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5화
청호 보금자리에는 나무로 만든 집들이 세워졌다.
스케먼의 가공할 손재주였다.
“이러니 그 악마들이 스케먼부터 잡아다가 잡일을 시켰지.”
부지런하며 전투력도 갖춘 녀석들.
만능 일꾼이 따로 없었다.
“여기다가 그늘지게 나무랑 호수만 파면 딱이야.”
이준은 벌써부터 스케먼의 다음 일거리를 찾았다.
[이런 놈에게 걸린 스케먼도 참 불상하도다.]
“제자한테 그 무슨 악담이십니까.”
[얼굴색 하나 안 변하고 말하다니, 이럴 때는 내가 너의 사부라는 게 참 다행이다라는 생각이 드는구나.]
이준이 철판을 깔고 말했다.
“다 저 녀석들이 잘 살 수 있게 제가 총지휘를 하는 겁니다.”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이러니까 진짜 악덕 고용주 같잖아. 사부가 얄밉게 느껴졌다.
사람을 놀리는데 도가 튼 무극자 사부였다.
과거 그에게 당한 사람이 꽤 있을 것 같았다.
예를 들어 14대 달마라든지, 10대 천마라든지.
무극자 사부의 제자라든지 말이다.
“이럴 때만 잠수를 타시네. 아주 잠수부야.”
이준도 그를 무시하고 옆에 놓인 책을 들었다.
‘수미천왕신공’이라 적힌 책.
얻어 놓고 익히지 않은 무공이었다.
자신은 다른 각성자와 달리 아무 무공이나 익혀도 됐다.
무극자 사부 말에 따르면 혼원신공은 모든 무공의 정점에 서 있는 신공.
타 심법을 익힌다 해서 혼원신공이 있기에 전혀 해가 되지 않았다.
이준이 서책을 그대로 찢었다.
반으로 나뉘어지자.
[수미천왕신공(S)을 배우셨습니다.]
[앞으로 수미천왕신공(S)를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S급 무공서를 익힌 보상으로 5,000,000p를 지급합니다.]
애증의 무공을 배울 수 있었다.
저절로 움직이는 혼원신공을 멈췄다.
곧바로 수미천왕신공을 운용하니.
몸 주변에 은은한 붉은빛이 띠었다.
수미천왕신공의 내기가 몸 전체로 퍼져 나갔다.
잠시 후 이준이 눈을 떴다.
수미천왕신공을 거둬들이고 내뱉은 첫마디.
“별것도 없네.”
S급 무공이라 기대했는데 별거 없었다.
그냥 강맹한 기운이 내부에 돌아다니는 정도?
“혼원신공에 비하면 쓰레기구만.”
비교당한 것만으로도 혼원신공을 모독하는 것이었다.
이딴 무공 때문에 그동안 버러지 취급을 당했다니.
생각만 해도 짜증났다.
옛날이었으면 모를까.
가문을 엿 먹일 때나 써먹는 정도가 딱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줘도 안 쓰는 무공이다.
자신한테는 혼원신공이라는 희대의 절세신공이 있었으니까.
이제는 S급 무공서가 눈에 차지 않는다.
“읏차, 파랑이한테나 가 봐야지.”
이준이 자리에서 일어나 게이트 남쪽으로 내려갔다.
요즘 파랑이가 지내는 곳.
계승의 꽃이 번식하니 녀석이 영역을 남쪽으로 옮겼다.
덕분에 꽃도 점점 피려고 한다.
파랑이의 기운 덕분이다.
녀석이 좀 더 강한 기운을 가졌더라면 꽃이 피었을지도 모른다.
“파랑아.”
이준이 풀이 널린 밭에 도착했다.
파랑이를 부르자 쪼르르 달려와 안기는 녀석.
여전히 작았다.
덩치는 언제 커질까.
지금도 귀여웠지만, 덩치가 커진 파랑이도 궁금했다.
“꽃이 전보다 생기 있어졌어? 네가 관리한 거야?”
“뀨뀨!”
파랑이가 품에 얼굴을 비비면서 수긍했다.
본래 레드 존급 몬스터라 그런가.
이대로만 있으면 계승의 꽃이 필 것만 같았다.
* * *
유령살귀가 학교로 침입한 사건이 일어난 지 며칠이 지났다.
또다시 화제의 중심에 선 이준.
그의 이름이 안 불린 날이 더 적었다.
등굣길.
오늘도 어김없이 그의 앞을 막는 이들이 나타났다.
“무맹의 스카우터 여휘성입니다. 저희 무맹에선 이준 학생을 최고의 대우로 모실 수 있습니다.”
“감사하지만 사양할게요.”
무맹의 스카우터를 제치고 가자, 다음 사람이 나타났다.
“진씨 가문의 진욱입니다. 저희는 비록 새로 생긴 가문….”
