‘우선 빈틈부터 만들어야겠어.’
박정연이 연휘검을 쳐내면서 기회를 엿봤다.
연휘검이 가장 멀리 쳐내지는 때를.
까강깡깡!
수십 합이 교차하고 드디어 박정연이 원하는 공간이 만들어졌다.
‘지금!’
검을 쥐지 않은 박정연의 반대편 손이 주먹으로 말아 쥐어졌다.
파지직-
뇌기를 담은 주먹으로 정권을 찔렀다.
팡 소리와 함께 한지유가 있었던 자리의 공기가 터져나갔다.
정말 간발의 차.
만약 피하지 않았다면 어깨가 부서지거나 터졌을 수도 있었다.
* * *
‘십보신권을 저렇게 사용한다고?’
이준이 속으로 놀라 했다.
십보신권은 학교의 공용 무공.
천무대전같이 중요한 비무를 할 때 사용하기에 적합한 무공이 아니다.
특히 B급 이상의 무공을 가진 오대 가문의 직계가 말이다.
[호오. 한지유와 빈 공간을 만들기 위해 십보신권을 사용하다니, 어린 나이치고 무공에 대한 이해도가 상당하구나.]
무극자 사부는 현대 각성자를 굉장히 얕보았다.
이곳 사람들은 무공을 그저 각성자 시스템에 의해 등록된 스킬에 불과하다고 여긴다고 생각한 그였다.
숙련도는 스킬을 많이 사용함으로써 올리는 것.
자신이 하고 있는 게 어떤 무공인지.
제대로 파악하지 않고 스킬로만 사용한다고 여겼다.
그래서 학생들을 무시하고 있었는데, 박정연의 대응에 무극자 사부가 의외의 반응을 보였다.
‘이래서 제가 저 누나를 무서워해요.’
[재능 있는 아이들이 꽤 많구나.]
대한민국의 미래는 엄청 밝았다.
철혈검가의 검룡과 검화.
신기지가의 빙화.
만독암가의 독화와 암화 등.
황금세대라 불릴 만큼 재능 넘치는 각성자가 엄청 많았다.
저들이 큰다면 현재 제일 강력한 각성자를 보유하고 있는 중국을 뛰어넘을지 모른다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 세계의 악마들로 인해…. 그들은 제일 위협이 될 것 같은 대한민국부터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이후는 자신도 죽어서 알 길이 없지만.
나라가 망했을 게 분명했다.
‘이번 생엔 전생처럼 되지 않을 거야.’
자신이 막을 것이다.
어머니를 죽게 만든 원수의 집단이니까.
그들이 신처럼 여기는 진무열, 그놈을 꼭 자신의 손으로 죽이고 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