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3화
학교 옥상.
이준은 간신히 한지유에게 벗어났다.
기척을 숨기고 바닥에 드러누웠다.
“후우… 죽는 줄 알았다.”
교복은 땀으로 범벅이었다.
차라리 몬스터를 상대하고 말지.
한지유의 집요함에 진저리가 났다.
“여기까진 안 따라오겠지?”
남은 점심시간은 15분.
설마 교실에서까지 검을 휘두를까.
옥상 바닥에 누워 하늘을 보았다.
절로 웃음이 나왔다.
박혁진과 한지유.
막상 보면 치가 떨려도 두 사람과 있으면 가문에 대한 생각이 싹 사라진다.
이게 자신의 진짜 마음.
정말 고등학교 때로 돌아온 느낌이었다.
학교생활이 꼬인 것 같기도 하지만 나름대로 신선했다.
“쭌!”
“깜짝이야. 너 언제 왔냐?”
이준이 화들짝 놀라며 상체를 일으켰다.
박혁진이 아이스크림을 빨며 대답했다.
“방금.”
“한지유는?”
“너 찾는다고 온 학교를 뒤지고 있어.”
“그냥 수업 쨀까?”
“그래라. 준이 네가 언제까지 지유를 피해 다닐지 모르겠지만, 시간 지날수록 죽을 확률이 더 높아질걸?”
입 한번 잘못 놀렸다가 칼 맞아 죽게 생겼다.
농담할 사람에게 해야 했는데, 이 모든 게 자신의 잘못이었다.
“몰라. 배 째.”
이준이 다시 바닥에 누웠다.
그런 그를 박혁진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쳐다봤다.
“너, 그 움직임 뭐였냐?”
“뭐? 보법?”
“응.”
“천왕보잖아. 신력권가의 무공.”
“그게 천왕보였어?”
권룡 이신이 쓰는 보법.
신력권가의 혈족이라면 기본으로 익히는 무공이다.
15가문 연맹의 무공을 잘 아는 박혁진은 고개를 갸웃했다.
같으면서도 다른 느낌.
이준이 쓴 천왕보 쪽이 단순하면서도 훨씬 깔끔했다.
신력권가 사람보다 이준이 더 천왕보의 느낌을 잘 살린 것처럼 보였다.
그의 표정을 눈치챈 이준이 피식 웃었다.
“그것 가지고 놀라면 너 나중에 기절해.”
“내가 놀랄 게 또 있냐?”
“엄청 많지.”
이준이 해맑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런데 강해 보이진 않은데?”
“네 눈에도 그렇게 보이냐?”
“어. C급? 그 정도가 다야.”
“내가 좋은 아티팩트를 차고 있어서 그래.”
“뭔데?”
아이스크림을 다 먹은 박혁진이 이준의 옆에 앉았다.
“이거.”
이준은 손가락에 끼워진 은색 반지를 치켜들었다.
“반지?”
“응. 날 아껴 주시는 분의 물건이야.”
무극자가 흐뭇하게 들었다.
박혁진은 묘한 눈으로 반지를 보았다.
겉보기엔 커플링 같이 세련된 반지. 고등급 아티팩트처럼 반짝이는 것도 아니고 특별한 기운도 느껴지지 않았다.
턱을 괴며 반지를 계속 살폈으나.
“전혀 모르겠다.”
“효능이 뭔지 아냐.”
“뭔데, 뭔데.”
“이게 말이다.”
이준은 어린아이가 되었다.
마치 친구에게 장난감을 자랑하듯 반지를 보여 주며 말했다.
“내 기운을 타인에게 안 들키게 해 줘.”
“정말이야?”
박혁진의 눈이 동그래졌다.
각성자의 기운을 숨겨 주는 물건.
독공과 대장장이도 겸하고 있는 만독암가에서도 이런 물건은 만들지 못한다.
오왕 중 한 명인 철왕조차도.
게이트에서 드랍하는 그 어떤 아티팩트도 이준이 말한 기능은 갖추지 못했다.
끽해 봐야 능력치나 퍼센트를 올려주는 게 끝.
