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4화
15가문 연맹회 대회의실에는 각 가문의 가주들이 모였다.
쾅!
책상을 강하게 치며 일어나는 남자는 다음 아닌 철혈검가의 검왕이었다.
“패왕과 신력은 계속 입을 다물고만 있을 것이오!”
검왕의 호통에도 패왕도가의 가주는 눈을 감고 있었다.
신력권가의 가주 또한 입을 꾹 닫고 입을 열지 않았다.
“저자들이 진짜!”
푸수수-
만독암가의 철왕도 패왕과 신력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손을 대고 있는 책상에서 연기가 났다.
철왕의 내기에 의해 녹아내리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입만 닫고 있다고 해서 되는 일이 아닙니다. 도왕과 권왕께선 변명이라도 해 보십시오.”
무사고의 이사장인 한민성과 굉장히 닮은 남자가 안경을 고쳐 잡고 말했다.
그는 신기지가의 가주인 한지웅이었다. 다들 화난 얼굴로 씩씩거리고 있었는데, 여기서 그만 이성적인 얼굴을 했다.
“계속 이런 식으로 나가면 저희도 어쩔 수 없습니다.”
신기지가의 가주 한지웅의 말에 드디어 도왕이 눈을 떴다.
“어쩔 수 없으면 우리 패왕을 공격하기로 하겠단 말이오?”
도왕 최강규의 얼굴은 전혀 미안한 기색이 없었다.
자기가 도와달라고 연맹에 도움을 요청한 인사였다.
실질적으로 공격대의 대장을 맡은 것도 패왕도가고.
그런데 위험에 처하니 제일 먼저 패왕 쪽이 줄행랑을 쳤단다.
그럼에도 저 뻔뻔한 얼굴을 하고 있으니.
만독암가의 가주인 철왕이 버럭 소리쳤다.
“그렇다면 어쩔 거요? 쌍둥이 습지대 일은 넘어갔다고 쳐도, 천중호수의 일은 제3자인 내가 봐도 도가 지나쳤소. 도왕이 우리 만독암가에도 도움을 청했었소. 쌍둥이 습지대의 일 때문에 도움을 거절했는데, 만약 천중호수 공략대에 우리도 참가했다면… 아주 끔찍한 일이 벌어질 뻔한 것 아니오. 당신네 패왕과 신력은 가문연맹의 신의를 저버린 것과 마찬가지요.”
철왕이 천중호수의 일을 제 일처럼 나섰다.
자신의 딸 또한 신력과 패왕의 후계자들에게 배신을 당해 목숨을 잃을 뻔하지 않았던가.
그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치가 떨린다.
마음 같아선 신력과 패왕에게 전쟁을 선포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도왕은 여전히 뻔뻔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우리만 몰아가지 마시오. 우리도 철혈가에 할 말이 많소.”
“무슨 할 말? 어디 해보시오.”
“철혈가에선 천중호수의 공략법을 이미 알고 있지 않았소?”
“당치 않소이다.”
“그렇담 어떻게 제2 구간을 쉽게 건널 수 있었단 말이오. 풍사도께선 필시 철혈가의 일제께서 천중호수의 공략법을 알고 있는 게 분명하다고 했소. 아니오?”
“그건….”
검왕이 말을 하려다가 말았다.
가문으로 귀환한 딸에게 들었다.
제2 구간을 단 한 명의 인명피해 없이 건너게 해준 게 이준이라고 했다.
‘도왕이 이걸 물고 늘어질 줄 알았어.’
그때는 일제인 아버지와 밭을 갈고 있어서 생방송을 보지 않았다.
뒤늦게 일을 끝내고 들어와 방송을 보기 시작했는데, 변명거리가 없었다.
철혈검가의 인원이 마치 공략법을 아는 것처럼 행동하는 게 아닌가.
자신의 눈에도 또렷이 보였다.
검왕이 멈칫하자, 도왕이 이때다 싶어 계속 말을 이어갔다.
“우리 패왕도가가 얼마나 천중호수를 클리어하고 싶었는지 당신네들도 잘 알지 않소.”
“그래도 같은 연맹회에 있는 이들을 배신하는 일은 묵과할 수 없소.”
전보다는 화가 많이 수그러든 수장들의 음성이었다.
이에 도왕이 내심 쾌재를 불렀다.
자칫 전쟁으로 번질 수 있는 상황.
여기서 한발 물러설 때였다.
“후우우. 내가 아들을 잘못 키웠소. 미안하오.”
