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6화
“신력권가 직계 혈통을 모욕한 죄는 죽음으로 갚아야 할 것이다.”
이준의 싸늘한 말투에 천왕대의 혈색이 하얗게 질렸다.
덜덜덜.
천왕대가 무릎을 꿇은 채 몸을 떨고 있었다.
사형준은 대원들을 보고 알 수 있었다.
이준 도련님을 극도로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
얼마 되지도 않아 천왕대가 이준 도련님께 굴복한 거다.
고작 기세 하나만으로.
사형준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는 게 아닌가.
원인은 당연히 눈앞에 있는 이준 도련님 때문.
자신 또한 몸이 떨려오는데 대원들은 오죽할까.
계속 버티다간 대원들이 치명적인 내상을 당할지 모른다.
“천왕대가 무례를… 범했습니다.”
사형준만이 꿋꿋하게 서 있었다.
역시 천왕대의 대주였다.
이준이 군림보를 사용했음에도 사형준은 별 영향이 없는 것 같았다.
아니지.
사형준의 진정한 정체는 천왕대의 대주 따위가 아니었다.
그의 진정한 정체는 따로 있었다.
가주의 말만 듣는 권신단의 부단주였다.
차기 권신단주로 내정된 인물.
신력권가가 꼭 품고가야 할 인재다.
‘지금은 A급 완숙에 있으려나?’
권신단을 이끌 때는 AA급이 되고.
20대 후반의 나이로 최고의 엘리트 코스를 밟고 있었다.
“너에게 받을 사과는 아니야.”
이준이 노려보고 있는 이들은 천왕대였다.
그가 여기서 멈출 것 같지 않자.
사형준이 고개를 돌려 버럭 소리쳤다.
“정신 차리고 이준 도련님께 예의를 차려라!”
사형준의 목소리에 내공이 담겼다.
대원들의 뇌리를 강타한 그의 음성.
하나둘씩 무릎을 꿇은 채 예의를 갖추었다.
“준… 도련님을 뵙습니다.”
인사불성인 채 가까스로 인사하는 천왕대.
사형준이 이준에게 재차 말했다.
“이만 용서해 주십시오.”
“재밌네. 정말 싹 다 죽이려 했는데.”
이준이 싸늘하게 웃으면서 말을 했다.
오싹.
천왕대 대원들이 흠칫 몸을 떨었다.
살기가 짙은 목소리였다.
그들은 커다란 충격에 빠졌다.
신력권가에서 버려진 자식.
수백억을 호가하는 계승의 꽃이 아니면 사실상 회생불가인 실패작이었다.
그런데 그가 뿜어내는 정체 모를 힘에 굴복했다.
자신들은 신력권가의 엘리트들.
이준의 무력은 상당한 충격으로 돌아왔다.
“이번은 그냥 넘어가 주지.”
그 말을 끝으로 천왕대를 찍어 누르던 힘은 거짓말같이 사라졌다.
‘직접 보니 왜 유령살귀가 이준 도련님께 졌는지 알겠어.’
정말 놀라웠다.
혈족 계승도 못했는데 어떻게 이렇게 강해질 수 있을까.
알면 알수록 놀라웠다.
사형준은 내심을 숨기고 이곳에 온 목적을 전했다.
“가주님께서 도련님을 뵙고 싶어 합니다.”
“왜?”
드디어 올 게 왔다.
옛날에 그토록 바라던 아버지의 관심.
학교를 넘어 이름을 날리니 이제야 아버지가 자신을 찾았다.
“아버지가 아들을 보고 싶은 것에 따로 이유가 있겠습니까.”
“개소리하지 말고. 자신이 버린 쓰레기가 혼자 커서 유령살귀를 제압하니까 관심을 가졌겠지. 아들이 보고 싶어? 지나가는 개가 웃겠다.”
말에 뼈가 있었다.
사형준이 아랑곳하지 않았다.
“가문의 상황으로서 도련님을 최대한 보호하기 위한 가주님의 선택이었습니다.”
이준이 목소리를 내리깔며 경고를 보냈다.
“한번만 더 그 입을 놀리면 너도 온전하진 못할 거다.”
이준이 낮게 으르렁대곤 혈전창을 뽑아 등을 돌렸다.
