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2화
바람을 찢어발기는 날카로운 소리가 들렸다.
위에서 내려온 그림자 중 한 명이 이준의 정수리를 노렸다.
까가가강-
이준이 연습용 창으로 살수의 공격을 방어했다.
“내 공격을 막아?”
기습한 남자가 복면 사이로 놀란 빛이 역력했다.
“또 너냐?”
“날 본 적 있나?”
이준이 어깨를 으쓱했다.
남자가 복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지만, 이준은 그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그의 끈적거리는 살기.
위락대평원에서 봤던 유령살귀였다.
“당신은 누구죠?”
이준 대신 옆에 있던 한지유가 검을 꺼내며 물었다.
경계 어린 음성.
그녀도 저들의 몸에서 살의가 풍겨 나오는 걸 느꼈다.
학생들이 저마다 무기를 뽑아 들었다.
“어이가 없군. D급 애송이가 내 살수를 막다니.”
유령살귀가 복면 너머로 실소를 터트렸다.
그러면서 이준을 유심히 봤다.
복면 사이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X발. D에서 C급이라더니. B급 각성자였잖아.”
유령살귀가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정보를 담당한 부하들이 움찔거렸다.
상관인 유령살귀는 암살 대상자의 정보가 틀린 걸 극도로 싫어했다.
거짓 정보로 인해 살행에 실패하는 걸 경계했으니까.
의뢰의 실패와 신뢰도의 하락.
흥신소의 매출에 직격탄이 온다.
물론 이번 건은 상부에 의해 살행을 나왔지만.
그래도 암살 대상자의 정보가 틀린 건 화날 일이었다.
유령살귀가 수하들을 죽일 듯 노려보고 있을 때.
“누군지 물었어요.”
한지유가 재차 물었다.
유령살귀가 수하들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그녀를 보았다.
“빙화가 예쁘다는 건 들었는데 기대 이상이야. 크크.”
그러면서 자신의 혀로 입술을 핥는 게 아닌가.
소름끼치는 웃음소리에 한지유의 전신에 난 털이 곤두세워졌다.
남자의 음흉한 눈빛.
징그러운 음성.
무엇보다 복면 남자에게서 위험한 냄새가 풍겼다.
진득한 살기랄까.
날카롭게 벼려진 칼이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바로 벨 것만 같았다.
이준과는 또 다른 느낌의 살기였다.
한지유가 검을 꽉 쥐었다.
긴장한 나머지, 검을 잡은 손에 땀이 들렀다.
그때 옆에서 이상한 소리가 났다.
이준이 창을 허공에 휘두르고 있었다.
그가 몇 걸음 앞으로 움직이며 말했다.
“너 입만 나불대고 있을 거야? 할 일 해야지?”
이준이 유령살귀를 도발했다.
그가 손가락을 까닥거리며 여유롭게 웃었다.
이준으로 인해 주위를 압박하던 기운이 사라졌다.
“크큭. 크하하하.”
유령살귀가 목청껏 웃었다.
“윽.”
“억.”
“푸웁!”
내공이 한껏 담긴 웃음소리에, 학생들이 귀를 부여잡고 쓰러졌다.
경지가 낮은 학생은 내상을 입으며 피를 뿜었다.
유령살귀가 웃음을 뚝 그쳤다.
그가 살기 가득한 목소리로 이준에게 말했다.
“공격 한 번 막았다고 기고만장하다니 이래서 애송이는 죽이기 쉬워.”
말을 끝낸 유령살귀의 신형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슥-
그가 다시 나타난 곳은 이준의 바로 옆.
잔뜩 몸을 숙이고 있던 유령살귀가 역수로 잡은 단검으로 이준의 발목을 그었다.
한지유를 비롯한 학생들은 유령살귀를 놓치고 말았다.
이준의 바로 옆에 나타나 단검을 휘두르자 비명을 질렀다.
