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9화
“도련님을 뵙습니다.”
예의 바르고 절도 있는 동작.
그의 뒤에 있는 수하들도 이준을 보더니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지난번에 정신교육의 성과였다.
“뭔데 자꾸 학교로 와.”
“가주님의 전언입니다.”
“별로 듣고 싶지 않아.”
이준이 관심 없다는 듯 교실로 들어 가려했다.
“가주님께서 후계자 경쟁에 참여하시랍니다.”
사형준의 말에 우뚝 섰다.
어처구니없는 소리에 이준의 입매가 비틀어졌다.
“염병들을 떨고 있네.”
직접 오라고 도발을 했는데, 또 수하를 보냈다.
아버지다웠다.
자신이 강해진 걸로는 그의 관심을 완전히 끌지 못 했나보다.
그래서 수미천왕신공이 중요했다.
“내가 어떤 무공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른 채, 아직도 엉덩이를 무겁게 하시고 있으니. 쯧쯧.”
이준이 권왕을 비웃듯 중얼거렸다.
사형준은 이준이 그러거나 말거나 말을 계속 이었다.
“첫 번째 과제로 천중호수 공략에 참여하시랍니다.”
“난 후계자 경쟁에 참여할 생각 없어.”
“신력권가의 사람은 가주의 명령에 불복할 수 없습니다.”
“난 아니야. 성질 긁지 말고 꺼져.”
이준이 사형준을 지나쳐 교실로 들어갔다.
구경하고 있던 아이들은 기겁했다.
사형준은 굉장히 유명한 사람이었다.
무사고를 수석으로 졸업한 사람.
신력권가의 가주가 친히 학교로 재림해 스카웃해간 일화로 유명했다.
일반 각성자에겐 신화 같은 존재였다.
그런 사람을 이준이 무시한 것이다.
“전 가주님의 말씀을 다 전했으니, 이만 가보겠습니다.”
기분 나빠하는 기색 없이 사형준이 물러났다.
“사람 열 받게 하는 것도 가지가지십니다. 아버지.”
아버지가 벌인 판에 놀아날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몸에서 거부 반응이 일어났다.
지금도 가문에서 웃고 계시겠지.
어떻게 해야 벌인 판에서 놀아나지 않을까.
머리를 굴리던 중 한지유가 눈에 들어왔다.
‘신기지가가 있었지?’
2차 공략이 실패한 신력권가와 패왕도가는 3차 공략에 대규모 인원을 편성한다.
거기에 신기지가도 껴 있었다.
‘아버지가 기겁할 일이 생각났어.’
이준의 표정이 한결 나아졌다.
판에서 벗어날 방법과 가문의 명성에 똥칠할 방법이.
자신이 생각해도 기가 막혔다.
교실로 돌아온 이준은 한지유부터 찾았다.
“지유야. 나랑 이야기 좀 하자.”
“해.”
“여기서 말고. 둘이 은밀히 할 이야기가 있어.”
이준의 말은 오해의 요지가 다분했다.
“무, 뭐?”
“따라와.”
이준이 말을 더듬는 한지유의 손을 잡고 교실을 나갔다.
두 사람의 행동에 시끌벅적했다.
“따라와!”
“꺄아아아.”
“저 박력 어떡해.”
여학생들은 이준의 행동을 따라하며 소리를 질렀다.
“은비야. 게이트에서도 준이가 저랬어?”
“썰 좀 풀어봐.”
“멋있긴 했어….”
박은비가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에도 아이들은 다 들었는지 반응은 장난 아니었다.
한곳으로 모인 시선들.
오직 박은비가 다른 말을 하기만을 기다렸다.
여학생들의 반응이 최고조에 달한 것과 달리, 남학생들은 똥씹은 표정이었다.
“하, 인생 X같다.”
“이준이 저렇게 될 줄 누가 알았겠어.”
“진작 친해져 놓을걸.”
그들은 이준이 변하고부터 말도 못 걸었다.
1학년 때부터 낙오자라고 불러온 그들. 무시란 무시는 다하고 없는 사람 취급을 했는데, 이제야 반가운 척 하겠는가.
처음에는 친한 척 해봤는데 그때의 눈빛을 잊을 수 없었다.
마치 벌레를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 후로 가까이 다가가지 못했다.
그때, 남선호가 혼자 중얼거렸다.
“준이 생각만큼 쌀쌀맞지 않는데….”
아이들은 남선호의 중얼거림을 듣지 못하고, 한숨을 푹 쉬며 신세한탄을 했다.
* * *
이준이 한지유와 함께 교정 벤치에 앉았다.
‘내가 뭘 생각한 거야.’
혼자 온갖 상상의 나래를 펼쳤던 한지유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당황스러운 모습을 들키지 않으려고, 이준에게 차갑게 말했다.