사형준은 그를 잡지 못했다.
‘내가… 겁을 먹었어?’
수전증이 심하게 온 것처럼 전보다 더 심하게 떨리는 게 아닌가.
사형준은 불신 가득한 눈으로 이준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 * *
“기분만 더러워졌어.”
이준이 바닥에 굴러다니는 돌을 찼다.
그의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으나 기분은 딱히 좋지 않았다.
예전에는 받아 보지도 못한 관심을 이제 받고 있었다.
정확히는 자신에 대한 관심이 아닌, 혈족계승도 못한 놈이 유령살귀를 어떻게 꺾었는지 그게 궁금하겠지.
그러니 자신을 부른 것이고.
이준은 이 더러운 기분을 날려 버리고 싶었다.
[기분 전환에는 수련이 최고이니라.]
“누가 사부님 아니랄까 봐.”
[어허. 다 너를 위해서이니라.]
“저도 압니다.”
참 웃겼다.
언제나 자신을 구박하고 놀리고 갈구는 무극자 사부였다.
그의 목소릴 들으니 기분이 조금 나아지는 게 아닌가.
그새 정이라도 든 것 같았다.
이준이 무극자 사부와 대화를 하는 사이 체력 훈련실에 도착했다.
그 말고는 몇 없었다.
모두가 무기를 휘두르러 체육관이나 운동장에 있었다.
기초 체력을 단련하는 이들은 몇 없었다.
“후욱. 후욱.”
이준의 눈에 익숙한 뒷모습이 보였다.
목검을 아래에서 위로 내려치고 있는 남자는 박혁진이었다.
녀석은 한 자세만 반복했다.
‘지독해.’
검룡이란 칭호를 괜히 단 게 아니라는 듯 목검에서 엄청난 풍압감이 느껴졌다.
10분이 흐르고, 30분이 더 흘렸다.
박혁진은 한 시간이나 더 검을 휘두르고 나서야 수련을 멈췄다.
수건으로 땀을 닦다가 이준과 눈이 마주쳤다.
“쭈운. 여긴 어쩐 일이야.”
“나도 기초 단련을 해 볼까 하다가?”
“오올? 어디 이 형이 자세 좀 봐줄까?”
“됐어.”
이준이 박혁진의 호의를 거절했다.
녀석의 수련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도 수련해야 할 게 있었다.
혈전창을 쥐고 자세를 잡자.
“너, 창도 써?”
어디서 들어본 질문 같았다.
이곳에서 한지유에게 들었던 기억이 났다.
“이제부터 연습해 보려고.”
“창법을 익힌 거야?”
“그러니까 창을 들고 있겠지?”
박혁진의 두 눈이 반짝였다.
이준이 어떤 창법을 펼칠지 내심 궁금한 눈치였다. 하지만 그의 기대는 이루어질 수 없었다.
이준은 자신이 하던 방식 그대로 창을 찌르고 회수하기만을 반복했다.
“초식 좀 펼쳐 봐.”
“나도 그러고 싶은데 이걸 먼저 하래.”
“누가?”
“내 사부가.”
“그 사부님 나도 좀 만나 보면 안 되냐?”
“넌 못 만나니까 말 시키지 마. 지금 자세 안 좋다고 혼나고 있어.”
이준이 정신 나간 소리를 하고 있었다.
체력 훈련실에는 그 포함 다섯도 되지 않았다.
그런데 누구한테 혼난단 말인지.
박혁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준은 계속 찌르기만 반복했다.
유심히 보던 박혁진이 이상함을 느꼈다.
‘자세가 좋아지고 있잖아?’
엉성하던 자세가 얼마 지나지 않아 고쳐지는 게 보였다.
마치 옆에서 누군가가 자세를 교정해 주는 느낌이랄까?
박혁진이 주변을 둘러보다 몸을 떨었다.
“귀, 귀신?”
그가 화들짝 놀랐다.
검을 올리며 주변을 경계했다.
박혁진이 그러든 말든 이준은 체력훈련실을 나가기 전까지 찌르기만 반복했다.
* * *
이준과 박혁진은 밤늦게서야 훈련실에서 나왔다.