“이준! 위험해.”
“큭큭. 끝났다.”
유령살귀가 득의양양한 미소를 지으며 위를 올려다보는데.
“뭐 하냐?”
이준의 고저 없는 목소리가 유령살귀의 귀를 강타했다.
그가 흠칫한 나머지 몸을 황급히 뺐다.
‘방금… 뭐였지?’
애송이의 목소리일 뿐이었다.
그런데 왜 육감이 경고를 했을까.
몸속의 내공이 흔들리면서 주위로 도망쳤다.
단검에 담았던 내기가 흩어져서 몸을 뒤로 빼야했다. 단순한 검날로는 B급 각성자의 발목을 자를 순 없었으니까.
유령살귀가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있을 때, 이준이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감 좀 있네. 들어왔으면 손목을 터트리려고 했는데.”
18살 고등학생한테 무시를 당한 느낌.
유령살귀의 눈동자에 살기가 맺혔다.
조금 전 느꼈던 감각을 싸그리 무시했다.
그의 머릿속을 지배하는 건 오직 이준을 죽이겠다는 일념뿐.
“건방진 놈이.”
그의 이명대로 유령 같은 움직임으로 이준에게 짓쳐 들어갔다.
그런 유령살귀를 향해 이준이 창대를 꽉 쥐었다.
무극창법을 떠올리자, 이준의 머리에 기수식이 그려졌다.
‘창을 아래로 내리고, 오른쪽 발을 뒤로 뺀다.’
그런데.
[제자야. 아니다. 무극창법은 아니니라.]
무극자 사부가 말렸다.
이준은 사부의 말을 깡그리 무시했다.
최근에 배운 무극창법이다.
유령살귀는 A급 각성자라 그에게 쓰기 적합하다고 생각했다.
[아이구 두야.]
이준의 종아리 근육이 팽창함과 동시에 지면을 강하게 박찼다.
군림보를 이용해 이준도 마주 오는 유령살귀를 향해 뛰어들었다.
쿠웅!
[군림보의 특성이 발휘됩니다.]
창두에 내공이 회오리치며 몰려들었다.
힘이 가득 담긴 순간 창을 내질렀다.
허공에 뜬 창의 환영.
무극창법 1초식인 환영살이었다.
하나의 창이 두 개에서 네 개로 분열되어 유령살귀를 찔러갔다.
* * *
“이건?”
난을 닦고 있던 한민성이 이사장실의 창문으로 고개를 돌렸다.
마침 이사장실의 문을 열고 남 비서가 안으로 들어왔다.
“이사장님! 큰일 났습니다.”
“저도 이제 눈치챘어요. 살수인가요?”
“네. 저희도 얼마 되지 않아 발견했습니다.”
“몇 명인가요?”
“대략 열 명 정도로 추정됩니다.”
이런 일이 꽤 많았던 모양인지, 한민성은 차분히 이야기했다.
“어디로 갔나요?”
“실내 체력 단련실이 있는 건물로 갔습니다.”
“그곳에 가문 인물 중 중요한 학생은 누가 있나요?”
무사고는 15가문 연맹의 후계자가 다니는 곳.
눈에 안 보이게 서로 경쟁하기도 했다.
사마련 같은 곳에선 자라나는 새싹을 미리 제거하기 위해 살수를 보내는 경우도 있었다.
신기지가의 비각에서 살수들을 모두 막아냈던 터라 이번 일로 괜찮을 거라 생각한 한민성이었다.
“지유 아가씨가 계십니다.”
“지유라면… 혹시 검산그룹 쪽에서 고용한 살수인가요?”
“아마도 그런 것 같습니다.”
최근 한 커뮤니티에 퍼진 동영상 때문에 검산그룹의 명예가 땅에 떨어졌다.
검산그룹에서 수습하려 나섰지만, 불을 끄긴 이미 늦었다.
동영상이 너무도 적나라했기 때문.
