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4화
지잉-
이준이 게이트에서 나왔다.
그가 나온 곳은 기숙사 방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파랑이도 게이트에서 나와 이준의 품에 안겼다.
“뀨우!”
녀석이 자신의 품에 얼굴을 비볐다.
“날 위로하는 거야?”
“뀨뀨!”
몸을 타고 올라온 파랑이가 어깨에 앉아 얼굴을 핥았다.
“악. 그만해.”
우울하던 이준의 표정이 파랑이 덕분에 금세 풀렸다.
[네 엄마가 돌아가신 줄 몰랐구나.]
“제가 말 안 했는데 어떻게 아시겠어요.”
[크흠. 고금제일의 사부는 제자의 모든 걸 알아야 하느니라.]
“됐습니다.”
무극자 사부도 괜히 자신에게 말을 걸어 주었다.
이럴 때는 꼭 할아버지 같았다.
손주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그런 느낌이랄까.
나쁘지 않았다.
[이러한 사실을 검룡이란 아이는 아느냐?]
“혁진이도 몰라요.”
[말 안 했단 말이냐.]
“좋은 것도 아닌데 알려 줘서 뭐 하게요. 괜히 말했다가 범인을 죽이겠다고 날뛰었을 거예요.”
[이 아둔한 제자를 어찌할꼬. 그동안 마음이 문드러지는 걸 어떻게 참았는지 원.]
무극자 사부가 고개를 저었다.
불쌍함, 안쓰러움, 걱정 등.
무극자 사부는 그 어느 때보다 다정한 눈빛을 보냈다.
언제나 자신을 놀려대기 바쁜 장난기가 없었다.
사부의 얼굴을 보고, 이준이 작게 웃었다.
“걱정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고금제일인이 내가 네 사부라는 걸 잊지 말거라.]
어떤 것보다 위로되는 말이었다.
자신의 비밀을 아는 사람이 세상에 한 명쯤은 있어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겠어요.”
[그건 그렇고 진무… 결이라는 놈. 얼굴을 아느냐?]
“아니요. 보지는 못했고 들어만 봤어요. 왜요?”
[아니다. 누군지 궁금해서 물어봤느니라.]
이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극자 사부의 목소리가 왠지 미묘하게 달랐다.
궁금해하는 것 같지 않았다.
오히려 무언갈 알고 있는 느낌이랄까.
사부에게 재차 물어보려는데.
깨톡!
폰에서 알림이 울렸다.
[한지유: 이준. 오늘 같이 훈련할 거지? 애들 다 기다리는 중이니까. 내 수련실로 빨리 와.]
“이 집착녀.”
입에 뜬 미소와는 달리 지겹다는 말이 흘러나왔다.
[머리를 비우는 건 훈련이 최고이니라.]
“그러면 가야겠습니다.”
이준이 침대에 누우려다가 방을 나갔다.
* * *
늦은 저녁 한지유의 개인 수련실.
그녀가 팔짱을 낀 채 이준을 기다렸다.
요정의 꽃밭에 같이 갔던 박은비, 서혜지, 남선호까지 있었다.
“내가 손수 깨톡까지 했는데, 읽씹해?”
“준이가 그러겠어? 무슨 일 있겠지. 안 그래 선호야?”
“마, 맞아. 내가 다시 전화해 볼게.”
남선호가 폰을 꺼내 이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통화음만 계속 들렸다.
그가 슬쩍 한지유를 보다가 눈이 마주쳤다.
“힉!”
한지유의 살기 어린 눈빛에 남선호가 놀라 폰을 떨어트렸다.
그때였다.
문을 열고 이준이 어기적거리며 들어왔다.
“이준 왔다!”
“하, 다행이야 안 올까 봐 조마조마했는데.”
박은비와 서혜지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왜 넌 화난 표정을 하고 있냐.”
이준이 한지유를 보며 말했다.
“왜 내 깨톡에 답장 안 해?”
“어차피 여기 올 거라서 안 했는데, 아 이것 때문에 화난 거야?”
한지유가 검을 만지작거렸다.
검을 뽑을까 말까 고민하는 눈치였다. 이준은 자신의 잘못을 인지하고 한발 물러났다.
“내가 제대로 수련시켜 줄 테니까 화 풀어.”
“좋아. 그걸로 퉁 쳐.”
“각오하는 게 좋을 거야. 나 아주 무서운 사람이거든.”
이준이 눈에 힘을 빡 주며 말했다.
그 모습에 무극자가 홀로 중얼거렸다.
[허허. 처음 봤을 때는 혼자 불행한 건 다 짊어지고 있듯 행동하더니, 이제야 저 나이의 애답구나.]