뻔뻔하게 나가던 도왕이 체념하듯 눈을 질끈 감았다.
그 모습에 신기가주 한지웅이 속으로 혀를 찼다.
‘쯧. 이번에도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겠구나.’
가문 연맹회는 서로 전쟁을 원치 않았다.
자칫 한 곳과 싸움이 붙을 때 다른 가문에서 빈틈을 노린다면 주춧돌 하나 남김없이 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쌍둥이 늪지대 때의 일도 흐지부지 넘어간 것이다.
“그걸로 어물쩍 넘어가려고 하지 마시오. 안 통하오.”
검왕이 물고 늘어지자.
“나와 권왕이 어떻게 하면 되겠소. 신기의 가주께서 말해주시오.”
도왕은 일부러 신기지가의 가주인 한지웅을 콕 짚었다.
“음… 일단 기자회견을 열어 전국민이 보는 앞에서 사과를 해 주셔야겠습니다. 그리고…”
신기지가 가주의 음성에 따라 도왕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 * *
기자회견장.
도왕 최강규와 권왕 이건무가 공식 석상에 섰다.
두 사람이 카메라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천중호수에서 있었던 일은 전적으로 저, 도왕의 잘못입니다.”
도왕은 최대한 저자세로 나갔다.
하지만 권왕은 고개만 숙일 뿐, 음성엔 여전히 오만함이 뚝뚝 떨어져 있었다.
“해선 안 될 짓을 저지른 내 동생과 아들을 대신해 사과드리오.”
사과를 하고 있는 게 맞을까 의심스러울 정도의 목소리였다.
“게이트 정보 매거진의 김서아 기자입니다. 제 질문은 같이 게이트에 들어갔던 가문에게 사과하시는 건지 아니면 그동안 국민을 기만했던 걸 사과하시는 건지 알고 싶습니다.”
한 여기자의 질문에 정곡이 찔렸는지 도왕의 얼굴에 균열이 갔다.
“그저 모든 게 제 불찰입니다.”
“앞서 질문했던 두 가지 모두를 말씀하시는 거죠? 그렇게 알면 되는 건가요?”
도왕은 여기자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다른 기자의 질문을 받고 대답했다.
그렇게 마지막 질문에 모두 대답하고 기자회견을 끝내려는데, 김서아란 여기자가 또 마이크를 잡고 입을 열었다.
“마지막으로 도왕께 질문하겠습니다.”
“…하십시오.”
“제가 얻은 정보로는 패왕도가에서는 이번 일을 사죄한 의미로 곧 있을 무사고의 축제, 천무대전의 부상으로 마겁을 내놓았다고 하던데 사실입니까?”
“마겁? 그 블랙존 게이트를 클리어해서 얻은 아티팩트 말이야?”
“저게 사실이야?”
김서아란 여기자의 말에 기자회견장은 시장바닥이 됐다.
마겁.
15가문 연합대가 블랙존 게이트를 클리어하고 얻은 무기이다.
현재는 패왕도가에서 보관하고 있었다.
그 어떤 정보창도 뜨지 않은 아티팩트.
그저 쇠막대기로 보이지만, 일제 오왕은 마겁이 심상치 않은 무기임을 알았다.
그 이유로 검제가 직접 마겁에 내공을 넣어 보았다.
하지만 엄청난 반탄력으로 인해 하마터면 손목이 날아갈 뻔한 일화는 아직도 회자되고 있었다.
도왕이 속으로 이를 갈았다.
‘한지웅. 그 여우가 날 물 먹이려고 기자한테 먼저 정보를 흘린 게 분명해.’
패왕도가에서는 마겁의 비밀을 풀고 있었다.
아티팩트의 비밀은 풀지 못했으나 뭔가 잡힐 것 같았다.
그때 신기지가의 가주가 이번 일을 미끼로 마겁을 천무대전의 부상으로 내세운 거다.
‘이번 일 톡톡히 되갚아 주겠다. 한지웅.’
도왕은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걸 참고 말했다.
“천무대전이 열릴 때까지 비밀로 하려고 했는데, 벌써 소식이 전해진 모양입니다. 마겁은 천무대전의 우승자에게 부상으로 주어질 겁니다.”
“진짜였어!”
“부상이 마겁이라니, 엄청난 소식 아니야?”
“우승자는 완전 횡재를 한 거야.”
블랙존 게이트의 아티팩트다.
모든 게 비밀에 쌓여 있지만, 만에 하나라도 그 비밀을 풀게 된다면 엄청난 기연과 다름없었다.