딸이 철이 없고 어려서 그런다고 검산그룹의 회장이 고개를 숙이고서야 일단락됐다.
반대로 신기지가는 한지유 때문에 평가가 고공행진 중이다.
한지유가 상대했던 일진 모두가 15가문 연맹의 자제들.
거기에 검산그룹의 김슬기까지 홀로 상대하니.
신기지가에서 검술 천재가 나왔다고 모두가 치켜세웠다.
검산그룹과 신기지가는 정반대의 처치가 되었다.
검산그룹은 이번 일을 계기로 한지유에게 앙심을 품었을 터.
평범한 곳이었다면 여론이 가라앉을 때까지 숨죽이고 있었겠지만, 검산그룹은 달랐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
아니 자존심을 건드린 순간 그냥 너 죽고 나 죽자 모드로 돌아서는 것이다.
이번 사건도 마찬가지였다.
복수를 위해 살수를 보낼 만했다.
“검산그룹이 간덩이가 부었군요.”
한민성이 난을 닦던 수건을 내려놓았다.
“앞장서세요.”
“예.”
그가 남 비서와 함께 이사장실을 나섰다.
그 뒤를 한민성의 친위대인 비각이 붙었다.
그들을 이끌고 실내 체육관이 있는 곳으로 갔다.
점점 가까워질 때마다 살기가 따끔거렸다.
“비각의 눈까지 피할 실력자라면 유령살귀인가요?”
“그밖에 없긴 합니다.”
검산그룹 산하.
흥신소를 운용하고 있는 사장이었다.
돈이면 뭐든지 하는 각성자.
사마련의 무리라 오해할 정도로 그의 손속은 잔인했다.
한 번 포착한 목표는 죽을 때까지 쫓았다.
여태까지 살행 성공률은 96%에 육박했다.
거의 모든 의뢰를 성공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만큼 실력 있고 뛰어난 자였다.
“그런데 빨리 안 가십니까?”
“가고 있습니다.”
“지유 아가씨가 위험할지 모릅니다. 이사장님.”
한지유의 작은 아버지보다 남인 남 비서가 더욱 다급한 눈치였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한민성은 경공도 쓰지 않고 걸어갔다.
“지유 옆에 이준 학생이 있지요?”
“네.”
“그러면 됐습니다.”
“이준 학생을 너무 믿으시는 거 아닙니까?”
한민성이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전 이준 학생이 청호 보금자리를 클리어 했다고 믿고 있어요.”
“그래도 몬스터와 각성자의 대결. 그것도 살수의 위협은 엄연히 다릅니다.”
남 비서가 걱정하는 건, 경험이었다.
게이트에서 몬스터를 처치한 실전이 있다 하더라도.
각성자 대 각성자.
즉 누군가로부터 목숨을 위협받으며 싸우는 건 엄연히 다르다고 생각했다.
특히 지능이 높은 인간이라면 더욱 말이다.
청호 보금자리를 깬 이준 학생이라도 A급 각성자인 유령살귀는 힘들 거라 생각한 남 비서였다.
한민성은 그녀와 생각이 달랐다.
여러 빅뉴스 중 하나인 위락대평원을 클리어한 수수께끼의 인물.
그는 이준이 이 수수께끼의 인물이라고 단정 지었다.
청호 보금자리에서 봤던 현상이 위락대평원에서도 재현되고 있다.
그 말은 청호 보금자리의 주인과 위락대평원의 주인이 같지 않을까?
물증은 없고 심증만 있지만, 왠지 이준 학생이 이번 사건의 중심에 있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유령살귀가 지유를 노림에도 안심했다.
조카의 옆에는 항상 이준이 있었으니까.
‘아닌가? 우리 지유가 이준 학생을 항상 따라다닌 건가?’
아무튼 괜한 걱정은 필요 없었다.
한민성과 남 비서는 유령살귀의 목표가 이준인 것도 모른 채, 살수가 있는 곳으로 갔다.