“할 말이라는 게 뭐야?”
“나랑 연합하자.”
한지유의 커다란 눈이 더욱 커졌다.
이미 스카웃은 포기한 상태.
관계 형성에 집중했다.
작은 아버지와도 연합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고 들었는데, 이준이 자신에게 직접 말하고 있었다.
“정말?”
“응. 이사장님께 거래에 응한다고 말해줘.”
“원하는 건?”
“전에 말했던 대로 게이트 독점권이면 돼.”
한지유가 이준을 유심히 보았다.
그녀가 알기론 그는 손해 보는 짓은 절대 안 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연합의 대가로 고작 게이트를 빌려 쓰겠다니.
의심이 들만도 했다.
“다른 건 없어?”
“없어.”
한지유가 한발 더 나아갔다.
“그럼 이준 네 이름만 빌려줘.”
“내 이름은 왜?”
“네가 신기지가의 게이트에 마음대로 들어가려면 우리도 명분이 필요해. 내 친구라고 널 게이트에 그냥 들여 보내준다면, 식객들의 반발을 살 거야.”
이준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신기지가에는 하나의 룰이 있었다.
식객이 된 사람을 전폭적인 지원을 하는 것.
그 하나가 게이트 독점권이었다.
영입된 식객이 인원을 꾸려 독점권을 가진 게이트를 사냥한다.
그곳에서 나온 물건을 가문과 8:2로 나눈다.
아주 파격적인 운용방식이었다.
장비, 무공서 지원, 보금품, 기타 부대 비용 등.
이 모든 걸 지원받고서 8할을 받는 건 그 어떤 가문도 제시하지 않았다.
혈족을 중시한 요즘 시대에 맞지 않았다.
“그도 그렇네. 식객 형태로 서로 도움 받는 관계로 해.”
“좋아.”
한지유가 먼저 손을 내밀었다.
악수하자는 제스처.
이준도 웃으면서 손을 맞잡으면서 말했다.
“덤으로 내가 너희 가문이 걱정하는 걸 해결해줄게.”
“무슨 소리야?”
이준이 하얀 이를 드러내며 전음을 보냈다.
‘신기지가 내부에서 썩고 있는 물들 처리해줄게.’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어.’
한지유가 모른 척 하자, 이준이 조금 더 노골적으로 말했다.
‘영입했던 식객들. 현재 다른 가문과 내통하고 있지?’
“그 무슨!”
한지유가 전음도 까먹은 채, 버럭 소리쳤다.
신기지가의 말 못 할 치부.
고이고 고인 물들이 이젠 강짜를 부리고 있었다.
더 좋은 조건을 내놓지 않으면 타 가문으로 이적할 거라고.
내부에서 어떻게든 막고 있으나,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이었다.
그래서 새로운 바람을 일으킬 인재들이 필요했던 것이다.
‘어때? 괜찮은 제안이지?’
한지유가 머뭇거렸다.
가문의 상황을 아는 듯한 이준이지만, 혹시 떠본 것일 수 있었다.
먼저 말을 하는 건 멍청한 짓.
적당한 말을 떠올리고 있을 때, 이준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떠본 거라고 생각하고 있을 텐데, 이러면 믿으려나? 응비조 이한성은 패왕도가, 흑웅 백대준은 신력권가와 내통하고 있잖아.’
한지유의 눈동자가 세차게 떨렸다.
두 사람 다 적과 내통했다는 걸 파악하고 있는 식객이었다.
‘어떻게 알았어?’
알지, 아주 잘 알 수밖에.
응비조 이한성은 신기지가를 배신 후, 신력권가로 와서 타 가문을 전복시키는 일에 앞장선 인물이다.
‘그건 중요하지 않고 나한테 그놈들을 처리할 방법이 있다는 게 중요하지.’
‘방법부터 말해봐.’
‘내가 너무 패를 다 까는 것 같은데.’
이준이 늦장을 부리자, 한지유가 쌍심지를 켰다.
천만다행으로 그녀의 옆구리에 검이 없었다.
있었다면 이미 뽑히고도 남았을 거다.
‘빨리!’
‘내가 착해서 공짜로 먼저 가르쳐주는 거야. 나 절대 호구 아니다?’
‘알았다니까.’
‘신기지가에서 찾고 있는 혈고독술 내가 줄 수 있어.’
한지유가 손으로 입을 가렸다.
혈고독술은 신기지가에서 몇 년 째 찾고 있는 무공서였다.
사람에게 고독을 심어 명령을 따르게 하는 것.
악독한 방법이긴 하나 말 안 듣는 놈에게 이만한 것도 없었다.
‘이준 네가 가지고 있어?’
‘비슷하다고 볼 수 있지.’
가지고 있을 턱이 있나.