그것만으로도 각성자는 엄청난 효과를 봤다.
“다른 건? 네가 자랑하는 걸 보면 그 효과만 있는 게 아닐 텐데?”
“알고 싶냐?”
“응. 궁금해 미칠 것 같아.”
“내공을 쓰다가 주화입마에 걸릴 확률을 70% 낮춰 줘.”
“헉!”
박혁진이 헛바람을 내었다.
주화입마에서 벗어나게 해 주는 아티팩트라니.
들어본 적 없는 효과였다.
만약 이 사실이 바깥에 알려지게 된다면 피바람이 불 것이다.
각성자가 무리하게 내공을 운용하다 주화입마에 걸린 경우가 허다했으니까.
“그런 대단한 물건을 네게 준 사람이 있어?”
“어.”
“누군데?”
“내가 제일 존경하는 분.”
이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박혁진은 그에게 반지에 대한 궁금증을 쏟아 내었다.
자신도 한 번 껴 보자.
하나만 더 구할 수 없냐.
선물해 준 분을 만나고 싶다.
비무 대신 다른 걸로 질척대기 시작했다.
[이 아이에게 혼원반지의 비밀을 말해 줘도 되느냐?]
‘혁진이는 괜찮아요. 제 아버지란 인간보다 더 믿을 수 있는 친구예요’
[그렇다면 다행이구나.]
무극자 사부가 뭘 걱정하는지 안다.
정말 친한 친구라도 기물에 눈이 멀어지기 마련.
그 부분을 우려한 것이다.
“쭌아. 나 한 번만 껴 보자. 응? 제….”
박혁진이 떼를 쓰고 있을 때.
쾅!
옥상 문을 박차고 광녀가 나타났다.
“찾았다.”
얼마나 뛰어다녔는지 예쁜 단발머리가 정전기라도 일어난 것처럼.
산발이 되어 있었다.
“하, 한지유.”
“이제 도망칠 곳 없어.”
그 말을 끝으로 그녀가 이준에게 쇄도하려는 그때.
“어디를 그렇게 미친년처럼 달려가나 했더니 옥상이었니? 혁진이도 있었구나?”
김슬기가 옥상에 나타나 박혁진과 한지유를 보고 아는 척했다.
“오랜만이에요.”
박혁진이 고개를 까딱였다.
누구에게나 친절히 대하지만, 김슬기한테만큼은 선을 그었다.
질 나쁜 누나에 대한 경계랄까.
아무튼, 김슬기의 뒤에서 교복을 풀어헤친 여학생들이 우르르 나왔다.
2, 3학년 일진은 물론.
1학년 신입생 일진들까지.
이 자리에 모두 모인 듯싶었다.
“여긴 무슨 일이에요?”
“무슨 일이긴. 너희가 학생회에 참석하지 않은 바람에 이신이 화가 잔뜩 났지 뭐야.”
그러면서 한지유를 노려봤다.
“이참에 교육을 단단히 하려고 하지.”
“누나가 저를요?”
“혁진이 넌 빼고. 널 건드리면 네 누나가 날 죽이려 할 텐데 그건 싫거든.”
박혁진에겐 한 살 터울인 누나가 한 명 있었다.
그와 마찬가지로 학교의 인싸였다.
한지유가 가시가 돋은 장미라면 박혁진의 누나는 호불호가 없는 벚꽃이랄까.
하지만 박혁진의 일이라면 가시 돋친 장미보다 더한 독을 지녔다.
누나의 극성 때문에 3학년 선배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모두가 검룡을 랭킹 1위로 여겼지만, 실제로는 그의 누나가 학교에서 제일 강할지도 모른다고 들은 바 있었다.
“내가 너희를 찾은 이유는 저 두 사람에게 볼 일이 있어서야. 그러니까 혁진이 넌 빠져 줄래?”
“준아. 미안하다. 난 빠진다. 여기서 죽고 싶지 않아.”
이준이 옥상에서 사라진 혁진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그가 바라보고 있는 곳엔 일진 무리가 있었다.
