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2화
“…….”
“믿을 수가 없군요.”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할지.”
선생들이 홀로그램에 재생된 영상에 눈을 떼지 못했다.
이준의 신들린 창술.
본 드라고니의 무시무시한 괴력과 독니.
정신없이 공수를 교환하는 장면은 입을 다물지 못하기에 충분했다.
제일 정신을 놓고 보는 사람은 이준의 담임 김태형이었다.
‘X발. 이젠 틀렸어.’
창술로 유명한 가문인 신창조가의 가주도 영상의 이준만큼 창을 잘 다루지 못할 거다.
창의 귀신이라도 된 듯, 영상이 이준의 움직임을 못 따라갔다.
‘이러면 안 되는데.’
저 실력을 신력권가에서 알고 있을까.
김태형은 이미 이준과 척을 진 상태.
신력권가에서 이준을 가문 사람으로 인정한다면 자신은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된다.
어쩌면 이준에게 보복을 당할지 모른다.
‘도망쳐야 해. 지방에 있는 시골에 처박혀 숨죽이고 있는 게 내가 살 길이야.’
이기홍의 아버지인 이민욱의 부탁만 듣지 않았어도 이 지경이 되진 않을 터.
이제 와서 후회가 됐다.
적당히 돈을 받아먹고 한 발 뒤로 뺐으면 좋으련만.
김태형이 손톱을 이빨로 뜯으며 절망에 빠져 있을 때 한민성이 말을 걸어왔다.
“김태형 선생은 무슨 생각을 그리 하십니까?”
“아, 아닙니다. 그런데….”
김태형이 표정을 수습했다.
마냥 불안해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기 전 발악은 해야 되지 않을까.
“전 갑자기 강해진 이준이 이상합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말씀해보세요.”
“이준은 신력권가의 자제입니다. 삼재검법이란 삼류 무공을 쓰는 학생이었죠. 영상에 보이는 건 이준이 창을 쓰고 있지 않습니까. 뭔가 이상합니다.”
다른 선생들도 서로 눈을 마주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신력권가는 권으로 유명한 가문.
그 어떤 사람도 창을 주무기로 쓴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학교에서 연환창법을 배우긴 하나, 화면의 무공은 연환창법이 아니었다.
“계속하세요.”
“다른 조력자가 있는 게 아닐까란 생각이 듭니다.”
“그 말은 이준네 조가 게이트를 깰 때 누군가가 도와줬다?”
한민성의 눈이 깊어지면서 김태형을 뚫어지게 보았다.
그 눈빛을 받은 김태형이 침을 꿀꺽 삼켰다.
이미 내친걸음.
여기서 물러선다면 바로 낭떠러지였다.
다신 선생 짓도 못하고, 신력권가에 밉보여 산에 매장당할지 모른다.
“그것 이외에는 솔직히 말도 안 되는 상황 아닙니다. 혼자 블루 존급 보스 몬스터를 상대하다니요. A급인 이사장님도 이준 학생처럼 홀로 블루 존급 보스 몬스터는 사냥 못하시지 않습니까.”
한민성은 A급 각성자였다.
비록 무력이 아닌 진법으로 이름이 알려졌으나, B급 각성자보다는 굉장히 강했다.
“김태형 선생의 말도 일리 있습니다. 하지만 증거가 없지 않나요.”
“제3의 인물이 이준을 키우고 있는 게 아닐까….”
탁!
한민성이 탁자를 손을 쳐 김태형의 말을 가로막았다.
“김 선생 말은 제3의 인물이 이준 학생에게 계승의 꽃을 먹였다 칩시다. 그도 이준의 능력을 알아본 걸 권왕이 놓쳤다는 말로 들리는군요.”
“그, 그건.”
김태형의 말을 빌리자면 권왕의 눈이 썩어서 이준의 재능을 보지 못했는데, 제3의 인물은 이준의 재능을 보았다는 것이다.