“준아 곧 중간고사인데 네가 갈 곳 미리 조사해 놓는 게 좋지 않아?”
“이미 정해 놨어.”
“벌써? 어딘데?”
“딱 1등 하기 좋은 곳으로 찜해 놨지.”
박혁진이 귀를 바짝 가져다 댔다.
“어딘데. 나만 살짝 가르쳐 줘 봐.”
“너라도 비밀이다.”
“야. 너 나한테 자꾸 비밀 만들기냐. 진짜 실망이다.”
박혁진이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세상 무너질 것 같은 표정으로 한숨을 푹푹 쉬었다.
비밀을 말해 줄 때까지 저 얼굴을 고수할 생각인가 보다.
이준이 피식 웃으며 녀석에게 져 줬다.
“요정의 꽃밭에 갈 거야.”
“종로에 있는 블루 존 게이트? 5명으로 가능하겠어?”
말해 줘서 좋아하기보단 걱정 가득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전생이나 현생이나, 자신을 걱정해주는 건 이 녀석 말곤 없었다.
아, 최근에 한 사람 더 생겼다.
무사고의 이사장이라고, 이상한 아저씨다.
“내가 설마 죽으러 가겠냐. 너도 긴장해야 할 거야.”
“그래도… 위험한 곳보다 공략 루트가 확실한 곳이 좋지 않을까하다.”
“됐고. 너는 어디 갈 거야?”
이준이 화제를 돌리자, 박혁진이 물음에 답했다.
“빙벽의 협곡으로 정했어.”
“너야말로 상당히 위험한 곳으로 정했는데?”
“준아. 나 검룡이야. 학교 랭킹 1위에 달하는 천재.”
박혁진이 가슴을 탕탕 쳤다.
안다.
대외에는 B급으로 측정되어 있지만, 실은 A급으로 올라섰다는 걸.
과거에도 빙벽의 협곡을 깨고 학교 전에 2등을 먹은 박혁진이었으니까.
참고로 당시 1등은 자신의 형, 이신이였다.
이준이 재밌는 생각이 떠올랐다.
어차피 이번 중간고사는 자신이 1등이다.
그렇다면 과거의 순위가 밀릴 터.
이신네 조가 2등이 되고 박혁진네 조가 3등이 된다.
만약 박혁진이 이신을 제친다면 어떻게 될까.
이신은 언제나 박혁진에게 열등감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과거에도 죽을힘을 다해 중간고사에서 그를 이기고 1등을 차지한 것.
입가에 번진 미소가 짙어졌다.
“혁진아. 내가 재밌는 사실 하나 가르쳐 줄까?”
“뭔데, 뭔데?”
“빙벽의 협곡 말인데….”
이준이 박혁진의 귀에 대고 자신이 아는 정보를 가르쳐 줬다.
* * *
중간고사 기간이 다가왔다.
“전 학년을 대상으로 경쟁이 치러진다. 5인 1조로 화이트, 그린, 블루 존까지 깰 수 있다.”
난이도가 올라갈수록 더 높은 점수가 측정되는 방식.
현장실습에는 인솔자가 동행되었지만, 중간고사는 학생들만 갔다.
실전 경험을 위한 평가였다.
실제로 이때에 가장 많은 부상자와 사망자가 발생한다.
학생들이기 전에 각성자.
선생들이 언제까지 몬스터에게서 학생들을 보호해 줄 순 없었다.
“성적을 잘 받고 싶으면 조를 잘 짜서 높은 등급의 게이트를 클리어하면 될 거다. 반장이 명단을 작성해서 나한테 제출하도록. 이상.”
김태형이 교실에서 나갔다.
학생 모두가 바짝 긴장했다.
목숨이냐 점수냐.
당연한 건 학부에 성적이 잘 나오면 15가문연맹에 들 수 있다.
학생들에게 꿈의 단체.
15가문연맹에 든 것 자체만으로 인생 역전이다.
학생들이 서로 눈치를 보다가 움직였다.
친한 친구들끼리 삼삼오오 모이는 모습.
그들을 바라보는 이준은 관심이 없었다.
혼자 깨도 상관없었고, 이참에 허수의 무공을 구할 게이트로 갈 생각이었으니까.
그런데 옆에서 한지유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랑 같이하자.”