“내가 귀중한 보물도 보여 줬구만. 저 치사한 자식. 나 죽는 꼴 보고 싶어!?”
혁준이 여자 일진들 사이에서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일진 누나가 빠지라는데 어떡하냐. 난 힘없는 후배일 뿐이야.”
박혁진이 슬금슬금 뒤로 빠지며 옥상 한구석에 아예 자리를 깔고 앉았다.
그리곤 운동장 쪽으로 고개를 돌려 크게 소리쳤다.
“애들아. 여기 빙화랑 매화 누나가 싸운다!!”
그의 목소리가 꽤 컸을까.
“빙화랑 매화가?”
“대박!”
“천무대전을 미리 보는 거야?”
“어서 가서 보자.”
눈을 감고 명상을 하던 학생, 운동장에서 무공 연습을 하는 학생, 수다를 떨고 있던 학생까지.
모두가 옥상으로 몰려왔다.
“뭐 하는 짓이야?”
“이런 좋은 걸 저만 구경할 수 없잖아요.”
“설마 선생들이 끼어들 거란 생각을 하는 건 아니지?”
“그럴 리가요. 학교에서의 싸움은 모두가 암묵적으로 동의하고 있는 거 아니었어요? 전 팝콘이나 먹게 어서 싸울 준비나 하세요.”
박혁진은 정말로 방관할 작정인 듯싶었다.
팝콘은 아니었지만, 과자 봉지를 뜯어 입안에 넣으며 재밌겠다는 표정을 짓는 게 아닌가.
김슬기는 내심 안심했다.
박혁진이 싸움에 끼어들면 여러모로 골치 아팠다.
자신들이 C급, B급 각성자로 이루어져 있었으나, 명색에 학교 랭킹 1위와 10위.
10위는 숫자로 가볍게 처리할 수 있었지만, 랭킹 1위가 끼어든다면 상당히 어려웠다.
그렇다고 자신들이 진다는 생각은 안 했다.
여기에 모인 이들은 각 가문에서 내로라하는 인재들.
숫자로 밀어붙이면 아무리 박혁진이라도 힘들 것이다.
“좋아. 나도 구경꾼들 많으면 좋지. 이참에 내가 빙화 위에 있다는 걸 보여 주겠어.”
김슬기가 표독스럽게 한지유를 바라보았지만, 그녀는 전혀 신경 쓰지 않은 눈치였다.
“이준 일로 안 와?”
한지유의 신경은 온통 이준에게 있었다.
김슬기가 뭐라고 하건, 여자 일진 선배들이 몰려오건.
자신의 알 바 아니었다.
“너 계속 이러면 나 진짜 화낸다? 어? 나 아주 무서운 사람이야.”
이준이 일진들 사이에서 소리쳤다.
아직도 여유만만한 그 모습이 꼴 보기 싫었던 한지유가 바닥을 박차고 이준에게 달려들려는데, 김슬기가 앞을 막았다.
“넌 내 상대야. 이준은 다른 애들이 밟아 줄 테니까 나한테 집중해.”
“비키세요.”
한지유가 이준을 노려보며 말했다.
그 모습에 김슬기의 입가 근육이 실룩였다.
‘저년이 날 끝까지 무시해?’
학교에서 김슬기의 랭킹은 20위였다.
한지유와는 10랭크 차이.
‘오늘 널 내 앞에서 무릎 꿇리고 너 대신 내가 10위에 랭크하겠어.’
차앙-
그녀가 검을 빼 들었다.
검에서 청명한 소리가 들렸다.
그녀가 계승한 무공은 화산파의 매화검법이다.
화려함 속에 감춰진 날카로운 비수 같은 무공.
변화무쌍하여 상대를 곤혹스럽게 했다.
“싫다면?”
“전 선배한테 볼 일 없어요.”
한지유가 방향을 틀었다.
김슬기를 피해 이준에게 가려는 모양.
그걸 잠자코 볼 김슬기가 아니다.
그녀도 같이 움직였다.
움직일 때마다 매화 향기가 나는 매화보.