기자들이 호들갑을 떠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럼 이걸로 기자회견을 마치겠습니다.”
도왕과 권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자회견실을 나온 두 사람.
복도를 걷고 있는 도왕은 권왕을 비꼬며 말했다.
“매제는 좋겠소. 아들이 천중호수의 영웅이 되어 비난을 피하고 있으니.”
“…….”
권왕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미진이한테 들어보니까 서자 따위를 다시 받아들인다는데 정말이오?”
“그렇게 됐습니다.”
그 오만하던 권왕이 도왕에게 존대를 했다.
아내의 오빠.
권왕에겐 도왕이 형님이었다.
“나와 미진이와의 약속을 어길 생각이오?”
“…….”
“대답이 없는 걸 보니 매제의 뜻을 알겠소. 그렇다면 우리가 그 천한 핏줄을 죽여도 된다는 말로 알겠소.”
도왕이 살기 가득한 말을 남기고 먼저 복도를 걸어갔다.
혼자 남은 권왕은 그저 묵묵히 걸을 뿐이었다.
* * *
천중호수를 클리어한 지 벌써 일주일.
기숙사에서 나온 이준은 오늘은 얼마 가지 못해 걸음을 멈춰야만 했다.
“꺄아아아.”
“나왔어.”
이준을 보며 비명을 지르는 여학생들이었다.
“이준 선배, 여기 좀 봐주세요.”
심지어 대포 카메라로 이준을 찍는 이들까지 있었다.
학교에서 연예인의 인기를 능가하는 이준. 처음에는 좋다고 손을 흔들어주었다.
사인을 만들어 적어주기도 했고, 사진도 같이 찍었다.
연예인의 기분을 느낀 건 정확히 2일째까지였다.
그 이후로는 피곤했다.
가는 곳마다 여학생들이 따라붙었다.
화장실 앞까지 지키고 있는 팬들.
인기가 많아지니 사생활이 없어졌다.
정말 다행인 건.
“야, 허수 안 꺼져?”
“네 덩치에 가려져서 이준 선배가 안 보이잖아.”
“어? 준 선배가 사라졌어.”
“빨리 찾아.”
등교할 때면 허수가 기숙사로 매일 찾아온 덕에 잠시나마 숨을 돌릴 수 있었다.
여학생들이 뿔뿔이 흩어졌다.
잠시 후.
“갔어?”
“네. 나오시면 됩니다.”
이준은 나무 위에서 기척을 감추고 있었다.
이제야 한가해진 등굣길.
나무에서 내려온 그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아. 이놈의 인기란.”
이준과 허수는 여학생들을 피해 다른 길로 학교에 가고 있었다.
“형님. 오늘 아침 뉴스 보셨습니까?”
“아니. 아침 뉴스에 뭐 나와?”
“뭐 나오다 뿐인가요. 엄청난 소식이 나왔습니다.”
허수가 잔뜩 흥분된 목소리로 말했다.
“뭔데?”
“천무대전의 우승자에게 주어지는 상말입니다.”
“아. 그 상.”
이준은 천무대전의 우승자에게 주어지는 부상을 알고 있었다.
그건 바로 장보도였다.
혈신의 무덤이라는 블랙존 게이트의 지도 말이다.
‘내가 학교를 계속 다니는 이유가 여기에 있지.’
혈신의 무덤은 이 지도가 없으면 아예 입장 자체가 불가능했다.
자신이 꼭 얻어야 할 물건이었다.
이건 ‘그’들도 그렇게 탐내던 것이었으니까.
그들에게 절대 뺏길 순 없었다.
그런데 허수의 입에서 전혀 뜻밖의 말이 튀어나왔다.
“마겁이라니. 엄청나지 않습니까? 만약 그 안의 비밀을 풀 수만….”
“자, 잠깐! 방금 뭐라고 했어?”
“비밀을 풀 수만 있다면 말입니까?”
“그 뒤.”
“마겁 말입니까.”
“그래. 그거! 정말 천무대전의 부상으로 마겁을 이야기한 거야?”
“네. 기자의 질문에 도왕이 직접 말한 겁니다.”
이준이 눈이 커졌다.
‘그’가 혈신의 무덤 지도와 같이 탐내던 물건이 바로 마겁이었다.
혈신과는 관련이 된 무기는 아니었지만, ‘그’가 지도보다 더 원하던 게 마겁이다.
그때였다.
잠자코 있던 무극자 사부의 놀란 음성이 들렸다.
[지금 마겁이라고 했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