“신룡사에선 이준 학생을 속가인으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습니다.”
15가문 연맹이나 무맹에서 스카우터들이 찾아왔다.
어제의 일이 빠르게 퍼져나간 것 같았다.
각 가문의 정보원이 곳곳에 있는 곳.
소문이 나는 건 당연했다.
심지어 사마련도 나타났다.
“네가 이준이냐?”
“그런데 누구십니까?”
“난 사마련의 조민석이라한다.”
범법자의 집단인 사마련까지 스카웃에 가세했다.
조민석이란 이름을 듣자, 학생들이 기겁했다.
“칠악 중 한 명인 살막의 살악 맞지?”
칠악 중 한 명이라 그런가.
범법자가 대낮에, 그것도 15가문 연맹이 세운 무사고에 나타났다.
엄청난 배짱.
이 모든 게 칠악 중 한 명이라 가능한 일이었다.
그를 막을 사람은 같은 오왕 밖에 없었으니까.
감히 어떤 각성자가 범죄자라고 그를 압박하겠는가.
슬금슬금 피하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서, 선생님께 알려야하는 거 아니야?”
“내가 알릴… 게.”
남학생의 앞에 살막의 살수들이 나타났다.
“어이 친구. 우린 이야기만 나누고 갈 거니까 가만히 있지? 아니면 죽을지도 몰라.”
살수가 남학생의 어깨를 움켜잡아 막았다.
남학생은 그 자리에서 얼음이 되었다.
살악의 수하들.
그저 살막의 최정예로 음살귀로 불렸다.
그들이 스치고 지나간 자리에는 흥건한 피밖에 남지 않았다.
“전 사마련에 들어갈 생각 없습니다.”
“뭐 하러 널 버린 가문에 목메는 거냐. 우리한테 오면 최강의 살수로 만들어 주겠다.”
“싫어요.”
이준이 단호하게 말했다.
“맹랑한 녀석. 생각이 바뀌면 나한테 연락을 해라. 기다리고 있으마.”
정말로 스카웃만 하러 온 건지 조민석이 순순히 물러났다.
살악이 사라지자, 등교하는 학생들이 그제야 숨을 크게 내쉬었다.
이준은 신경 쓰지 않고 본관 건물로 들어갔다.
교실 문을 열자.
“준아 괜찮아?”
언제 등교했는지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던 박혁진이 이준에게 달려와서 엉겨 붙었다.
“떨어져.”
이준이 박혁진을 밀어냈다.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제 할 말을 했다.
“난 살악이 널 강제로 납치해가려는 줄 알았다.”
“봤으면 도와주러 내려오던가. 배신자 자식아.”
“하하. 갑자기 변비가 걸리는 바람에… 똥 싸고 가려고 했는데 끝나 있더라고.”
“아휴. 이걸 친구라고.”
이준이 가방을 놔두려는 찰나.
드르륵.
한지유가 교실로 들어왔다.
그의 손엔 하나의 기다란 창이 들려있었다.
성큼성큼 다가오는 그녀.
이준에게 불쑥 창을 내밀었다.
“여기.”
“이걸 왜 나한테 줘?”
“너 창도 쓴다며 학교 이사장님이 보낸 선물이야.”
“뇌물이냐?”
이준이 한지유에게 묻자.
“어.”
당당하게 뇌물이라고 대답했다.
“고맙다고 전해 줘.”
“그렇게 빨리 받는다고?”
“뇌물이라며. 당연히 받아야지. 나 뇌물 좋아해.”
듣고 있던 박혁진이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역시 준이야. 내가 이래서 널 친구로 둔다니까.”
이준은 한지유에게서 선물 받은 창의 정보를 열었다.
[혈전창]
등급: A
설명: 피를 머금고 싸울수록 창의 예기는 더욱 날카로워질 것이다.
옵션: 공격 속도 +45%, 민첩 +75, 수속성 공격력 + 50%
입이 떡 벌어질 만한 옵션을 지닌 병기였다.
A급 중에서도 최상급 옵션을 가지고 있었다.
이준이 혈전창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꽤… 마음에 들어.”
“가문 창고를 종일 뒤진 거래.”
두 사람만이 아는 이야기를 하자 박혁진이 끼어들었다.
“무슨 이야기야? 뇌물은 또 뭐고?”
“넌 몰라도 돼.”
“궁금하단 말이야. 가르쳐 줘.”
“야. 남의 반에 와서 귀찮게 하지 말고 1반으로 가.”
이준이 박혁진을 밀어냈다.
“칫! 이준. 네가 이렇게 나온다 이거지? 두고 봐라. 존나 후회하게 해 주지.”
박혁진이 삐져서 자신의 반으로 돌아갔다.
이준은 녀석이 가든 말든 혈전창에 푹 빠졌다.
이게 바로 무기에 대한 욕심인가.