* * *
이준의 창에서 환영이 일어났다.
그깟 눈속임이라 치부하기엔 느껴지는 기운이 모두 진짜였다.
유령살귀가 몸을 비틀며 피하려는데.
“몸이… 말을 안 들어!?”
무형의 기운이 그를 옭아맸다.
이준의 창날이 회전하면서 유령살귀의 지근거리까지 왔다.
쉬이이익-!
피할 수 없음을 느낀 유령살귀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런데.
“젠장, 무기가 버티질 못해.”
이준은 걸레짝이 된 연습용 창을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유령살귀가 눈을 떴다.
위험을 알려 줬던 감각.
이준을 향해 경종이 계속 울렸다.
‘말도 안 돼! 어떻게 애송이 자식이 나보다 강할 수 있어?’
자신은 살수이지, 정면 승부를 보는 검사나 창사가 아니었다.
정면으로는 이준을 이길 수 없다는 걸 안 유령살귀가 몸을 빼려한 순간.
갑자기 주먹이 날아온 게 아닌가.
“커헉!”
유령살귀가 이준의 주먹에 얼굴을 맞고 벽에 부딪쳤다.
“혀, 형님!”
“지금 내가 뭘 본 거냐?”
“우리 형님이 고등학생한테 처맞은 거야?”
유령살귀의 수하들이 눈을 비볐다.
자신들의 형님은 A급 각성자다.
어딜 가나 대우를 받는 그런 존재.
유령살귀란 이명은 사마련의 살악과 비교해도 뒤처지지 않았다.
그런데 어떻게 고등학생한테 죽빵을 맞을 수 있을까.
그들의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아씨. 쓸 만한 창을 구하기 전까지는 무극창법도 봉인해야 되나?”
이준에게 유령살귀는 안중에도 없었다.
감질나게 하는 무극창법.
조금이나마 맛본 SS급 무공의 손맛을 잊을 수 없었다.
[내가 누차 말했잖느냐. 무극창법은 아니라고.]
‘사부님의 무공은 참 조건이 까다롭습니다.’
[괜히 고금제일의 무공이 아니니라 크흐음.]
이준이 터벅터벅 유령살귀에게 걸어갔다.
“잠깐! 더 이상 형님께 위해를 가한다면 이 녀석들이 무사하지 못할 거야.”
이준이 뒤를 돌아봤다.
정신을 차린 유령살귀의 수하들이 학생들을 인질로 잡았다.
“뭐라고 지껄이는 거냐.”
이준은 그들의 말을 일체 신경 쓰지 않았다.
이준은 유령살귀가 움직이지 못하게 마혈을 찍었다.
“못 들었어? 나한테 위해를 가하면 네 친구들이 무사하지 못, 아아아악!”
이준이 유령살귀의 말을 도중에 끊었다.
유령살귀의 허벅지를 발로 지그시 눌렀다.
우드득-
소리와 함께 뼈가 부러졌다.
“한 번 더 형님의 몸에 손을 대면 이 녀석을 죽일 거야.”
“마음대로. 나 사실 걔랑 안 친해. 아니지. 날 낙오자라고 욕하면서 까던 애야. 그냥 죽여.”
이준의 말에 인질로 잡힌 남학생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인질은 무시하고 유령살귀를 향해 말했다.
“누가 시켰냐?”
“내가… 말해 줄 것, 아악!”
“말하지 마. 나도 이참에 고문이란 걸 배워 보자. 사람한테 시험하는 건 처음인데 널 대상으로 해 보면 되겠다.”
이준이 유령살귀를 향해 히죽였다.
그 웃음이 어찌나 차가운지, 유령살귀가 부르르 떨었다.
이준이 무릎을 굽혔다.
그리고 바닥에 떨어진 단검을 들었다.
“날 죽이러 왔으면 각오는 되어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