화산파의 무공을 쓰면 나는 현상이었다.
스스스.
물 흐르듯 미끄러지며 한지유의 앞을 막았다.
“그러면 날 재껴 봐!”
김슬기의 손에 들린 검에서 하얀 아지랑이가 맺히며 한지유의 목을 향해 휘둘러졌다.
쉬이익-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났다.
한지유가 허리를 비틀며 날아오는 검을 쳐냈다.
챙!
공격이 막혔음에도 김슬기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미 다음 공격이 한지유에게 쏟아졌다.
채쟁챙챙-!
두 개의 검이 허공에서 순식간에 네 번이나 교차했다.
한지유가 인상을 찌푸렸다.
“계속 이러시면 저도 더는 봐줄 수 없어요.”
그녀의 말에 자극을 받은 김슬기가 내공을 끌어올렸다.
“뭐? 봐줘? 이년이 진짜!”
검을 휘두르는 속도가 빨라졌으며, 손목에 힘이 들어갔다.
김슬기가 옥상 난간까지 한지유를 몰아붙였다.
수세에 몰린 한지유.
그런데 그녀의 표정은 여전히 변함이 없었다.
다만 그녀가 든 검에서도 붉은 아지랑이가 스멀스멀 나오기 시작했다.
검기 대 검기.
드디어 한지유가 싸울 마음이 생겼는지.
검에 내공을 담기 시작했다.
옥상 난간까지 밀렸던 그녀가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갔다.
까강깡깡!
두 개의 검이 부딪힐 때마다 불꽃이 튀었다.
“악.”
한지유가 무표정한 얼굴로 검을 받아치고 있는데, 강맹하게 퍼붓고 있었던 김슬기가 짧은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일진들 사이에서 구경하고 있던 이준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졌네요.’
[매화검법은 상대의 눈을 속이는 무공인데 저 아이는 오직 강함을 바탕으로 펼치는구나. 이미 매화검법이 아니다.]
무극자 사부의 말대로 3학년 누나가 펼친 무공은 부자연스러웠다.
마치 일부러 어긋나게 하려는 것처럼.
자신의 눈에 보이는 실선들을 전부 빗겨 휘두르고 있는 게 아닌가.
선만 따라가면 그래도 이렇게까지 밀리진 않을 텐데.
‘검로를 따라가는 게 그렇게 어렵나?’
이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허허. 개구리 올챙이 시절 생각 못 한다더니. 딱 네가 그렇구나.]
‘정말 몰라서 그럽니다. 저게 어려운 겁니까?’
[쯧쯧. 그냥 입 다물고 보기나 하거라.]
무극자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준은 혈족 계승을 못 받은 불운아였다.
애초에 좋은 무공이 없었고, 둔재에 가깝다 생각했다.
한데 같이 지내다 보니.
제자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둔재에서 천재로 변한 게 아니고 그냥 천재였다.
[삼재검법으로 이류에 올라선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지.]
삼재검법은 말이 무공이지, 병사들이 익히는 일반적인 창술보다도 못했다.
호신(護身)에도 쓸모가 없는, 고수들이 보기에도 회생이 불가능할 조잡한 무공.
무공이라 불러 주기도 민망한 쓰레기였다.
그런 걸 가지고, 이류 무인.
이 세계에서 사용되는 호칭으로는 D급 각성자에 올라선 게 이준이었다.
그것도 단전이 깨진 상태에서 한 번 복구하고 도달한 경지였다.
이것만으로도 이준이 천재라는 건 입증이 된 것이다.
[그러니 매화검법의 경로가 눈에 들어오는 것일 테고. 홀홀. 내 안목은 천년이 흘러도 변하지 않구나.]
무극자는 이준을 생각하다가 결국 자신의 칭찬으로 끝냈다.
이준은 여전히 두 사람의 대결을 보고 있었다.
점점 한지유의 승기가 굳혀지자.
‘역시 쟤는 무서운 애야.’
이준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미래에 검후였던 한지유.
그녀의 손에 죽어간 몬스터와 마인이 수천은 됐다.