왜 각성자들이 좋은 무기를 찾는지 그 이유를 조금 알 것만 같았다.
창이 생기니 좋긴 하다만.
“가지고 다니는 게 문제네.”
“그래서 사람들이 창을 주무기로 선택 안 해.”
만독암가에서 만든 창은 창대의 길이를 조절할 수 있다.
하지만 게이트에서 얻은 아티팩트는 길이를 줄일 수 없는 게 큰 단점이었다.
“나중에 편하게 사용할 방법을 찾아봐야겠다.”
물론 불편해도 사용할 만한 아티팩트라는 건 확실했다.
* * *
이준이 운동장 벤치에 앉아 천으로 혈전창을 닦고 있었다.
반질반질.
A급 아니랄까봐 때깔이 참 고았다.
광을 내고 있는데 폰에서 알람이 울렸다. 주머니에서 폰을 꺼내 액정을 봤다.
[금전노: 당신을 만나고 싶소. 이 문자를 보면 연락 바라오.]
“날 만나보고 싶어서 안달이네.”
이준이 히죽거리며 폰을 넣었다.
암상과 거래할 때 금전노의 복수를 들먹였다.
금전노밖에 모르는 암호를 자신이 말하니 정체가 궁금하겠지.
반쯤은 노린 게 맞았다.
금전노 같은 거물과 인연을 맺으면 앞으로 굉장한 도움이 될 테니까.
하나, 지금은 딱히 만날 생각이 없었다.
일종의 밀당이라 해야 할까.
정체를 알려 줄 듯, 말 듯 안달 나게 해야 사람 귀한 줄 아는 법이다.
뿐만 아니라 지금은 할 게 너무 많았으니까.
적당히 애를 태우다 정보가 필요하거나 물건을 한꺼번에 팔 때 암상에 들릴 생각이었다.
이준이 엉덩이를 털고 자리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개를 들어 앞을 보니 저 멀리서 한 무리가 걸어오고 있었다.
저 중 한 명은 전에도 마주쳤던 인물이다.
“천왕대의 대주가 도련님을 뵙습니다.”
그와 같이 온 이들은 고개만 까딱였다.
이준은 사형준을 쳐다보지 않았다.
그의 뒤.
똥 씹은 표정을 한 천왕대를 보고 있었다.
“도련님.”
“…….”
사형준이 이준을 불렀다.
그는 여전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도련님?”
천왕대의 대주를 무시하는 건 천왕대를 무시하는 것.
대원 중 한 명이 발끈했다.
“우리 대주님이 부르지, 악.”
앞으로 나선 이가 정강이를 부여잡고 비명을 질렀다.
어느새 움직인 이준이 천왕대원을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내가 니 친구냐?”
싸늘했다.
표정이 바뀌었을 뿐인데 주변의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변화된 걸 느낀 사형준은 이준에게서 위화감을 느꼈다.
‘이 느낌은 뭐지?’
유령살귀를 이겼다면 필시 A급 각성자일 터.
그에게 느껴지는 기운은 B급에 불가했다.
무엇보다 이준은 현재 주변을 압도하고 있었다.
A급인 자신이 있는 데도 말이다.
‘어떻게 된 거지…?’
분위기를 반전시키는 건 상대보다 더 높은 경지를 지녀야 했다.
그걸 확인하기 위해 사형준은 내공을 일으켰다.
칙칙한 분위기를 환기시키려 했는데.
‘분위기가 변하지 않아?’
싸늘하고 칙칙한 게 반전되지 않았다.
사형준이 놀라는 사이, 이준이 대원들에게 한걸음 다가섰다.
“내가 너희 친구냐고. 응?”
[혼원신공의 특성이 발동했습니다.]
[군림보의 특성이 발동했습니다.]
[두 가지 특성이 시너지를 발휘합니다.]
[시전자와 동급을 가진 각성자도 두려움과 공포를 느끼게 합니다.]
숨을 옥죄이는 압박감.
주위를 압도하는 기운이 천왕대를 뒤덮었다.
‘도련님의 몸에서 나온 기운이었어.’
이준을 바라보는 사형준의 눈이 좌우로 흔들렸다.
그의 눈에 보이는 이준은 평범했다.
내공을 끌어올려 상대를 압박하는 건 전혀 볼 수 없었다.
그런데 이 기운은 뭐란 말인가.
이준이 한 걸음 다가설 때마다 몸에 가해지는 압력은 극심해졌다.
“너희가 나한테 갖춰야 할 최대한의 예의를 보여라. 그러면 너그러운 마음으로 용서해 주지. 아니면.”
화아악-
오직 천왕대만 느낄 수 있게 살기를 집중시켰다.
“큭.”
“쿠웨에엑!”
천왕대원들은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무릎을 꿇었다.
이준은 그들을 향해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