그저 무극자 사부란 네비게이션을 믿고 있을 뿐이었다.
* * *
“언니.”
“아가씨께서 이 시간이 무슨 일로?”
남 비서가 뒤에 있는 이준에게 시선을 옮기며 물었다.
“작은 아버지한테 드릴 말씀이 있어요. 안에 계세요?”
“잠시만요. 이사장님. 지유 아가씨께서 오셨습니다.”
-들어오라 하세요.”
“들어가셔도 됩니다.”
한지유가 안으로 들어갔다.
“작은 아버지.”
“그래. 무슨 일로 왔… 구나?”
조카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려는 찰나.
이준을 보고 알아차렸다.
“앉거라.”
“안녕하세요.”
“그래. 무슨 일로 왔어?”
소파에 앉자마자 한지유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이준이 저희 가문의 사정을 알고 있어요.”
“무슨 사정?”
“식객이 타 가문과 접촉하고 있다는 사실을요.”
한민성은 한지유가 처음 보였던 반응을 그대로 보이고 있었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모른척했다.
이준은 그걸 보며 작게 웃었다.
누가 가족 아니랄까봐.
행동이 비슷했다.
“이준 학생이 어떻게?”
“저도 그건 모르겠는데, 저희 가문이랑 연합하는 조건으로 이준이 혈고독술을 주겠대요.”
“혈고독술!? 이준 학생이 가지고 있었어?”
“그렇다 할 수 있죠.”
이준은 혈고독술을 가지고 있는 것과 진배없었다.
어느 게이트에 무공서가 있는지 알고 있었으니까.
‘서울 숲 게이트에 자신들이 그토록 찾고 있는 무공이 있는 줄 어떻게 알겠어.’
신기지가가 가지고 있는 게이트 중 한 곳인 서울 숲에 혈고독술이 숨겨져 있었다.
‘그리고 마정석 광산. 파도파도 마르지 않은 금광을 다른 사람한테 넘겨줄 수 없어.’
그의 생각을 전혀 모르는 한민성은 연신 감탄을 토로했다.
“허. 이준 학생이 손해가 더 클 텐데?”
“괜찮습니다. 신기지가에서 언제든지 특급 정보를 열람할 권한만 주세요. 지원도 빵빵하게 해주시고요.”
정보에서 만큼은 신기지가를 따라올 가문이 없었다.
음지의 암상조차도 말이다.
정보단체에서 정보를 이용하려면 한 건에 수천만 원.
특급 정보는 억 단위에 해당했다.
신기지가가 신뢰도 쌓고 정보도 공짜로 쓸 수 있고 얼마나 좋나.
그리고 자기들의 영역에 있는 무공을 찾아서 주는 것.
자신이 손해 볼 일이 아니었다.
‘혈고독술처럼 저급한 무공은 필요 없어.’
SSS급 무공인 혼원신공만 있으면 됐다.
“한 가지 부탁을 미리 해도 될까요?”
“그래. 어떤 부탁이든 말해봐.”
“신기지가에서도 천중호수 3차 공략에 참여하시죠?”
“그 건은 극비로 진행되고 있었는데?”
한민성이 한지유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녀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자신이 말한 이야기가 아니라고 표현했다.
이준이 방긋 웃었다.
미래를 알고 있는 자신이 모르는 건 없었다.
이번 3차 공략도 실패로 돌아간다는 것도 알고 있었으니까.
또한 대규모의 전사자를 남긴 것도 말이다.
여기서 제일 피해를 본 이들은 신기지가.
이 모두가 패왕도가의 계획이었다.
그들은 이미 악마의 끄나풀과 손을 잡고 있는 놈들이다.
“제 정보가 굉장히 빠른 편이라서요. 무튼 제가 신기지가의 편에 서는 건 3차 공략 이후였으면 좋겠어요.”
“그래도 상관없는데, 이유를 물어봐도 되겠나?”
“제가 신력권가 쪽에서 참여하게 됐거든요.”
이준의 제안을 듣고 한민성의 얼굴에는 화색이 돌았다.
이준은 학교에서 떠오르는 신성.
그의 실력을 어렴풋이나마 짐작하고 있는 한민성이라 아주 기뻤다.
3차 공략에는 각 가문의 후계자 급이 참여한다.
여기에 자신의 조카인 한지유도 참가하게 됐다.
혹여라도 다치지 않을까 불안하기도 했는데, 이준이란 실력자도 참가한단다.
조카인 지유와는 아주 친한 단짝.
자신이 보기에는 지유가 다치기 전에 이준이 도와줄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제 가문에 엿 좀 먹이게 시범으로 동영상 하나만 더 풀어주세요.”
이준의 한쪽 입꼬리가 말아 올라갔다.
섬뜩할 만한 미소.
한민성 이사장은 저도 모르게 소름이 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