“다른 애들이 너랑 가고 싶어 한 눈친데?”
죄다 남학생들.
한지유에게 먼저 제안하고 싶었으나 용기를 내지 못했다.
그들이 들으라는 듯, 그녀가 큰 목소리로 말했다.
“난 너랑 하고 싶어.”
한지유가 이준을 선택해서 남학생들이 실망했다.
아직 3명이 남았으나, 저 틈에 들어갈 용기가 안 났다.
대신 여학생들은 화색을 띠었다.
자신들도 한지유처럼 기회가 있다 여겼으니까.
“저… 준아. 나도 너희 조에 끼워 주면 안 될까?”
단발머리 여학생이 다가왔다.
학급의 반장으로 박은비라는 친구였다.
E급 각성자.
성적으로는 5반에선 상위권에 있었다.
뽀얀 피부에 동그란 눈을 가진 자그마한 체구의 여학생으로, 꽤나 귀여운 외모와 사근사근한 성격 덕에 한지유가 오기 전까지 제일 인기 있던 여학생이기도 했다.
박은비의 제안이 기폭제가 되었나.
“나도 준이랑 할래.”
“아니야 내가 먼저 하려고 줄 섰어.”
“내가 먼저거든.”
반 여학생들이 모두 이준에게 달려들었다.
졸지에 여자들에게 둘러싸인 이준이었다.
“난감하네.”
이준이 뒷머리를 긁적이고 있을 때, 한지유가 손바닥으로 책상을 쳤다.
쾅!
커다란 소리에 주변이 조용해졌다.
“은비는 기공사, 혜지는 치료사. 다른 한 명은 남자로 구할 거야.”
은비와 혜지가 뛸 듯 기뻐했다.
여학생들은 한지유의 결정에 불만을 드러내지 않았다.
집안 배경도 좋은 한지유.
거기에 학교 랭킹 10위에 드는 능력을 가졌으니.
그녀의 결정에 불만을 제기하지 못했다.
대신 여학생들의 얼굴에 아쉬움이 가득했다.
이준과 같이하면 상위권의 성적은 따 놓은 당상이었으니까.
그녀들로선 좋은 기회를 날린 셈이다.
“고마워 지유야.”
“열심히 치료할게.”
“난 포지션에 맞게 정했을 뿐이야. 이준 너도 동의하지?”
“어차피 지 멋대로 할 거면서 알아서 해라.”
이준은 이미 한지유한테 두 손 두 발 든 상태였다.
그런 이준의 태도에 심기가 불편해졌는지.
“죽을래?”
한지유의 손이 검 손잡이에 갔다.
틈만 나면 검을 뽑으려고 한다.
저것도 다 습관이다.
집착녀에 폭력배 추가.
학폭으로 신고나 안하면 다행인 줄 알아야 한다.
이준은 마음과 달리 슬쩍 화해를 청했다.
“농담이야. 이거 먹고 칼 좀 집어넣어.”
한지유가 이준에게서 받은 민트초콜릿을 먹었다.
금세 기분이 좋아진 듯 표정이 풀린다.
‘저거 미친년이 분명해.’
이준이 고개를 저었다.
한지유의 결단 덕에 한 명만 더 뽑으면 조원이 정해진다.
‘남은 건 전체 학년 1등인데.’
시험에서 수석을 한 사람에는 하나의 특전이 주어진다.
학교 박물관에 보관된 물건 중 하나를 고를 수 있는 권한.
최소 A급의 아티팩트가 주어진다.
굳이 운신의 폭을 좁혀가면서까지 얻어야하는 아티팩트.
사람들이 모르는 사실이 있다.
박물관에 보관된 아티팩트가 불패의 신화라 불리는 천중호수를 클리어할 수 있는 열쇠라는 것을.
백날 A급 각성자를 무더기로 투입해 봐라.
천중호수가 깨지나.
게이트의 패턴이 뭔지, 열쇠가 따로 있는지, 트릭이 있는지.
알아보고 깨야한다.
천중호수 같은 경우 열쇠가 없으면 절대 못 깬다.
나중에 알려지게 되는 일이지만, 현재는 자신밖에 모르는 일이다.
‘이번 중간고사는 내가 1등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