권왕은 세간의 이미지를 굉장히 신경 쓰는 사람.
남들이 보기에 아무리 쓰레기라도 그가 보기에 재능이 있으면 수백 억을 호가하는 계승의 꽃을 먹여서라도 그럴듯한 보석으로 가공해낸다.
하지만 그는 세상에 못을 박아 버렸다.
이준은 실패작이라고.
재능도 없는 둔재라며 이준을 혈족 계승도 못한 쓰레기라고 선언했다.
“다른 선생들의 의견은 어떤가요?”
“정말 게이트를 클리어 했는지 확인해 보는 건 맞지만, 김태형 선생의 말은 너무 간 듯합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권왕께선 그리 편협하신 분이 아닙니다. 잘못을 인정하고 차라리 이준 학생을 가문에 다시 들이셨겠죠.”
졸지에 선생들이 돌아섰다.
김태형이 입술을 깨물었다.
자신도 너무 갔다는 걸 이제야 깨달은 것이다.
‘빌어먹을. 이게 아니었는데….’
* * *
이준은 천막으로 된 숙소에 자신의 무기를 놔두고 밖으로 나가려 하자.
“어디가?”
한지유가 붙잡았다.
“화장실.”
“다른 곳으로 새는 거 아니지?”
“내 소변 보는 것까지 감시하게?”
“내가 미쳤냐?”
“하.”
이준이 한숨을 푹 쉬고 밖으로 나왔다.
“눈치는 귀신같이 빨라 가지고.”
저게 바로 여자의 직감이라고 해야 하나.
남자들이 바람을 피우면 레이더를 돌려 알아낸다더니.
여자들의 촉이란 소름 돋게 무서웠다.
이준이 한차례 부르르 떨고는 화장실로 들어갔다.
게이트를 소환해 요정의 꽃밭으로 나왔다.
“준비 다 끝냈지?”
- 네… 그런데 저희가 정말 여기를 버려야 할까요?
“버리는 게 아니고 잠시 피신.”
앳된 페어리가 작은 단지를 옆에 끼며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다른 페어리도 똑같은 얼굴이었다.
자신들의 집을 버리고 다른 게이트로 간다고 하니, 마음이 착잡한 것이다.
“들어가서 지내 보고 아니면 다시 돌아오던지.”
- 그래도 돼요?
“인간들한테 너희를 보호하려고 잠깐 피신시키는 거야.”
이준이 서운한 어투로 말하자, 품속에서 파랑이가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뀨웃!”
녀석이 페어리들한테 앙증맞은 송곳니를 드러냈다.
녀석의 포효에 페어리들은 자라목이 되었다.
- 아, 아니에요. 믿어요. 그렇죠 여러분?
“서로 믿고 지내다 보면 다시 요정의 꽃밭으로 돌아오기 싫을 거야.”
이준이 청호 보금자리로 가는 게이트를 열었다.
그가 먼저 안쪽으로 들어가 페어리에게 손짓했다.
“넘어와.”
- 고등급의 주인들만 쓸 수 있는 게이트 소환!
- 여, 역시 금역의 주인을 수하로 두신 분이야.
페어리의 얼굴에 감탄이 어렸다.
그들이 청호 보금자리로 줄줄이 넘어왔다.
“오오.”
“여기가 금역의 주인의 영역.”
“공기가 전혀 달라.”
페어리들은 소풍이라도 온 듯 주변 광경을 눈에 담았다.
그때였다.
멀리서 무기를 들고 달려오는 몬스터들이 보였다.
페어리들은 먼저 꿀단지를 보호했다.
“누가 요정들 아니랄까 봐.”
이준이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스케먼이 일사불란하게 정렬하며 이준의 앞에 섰다.
“주인님 오셨습니까!”
오늘도 어김없이 테구르가 예의 바르게 경례를 했다.
이준이 마주 경례하며 손을 내렸다.
“오늘부터 같이 살 페어리들이야.”