좀 전의 우울하던 이준의 행동과는 달랐다.
조금 밝은 느낌이랄까.
이래서 마음이 맞는 친구들이 있는 게 좋다는 거다.
[우중충하게 있는 것보다 훨씬 낫구나.]
밝은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무공도 더욱 굳건해진다.
특히 혼원신공 같은 무공은 더욱 영향을 많이 받았다.
“자자. 우선 기본자세부터 하자.”
이준이 손뼉을 치며 아이들을 집중시켰다.
무극자가 가리킨 기본.
무공의 기본은 하체라고 하던가.
“마보부터 시작해 볼까?”
한지유도 예외는 없었다.
AA급 각성자와 어깨를 나란히 한 이준이 기본부터 시작하자고 하니, 두말할 것 없이 따라 했다.
“중력을 두 배로 높일 테니까 버텨야 한다.”
이준이 홀로그램에 나온 시스템 장치를 만졌다.
지이잉-!
중력을 두 배로 올리자, 몸에 가해진 압박이 심해졌다.
“윽.”
“엎어지겠어….”
“안 돼. 그대로 유지해.”
이준은 중력에 영향을 안 받는 것처럼 편히 움직이며 아이들이 자세를 바로 해 줬다.
박은비, 서혜지, 남선호와 달리 한지유는 중력의 두 배를 거뜬히 버텼다.
“이대로 계속….”
이준이 말을 하는데 무극자 사부의 목소리가 들렸다.
[훈련이 되겠느냐. 저 아이한테는 공격을 하거라.]
이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난데없이 한지유를 향해 공격했다.
내공이 전혀 안 담긴 주먹.
그런데도 주먹이 안 보일 정도로 빨랐다.
팡-
공기가 터져 나갈 만큼 강한 주먹이었다.
한지유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옆으로 틀어 피했다.
“난 공격할 테니까 넌 피하기만 해. 절대로 반격 하지 마!”
그녀의 성격에 꼭 되받아칠 것만 같아서 당부했다.
한지유가 알았다는 듯,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팡- 팡-
이준의 주먹이 허공을 갈랐다.
아슬아슬하게 피한 한지유였다.
간혹 이준이 공격할 때 그녀가 움찔거렸다.
반격하려다 만 행동.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나오는 본능적인 대응을 간신히 참고 있었다.
이준과 한지유가 쉴 새 없는 공방을 나누고 있는 사이.
나머지 아이들도 이를 꽉 물었다.
AA급 각성자인 이준의 공격을 받는 기회. 살면서 한 번이라도 있을까 말까 했다.
세 사람의 마음은 활활 불타올랐다.
자신들도 한지유처럼 이준과 공방을 나누고 싶었으니까.
* * *
거실에는 최미진이 앉지도 못하고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입으로 손톱을 물어뜯으면서 중얼거렸다.
“지금쯤이면 처리하고 올 때가 됐는데, 왜 연락이 없는 거야.”
다른 한쪽 손에는 핸드폰이 들려 있었다.
잠시 후 그녀가 폰으로 심진화에게 전화를 걸었다.
따르르릉-
신호음이 들렸다.
그러나 통화는 연결되지 않았다.
최미진이 전화를 끊고 다시 걸었다.
따르르릉-
전화 연결을 계속 시도했지만 상대는 받지 않았다.
“어떻게 된 거지? 일이 잘못됐나?”
심진화에게 벌써 수십 통 전화를 건 최미진이었다.
심진화가 전화를 안 받아 수하들에게도 전화를 걸었지만, 그들 또한 연결이 되지 않았다.
이 정도의 시간이 지났으면 일을 끝내고도 남았을 건데, 연락이 없으니 걱정스러웠다.
최미진이 자리에 앉지 못하고 서성이자 천왕대의 성우건이 그녀를 진정시켰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심진화 님께선 이준을 처리하고 돌아올 겁니다.”
“소식이 없으니까 걱정되는 거지. 유모는 내 전화를 단 한 번도 안 받은 적이 없어.”
심진화는 언제나 최미진의 옆에 있었고, 임무를 나간 순간에도 전화를 받았다.
수십 년간 그렇게 생활했다.
그런데 이준을 죽이러 간 후로 연락이 끊겼다.
혹여나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걱정이었다.
“심진화 님은 사모님께서 그렇게 걱정할 분이 아닙니다.”
“알아. 나도 안다고. 그래도 걱정되는 걸 어떻게 해.”
“그러면 제가 아이들을 보내보겠습니다.”
“그게 좋겠어. 빨리 알아봐.”