테구르가 유심히 페어리들을 탐색했다.
누가 더 강한지 서열을 가리기 위한 행동 같았다.
한동안 계속 앳된 페어리와 눈싸움을 이어갔다.
그리고 잠시 후,
“헤헤. 마음 편히 지내셔도 됩니다.”
테구르가 몸을 굽실거리며 두 손을 비볐다.
이준은 어처구니없었다.
청호 보금자리로 먼저 온 건 테구르였다.
선배라고 할 수 있는데, 자신보다 한참 고등급인 페어리들을 마주하자 주제를 파악하고 먼저 고개를 숙인 게 아닌가.
[저놈은 어디에 내놔도 오래 살겠구나.]
“예상 밖입니다. 한바탕 싸울 줄 알았는데.”
[저게 바로 처세술이란 거다. 자신보다 강한 자에게 고개를 숙여 목숨을 부지하는 건 현명한 자세니라.]
스케먼의 포지션은 일꾼이다.
강한 공격력을 자랑하는 페어리와 싸워서 이길 수 없었다.
테구르도 그 사실을 안다.
그의 호의에 페어리들이 깜짝 놀랐다.
-네?
“제집은 아니지만, 편히 지내십시오. 아, 집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속사포로 말하는 테구르 덕에 페어리들의 혼이 쏙 빠졌다.
파랑이가 이준의 품에서 나와 남쪽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말입니다. 파랑이 형님이 있는 남쪽 영역은 되도록 침범하지 않으셔야 합니다. 만약 이 사실을 어기면 파랑이 형님이 노하실겁니다.”
-금역의 주인 말씀이세요?
“금역의 주인이요?”
테구르가 고개를 갸웃하자, 이준이 대신 대답해 줬다.
“파랑이를 말하는 거야.”
“그렇습니까? 맞습니다. 파랑이 형님 말입니다.”
- 헉!
- 어떻게 금역의 주인과 스케먼이 형 동생 할 수 있지?”
- 천지가 개벽할 일이야.
놀람의 연속이었다.
페어리들은 자신이 겪고 있는 게 현실인지 헷갈려 했다.
블랙존급 게이트의 주인은 콧대가 높다.
그중에 최상위 11주인은 같은 블랙존들도 쳐다보지 못할 존재들.
그런데 고작 하위종인 스케먼과 형, 동생하고 있으니.
이걸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몰랐다.
그다음 테구르의 말은 더 가관이었다.
“여러분도 앞으로 저분을 형님으로 모시면 됩니다.”
- 저, 저희가 말이에요?
“물론이죠. 안 그렇습니까? 주인님?”
“그건 너희 마음대로 해.”
“마음씨 착하고 너그러운 저희 주인께서도 허락한 일이니 그렇게들 하시면 됩니다. 이런, 말이 또 옆으로 샜군요. 집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테구르의 말은 끊기지 않고 계속 되었다.
더는 이준이 여기 있을 필요가 없었다.
따까리 기질이 다분한 테구르에게 맡기면 될 뿐.
이준이 다시 학교로 돌아갔다.
* * *
그가 잠깐 게이트에 갔다 온 사이, 조사대가 편성됐다.
이준의 조가 정말 게이트를 클리어했는지 알아보기 위한 파견대였다.
이례적으로 한민성 이사장이 직접 움직인 것.
이번 사건이 그만큼 크다는 소리다.
조사대가 요정의 꽃밭에 도착했다.
“들어가 보시겠습니까?”
“그럽시다.”
관리관의 안내에 한민성와 선생들이 게이트 안으로 들어갔다.
[요정의 꽃밭에 입장하셨습니다.]
[클리어된 게이트입니다.]
[소요시간: 02:30:52]
“허. 정말로 클리어한 시간이 3시간도 되지 않다니.”
“직접 메시지를 보니까 말이 안 나오는군요.”
“이 사실을 공표하는 것도 일이겠습니다.”
이곳을 나간 선생들은 바쁠 예정이었다.
각 가문에서 후원받는 이들.
그들에게 이 엄청난 정보를 넘겨줘야했다.
조금 더 확인하기 위해 조사대가 안쪽으로 들어갔다.
한민성은 주변을 계속 확인했다.
‘청호 보금자리처럼 주인이 있는 것도 아니고, 게이트 안의 공기도 정화되어 있지 않아.’
일반적으로 게이트를 클리어 할 때 보이는 현상이다.
이준이 휩쓸고 간 게이트는 공중에 떠도는 마기가 단 하나도 남지 않았다.
‘이준 학생이 눈속임한 걸까?’
한민성은 오직 이준에 대한 궁금증뿐이었다.
그의 진면목은 과연 어떨까.
한 명의 각성자로서 이준 자체에 대한 호기심이 일었다.
“확인은 된 듯싶군요.”
“말도 안 되는 상황이지만, 직접 눈으로 확인하니 더는 반박할 수도 없겠군요.”
“다들 이견 없는 걸로 알고 돌아가도록 합시다.”
* * *
중간고사가 진행된 지 사흘째.
이신이 털썩 자리에 앉았다.
격전을 치른 듯 몸에 두르고 있는 방어구가 많이 손상됐다.
그가 수통을 꺼내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언제까지 이 짓거리를 반복해야해?”
이신이 짜증을 냈다.
리자드맨을 죽인 숫자만 200마리는 되었다.
어디에 숨어 있는지 계속 나오는 몬스터들이다.
“불평 좀 그만해. 너만 짜증나는 거 아니거든?”
“이년이 진짜 뒈져 볼래?”
“그 냄새 나는 주둥이 좀 닥쳐 주라. 정말 부탁이야.”
“이익!”
이신이 벌떡 일어났다.
앉아 있던 검화가 위를 올려다보며 이신의 속을 긁었다.
“대가리 속에 개념 대신 근육만 채워 넣었니? 저러니까 한지유가 싫어하는 거지.”
“리자드맨을 처리하기 전에 너부터 손봐 줘야겠다.”
최태민이 중재하지 않았다면 두 사람은 정말 한판 붙었을 기세였다.
아니, 게이트가 아니라면 이미 붙고도 남았다.
“그만해 둘 다. 여기 블루존 게이트야.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데 우리끼리 싸우면 어쩌자는 거야.”
“저년이 자꾸 성질나게 하잖아.”
“저년? 뇌가 근육으로 뭉친 새끼가 얻다대고 이년 저년이야.”
이신과 검화 박정연이 언성을 높였다.
평소 사이가 안 좋았던 두 사람.
하지만 처음부터 이런 건 아니었다.
여색을 밝히는 편인 이신은 원래 박정연에게도 사심이 있었다.
철혈검가의 장녀.
서구적인 몸매에 더불어 고양이가 연상되는 날카롭고 뚜렷한 이목구비의 소유자.
학교에서 손에 꼽히는 미인이다.
외모만큼이나 성격도 화끈했다.
한번 꽂힌 건, 사람이든 물건이든 열렬한 감정을 내비친다.
그런 박정연이 꽂힌 게 가문의 수치라 불리던 이준이었다.
어째서인지 남매가 쌍으로 이준에게 꽂혔다.
그렇게 박정연이 이준을 귀여워해 주면서 두 사람의 관계가 서서히 틀어졌다.
완전히 갈라서게 된 계기는 이신이 이준을 괴롭혔을 때였다.
박정연이 이준의 편을 들면서 이신에게 개망신을 안겨 주자 이후부터 앙심을 품었다.
그렇게 만나기만 하면 서로 으르렁대기 바쁜 두 사람. 학교 시험을 1등으로 끝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같은 조로 뭉친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밥도 같이 먹지 않았다.
두 사람이 서로 으르렁 대고 있을 때였다.
“쉿! 조용히 하고 저 앞을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