성우건이 고개를 숙이고 밖으로 나갔다.
아무도 없는 마당.
성우건이 입을 뻐끔거리자, 그림자가 신력권가의 담벼락을 넘었다.
며칠 뒤.
성우건이 그림자에게서 연락받은 내용을 최미진에게 전달하기 위해 그녀의 방을 찾았다.
“사모님.”
“그래 유모에게 연락 왔어?”
최미진의 말에 성우건이 조심스럽게 고개를 저었다.
“아직 유모에게서 연락이 안 왔단 말이야?”
“그게 아니라 아무래도 심진화 님께서 잘못되신 것 같습니다.”
털썩.
최미진은 다리가 풀렸는지 주저앉고 말았다.
“…아니야. 거짓말일 거야. 그렇지?”
“귀살대를 부산으로 보냈는데 싸운 흔적만 발견되고 심진화 님께서 감쪽같이 사라졌다 합니다.”
“그게 유모가 잘못됐다는 거랑 뭔 상관이야!”
“귀살대가 심진화 님의 흔적을 찾지 못한 걸 보면 아무래도….”
“그만!!!”
최미진이 버럭 소리쳤다.
심진화는 그녀가 어렸을 때부터 봐오던 유모였다.
아버지가 게이트에서 데려온 자로 자신을 극진히 돌봐 준 사람이었다.
결혼하고도 남편보다 더 의지한 사람이 유모였는데, 그녀가 사라졌다고 하니, 하늘이 무너질 것만 같았다.
“찾아! 어떻게든 흔적을 찾아오란 말이야!!”
최미진이 찻잔을 성우건에게 던지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억지인 명령에도 성우건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에게 있어 최미진은 중요한 사람.
정확히는 그 뒤에 있는 패왕도가는 자신들에게 필요한 존재들이었다.
또한 이번 일은 그에게도 중요했다.
자신의 상관이 대한민국에서 증발한 일이다.
원인을 꼭 찾아야 한다.
‘심진화 님이 이준에게 졌나?’
성우건이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없다.
그분이 누군가.
자신의 세계에서 혈귀마녀라 불렸다.
이명과 아주 잘 어울리는 사람.
그녀를 마주하고 살아서 돌아간 자는 거의 전무하다시피 했다.
‘내가 직접 확인해 봐야겠어.’
성우건은 귀살대와 함께 부산으로 내려갔다.
* * *
상관의 흔적이 끊긴 곳에 도착했다.
그는 땅을 자세히 관찰했다.
곳곳에서 싸운 흔적이 보였다.
“귀살대가 모습을 드러내고, 한 대원이 먼저 기습을 했어.”
손으로 바닥을 가리키면서 그때의 상황을 떠올렸다.
그런데 이상함이 느껴졌다.
“왜 여기서 기습한 대원이 사라진 거지?”
정말 뜬금없었다.
대원은 분명 누군가를 기습했는데, 어느 순간 발자국이 붕 떴다.
마치 세상에 없던 것처럼 말이다.
“너희도 이걸 봤나?”
“네. 저희도 이게 이상해서 봤는데, 전혀 알 수가 없어서….”
귀살대와 마찬가지로 성우건도 이상한 지점을 계속 관찰했지만, 이렇다 할 성과가 나오지 않았다.
오히려 미궁에 빠지는 느낌.
시간이 계속 지체되는 것 같아 다른 곳부터 생각했다.
“여기서부터 심진화 님과 귀살대가 전부 사라졌어. 뭘까?”
성우건이 턱을 매만졌다.
그때 떠오르는 가설 한 가지.
“만약 말이다.”
“네.”
“이 지점에 몬스터 쇼크가 발생하면 어떻게 될까?”
“심진화 님께서 몬스터에게 당하셨단 말씀이십니까? 절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만약이라고 하지 않았나.”
“정말로 그런 거라면 심진화 님께서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게 가능할 수 있습니다.”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이곳에 있는 모두가 같은 생각이었다. 하지만 또 다른 벽이 성우건을 막았다.
“그렇다면 누가? 이곳에 강제로 게이트를 열기라도 했나? 아니면 정말 운 나쁘게 몬스터 쇼크가 일어났어?”
부산은 혼돈지역.
서울과 다른 타 지역과는 달리 몬스터가 판쳤다.
이곳에는 레드존 게이트도 널리지 않았던가.
“블랙존 게이트가 갑자기 나타났다면 아무리 심진화 님이라도 무사하진 못할 거긴 해.”
이것 말고는 결론이 나지 않았다.
어떻게 사람이 강제로 게이트를 열겠는가.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아니, 자신의 주군만이 가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